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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0)] 최초의 세계제국 건설한 포르투갈의 해양자본주의 

교역으로 흥하고 사치로 망하다 

왕실과 귀족이 손잡고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브라질 식민 경영 적극 장려
인구의 한계와 봉건 시스템에다 스페인·네덜란드의 공세에 밀려 영역 축소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근교 도시인 마프라에 위치한 궁전. 포르투갈의 전성시대를 상징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유럽 지도를 펼쳐 보면 포르투갈은 대륙의 변방 중에서도 끝에 있다. 유럽의 남서부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쪽 해안을 타고 길게 자리 잡은 포르투갈은 몸집도 작다. 하지만 역사는 길다. 이베리아 반도 나머지를 차지한 스페인과 공유하는 1200㎞에 달하는 긴 국경은 1297년 알카니세스 조약으로 결정된 이후 지금까지 쭉 유지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국경이다.

포르투갈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400여 년 동안 세계를 하나로 묶어 교역의 네트워크로 만든 주인공이다. 지금까지 부국굴기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모두 지구의 한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발전과 부를 축적했던 경험들이다. 고대 서남아시아의 바빌로니아부터 지중해의 그리스와 로마, 중세의 이슬람 세계와 중국과 인도, 그리고 다시 지중해의 도시국가 등인데 그중에서 활동 영역이 가장 넓은 경우가 지중해부터 중국까지 연결했던 이슬람 제국이었다. 하지만 아랍인들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교역하지는 못했다.

반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발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인류 최초로 전 세계를 포괄하는 무역망을 건설한 것은 물론, 군사력을 세계 각지에 투입해 강력한 제국을 완성했다. 중세의 이슬람이나 인도, 중국의 상인들도 문화가 다른 지역까지 멀리 진출해 교역을 추진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처럼 군사적 우위를 앞세우면서 체계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5세기부터 경쟁적으로 대양을 제패하는 모험에 나섰고 마침내 1494년에는 교황의 중재로 지구를 양분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한다. 마치 사과를 반으로 자르듯이 지구를 둘로 쪼개 각자의 영역을 결정한 조약이다. 유럽 변방의 작고 가난한 나라가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을 건설하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상인정신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 리베이라 광장의 18세기 무렵 풍경화. / 사진:위키피디아
이베리아 반도의 지리적 조건은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인도가 인도양에 던져진 다리이고, 이탈리아가 지중해로 뻗어나간 육지이듯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이 대서양을 향해 내민 머리라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 내에서 보면 변방 국가에 불과하지만, 바깥세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첨단 전진 기지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는 중세 유럽의 주요 무역 루트인 이탈리아와 북유럽 항로의 딱 가운데 위치한다. 이런 지리적 조건 덕분에 포르투갈 리스본에는 많은 외국 상인이나 자본가들이 정착해 활동하고 있었다. 핵심은 제노바 출신 금융가들이었지만 영국이나 네덜란드 상인들도 다수 있었다. 또한 문화·인적 자원도 풍부했으며 상업적 기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험정신이 투철한 인물도 많았다.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늘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구 도시인 포르투에서 12세기에 출범한 포르투갈 왕국은 백년이 넘는 전쟁을 통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자국 영토를 확보한 바 있다. 1415년, 포르투갈 해외 진출의 출발점으로 통하는 북아프리카의 세우타 지역을 점령한 것 역시 모로코의 이슬람 세력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이처럼 포르투갈은 왕국의 정체성 자체가 매우 호전적이었으며 기독교 확장의 임무를 특별하게 여기는 세력이었다.

물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외 진출에는 경제적 측면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실제 포르투갈은 가까운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별 재미를 보지 못하자 대서양의 섬들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스페인이 카나리아 군도를 점령하자 포르투갈은 마데이라(1419년) 군도를 차지, 사탕수수 재배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어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내려가며 세네갈 앞의 카페 베르데(1456년), 가나의 엘미나(1482년), 중앙아프리카의 상투메(1472년) 등을 차지했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에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넘어(1488년) 인도양으로 진출하면서 형성한 제국이었다. 포르투갈은 대양을 넘어 항해하는 범선에 대포를 장착, 막강한 화력을 갖췄다. 게다가 수백 년간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훈련된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인도양의 이슬람·인도·중국 세력은 연안 항해에 적합한 소규모 배로 움직였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교역에 익숙한 상황이었다.

