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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복거일 소설 ‘이승만’ | 물로 씌여진 이름 (제1부 광복) 

제17장 국치일 행사(5) 

애초에 일본이 조선에 파병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공사관과 거류민의 보호’였다. 그러나 일본은 곧바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추진하자고 청에 제안했다.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조선에 대해 절대적 영향력을 지닌 청이 그 제안을 거절하자, 일본은 독자적으로 그 일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894년 6월 조선의 수도와 왕궁을 장악하자, 오토리 케이스케 공사의 주도로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
민비 일족이 밀려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는 상황에서, 김홍집(金弘集)이 총리대신이 되었다. 김홍집은 개항기의 조선 조정에서 외교 업무에 가장 밝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고 외국과의 교섭과 조약 체결에서 늘 실질적 책임자였다. 두 차례의 일본 시찰에서 일본의 근대화 노력에 감명을 받아, 그는 개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다른 편으로는 조선 사회의 정치 현실을 잘 알아서 개화가 온건한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식견과 정치적 감각 덕분에 그는 개혁 내각을 이끌 적임자였다. 김홍집 내각의 주요 인물들은 어윤중과 김윤식(金允植)이었다.



일본이 요구한 개혁은 워낙 근본적이어서 기존 정부 기구로는 일을 추진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조선에서 근무해서 조선 사정을 잘 아는 일본 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기존 정부 기구들을 뛰어넘는 권한을 지닌 새로운 기구의 설치를 제안했다. 그런 제안에 흥선대원군과 각료들이 동의해서 개혁 업무를 관장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었다. 이 기구는 총재, 부총재 그리고 16인에서 20인 사이의 회원들로 이루어졌는데, 총리대신이 총재가 되고 정부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나 고위 관리들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회의 형태여서 개혁 업무들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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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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