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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리포트] 수교 70주년 맞아 ‘병견전행(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으로 나간다)’ 밀착된 北·中 

김정은, ‘혈맹’ 통해 ‘피’를 수혈할 수 있을까 

항미항남(抗美抗南) 공감대… 6·25 때 수준으로 공조 발전
中 등에 업은 北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 거절 가능성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월 21일 평양 금수산영빈관에서 산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북한과 중국은 1949년 10월 6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0월 1일 중국 본토를 석권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지 6일째 되는 날이다.

정무원 총리를 겸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외교부장은 정부 수립 당일 세계 각국에 외교관계 수립을 희망하는 서한을 보냈다. 북한은 그 사흘 후 박헌영 외무상 명의로 수락 전문을 띄웠고, 이틀 후 양국 간 정식 외교관계가 맺어졌다. 북한은 소련(2일)·불가리아(4일)·루마니아(5일)에 이어 중국의 네 번째 수교국이며, 북한의 첫 수교국은 1948년 10월 수교한 소련이며 중국은 북한의 열 번째 수교국이다.

그 후 1년이 막 지난 시점에 중국 지도부는 난감한 결정에 직면했다. 1950년 6월 25일 2차 대전에서 독일 전차를 박살 냈던 T-34 탱크 등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신무기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남침을 시작했고, 두 달 만에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한국군과 유엔군을 밀어냈다.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인천에 상륙한 7만5000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1일 새벽 국군 3사단이 강원도 전선에서 38도선을 넘자 김일성은 황급히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특별 원조를 요청했다.

마오와 중국 공산당은 파병을 둘러싸고 진퇴양난에 빠졌다. 10월 2일 중공 중앙서기처 회의와 10월 4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대다수 간부는 파병에 반대했다. 당시 대규모 파병은 신생국가인 중국에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았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토지개혁이 완수되지 않았고,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과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 따른 후유증이 심했다.

마오는 훗날 김일성에게 “우리는 비록 다섯 개 군단을 압록강 주변에 배치했지만, 정치국에서는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정했다가는 번복하고 결정했다가 다시 번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마오는 “이웃 나라가 위급한 시각에 처해 있는데 우리가 곁에서 방관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훗날 김일성을 만나 당시의 고충을 토로했다. _[毛澤東會見金日成時的談話(모택동회견김일성시적회담)](1970.10.10)

하지만 중국에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양날의 칼이었다. 정권이 안정되지 않은 시기에 대규모 군대를 움직이는 일은 항상 위험이 수반된다. 대륙은 광활하고 인걸이 많아 변방이 시끄러우면 베이징의 황제가 베개를 편히 못 벤다는 전설은 어느 시대든지 냉엄한 현실이었다.

중국에 한반도는 일본이나 미국 등 해양세력을 막는 완충지대이기는 하나 19세기 이전 중국의 두 차례 조선 출병은 중국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명나라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이후 국력이 쇠퇴해 청나라에 밀리기 시작했다. 1894년 청나라의 조선 출병은 청일(淸日)전쟁으로 이어져 엄청난 재난을 초래했다.

핵 무장한 北… 능동적 행위자로 변모


▎리용호 북한 외무상(오른쪽 둘째)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9월 2일 평양 만수대 의사당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20세기 들어서도 중국의 한반도 출병의 역사는 반복됐다. 현대식 무기가 부족한 중국은 인해전술 방식의 인민해방군을 파병했고, 북한은 유엔군과 한국군을 다시 38도선 이남으로 밀어냈다. 420년간 국내성이라는 지명으로 고구려 수도였던 압록강 중국 지역의 집안(集安) 맞은편인 평안북도 만포시 별오리 지하 대피소에 숨어 있던 김일성은 중국의 화끈한 파병으로 기사회생했다.

중국이 참전 명분으로 제시한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구호 하에 양측 관계는 마오의 장남 마오안닝(毛岸英)이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 동창군에서 미군 폭격으로 사망하는 등 혈맹으로 공고화됐다. 중공군은 13만6000명의 사상자와 2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과거 두 차례의 조선 출병의 악몽에서 벗어났다.