포르투갈은 동아프리카 소팔라, 페르시아 걸프 만의 호르무즈, 인도의 고아, 동남아의 말라카, 그리고 동아시아의 마카오에 이르기까지 각 요지마다 요새를 만들어 무역을 총괄했다. 게다가 1500년경에는 포르투갈을 출발해 아프리카를 향하던 배가 우연히 브라질에 도달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포르투갈은 대서양은 물론 인도양을 넘어 태평양까지 이르는 제국을 보유하게 됐다.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가 바닷길을 개척해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향신료와 金으로 부를 독점하다

15세기가 포르투갈의 확장 시기였다면 16세기는 본격적으로 제국의 위상을 과시하면서 수확의 혜택을 누린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부흥 시기에는 동방무역이 중요했고 특히 향신료 수입을 독점했던 베네치아의 역할이 돋보였다. 포르투갈 제국도 리스본에서 출발한 범선이 인도와 동남아에서 직접 향신료를 싣고 돌아와 유럽 전역에 보급했다.

그중에서도 후추는 유럽 시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향신료였는데 아시아 무역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실제 1518년 아시아에서 실어온 화물 중 95%가 후추였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동방 무역이 포르투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막대했다. 예컨대 1506년 포르투갈 왕국의 수입 가운데 아시아 향신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25%였으며, 이후 점차 증가해 1518년엔 무려 40%를 차지했다. 당시 향신료는 21세기 대표적인 산유국에서나 볼 수 있는 석유의 위상과 유사. 물론 16세기 물동량은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무척 적어 보일 수 있다. 해상 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1530년대와 40년대 리스본을 출발하는 배는 매년 평균 7~8척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6~7척이 돌아왔을 정도다. 나머지 1~2척은 항해 도중에 해적에게 공격당하거나 사고로 침몰했다.

포르투갈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해양 교역에 덧붙여 현지의 지역 무역에서도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스페인이 멕시코와 페루에서 필리핀으로 실어온 은, 그리고 일본의 은을 가져다 중국 마카오에서 비단이나 도자기와 교환하던 무역이 대표적인 사례다. 동아시아 바다에서 해운업과 중개업으로 포르투갈이 재미를 본 셈이다.

또 포르투갈 군대는 인도양에서 아랍이나 인도 상인들에게 통행증을 팔아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덕분에 향신료 일부는 홍해를 통해 베네치아인들 손으로 들어갔고, 16세기 후반이 되면 향신료 루트는 아프리카 해로와 서아시아 육로로 양분된다.

16세기가 아시아 무역의 시대였다면 17~18세기는 브라질과 아프리카, 즉 대서양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분류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아시아 무역은 기본으로 군사력을 활용한 정치적 자본주의이자, 중개 무역을 담당하는 전통적 상업 자본주의다. 하지만 아프리카나 브라질을 활용한 자본주의는 산업 자본주의에 가깝다. 아직까지 공업 수준은 아니었지만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작물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였기 때문이다.

