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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리포트] 한국 대신 북한에 손 내미는 아베의 셈법은? 

연내 북·일 정상회담 개최에 전력 투구 

일본 의사와 정치인들의 잇따른 방북에다 아베 측근 기타무라도 북과 접촉
北의 일본인 납치 인정 후 막혀있던 관계가 경제협력 카드로 복원될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아베 일본 총리는 만날 수 있을까. 그림은 두 사람의 만남을 가상으로 엮은 일러스트. / 사진:연합뉴스
갑자기 일본 의사들과 의사 출신 전직 국회의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NHK,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9월 28일 마세키 미쓰아키(柵木充眀) 일본의사회 의장이 이끄는 대표단이 베이징을 통해 평양에 도착했다.

대표단은 마세키 의장을 비롯한 의료진과 일본 자민당 참의원 의원을 지낸 미야자키 히데키(宮崎秀樹) 전 일본의사회 부회장, 다이조 전 법무상 등 8명으로 구성됐다. 5박 6일의 일정을 마친 후 10월 3일 일본으로 귀국했다. 일본의사회가 의료 협력을 위해 북한에 대표단을 공식 파견한 것은 처음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의료 지원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평양의 장애인 치료 전문병원 등 북한의 의료 시설을 둘러봤다.

이번 방북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측근인 요코쿠라 요시다케(横倉義武) 일본의사회 회장의 제안에 따라 추진됐다. 요코쿠라 회장은 지난해까지 세계의사회 회장을 지냈고 자민당 후원자이기도 하다. 일본의사회는 이번 방북을 계기로 일본 의료진의 북한 파견이나 북한 의료진의 일본 연수 사업 등을 계획하고 있다. 마세키 의장은 경유지인 중국 베이징 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은 결핵이나 B형 간염 등 전염병 확산이 심각하다. 실태를 파악해 일본의 사회의 지원 방안을 논의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번 방북은 순수하게 인도적 목적으로 가는 것”이라며 “북한의 세계의사회 가입도 추천하겠다”는 계획도 덧붙였다.

대표단은 의료 지원 외에도 일본 정부를 대신해 북·일 간 현안을 조심스럽게 타진한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원 출신인 미야자키 전 부회장은 방북에 앞서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도록 권유할 것”이라며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도 논의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김일성과 가네마루의 비밀 수교 협상


▎고(故)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의 차남인 가네마루 신고(가운데)가 9월 방북단을 이끌고 평양을 찾았다. / 사진:연합뉴스
이에 앞서 9월 14일에는 고(故) 가네마루 신(金丸信)(1914∼1996) 전 자민당 부총재의 차남 가네마루 신고(金丸慎吾)를 대표로 하는 일본 방북단 60여 명이 5박 6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이들은 가네마루 신 탄생 105주년이 되는 9월 17일 평양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부총리를 지낸 중의원 12선 출신의 정치인 가네마루 신은 1990년 9월 자민당과 사회당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뒤 ‘북·일 수교 3당 공동선언’을 끌어내며 북·일 외교의 물꼬를 튼 인물이다. 차남인 신고는 당시 비서 자격으로 선친을 수행한 것이 계기가 돼 북한과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도 방북해 송일국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 담당 대사를 만났다.

당초 방북단은 최룡해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을 만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한 단계 아래인 송 대사를 만났다. 가네마루 신고는 ‘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싶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송 대사는 “북·일 관계는 정상화는커녕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고 주장했다. 송 대사는 북한이 가까운 장래에 일본과 정상회담을 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고는 방북에 앞서 TV아사히 인터뷰에서 “우리가 간다고 북·일 관계가 움직인다는 건 있을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그런 환경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네마루 신 부총재는 당시 방북에서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에 대해 북한 측에 정중하게 사죄했으며, 이런 이유 등으로 일본 귀국 후 비판을 받았다. 필자가 가네마루 신의 방북에서 주목했던 점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북·일 간 수교 배상금을 논의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은 수교 배상금으로 90억 달러를, 가네마루는 60억 달러를 언급했다는 내용이 일본 언론에 공개됐다. 하지만 북·일 양측이 후속 교섭을 이어 가지 못했기 때문에 수교 배상금 문제는 더는 구체화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물가 기준으로 60~90억 달러는 일제 강점기 지배의 경제적 배상에 대해 북·일 지도자 간에 최초의 논의가 있었던 액수이기 때문에 향후 수교 논의에서도 가이드라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왜 갑자기 더위가 물러가면서 일본의 의사와 정치인들이 평양에 몰려가기 시작했을까?