9월 초 방북한 왕이(王毅) 외교부장 역시 중국 인민지원군 묘소를 참배하며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 군인들을 기리는 행보를 보였다. 이 묘역에는 1950년 11월 청천강 전투에서 사망한 중국군 1156명의 유해가 묻혀 있다.

1950년 11월 맥아더 장군의 만주 폭격 등 적극적인 확전 주장이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거부당하면서 중국은 한숨을 돌렸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이 워싱턴의 정치권에 의해 승인됐다면 중국은 과거 2차례의 출병과 같이 상당한 후유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차 대전의 피로감 때문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제한전(limited war)으로 6·25 전쟁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국제정치가 중국에는 큰 행운이었다. 1953년 3월 5일 한국전쟁의 총감독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하고 주연들의 참전 열기도 시들해지면서 6·25 전쟁은 휴전체제로 종결됐다.

마오가 사망한 후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金濤)를 넘어 6세대 리더 시진핑(習近平) 주석 등 중국 최고지도자들은 시간적인 간격은 있었으나 김일성·김정일에 이어 3세대 세습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북한 영도자와 주기적이고 긴밀한 만남을 이어갔다.

인연에 따라 다소 등락이 있었지만, 양국 간에 지속적인 소통과 깊은 신뢰는 핵심 화두였다. 중국에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동북아 국제정세에 좌우했다. 미·중 화해 협력 시대에는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난 1972년 핑퐁 외교로 미·중 국교가 정상화되고 1976년 9월 마오의 사망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이 덩샤오핑의 영도력으로 가속화되자 고립주의를 강조한 평양의 지리적 가치는 급락하고 양국 관계는 얼어붙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직후에는 평양이 베이징에 대해 ‘배신자’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북·중 양국 관계는 찬바람이 불었다. 덩샤오핑은 숨어서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 기조를 100년간 지속하라고 특별 당부했다. 1990년 대에 장쩌민 주석은 해야 할 일은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를 선언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2003년에 화평굴기(和平屈起)를 선언했다. 시진핑 주석은 거침없이 상대를 압박한다는 ‘돌돌핍인(咄咄逼人)’을 내세우며 국제정치의 강경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1세기 이전에 중국은 경제발전이 최우선 과제로서 교조주의 이념을 고수하는 북한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2006년 10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동북아의 국제정치 상황은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북핵은 중국에 다층적인 이슈가 됐다. 핵으로 무장한 북한의 입지는 수동적 입장에서 능동적인 행위자로 변모했다. 핵 포기의 객체가 아니라 세계 비핵화의 주체라는 입장이다. G20 국가로서 미국과 국제정치의 지분을 나눌 것을 요구하는 중국과 핵으로 미국과 협상하려는 북한의 전략적 이해가 맞물렸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은 북 핵실험에 상관없이 중국과 한반도는 지리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융합돼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불변이라는 ‘일의대수(日依帶水)’와 ‘순망치한(脣亡齒寒)’ 담론과 북 핵실험이 중국에 정치적 부담을 준다는 ‘북한부담론’이 대립한다.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는 담론은 북·중간의 우호가 우선이며 한반도에는 남북한이 공존하는 ‘두 개의 한국’이 중국의 국익에 부합하며 북한이 자산(asset)이라는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기초한 정책이다.

북한자산론은 ▷한반도 전쟁 방지 ▷한국의 북한 흡수통일 저지 ▷북한의 혼란 방지와 동시에 북한 비핵화라는 ‘3불(不) 1무(無)’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전쟁 과정에서 북핵이 역설적으로 지렛대 역할을 함에 따라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며 한국의 북한 흡수통일을 반대한다.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는 동시에 책임을 중국에 넘겨 북·중간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의 판단이다.

북·중, 한·중 관계는 교환균형 관계


▎1992년 9월 중국을 방문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장쩌민 공산당 총서기와 환담하고 있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개시 이후 ‘북한부담론’이 우세했다. 1차 핵실험은 외교적 해결을 모색한 중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어 북한의 행태가 ‘제멋대로(悍然)’라는 비외교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국 외교부는 2005년 베이징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을 무시한 극악하고 뻔뻔스러운 행위라며 북 핵실험을 비난했다.