인도의 향신료에 이어 포르투갈을 부자로 만든 것은 브라질과 아프리카의 사탕수수와 담배, 면화 등 열대 농작물들이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려와 브라질 대규모 농장의 노동력으로 활용함으로써 제국 내 분업 체제를 발전시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690년대에는 브라질에서 미나스제라이스 금광이 발견됨으로써 포르투갈에 엄청난 부를 안겨줬다. 역사적으로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광이 유명하지만 브라질 금광은 초기 10여 년 만에 기존에 누적된 스페인의 수입을 초과했다. 생산량이 정상에 달했던 1750년대 브라질은 매년 3t의 금을 생산했다. 이에 더해 다이아몬드 광산까지 발견됐으니 포르투갈은 진정 황금향(黃金鄕) ‘엘도라도’를 품은 셈이었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뺏기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포르투갈을 통합했지만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어 성공한 것은 지리의 덕이 크다. 반면 바로 그 점 때문에 포르투갈은 지정학적으로, 또 지경학적으로 심각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15세기 이베리아반도 세력 재구성은 포르투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반도는 서부의 포르투갈과 중앙의 카스티야, 그리고 동부의 아라곤이 경쟁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1470년대에는 카스티야 왕위 승계를 놓고 전쟁까지 벌어졌다. 한편에는 포르투갈 국왕과 결혼한 호아나 공주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아라곤 페르난도 국왕과 결혼한 이복 여동생 이사벨이 있었다. 결과는 포르투갈 측이 패하고 아라곤 측이 승리함으로써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합쳐진 스페인이 탄생했다. 이후 스페인은 남부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스페인은 이베리아 전부를 통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포르투갈은 그 대상이었다. 물론 포르투갈도 자국이 왕실 통합의 주체라면 마다할 일은 없었다. 따라서 두 왕실은 서로 얽히고 설키는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1580년에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계승함으로써 두 왕실이 하나로 통합됐다. 하지만 이 통합은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1640년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공이 프랑스, 영국과 동맹을 맺은 뒤로 수십 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다시 독립을 쟁취했고 브라간사 공은 주앙 4세로 즉위했다.

포르투갈에 대한 위협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양에 진출해 부를 얻게 되자 곧바로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뒤따라 대양 확장과 무역에 달려들었다. 특히 네덜란드는 전 세계의 바다에서 포르투갈을 공격하고 나섰다. 대서양의 브라질과 아프리카 연안의 포르투갈 기지를 공격하는 것은 물론 인도양과 태평양에서도 싸움을 벌였다. 17세기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치렀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긴 전쟁 끝에 인도양과 태평양에서는 네덜란드가 승리를 거둬 식민제국을 만들고, 대서양에서는 포르투갈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이와 같은 결과는 포르투갈의 지경학, 특히 인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는 인구가 100만에 불과했고, 17세기에도 200만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보다는 큰 규모였지만 세계 제국을 유지하고 관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연히 인도양의 포르투갈 기지나 식민지는 군사력이 취약했다. 그나마 대서양에서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브라질의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을 군대로 흡수해서 군인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군대를 아프리카로 이동시켜 제국을 방어하는데 요긴하게 활용했다.

앙골라 노예로 일군 브라질 사탕수수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흑인을 브라질 농장에 파는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현대의 미국과 브라질을 비교하면 영국과 포르투갈 제국주의의 서로 다른 특징을 볼 수 있다. 아직도 미국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서로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고 있는 반면, 브라질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혼혈이 많고, 보다 통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제국주의 시대부터 영국은 식민지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를 확실하게 뒀던 반면 포르투갈은 현지인과 융합하는 전략을 폈다.

엠마뉘엘 토드와 같은 인류학자는 [유럽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국가별 문화 구조를 비교하면서 영국의 차별주의 성향과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평등주의적 경향을 대비시킨다. 같은 제국주의라도 영국은 차별성을 강조한 반면 포르투갈·스페인은 보편성에 방점을 두었다는 문화적 해석이다. 분명한 사실은 포르투갈의 경우 인구 구조상 식민지에 다수의 주민을 이전시킬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식민 관료나 군인, 상인들은 독신으로 살거나 현지 여성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 제국은 노예무역을 세계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도입한 것은 물론 노예에 기초한 경제를 국가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실제로 포르투갈은 대서양의 아프리카 연안을 탐험하던 15세기부터 이미 노예를 상품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1441년 서부 아프리카에서 노예가 포르투갈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1480년대부터는 정기적인 노예무역이 형성돼 대서양을 오르내리게 된다.

초기 포르투갈의 기사 겸 상인들은 아프리카 연안에서 직접 노예사냥에 나섰지만 곧바로 연안 부족들과 연합을 통해 노예를 사들이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이전에 이슬람 세계나 유럽에서도 노예는 존재했지만 전쟁에 뒤따르는 부수적인 결과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노예를 상품으로 개발해 대규모 교역을 통해 제국의 축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사탕수수·담배·면화·카카오 등의 열대 농작물은 노예의 노동력 없이는 불가능한 경제 활동이었다.