아베 총리의 북한 전략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 봉쇄에서 적극적인 관여로 노선을 변경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정책 변화를 현장에서 추진하고자 9월 내각 개편 과정에서 운 인물을 발탁했다. 지난해부터 북·일 접촉 창구였던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 65세) 전 일본 내각정보관이 신임 국가안전보장국(NSS) 국장에 취임했다.

기타무라는 9월 초 개각 개편에서 5년 8개월간 이 자리를 맡아 온 야치 쇼타로(谷内正太郎)의 후임으로 임명됐다. 기타무라는 외무성이 아닌 경찰청 출신으론 처음으로 우리의 국가안보실장에 해당하는 NSS 국장에 임명됐다.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은 외교·안보를 총괄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사무국이다. 전임 야치 국장이 도쿄대·외무성 출신 외무공무원이었던 것과 달리, 기타무라 신임 국장은 도쿄대·경찰 출신이다. 경찰 출신 외교·안보 사령탑은 일본 내에서도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기타무라 국장은 제1차 아베 내각에서 총리 비서관을 지낸 뒤 효고현 경찰본부장과 경찰청 외사정보부장 등을 거쳐 2011년 12월부터 내각정보관을 맡아왔다. 내각정보관은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내각정보조사실의 수장이다. 기타무라는 아베 총리가 집무실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참모다. 2012년 말 재집권 뒤 4년 동안 무려 659번을 만났다고 한다. 지난 8월 중순 여름휴가 때 아베 총리가 그를 별장으로 따로 불러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서훈 국정원장은 작년 9월 방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베 총리 면담 후 기타무라 국장을 비밀리에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예년에 없던 민간 방북단이 연이어 평양을 방문하면서 기타무라 신임 국장의 막후 역할론이 부상하고 있다. 기타무라 국장이 그간 북·일 관계 정상화와 납치 문제 해결의 일본 측 창구였다는 점에서 한·일 관계 개선보다 북·일 관계 개선으로 일본의 한반도 정책의 무게 중심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동할지 주목된다.

기타무라 국장은 북한 인맥도 상당하다고 한다. 일본 외무성이 북·일 관계 개선에 역할을 하지 못하는 만큼 아베 정권은 아예 정보기관을 대북 채널로 이용해 북·일 정상회담 개최에 힘쓰고 있다.

기타무라 내각정보관은 2018년 7월 베트남에서 김성혜 북한 통전부 실장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베트남 극비접촉은 아예 미국에 알리지 않고 진행했다. 9월 북·일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서 접촉했으나 합의에 실패했다. 2018년 8월 리용호 외무상 및 북한 외교 인사들이 몽골을 방문함에 따라 또다시 기타무라 내각정보관이 파견됐으나 북한 측에서 회담장에 나오지 않고 바람을 맞혔다. 2018년 11월 9일에는 기타무라 내각정보관과 김성혜 통전부 실장이 다시 만나 회담을 가졌다. 2019년 2월 1일 기타무라는 재일 조총련 남승우 부의장을 비밀리에 만나 평양과의 간접 소통에도 주력했다.

2월 말 2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확정된 가운데 아베 총리 역시 북·일 정상회담 개최를 시도했다. 일본 정부는 북·일 정상회담을 통해 답보상태에 빠진 납치자 문제에 진전을 이루면서 동북아 정상외교에서 주도권을 회복하려고 했다. 북한과 소원해진 한국을 압박하려는 다목적 복안도 가지고 있었다.