2009년 2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016년 9월 5차 핵실험까지 중국 외교부의 공통 반응은 “결연히 반대한다”였다. 2013년 3차 핵실험 이후에는 중국의 고위 군 간부가 “북한보다 한국과 국경을 맞대는 것이 좋다”고 언급할 정도로 한국 주도의 통일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도 나타났다. 2014년 7월 시진핑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국빈 방문할 정도로 한·중 관계가 절정에 도달한 만큼 핵실험으로 북·중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한·중 양국은 1949년 적대적 관계를 시작으로 1992년 수교로 선린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1998년 협력 동반자 관계, 2003년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2008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하고 시진핑 주석이 서울을 방문한 2014년 전면적 전략협력동반자 관계를 수립했다.

하지만 2016년 1월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하고 2월 7일 광명성 4호를 발사함에 따라 한국은 중국과의 갈등을 무릎 쓰고 사드 배치를 추진했다. 2016년 2월 5일 시 주석은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사드 배치의 위험성을 들어 배치 반대를 요청했다. 2016년 9월 5차 핵실험으로 한국 정부는 사드 배치를 확정하고 2017년 3월 성주 골프장 부지에 사드 배치를 시작했다.

한국의 사드 배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발사로 촉발됐고 결과적으로 이는 한·중 관계의 악화를 가져왔다. 시작은 북핵이었으나 종결은 북·중 관계의 결속이라는 기승전결이었다. 김정은의 핵과 미사일 발사 전략이 동북아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변동시켰다.

북·중 관계와 한·중 관계는 한 축이 양호하면 한 축이 악화하는 교환균형 관계(trade-off)다. 결국 사드 갈등 이후 북·중 관계가 회복하면서 2017년 9월 6차 북 핵실험에 대한 중국 외교부의 입장에는 이전과 다른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핵실험에 엄중히 반대한다”라는 원론적 입장은 기존 반응과 유사하였으나 후속 코멘트가 의미심장했다. 중국은 “군사 수단은 유효하지 않고 제재를 계속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고 한 걸음 물러섰다.

시진핑 주석은 한국의 사드 배치에 대응하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면적인 무역전쟁을 시작하면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하며 대북정책의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를 추진했다. 북·중이 항미(抗美)하기 위해 연대할 필요성이 분명해진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3월부터 올해 1월까지 총 네 차례 중국을 찾아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시 주석도 지난 6월 중국 최고 지도자로는 2005년 후진타오 주석의 평양 방문 이후 14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했다. 2011년 12월 김정은 집권 이후 8년 만에 양측이 외교의 최절정에 도달했다.

특히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4차례에 걸쳐 북·미 정상회담 막전막후에 시 주석과 김 위원장은 전략적 소통을 통해 항미 전략을 긴밀히 논의했다. 지난 6월 G20 오사카 정상회담을 앞두고 시 주석이 1박 2일 일정으로 평양을 전격 방문하는 동안 김 위원장은 30시간 이상 시 주석을 밀착 수행하며 브로맨스(bromance) 수준의 공조를 과시했다.

“비바람 속에서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올해 1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중국을 방문한 리설주 여사(왼쪽)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와 악수하고 있다. / 사진:노동신문
북한은 북·미 교섭을 통해 대북 제재 완화가 필요한 상황인데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이 원활하지 않아 미국과 대립 중인 중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중국 또한 미·중 무역전쟁뿐만 아니라 홍콩·대만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어 ‘북한 카드’를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6차 핵실험 이후 북한부담론은 사라지고 북한의 몸값은 다시 치솟고 있다.

그동안 북한은 한국을 중재자로 북·미 간 비핵화 교섭이 탄력을 받았다면 지금은 문재인 대통령의 ‘운전자론’ 등 모든 남북 중재 채널이 중단된 상황이다. 대북제재 완화가 시급한 북한으로서는 중국을 통해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2019년 하반기 들어 북한이 남한을 완전히 배제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의 배경이기도 하다.