인도양의 제국에서도 포르투갈인들은 현지인과 결혼해 다양한 혼혈 사회를 낳았다. 이런 현상은 1510년 알부케르크 총독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 포르투갈 제국의 독특한 특징이 됐다. 하지만 이들 식민 사회는 혼혈이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인종에 기초한 확고한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즉 흑인 노예부터 현지인, 혼혈, 현지 유럽인, 본토 포르투갈인의 위계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이런 점에서 포르투갈 본토에서 유대인들의 지위는 흥미로운 사례다. 15세기 말까지 포르투갈의 유대인들은 3만 명 정도로 인구의 3%에 불과했지만 상업과 금융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왕실의 의사나 천문학자들을 배출하는 등, 뛰어난 소수 집단이었다. 특히 1492년 이웃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 결과 다수가 포르투갈로 이전해 와 유대인 수가 두 배로 늘어났다. 당시 포르투갈은 일단 유대인을 받아들인 뒤 1496년 기독교로 강제 개종을 요구했다. 이들은 이후 구 기독교인과 구분되는 신 기독교인이라 불렸다.

이후 포르투갈의 역사를 보면 신 기독교인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폭동이 잦았다. 또 국가의 관료가 되거나 혜택을 받자면 ‘피의 순결’(limpeza de sangue)을 증명해야 하는 등 유대인 출신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유지됐다. 이처럼 포르투갈은 한편으로는 세계 제국을 형성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봉건적 사고방식과 관습을 버리지 못하는 모순을 보였다.

富의 순환에 실패한 포르투갈


▎종교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포용력 부족은 ‘세계제국’ 포르투갈의 수명을 단축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부자 나라에서는 한동안 부가 넘쳐 난다. 그런데 이 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 지속성을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만 보더라도 제노바에서는 부가 부자들을 따라 외국으로 이동해 버렸고, 피렌체에서는 왕실에 집중돼 사치로 낭비되거나 보물과 예술품의 형식으로 남았다. 베네치아가 그나마 가장 광범위하게 시민들에게 나누어졌고 건물과 상점과 극장에 투자됐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포르투갈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전자가 상인들의 정부였다면 포르투갈은 왕과 귀족의 정부였다는 사실이다.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왕실이 가장 앞장섰고, 왕은 처음부터 귀족들을 해외 사업에 투입함으로써 정권과 제국을 긴밀하게 엮으려고 노력했다.

1487년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를 후원한 국왕 주앙 2세는 해외 개척 사업을 귀족 에스테바웅 데 가마에게 맡겼다. 그리고 주앙2세의 뒤를 이은 마누엘 국왕은 에스테바옹의 아들 바스코 데 가마에게 인도양 개척을 부탁. 제국 건설의 초기부터 대를 뛰어넘는 왕실과 귀족의 협력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양이나 대서양 무역은 기본적으로 왕실이 독점하는 무역이었다. 제국에서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은 왕실이나 귀족 계층으로 흘러 들어갔다. 왕실의 부란 국가 예산을 의미했는데 당시 유럽의 왕실은 끊임없는 전쟁으로 자금을 소진하던 시절이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은 유럽에서 갈고 닦은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기는 했지만 유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전쟁을 벌여야 했고 전쟁 자금도 지원해야 했다. 또한 귀족들은 투자를 통해 새로운 소득원을 개발하기보다는 과시적 소비를 선호했다. 탄탄한 성을 쌓고 화려한 궁을 짓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포르투갈은 이처럼 제국을 통해 봉건사회에서 상업사회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부를 봉건주의적으로 탕진하고 말았던 셈이다. 위에서 언급한 신(新)기독교인들은 포르투갈의 상인계층으로 성장,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16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종교재판을 통해 이들을 지속적으로 협박했고 그 결과 다수의 신기독교인은 자유로운 네덜란드로 이주해 버리고 말았다.

