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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정밀취재] 문재인에게 조국은 어떤 존재였나 

합리와 균형의 궤도 이탈한 조국 장관 임명 강행 

문 대통령 정치적 고비 때마다 ‘호위무사’… 검찰개혁에서 ‘브로맨스’ 과시
조국 사태로 실종된 공정과 정의 향한 국민의 외침에 뒤늦게 호응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서울 마포구 홍대에 모인 유권자들 앞에서 조국 서울대 교수(오른쪽)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지난 두 달 동안 대한민국을 ‘조국 블랙홀’에 빠뜨렸던 ‘조국 대전(大戰)’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하 존칭 생략)의 전격 사퇴로 막을 내렸다. 당장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물러나던 10월 14일 오전만 해도 추가 검찰개혁안을 직접 발표까지 했던 그가 갑자기 사표를 던진 이유가 쉽게 납득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 전날 고위 당정청회의에서도 조국은 불퇴전의 각오를 다졌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을 봐야 한다.”

검찰개혁을 마치 성전(聖戰)으로 여긴 듯 정치적 순교도 마다 않을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조국의 변심을 놓고 다양한 분석이 제기됐다. 자신의 거취를 둘러싼 극한적 진영대립으로 인한 민심이반, 지지율 추락이 1차 원인으로 꼽혔다. 장관직 고수의 명분으로 들었던 검찰개혁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시대적 대세가 돼 나름 소명을 다했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뜻하지 않게 ‘국민공적’처럼 돼 버린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무시할 수 없다. 대통령도 이를 충분히 이해한 듯 그의 사의를 받아들였다.

‘미스터리’의 출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오른쪽)이 민정수석 시절인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하며 웃음을 짓고 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그래서 조국 사태의 출발을 더 이해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황당함도 이런 황당함이 없다.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가정이 풍비박산 날 때까지 조국은, 대통령은, 여당은 도대체 왜 눈뜬장님, 꿀 먹은 벙어리 노릇을 자처했을까. 그래서 많은 이가 이렇게 따져 묻는다. “문재인과 조국은 어떤 특수 관계인가”(9월 7일 자 [조선일보] 최보식 칼럼).

장관 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조국의 실체는 많은 국민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먼저 딸을 둘러싼 논란. 의대 논문저자 허위등재부터 장학금 부정수급을 거쳐 인턴증명서 위조 등 관련 의혹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한가운데에 교수 엄마의 ‘치맛바람’과 스타 교수 아빠의 ‘입김’이 어른거렸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거의 모든 현안에 대해 입 바른 소리로 ‘죽비’를 내려쳤던 조국의 위선적 민낯은 큰 충격이었다.

“교수 월급 받는 나는 사립대 다니는 딸에게 장학생 신청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과거 외교장관 후보자 딸의 장학금 혜택을 공격했던 사례가 대표적 부메랑. 정작 자신의 딸은 “신청도 안 한” 장학금(서울대 환경대학원)을 두 차례나 받은 것도 모자라, 옮겨 간 대학(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선 유급을 두 번이나 하고도 유일하게 6학기에 걸쳐 장학금을 탔다. 민정수석 재임 중 사모펀드 투자 논란은 입만 열면 경제적 불평등 심화와 자본주의 탐욕을 질타하던 모습과 딴판이었다. 선친이 인수한 웅동학원을 둘러싼 비리 의혹도 그간 알려진 미담과 달랐다. 재정형편이 악화된 고향의 중학교를 사재를 털어 되살려 놓았다는 그의 설명과는 달리 오히려 부적절한 거액 소송을 통해 학교를 사유화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졌다.

8월 9일 장관 지명 이후 매일 관련 보도가 계속됐고, 임명 반대 여론 우위가 분명해졌다. 이때쯤 조국 스스로 물러날 것이란 관측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다 검찰이 전격적으로 강제수사에 착수하자, 사퇴는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정작 그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쏟아지는 보도에도 무조건 청문회까진 간다며 ‘모르쇠’ 모드로 들어갔다. 예정된 국회 인사 청문회가 증인 문제로 불발되자 ‘셀프’ 기자간담회를 열어 정면 돌파에 나섰다. 뒤늦게 열린 청문회에서도 야당 의원들 공세에 “송구하다”면서도 자진 사퇴를 거부했다.