왕이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서울이 ‘조국 사태’로 아수라장이던 시점인 9월 2~4일 이례적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중국 외교부장이 단독으로 방북한 것은 2007년 7월 이후 11년 만이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은 비교적 자주 방북하지만, 외교부장의 평양 방문은 드문 일이다.

10월 1일 중국 건국 70년 기념일과 10월 6일 북·중 수교 70주년 행사를 앞두고 왕이 외교부장은 평양에서 외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양국 간 신뢰와 전략을 언급했다. 중국 외교부는 양자 회동을 전하며 “양국이 한반도 정세에 대해 깊이 있게 의견을 나누고 최신 상황을 공유했다”고 발표했다.

왕 부장은 특히 올해가 북·중 수교 70주년임을 강조하며 “지난 70년 동안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양국은 시종일관 풍우동주(風雨同舟, 비바람 속에서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병견전행(倂肩前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으로 나간다) 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국은 시 주석과 김 위원장이 달성한 중요한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북한과 함께 노력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왕 부장은 특히 북·중 관계가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며 앞으로 더욱 밝은 미래를 맞을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양측 발표의 키워드는 ‘긴밀한 소통’과 ‘전략적 상호 신뢰’다. 지난 6월 20일 시진핑 주석이 방북했을 때도 ‘전략적 소통’을 언급했다. 앞서 북·중이 긴밀하게 교류한 2010년 5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만났을 때도 비슷한 언급이 나왔다.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연회에서 처음으로 북·중 사이에서 ‘전략적 소통’, ‘전략적 협조관계’의 단어가 등장했다. 당시 후 주석은 연회 연설에서 ‘전략적’ 관계를 강조하며 “중국 당과 정부는 중·조 관계를 고도로 중시하며 시종일관 전략적인 높이에서 중·조 친선 협조 관계를 틀어쥐고 수호하며 추동(推動)해 나가고 있다”고 언급했다. 양측이 공감대를 이룬 전략적이라는 형용사의 함의는 요컨대 항미 전략이다.

동북아 국제정세가 미묘하게 변모하는 시점에 이뤄진 왕이 부장의 평양 방문은 심상치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북·중 결속이 가속화돼 북한이 비핵화에 나설 가능성이 작아지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은 트럼프 지지율 올리는 전가의 보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월 30일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왕이-리용호 회담에서는 지난 6월 하순 오사카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격 성사된 시 주석과 김 위원장 간 평양 회담에서 한 중요한 합의를 이행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구체적으로 ‘중요한 합의’가 무엇인지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대북제재를 피해 식량 지원과 관광협력 등 경제협력과 군사합의 등 북한의 안전보장 문제로 추정된다. 북·중 정상회담 후 일본[아사히신문]은 중국이 식량 80만t을 북한에 지원하고 대규모 관광협력을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5만t 식량 지원을 북한이 거절한 배경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대북제재는 결국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에서 구멍이 나면서 유명무실화될 것이다. 동시에 북한의 대미 비난이 수위를 높인 것도 북·중 결속과 무관하지 않다. 리 외무상은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에 대해 “미국 외교의 독초”라며 “제재 따위를 가지고 우리와 맞서려고 한다면 오산”이라고 주장했다. 최선희 제1부상은 8월 31일 “미국과의 대화에 기대가 사라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모든 조치를 재검토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 요구를 거절할 가능성이 커졌다. 모두가 든든한 중국의 뒷배가 있기에 가능한 행동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말까지 김정은 위원장과 4차 회담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평양의 젊은 독재자와의 정상회담(summit)만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벤트는 없다. 내년 11월 미국 대선 전까지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과의 회동은 본인의 지지율이 추락할 때마다 시청률을 올리는 전가의 보도처럼 뉴스 전면에 나올 것이다. 비핵화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단순 만남을 통해서 트럼프 본인이 김정은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만 부각하면 외교정책은 대선 과정에서 어려운 경제문제를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복안이다.

