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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9)] 고독한 사막에서 반려견을 만난 사연 

무위적 삶이 곧 유위의 예술! 

고독을 좇아 문명과 떨어진 대자연의 불모지서 홀로 살기
이방인과 동물 등 주변과 관계 맺기의 본질은 도시와 같아


▎절벽 아래 책상에 앉아 바라본 광야의 전경.
소꿉친구 혜원이를 암만에서 떠나보내고 그곳 중고품 가게에서 의자를 구해 와디 럼에 돌아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나는 서재 바위산에 책상과 의자 한 세트를 어떻게 놓을까, 그 완벽한 배치를 궁리하면서 하루를 소비하였다. 바위산 위에 책상 하나 놓기 위해 여러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 그 단순한 사건 하나에 하루 전체를 매달린다는 것을 과연 우리의 일상적 감각 속에서 이해 가능할 것인가?

처음에는 책상을 반(半) 동굴화된 옴폭한 벽면을 향해 안정적으로 붙여놓을 생각을 했다. 그러나 책상을 돌려서 의자를 벽면에 기대어놓고, 책상과 벽면 사이에 얼마간의 공간을 주면, 사막의 파노라마가 한눈에 들어오는 유리한 시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독서와 함께 시선의 평온과 영감을 동시에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자리를 확보한 후에 주변의 작은 조약돌과 큰 돌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리고 주변에 쌓인 먼지와 모래들을 오랜 시간을 걸려 깨끗이 벗겨내었다.

그렇게 열심히 소제한 후, 그곳을 둘러보았는데 뭔가 잘못된 듯, 자연스러운 안온함을 느낄 수 없었다. 깨끗하게 청소한 사건이 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바닥을 오랫동안 보고 또 자세히 살펴보았다. 결국 그 장소를 깨끗이 청소한다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움에 대한 폭력이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내가 청소하기 이전에는, 움푹 파인 반 동굴바닥에는 모래가 꽤 두툼하게 깔려있었다. 날아다니던 모래들이 그곳에서 안식을 얻는다. 또 그곳에는 바위가 떨어져 그 쌓인 모래들이 교란 당할 염려라곤 없었다. 반 동굴 벽에서 떨어질수록 굵은 모래와 자갈이 깔리게 된다.


▎책상에서 바라보는 사막의 파노라마는 언제나 시선을 압도한다.
여러 시간, 세밀하게 조사하고 사유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이러했다. 돌멩이 하나의 모양과 위치,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래알의 분포는 수천 년 또는 수백만 년을 거쳐 진화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다. 내가 조약돌을 쓸어내림으로써 순식간에 나의 시각에 편하게 느껴졌던 모든 평형 상태가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후 시간에는 내다 버린 조약돌을 주워다 바닥에 까는 작업을 해야만 했고, 벽 쪽으로 모래를 다시 깔아 그 모래의 펼쳐진 모습이 조약돌의 분포와 매우 자연스러운 연속성을 이루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연속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모습이야말로 나에게 심미적 쾌감을 주었다.

바위산 서재를 꾸미다 깨우친 진리


▎나의 캠프를 찾아온 모하메드 살라가 의자를 날라주고 있다.
사막에서의 삶의 실험을 시작할 때, 나는 곧 예술을 창작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방에 깔린 것이 지고의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위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근원적인 욕구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나는 이미 걸작 예술품 안에 들어와 있었다. 텐트 문만 걷고 나가면 모든 심미적 감성이 충족되는데, 무엇 때문에 방안에 우그리고 앉아 궁상맞게 붓질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내가 애초에 사막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나는 미니멀리즘적인 삶을 살게 되리라고 기대했고, 인위적인 창작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예술이라고 따로 할 이유가 없어지니깐 예술품을 만드는 작업도 제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인즉, 그렇지 않았다. 내가 나의 책상 주변으로 조약돌을 세심하게 재배치하는 그 행위 자체가 내가 예술품을 만드는 과정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사막에서도 역시 끊임없이 창조적이어야만 했다. 그러한 행위가 없으면 나는 무생물에 가깝다. 사막은 텅 빈 캔버스와도 같았다. 그 표면은 항상 무화(無化)되면서 신선한 캔버스를 제공한다. 그래서 최초의 한 획을 그을 때, 나는 그 여파를 다 감지할 수 있다. 동양의 화론가(畫論家)들은 일획이 곧 만획이고, 일획에서 곧 모든 법이 성립한다고 하는데 그 가장 강렬한 사례를 나는 사막의 삶 속에서 느낀다. “무법(無法)으로 유법(有法)을 생하고, 유법으로써 중법(衆法)을 관철한다.” 중국 명말청초의 화가, 석도(石濤, 1642~1707)의 말이다.