2012년 대선 문재인 후보 찬조연설자 조국

조국의 ‘버티기’는 분명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그가 당장 ‘비빌 수 있었던 언덕’은 임명 반대와는 또 다른 여론 흐름이었다. 친문(親文)을 중심으로 한 집권 지지층이 검찰 수사와 과도한 언론 의혹 보도를 ‘기득권 세력의 개혁 저항’으로 규정해 ‘조국 사수’를 천명하고 나선 것. 이보다 더 큰 그의 ‘언덕’은 역시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실제 후보자 꼬리표를 떼고 마침내 ‘장관’이 된 것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임명장 수여식에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인사청문회까지 마친 절차적 요건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명백한 위법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다.”

당장 정가 안팎에선 “대통령이 ‘의혹 투성이’ 조국 장관을 밀어붙인 이유가 단지 ‘인사 원칙’ 때문일까”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국의 장관 취임 이후엔 연일 광장에서 진영 간 대규모 세 대결이 펼쳐졌다. 국론은 쫙 갈라졌고, 우리 사회 대립과 갈등은 비등점을 향해 치달았다. 덩달아 두 사람 관계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졸지에 정가 최대의 ‘미스터리’가 된 이 대목을 파헤쳐 보는 이유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 제대로 알려진 것은 없다. 그러나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있다. 지난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당시 문재인 후보 찬조 연설자, 조국의 연설이 그것이다. 통상 찬조연설자는 막역한 관계 또는 특별한 인연을 통해 알게 된 후보 면면을 장점 위주로 소개하면서 유권자 지지를 설득한다. 그래서 대개는 후보를 과대포장하기 마련이다. 그 역시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조국의 ‘문재인 바라기’


▎조국 전 법무장관이 장관직 사퇴 성명을 발표한 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차에 오르고 있다. / 사진:오종택
여기서 정작 주목되는 것은 조국이 진작부터 ‘문재인 바라기’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문재인’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반 울산대 교수 시절. ‘햇병아리 법학 교수’로서 지역 사건의 판결문, 변론서 등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수많은 공익인권 사건마다 ‘계속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문재인 변호사’였다는 것. 조국은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에 대한 뜨거운 염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공감, 표현의 자유와 경제적 기본권에 대한 굳센 소신”이라는 ‘그의 지향점’을 단번에 파악한다. 이어 “도대체 그가 누굴까”라며 만남을 고대했다고 고백했다.

문재인 변호사 “여러분, 조국 교수 어떠시냐?”

그를 직접 만나기까진 적잖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가 참여정부 청와대 근무(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를 마치고 인권변호사로 돌아왔을 때’인 2008년쯤으로 보인다. 첫 만남에서부터 조국은 ‘인간 문재인’에 깊이 빠져든 것으로 보인다. “불과 얼마 전까지 권력 핵심에 서 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낡은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 사무실에 출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개와 고양이를 돌보며 막걸리 마시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사심이나 물욕이 없는 사람, 신중하고 절제된 원칙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2012년 대선 찬조연설).” 개와 고양이를 언급한 것으로 볼 때, 조국이 경남 양산의 문재인 변호사 자택을 직접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조국은 “이후 여러 차례 만나며 그에게 종종 거북한 얘기도 꺼냈다”고 했다. 참여정부 재벌정책, 친노(親盧)세력의 정치적 미숙 등을 “직설적으로 지적했지만 그는 화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잘못을 겸허히 인정했다. 그때 그의 가슴속 뜨거움을 봤다”고 말했다.


▎9월 23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의 자택에서 검찰 관계자들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 사진:연합뉴스
조국은 첫 만남 경위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부산의 민주당 인사들은 연결고리로 ‘법무법인 부산’의 정재성 변호사를 꼽는다. 1980년대 부산·경남 지역 노동 인권 사건을 도맡다시피 했던 노무현, 문재인 두 변호사가 만든 로펌이 법무법인 부산.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문재인 변호사마저 청와대로 차출된 뒤 운영을 책임진 이가 정 변호사. 노 대통령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정 변호사는 서울법대 출신으로 학생시절엔 ‘노동법 연구회’를 만드는 등 진작부터 노동 인권 변호사로서의 삶을 예비해 왔다. 조국은 대학 동문(조국이 3년 후배)에다 비슷한 진보 성향 탓에 정 변호사와 쉽게 의기투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국은 그를 통해 변론서에 담기지 않은 문재인 변호사의 또 다른 모습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변호사 또한 전언을 통해 조국의 됨됨이와 활동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안 돼 격의 없이 정치현안까지 논의한 사실이 오래전부터 숙성돼 온 동지적 관계를 웅변하고 있다.