다음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파기로 한·일 관계는 물론 한·미 동맹도 삐걱거리는 사이에 북·중 양국의 대남 압박이 강화될 것이다. 올해 상반기 이후 북한의 문 대통령과 남한에 대한 금도(襟度)를 넘은 신상 비난과 압박은 중국의 백업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5월 이후 10차례 진행된 북한 군부의 신무기 시험도 한·미 양국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중국의 암묵적 동의가 작용했다.

문 대통령이 9월 하순 유엔총회 연설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다시 한번 오지랖 넓은 중재자(?)의 역할을 통해 김정은과의 삼각 채널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긴밀한 북·중 공조에 발을 걸치려는 의도가 내포돼 있다.

밀착 혈맹에 대응하는 한국의 전략은 불확실


▎1954년 10월 중국 건국 5주년 열병식 때 천안문 망루에 오른 마오쩌둥(오른쪽)과 김일성.
마지막으로 동북아 국제정치 역학관계의 불균형이 심화할 것이다. 왕이-리용호 면담에서 중국 건국 70주년에 기념일에 맞춰 김 위원장이 ‘9월 말 10월 초’에 중국을 답방하는 문제를 논의했을 것이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9월 3일 기자설명회에서 “왕이 국무위원의 이번 방북은 북·중 정상의 중요한 공동 인식을 전면적으로 실현하고 북·중 수교 70주년 행사를 치르는데 의미가 있다”면서도 “북·중이 실무 협력을 촉진하고 국제무대에서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8월 27일에는 김익성 총국장이 이끄는 북한 외교단 사업총국 친선대표단이 베이징에 왔다. 루캉(陸慷) 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 외교부 대표단은 8월 하순 평양을 방문해 북·중 우호 관계를 다졌다. 중국 국제문화전파중심과 북한 국가영화총국은 수교 70주년을 기념해 10월과 11월 베이징과 평양에서 각각 처음으로 북·중 국제영화제를 개최해 북·중 양국의 문화 교류를 강화하기로 했다.

또한 북·중 수교일에 맞춰 북·중우의 미술관 공동 건설도 이뤄질 예정이다. 김영재 대외경제상이 이끄는 북한 대외경제성 대표단도 8월 중국 창춘(長春)에서 열린 제12회 동북아 박람회에 참석해 북·중 경제 협력을 모색했다. 김수길 군총정치국장을 포함한 북한 군사대표단은 8월 16일 방중해 북·중 군사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강윤석 북한 중앙재판소 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중앙재판소대표단과 김성남 제1부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노동당 국제부 대표단은 8월 방중했고,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대표단도 베이징을 찾는 등 사실상 북한의 거의 모든 분야의 각급 기관이 중국을 찾고 있다.

김정은이 10월 초 방중하면 지난 2015년 9월 3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 항일 전승 70주년 열병식 참석 당시 올랐던 천안문(天安門) 망루에서 시 주석과 함께 중국 건국 70주년 행사에 동참할 것이다. 불과 4년 만에 천안문 망루에 등장한 남북한의 지도자가 바뀌었다.

북·중 수교 70년을 맞는 시점에서 시종일관인 풍우동주와 병견전행의 밀착 혈맹에 대응해 한국의 전략은 무엇인지 불확실하다. 무너지는 한·미 동맹 대신에 혹시 번지수를 잘못 찾아 평양·베이징의 틈바구니에 동참하려는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은 평화적으로 부상할 수 없다(China cannot rise peacefully)”는 전제로 공세적 현실주의 이론을 주창한 시카고 대학의 존 미어셰이미어 교수가 진단한 중국과 전대미문의 핵무기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북한이 동북아에서 ‘힘과 의지’로 항미항남(抗美抗南) 정책을 추진한다면 한국의 대책은 무엇일까? 중국과의 균형을 추구할 것인가? 중국의 편에 설 것인가?

주기적으로 신형무기를 시험하는 평양발 군사도발에도 불구하고 사문화된 9·19 남북군사합의를 붙들고 공허한 군비 통제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미래의 한국 안보는 풍전등화(風前燈火)다. 기존의 동맹관계조차 수호하지 못하고 평양에 대한 사모곡만을 부른다면 한국의 외교 안보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동북아의 갈라파고스의 섬처럼 고립될 것이다.

-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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