아마도 내가 도시를 떠나온 이유를 말하라면 이 이상의 대답은 없을 것 같다. 도시는 나의 예술적 비전을 흐리게 만들고, 예술과 상품, 예술과 상업선전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비속한 경지로 나를 몰고 간다. 와디 럼에 정착하면서 예술을 제거하겠다는 대자적 의식은 오히려 사라지고, 나의 실존 그 자체가 행위예술과 설치미술의 혼합이 되어버렸다. 나는 소위 예술품을 만들지는 않지만, 나의 삶이 끊임없이 예술적 과정의 현현 속에 있다고 느꼈다. 사막이야말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카타르시스적인 순수체험을 제공하는 그 무엇이었다.


▎서재 산의 전경. 절벽 아래 책상을 뒀다.
다음날 책상이 온전한 제 위치를 찾았을 때, 나는 수평기를 동원해 완벽한 수평을 맞추고, 의자를 아래 캠프로부터 나르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의자가 보관되어 있는 부엌으로 갔을 때, 캠프로 다가오는 한 방문객이 있었다. 그는 내가 살라의 캠프에서 만난 적이 있는 베두인 소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모하메드 살라(Mohammed Salah)였는데, 바로 유머감각이 넘치는 큰아들 알리(Ali)의 수줍은 동생이었다. 살라는 후리후리한 키에 여성적인 성격의 19살 난 소년이었는데, 매우 큰 갈색 눈매에 눈썹이 길게 하늘로 치솟았다. 도톰한 입술과 얼굴의 윤곽이 모든 여성이 선호하는 미모였다. 심미적으로 말한다면, 그는 아름다운 베두인 청춘의 이데아적 카탈로그 이미지의 표상이 될 만했다.

그를 그의 집에서 보았을 때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내가 사는 곳을 찾아온 사실이 좀 의외였다. 개성으로 말한다면, 이 소년은 항상 잘 기름이 쳐진 기계와 같이 돌아가는 외향적 플레이보이, 모하메드 팔라(MohammedFalah, 책상을 날라다 준 23세의 청년)와는 정반대의 인간형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그를 맞이했다. 모하메드 살라는 멋쩍게 웃으면서, 지금 뭘 하고 있냐고 물었다. 내가 의자를 책상 있는 데까지 올려야 한다고 말하자마자 그는 의자를 등에 메었다. 그와 같이 바위산을 오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의자는 책상과 달라 가벼우니깐, 마사지해 달라는 얘기는 하지 않겠지?”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의자의 포장을 벗겼고, 그것을 책상 안쪽으로 놓았다. 그는 내가 꿈꾸었던 환경을 드디어 창조해놓은 것에 관해 만족해하는 것을 눈치라도 채는 듯이 나에게 이 모든 세팅이 매우 훌륭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기의 일상적 감각과는 매우 “다르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는 “다름”을 감지할 줄 아는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매우 순결했다. 그리고 말이 많지도 않았다. 그는 내 책상과 주변 경관을 바라보면서 충만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 삶의 환경을 꾸미는 사람은 처음 봐요. 정말 멋있어요.”