실제적 정치동지로서 두 사람 관계의 공식적 출발은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일 것이다. 조국은 찬조연설자로 TV 출연에 이어 광화문에서 열린 대규모 유세에서도 마이크를 잡았다. 그간 현실정치와 거리를 둬 왔던 조국의 화려한 정치데뷔 무대였다. ‘문재인 서포터’로서의 활동은 그 한 해 전부터 시작됐다. 2011년 11월 문재인 변호사가 검찰개혁을 주제로 펴낸 [검찰을 생각한다]의 북콘서트 사회를 맡았다.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형법을 전공한 서울법대 교수 조국이 진행한 북콘서트는 언론의 관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생소한 정치 이벤트 현장의 어색한 ‘주인공 문재인’으로선 천군만마.

이때 조국은 검찰개혁에서 법무부 장관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이렇게 물었다. “저는 문재인의 운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마 본인 스스로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거다. 대선주자로 자의 반 타의 반 거론되고 있는데, 누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실 것인가. 대통령이 되신다면?” 다소 도발적 질문에 문재인 변호사는 “여러분, 조국 교수 어떠시냐?”라고 말했다. 좌중에선 박수와 함께 폭소가 터졌다. 언론은 이 에피소드를 비중 있게 전했다. 눈썰미 있는 독자들은 ‘조국 법무부 장관’ 대목보다 ‘차기 대통령=문재인’을 암시한 조국의 ‘뉘앙스’를 곱씹었다. ‘잠룡 문재인’ 가능성을 대중이 깨닫는 데 조국이 큰 역할을 했다는 말이 친문 진영에서 흘러나왔다.

‘대연정’ 안희정을 대신 공격하다

그 후 조국은 ‘국회의원 문재인’의 정치적 고비 때마다 ‘수호천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대선 실패를 딛고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대표가 선출되자 조국은 ‘육참골단((肉斬骨斷)’이라는 화두를 야권에 던졌다. ‘자신의 살을 베어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다’는 뜻처럼, 야당의 선제적 인적쇄신을 문 대표에게 주문한 것. 당내 비주류는 반발했지만, 여론은 조국 편이었다. 그 덕분에 문 대표로선 당 혁신의 물꼬를 손쉽게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혁신 작업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친문독식’, ‘친문패권’을 내세워 비주류는 강력 반발했다. 문 대표의 지도력은 ‘봉숭아 학당’이라는 조롱을 들을 정도로 흔들렸다. 급기야 안철수 전 대표와 호남 현역 상당수가 탈당했다. 당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이때도 어김없이 조국이 거들고 나섰다. 문 대표가 정면 돌파 방안으로 만든 혁신위원회에 전격 동참을 선언했다. 이전 지도부의 비상대책위원장 제안에도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던 그가 ‘문재인 구하기’에 팔을 걷어붙이자 언론은 두 사람의 ‘정치적 브로맨스’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조국이 앞장서 만든 당 혁신안은 여론 관심과 지지층의 기대를 집중시켰다. 결과적으로 분당 위기를 넘어 이듬해 20대 총선 승리의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재인 수호천사’ 조국