18세기 브라질의 황금은 포르투갈이 장기적 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이런 횡재 또한 국왕과 귀족에게 혜택이 집중됐고, 이들은 황금으로 자국의 산업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상품을 수입하는 데 열심이었다. 특히 주앙5세는 프랑스 루이14세의 베르사유 궁을 본 따 리스본 근교에 33년에 걸쳐 노동자 5만 명을 투입한 마프라 왕궁을 지었다. 왕궁의 실내를 장식하고자 피렌체와 로마, 프랑스의 예술가들을 불러 모았고 유럽 전역에 신하를 파견해 장식품, 예술품, 희귀 도서 등을 사들였다.

왕과 귀족에게 부가 집중되고, 낭비되는 와중에도 포르투갈에 희망은 남아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 속언에 따르면 “인도양에서 가서 부자가 되어 돌아온 사람은 많지만, 브라질가서 돈 벌어 온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브라질에서 농장을 운영해 부자가 되면 포르투갈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농장을 안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이처럼 포르투갈 제국의 부 가운데 휘발성이 강한 현찰은 리스본을 통해 유럽의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간 반면, 산업적 성격으로 뿌리가 깊은 부의 근원은 점점 브라질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18세기가 되면 포르투갈은 여전히 전통적인 농업이 지배하는 봉건적 사회였지만 브라질은 상업화가 깊이 진행된 산업으로서의 대농장 체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부가 축적되어 또 다른 부를 낳는 자본주의적 성격은 차츰 포르투갈이 아니라 브라질로 기울기 시작했다. 배꼽이 배보다 더 커져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포르투갈에게 부정적 효과만 초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리적으로 강대국 옆에 위치한 스코틀랜드나 카탈루냐(아라곤) 등은 이웃에 흡수당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바로 브라질과 같은 소중한 식민지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제국이기엔 너무나 봉건적인…

포르투갈은 브라질이란 풍요로운 식민지의 모국이었기 때문에 영국 입장에서는 이용가치가 높은 동맹국이 될 수 있었다. 유럽 정치 무대에서 영국은 포르투갈을 지원해 스페인을 견제하는 한편 그 대가로 브라질과의 무역에서 상당한 득을 볼 수 있었다. 직접 식민지를 운영하기보다는 포르투갈이 비용을 대고 이득은 함께 누리는 구도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18세기 브라질에서 생산한 금과 다이아몬드의 상당 부분은 영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당시 브라질-포르투갈-영국의 삼각무역이 활발했는데 브라질에서 얻은 금과 다이아몬드는 포르투갈 리스본을 잠시 거친 뒤 거의 곧바로 영국의 공산품을 사는 데 소비됐다. 영국은 브라질의 금은 물론 곁다리로 영국인이 선호하는 포르투갈 산 포르토 와인도 수입하곤 했다. 특히 1703년의 메수엔 조약에 의거해 포르투갈은 영국의 직물을 수입하고 대신 영국은 낮은 관세를 통해 프랑스 대신 포르투갈 와인을 수입한다는 합의는 이런 현상을 강화시켜 줬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영국의 경제발전에서 브라질 금의 역할을 언급하며 이것이 결국 산업혁명의 기반이 됐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영국은 1713년부터 1724년 사이 8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금화를 찍어낸 바 있다. 이처럼 브라질의 금은 포르투갈이 아닌 영국의 산업혁명에 자금을 대면서 결정적으로 기여한 셈이다.

화려한 해양제국이었던 포르투갈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처럼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결정타를 맞게 된다. 1807년 프랑스 군대의 침공 소식에 포르투갈의 왕실은 1만5000명의 신하와 가족, 각종 왕실 자료와 보물 등을 싣고 브라질로 망명을 떠났다. 리우데자네이루에 왕실이 정착하자 브라질은 이제 유럽의 포르투갈을 더욱 부수적인 존재로 여기게 됐고 마침내 1822년에는 독립을 선언했다.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가 한동안 세계를 호령하고 지배하는 부유한 제국이 됐지만, 이제 다시 변방의 작은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포르투갈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살리기에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봉건적이었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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