캠프를 찾아온 베두인 소년과 대화


▎와디럼의 깊은 협곡을 탐험하는 모하메드 살라.
사실, 모하메드 살라는 내가 그곳에서 하는 일을 이해하고 흠상할 줄 아는 최초의 베두인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정말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면서 광야를 탐색하고 정통적인 베두인 삶의 양식을 발견했다. 그것도 인사이더적인 청년세대의 관점에서.

그는 나를 통해서 이 세상의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나 정치에 관해 듣는 것을 매우 즐겼다. 그는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한 청년이었다. 내가 와디 럼에서 목격하는 현상에 대한 나의 관점을 얘기하면 아주 심도 있게 경청하곤 했다. 어디서나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전자 기기상에 있는 게임을 즐겨 했고, 텔레비전에서 축구를 보거나, 자동차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베두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관광객이나 언론매체를 통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적 사건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작은 아이패드를 빌려주면, 그는 아이패드상에서 축구게임을 몇 시간이고 했다. 그리고 세계의 주요 팀이나 선수들에 관해 다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소셜미디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어느 날 나에게 최신 유행하는 스냅챗(Snapchat)을 쓰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는 대뜸, “스냅챗이 페북 메신저보다 더 나아요. 다운로드 받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스냅챗은 한국의 스노우앱에 비견할 만한 새로운 비디오 메시지 앱이다. 전기도 없고, 지상 전화선도 없는 문명권의 새로운 세대가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초현실주의적 그림이었다.


▎책상 옆에 작은 화로를 만들어 커피를 끓인다.
모하메드는 요르단 사막 안의 작은 빌리지에서 자라난 소년이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아버지가 사용을 허락하는 낡은 지프차에 손을 대기만 하면 그는 며칠이고 사라져 보이질 않았다. 그는 사냥하고, 탐험하고, 캠핑한다. 사막은 이 소년에게 그러한 자유를 허락한다. 그 나이의 소년들은 모두 그러한 자유를 누리기를 갈망한다.

서재 산에 의자를 올려놓은 그 다음 날, 그는 나를 처음으로 지프에 태우고 떠났다. 나는 그가 진정으로 사막을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캠프와 동네 사람들을 떠나 깊은 광야로 탐험의 여로를 개척했다. 그는 사막의 지리, 식물상, 동물상에 관해 놀라운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와 사막에 같이 있다는 것이 매우 편안했다. 그는 사막의 환경과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존재 그 자체가 사막에 융화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끔 그가 차를 멈추고 보닛을 열어 엔진에 물을 부을 때는 좀 불안했지만…….

그가 물을 부으면 물이 끓어올랐다. 자동차가 과열된 것이다. 어떤 때는 차가 멈추어 엔진이 다시 작동되지 않았다. 모하메드는 돌멩이 한 조각을 들어 배터리를 꽝 때렸다. 희한하게도 엔진은 스타트 되었다. 차가 아주 고장이 나버리면 누군가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한다. 전화도 연결될 길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냥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지적 호기심 가득한 순결한 사막 소년


▎고독하기만 할 줄 알았던 사막에서도 다양한 동물들과 관계 맺기가 이뤄진다. 나의 숙소를 찾아온 여우의 모습.
모하메드 살라는 와디 럼에서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되었다. 그와의 우정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무엇보다도 그는 내가 완벽히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로컬 베두인이었다. 그만큼 그는 순결한 영혼이었다. 대부분의 베두인이 친절했지만, 개인적 친분을 맺기는 매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나를 단순한 게스트나 친구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재원, 즉 돈줄로 생각했다. 아우데만 해도 내가 그의 엄마 캠프에 머물고 있을 때, 두 개의 물탱크에 물을 채워야 한다고 하면서 70달러를 요구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물값은 공짜였고, 물 트럭에 소요되는 연료비는 기껏해야 20달러 정도였다.