▎지난 8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에서 “가족들이 보유한 사모펀드 자산을 공익법인에 기부하고 가족 모두 사학재단 웅동학원에서도 손을 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사진:연합뉴스
2017년 3월 조기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제기된 대연정론 공방에서도 조국의 ‘문재인 방어’는 빛났다. 안희정 충남지사가 ‘개혁 과제 합의’를 전제로 자유한국당과의 연정을 공개 제안했다. 나름 통합 리더십을 통해 ‘적폐청산’을 부르짖던 문재인 후보와 차별화에 나섰던 것. 문 후보 캠프는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조국은 이 즈음 열린 토크콘서트에 패널로 참석해 문 후보에게 대연정론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그러자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는커녕 “조국 교수 의견이 어떠냐”며 은근슬쩍 공을 넘겼다. 기다렸다는 듯 조국은 강한 톤으로 대연정론을 질타했다. “대연정이라면 공동정부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당과 함께 이뤄야 할 목표가 뭔지 모르겠다. 그들은 경제민주화도,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동의한 적 없다. 개혁 정부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촛불민심을 받아 안을 정당과 공동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민주당 당원과 지지자들이 “와~” 하며 큰 박수로 호응했다. 문 후보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그는 “대연정 때문에 개혁 절반만 하겠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조국에 화답했다. ‘친노(親盧)’라는 같은 정치적 뿌리를 둔 안 지사와의 공개 충돌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던 문 후보로선 조국의 깔끔한 정리가 고마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정치적 동지관계는 문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적어도 외형상으론 상하관계로 바뀌었다. 조국이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으로 발탁된 탓이다. 이때 정가 입방아꾼들은 ‘평행이론’을 제기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사람의 운명이 같은 식으로 반복된다’는 뜻. 대통령과 조국의 운명이 공교롭게도 너무 똑같이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실제 정권의 초대 민정수석, 비검찰 출신, 대통령과의 막역한 사이, 당사자의 고사를 무시한 대통령의 강권, 선출직에 대한 체질적 알레르기까지, 꼭 닮은꼴이다.

“대통령의 간절한 염원을 누구보다 잘 이해”


▎10월 3일 서울 광화문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통령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 역시 비슷해 보인다. 대통령과의 동지 관계, 신임을 생각하면 외형상 상하관계를 넘어 편하게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국은 결코 참모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 태도로 일관했다는 전언이다. 소탈한 대통령의 성격 탓에 회의석상에서 간혹 가벼운 농담이 오가기도 했으나 조국만은 그런 분위기와 철저히 거리를 두는 깍듯함을 보였다고 한다. “문재인의 친구”를 자처했던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항상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는 문재인 수석 시절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이쯤 되면 대통령 입장에선 조국이 자신의 ‘복사판’쯤으로 보이진 않았을까. 그 단서를 지난 5월 대통령 취임 2주년을 맞이해 가진 KBS와의 단독 회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정수석 이후의 조국 거취를 묻는 질문에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조국 수석이 혹시 정치에 나갈 것이냐, 그런 거취를 묻는 것이라면 저는 조국 수석에게 정치를 권유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 여부는 전적으로 본인이 판단할 문제다.” 당시 민주당 부산시당을 중심으로 내년 총선 ‘조국 차출론’이 나오던 시점. 정작 당사자는 “나는 정치적 근육이 없다”는 말과 함께 “민정수석이 끝나면 바로 학교로 돌아갈 것”이라며 손사래를 치던 상황이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조국 출마론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어쨌든 이날 장면은 참여정부 민정수석 발탁 때 향후 자신의 거취에 대해 대통령이 했던 말과 정확히 겹친다.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사 끝에 수락하면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에게) 두 가지 조건을 말씀드렸다. ‘민정수석으로 끝내겠습니다.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대통령은 그 역시 그랬던 것처럼, 조국이 민정수석으로 공직을 끝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법무장관으로 전격 발탁했다. 그 한 달여 전, 사표를 쓰고 서울대에 복직계를 냈던 조국도 대통령의 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폴리페서’라는 따가운 비난이 쏟아졌다. “자리에 대한 욕심보다는 검찰개혁에 대한 대통령의 간절한 염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전한 조국의 수락 이유였다.

사실 검찰개혁은 대통령의 ‘1호 공약’으로 불릴 정도로 국정 최우선 과제였다. 야인시절 대통령이 펴낸 [검찰을 생각한다]는 저서의 부제는 ‘무소불위의 권력, 검찰의 본질을 비판한다’. 여기서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이 이뤄 낸 인권과 진보적 가치가 기득권에 집착해 ‘스스로 정치화된’ 검찰의 퇴행으로 졸지에 물거품이 됐다고 판단했다. 역시 가장 아프게 받아들인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대통령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제대로 된 검찰 개혁을 통해 끊어내야 한다고 봤다. 구체적 방안으로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통한 견제와 권력 분산을 제안했다.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선출된) 정치권력이 검찰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 이를 위한 “공식적이고 제도적으로 유일한 기구”로 법무부를 꼽으며 “제대로 된 검찰 견제기구로 자리매김”할 것을 주문했다. 그 때문에 “법무부 장관의 결정은 대통령의 철학과 항상 일치해야” 하며, “적어도 2년, 가능하다면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파했다.