내가 관광객들이 볼 수 있도록 욕실 앞에 물을 절약해야 한다는 안내문을 붙여놓았는데, 칼리드는 그것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핏대를 내면서 그의 관광객 손님들이 물을 쓰고 싶은 대로 편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값은 누가 내는데? 나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나는 칼리드에게 노스페이스 재킷을 사다 주었고, 아우데의 부인이 부탁해서 인도로부터 비싼 실크사리 드레스를 사다 주었다. 그들은 나에게 요구만 했지, 인간적 교감이라는 측면에서는 한없이 부족했다. 내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우데를 위하여 웹사이트를 건설해주었고, 그 덕분에 그는 많은 관광객과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로 베두인 남자들이 감추고 있는 음심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베두인 여자와 친구를 하고 싶어도 그들은 영어를 못했고, 또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모하메드 살라가 나에게는 유일한 친구가 된 것이다. 그는 음심이 없는 순결한 영혼이었고 성실한 지적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와디 럼에 수백 명의 모하메드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겠지만, 지금부터는 모하메드 살라를 그냥 모하메드라고만 부르겠다.

모하메드와 친구가 된 이후 나는 캠프에서 일주일간 일상적인 생활을 반복하며 혼자 지냈다. 캠프에 홀로 지내는 것이 이제는 꽤 익숙해졌지만 때로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아마도 그렇기에 살라의 캠프에서 관광객들을 만날 때는 유별나게 수다쟁이가 되곤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또 모하메드를 만나게 되면 괜히 너무 많이 웃는 것 같다. 고독을 찾아 이렇게 어렵게 사막 한가운데 보금자리를 만들어놓고 또다시 반려의 벗을 그리워한다는 것 자체가 좀 웃기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시환경에서 느끼는 고독과 사막의 고독은 근원적으로 질이 다른 것이다. 도시에서 느끼는 고독은 존재를 빈곤하게 만드는 고독이다. 고립·왕따에서 생겨나는 불안감이다. 도시의 고독은 주변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찾아내는 여러 루트가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도 없고 또 나의 안부를 묻는 사람도 없다. 그냥 무관심한 것이다. 아파트에 혼자 앉아 있으면 때때로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저조하고 우울해진다. 그러나 사막에서의 고독이란 매우 대조적이다.

사막에서 고독을 활용하는 지혜


▎먹을 것을 찾아 숙소에 나타난 고슴도치가 잔뜩 웅크리고 있다.
나는 물리적으로 단독자이다. 사람들이 나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되어 있다. 사막에서 느끼는 고독은 멜랑콜리아가 아니다. 오히려 사막의 고독은 나 자신과 편하게 지내는 지혜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든 타 생명체이든 내 주변의 다른 생명체의 현존을 흠상하게 한다.

실제로 사막에서 내가 완벽하게 고독하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밤이 되면, 주변을 동물들이 감싼다. 나는 쿠킹을 할 때마다 남은 요리를 여우들을 위하여 밖에다 놓아두는 습관이 있다. 그렇게 하면 정규적인 방문객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떤 때는 여우 똥에 플라스틱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 여우는 너무 배고파서 쓰레기통의 플라스틱까지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우를 잘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슴도치도 나를 방문하는 단골 중의 하나였다. 그중 어떤 놈은 전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크래커를 주려는 데 내 손으로 팔짝 뛰어올라, 크래커를 부지런히 먹어치웠다. 베두인들은 고슴도치가 독사들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로운 동물로 간주한다. 고슴도치는 잡식이다. 벌레·도마뱀·곡식·식물 닥치는 대로 먹는다. 어떤 때는 내가 실수로 올리브오일을 모래 위에 쏟았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자리에 깊은 구멍이 파여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고슴도치가 기름 냄새 때문에 땅속을 뒤진 것 같다.

이 동물들이 밤에 부엌을 침입해 난장판을 만들지 않도록 나는 항상 부엌문을 잘 닫아놓았다. 그런데도 항상 부엌 내부에서 알루미늄으로 포장된 V자 치즈를 까먹거나 다른 장난을 치는 놈이 반드시 있었다. 곤충류로 보기에는 그 자국들이 너무 컸다. 여우나 고슴도치는 담 높이 달린 창문을 넘어올 리 만무했다.

이 범죄의 주인공은 추측건대 일종의 설치류인 것 같았다. 그래서 포장된 치즈 하나를 밖에 놓아두고 밤에 그 주변을 감시하기로 했다.

밤늦게 문을 열고 부엌 한편의 바위벽 쪽을 향해 전등을 비추었을 때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아주 이질적으로 생긴 동물, 너구리를 쥐처럼 우그려놓은 형상이라고나 할까? 등쪽에는 짙은 쥐색의 털이 나 있고, 배쪽에는 흰 털, 눈을 뺑 둘러서는 까만 털, 그리고 꼬리 부분은 까만 털, 꼬리도 길지는 않지만 제법 털이 풍성했다. 무게는 100g 정도, 그리고 귀가 쫑긋 매우 컸고 코는 분홍빛, 인상이 뭔가 어려움을 당하는 듯 슬픈 표정이었다. 이놈은 벽면을 수직으로 자유롭게 왕래했다. 창문을 넘나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미스터리는 풀렸으나 이 동물의 족보를 알 수가 없었다. 사막에서도 매우 드물게 목격되기 때문에 베두인들도 이 동물을 본 적이 없다 하고, 그 이름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부엌을 방문하는 이 손님을 행운이라 여겼고, 이 녀석이 치즈를 까먹다 남겨놓은 부엌의 쥐구멍 앞에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먹을 수 있게 배려했다. 나의 음식 저장고를 뒤지지 않게 단속해놓았고 쥐구멍 앞에서 식사를 다 해결하도록 해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녀석은 거의 내 식구처럼 친밀해졌다. 음식을 장만해놓고 자기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동물의 비디오를 찍을 수 있었고, 그것을 페북에 올려 전문가들에게 이 이국적인 설치류의 정체성에 관해 문의했다. 그 이름은 아시안 가든 도마우스(Asian Garden Dormouse) 엘리오뮈스멜라누루스(Eliomysmelanurus)! 좀 긴 이름이었다.

캠프를 찾아오는 다양한 손님들


▎휘티어라는 작은 새는 내가 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매일 숙소를 찾아와 지저귀곤 한다.
아침에는 여러 다른 새들이 찾아온다. 작은 모랫빛 종달새가 가장 흔한 방문객이다. 주작속(屬)의 로즈핀치(rosefinches)도 있다. 로즈핀치는 생기기는 종달새처럼 생겼는데, 붉은 털로 온몸이 덮였고, 흰 털과 까만 털이 강렬한 무늬를 형성하는 아름다운 날개를 지녔다. 휘티어(wheatears)라는 매우 매력적으로 생긴 검은딱새류도 찾아온다. 까만 새이지만 가슴이 하얗다. 이들 작은 턱시도 새들은 나에게 매우 친절하다.

한 휘티어는 매일 아침 내가 아침을 지을 때면 반드시 날 찾아온다. 이 녀석은 내가 음식 찌꺼기를 던져준다는 것을 알고 바로 문밖에서 기다린다. 때로는 내가 밥을 안 주면 달라고 아름답게 그 소망을 노래하곤 한다. 오래 사귀다 보면 새들의 지저귐의 질감을 통해 그들이 어떠한 요구를 하는지 알 수가 있다. 새들은 정보교환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내가 이 생명체들, 심지어 곤충들과도 많은 언어를 교환하는 동안, 불현듯 개 한 마리 정도는 키워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야생동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도 그 나름대로 훌륭한 일이었지만, 나의 감정을 소통시킬 수 있는 상존하는 반려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이런 외딴 환경에서는 매우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도시생활에서의 거추장스러운 페트와는 또 다른 의미였다. 그리 보자면 물론 개가 제일 이상적일 것 같았다. 개야말로 1만5000년 이상을 인간과 함께 진화해오면서 인간과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상적 교감체로서 발전해 온 것이다.