검찰개혁 적임자, 조국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사퇴 직전인 10월 14일, 정부과천청사에서 2차 검찰개혁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 사진:오종택
하지만 자신의 공언과 달리,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 장관 인선은 처음부터 꼬였다. 개혁적 카드로 뽑아든 안경환 서울 법대 명예교수가 ‘몰래 혼인신고’ 소동으로 낙마한 것. 부득불 선택한 인물 역시 비검사 출신의 박상기 전 연세대 법대 교수. 무난하게 임명됐지만, 재임 2년이 넘도록 검찰개혁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물론 행자부 장관과 머리를 맞대 검경 수사권 관련 법안을 만들기도 했다. 이것도 청와대의 입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후문.

각종 의혹에 청와대가 ‘모르쇠’로 일관한 배경

검경수사권 법안과 함께 국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오른 공수처 설치 법안 역시 조국의 막후 노력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다. 검찰개혁이 본격 흐름을 탈 조짐을 보이자 문무일 검찰총장은 기자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양복을 벗어 흔들었다. “뭐가 흔들립니까? 옷이 흔들립니다. 흔드는 건 어딥니까?”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검찰이라는 ‘옷’을 쥐고 흔드는 청와대를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이러다 이번 정부에서도 자칫 검찰개혁이 물 건너가는 것 아니냐.” 여당 관계자들의 우려가 커질 무렵, 대통령이 꺼내던 회심의 반격 카드가 바로 조국이었다. 서로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인물, 필요할 때마다 힘이 돼 준 정치적 동지, 자신의 ‘페르소나’답게 뜨거운 열정으로 개혁을 함께해 온 참모, 여기다 한국 최고 학부의 형법 학자라는 이력까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적임자라고 판단했음 직하다.

그래서였을까. 법무장관 지명 직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각종 의혹에 청와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조국 딸의 입시 비리 보도에 젊은 세대의 비판이 쏟아지자 대통령은 다소 엉뚱하게도 대학 입시제도 보완을 지시했다. 이 와중에 검찰이 전격적으로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청와대는 “내란수사 수준”이라며 노골적 불만을 드러냈다. 오히려 조국에 대한 반대여론은 꺾이기는커녕 커져만 갔다. 검찰은 조국 부인을 딸 입시에 사용한 표창장 위조 혐의로 기소하며 강하게 압박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다수의 예상을 뒤엎고 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이때 여권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아마도 8년 전 조국이 말했던 예언이 현실화하는 장면을 목도하며 불퇴전의 각오를 다졌는지도 모른다”고 귀띔했다. 2011년 대통령이 농담조로 법무장관직을 제안했던 그 북콘서트에서 조국은 이렇게 말했다. “법무장관이 그걸(강력한 검찰개혁) 시행하게 되면 검찰에서 법무장관 뒤를 팔 가능성이 있거든요. (비리 의혹) 소문으로 (장관을) 흔들어 낙마시킬 수 있다. 그래서 아주 강골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실제 대통령뿐 아니라 여권 지지층도 검찰 수사를 개혁저지를 위한 기득권 세력의 불순한 저항으로 인식했다. 10월 한 달 내내 주말이면 서초동 대검 청사 앞 도로는 검찰개혁과 ‘조국수호’를 외치는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조국은 장관직에서 내려왔다. 임명된 지 35일 만이었다. 언론은 사태 변곡점으로 10월 3일 광화문 집회를 꼽았다. 서초동 촛불 못지않게 대거 모여든 또 다른 국민의 성난 목소리를 새겨들었다는 말이다. 조국 사태 속에 실종된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에 대한 간절한 외침이었다. 그간 ‘아스팔트 보수’, ‘태극기 부대’ 등 극렬 우파 집회에서 흔히 들리던 ‘빨갱이’, ‘좌빨’ 등 증오, 혐오와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특히 상처받은 젊은이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장관직 사퇴 입장문에서 조국은 자신과 가족이 걷어차버린 ‘공정’의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같은 날 대통령도 맞장구를 쳤다. “검찰개혁과 공정의 가치는 우리 정부의 가장 중요한 국정 목표다. 그 두 가치의 온전한 실현을 위해 국민의 뜻을 받들고 부족한 점을 살펴 가면서 끝까지 매진하겠다.” 두 사람의 특수 관계가 합리와 균형의 궤도로 들어서는 징표로 이해하고 싶었다.

-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초빙교수 jwhn20@naver.com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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