처음에는 매우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타야가 자기 캠프에서 개를 키우는 것을 허락할지에 관해서도 자신이 없었다. 또 도시로부터 개 한 마리를 사올 적에 과연 그 개가 사막에서 잘 적응할지도 나는 확언할 수 없었다. 나는 개나 동물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내 책임으로 개를 키우거나 훈련시킨 경험은 없었다.

내가 반려견을 생각했을 때, 우선 암만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나의 친구 사이드(Said)와 의견을 나눴다. 그는 나를 아우데와 연결해 주었고, 사막에서 머물 수 있도록 모든 안배를 해준 인물이었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개들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으며,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종자를 하나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독일종 로트바일러, 알래스카 눈썰매견 허스키의 사진들을 보내왔다. 그리고 심지어 코케이시안쉐퍼드의 강아지 사진까지 보내왔다. 코케이시안쉐퍼드는 추운 산 지역에서 기르면 털이 수북한 곰 사이즈로 클 수도 있는 매우 공격적인 경비견이다. 그런 개를 키우면 눈에 띌 수는 있겠지만, 사막에서 그런 위압적인 개를 키운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었다. 허스키도 키우면 매우 아름다울 수는 있다. 그러나 본시 추운 날씨에 익숙한 종자를 이 사막에서 키운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대체로 캠프를 떠나 어디론가 도망치기 때문에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로트바일러는 사막에서도 키우기에 적합한 종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향해 뛰어가기를 잘하기 때문에 겁에 질린 베두인들이 죽여 버릴 위험성이 높다고 한다. 요르단에서 이렇게 유명한 종자를 내다 팔기 위해 양육하는 사람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매우 빈곤한 상태에서 개를 키운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개들이 어릴 때 혹사를 당해 뭔가 결함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이들에게서 개를 산다면 동물 학대로 돈을 버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꼴이 아닐까?

베두인의 애물단지가 된 반려견과 첫 만남


▎부엌에서 치즈를 훔쳐먹곤 했던 사막의 희귀 동물인 아시안 가든 도마우스.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이 생각 저 생각 굴리고 있을 때, 나는 불현듯 모하메드에게 개를 하나 기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내 인생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치게 될 한 계기가 되는 중요한 얘기를 했다. “어~ 우리 캠프 뒤에 개가 한 마리 묶여 있어요. 우리는 그 개를 처치 곤란해 하고 있어요. 그놈은 우리 가축을 보호하는 능력도 없고 영리하지도 않아요. 당신이 좋아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모하메드는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엄마가 개를 키웠는데 이 개가 공격적인 경비견의 역할을 못 해 가축을 지켜주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용이 없어서 이 개를 관광캠프 주변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밤중에 밖에서 잠자는 관광객들의 얼굴을 핥아, 다음 날 아침 관광객들이 불평을 토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라가 개를 붙잡아서 사람들에게 귀찮게 굴지 않도록 캠프 뒤에 있는 바위에 묶어 놓았다는 것이다. 모하메드는 말했다. “이 개는 비교적 큰 개에요. 아주 힘이 세요. 앞발로 사람을 눕힐 수도 있어요. 미루 누나가 이런 개를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정말 멍청한 놈이거든요. 머리가 나빠요!”

그때는 밤이었다. 나는 모하메드를 따라 바위산을 에둘러 캠프 뒤쪽으로 있는 작은 산의 저편, 보이지 않는 평평한 곳으로 갔다. 절벽에 움푹한 곳에 전등을 비추자, 졸린 눈을 한 개 한 마리가 사람이 그리워 꼬리를 어찌나 세차게 흔들어대는지 뒷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다. 그 개는 까맣고 누런 잡종 똥개였다. 우리나라 풍산개만 한 크기였는데 철사와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이 버림받은 슬픈 개는 우리를 보고 너무도 기뻐한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우리를 향해 벌떡 일어서다가 썩은 잔반 가득한 낡은 밥통을 엎어버린다. 그러자 한 번도 씻어준 적이 없는 밥통의 온갖 오물이 흩어지면서 같이 퍼지는 악취는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고약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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