아베 총리는 복심인 이마이 다카야(今井尙哉) 총리 비서관이 총리 보좌관을 겸하도록 이례적인 인사 발령을 했는데 보좌관이라는 직함을 지니고 있으면 국외 출장이 쉽다는 점에서 북·일 외교를 염두에 둔 조치라는 해석도 나온다.

김정일의 납치 인정, 일본의 분노


▎기타무라(왼쪽)는 2018년 7월 베트남에서 김성혜 북한 통전부 실장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최근 아베 총리는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의지를 또다시 밝혔다. 아베 총리는 9월 2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일반토론 연설에서 “어떤 조건을 달지 않고 김정은 위원장과 직접 마주 볼 결의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 핵, 미사일 문제 등 모든 현안을 포괄적으로 해결해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실현하는 것이 불변의 목표”라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2012년 집권 이후 ‘납치 문제 해결 없이는 국교 정상화 등 북·일 관계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견지하다가 올해 5월 초 갑자기 “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고 입장을 바꿨다.

2002년 9월 17일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전격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납치 문제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던 아베 신조 당시 관방차관은 2002년 8월 초 양국 외무성 담당 국장의 평양회동 때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8월 말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이 발표됐다. 두 지도자는 ‘조속한 관계 정상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조처를 하기로’ 합의했다.

고이즈미는 식민지 시절 한반도 주민들에게 입힌 ‘엄청난 피해와 고통’에 대해 ‘깊은 유감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했으며 김정일은 일본인 13명을 납치하고 일본 영해에 간첩선을 침범시킨 데 대해 사과했다. 양측은 과거 청산 및 북일 수교 등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담아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했다.

북한은 회담을 계기로 일본인 납치를 인정했다. 김정일은 1977년부터 1982년 사이 일본의 외딴 해변에서 여학생, 미용사, 요리사, 데이트 중이던 3쌍의 커플 등 일본 시민을 납치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김정일은 당시 일본인 납치 사실을 자신은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면서 “국가 특수기관의 일부 분자들이 광신적 믿음에서 또는 공명심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평양 정상회담이 있은 지 3주일 후, 피랍 일본인 13명 중 5명이 특별기편으로 일본으로 돌아왔다.

북한의 납치 인정 뉴스가 속보로 보도되고 피랍 일본인들이 돌아오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충격과 우려와 분노가 증폭됐다. 일본인들의 분노는 나머지 피랍 일본인 8명의 운명에 관한 평양 측 설명 때문에 더욱 악화됐다. 북한이 제공한 납북자 관련 대부분의 정보는 불확실했다.

가장 비극적인 사례는 1977년 13세의 나이로 일본 니가타 시에서 납치된 여학생 요코다 메구미의 경우다. 평양 측 설명에 따르면 메구미는 북한 남성과 결혼해 ‘혜공’이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으나 그 딸이 5살이 됐을 때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일본인 희생자 가족들은 분노와 불신에 가득 차 평양의 설명은 궤변에 지나지 않으며, 피랍자들이 살아 있으며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이들을 일본으로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납치된 일본인의 숫자가 13명이 아니라 40명, 어쩌면 100명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번져갔다.

아베의 빗나간 북한 붕괴론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왼쪽)는 2002년 9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회담했다. / 사진:AP연합뉴스
양측은 북·일 정상회담 이후 17년 동안 공백 상태였다. 북한이 고백한 납치 스토리가 일본의 대북 여론을 악화시켰기 때문에 일본 지도자들은 후속 교섭 논의를 진행할 수 없었다. 이후 납치 문제는 일본 주요 국내정치 이슈로 확대됐다.

필자는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 연구소장으로 근무하던 2010년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파악하고자 도쿄 일본 경시청을 방문했다. 필자는 납치 문제의 일본 내 여론과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 담당관과 대화를 나누었다. 1년에 일본에서 행방불명자로 경찰서에 신고 되는 국민은 8000명 내외다. 이중 연말까지 소식이 없는 신고자는 2000명 수준이라고 한다. 인구 1억3000만의 일본에서 행방불명 신고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판단을 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메이와쿠(迷惑) 콤플렉스가 대세인 일본에서 개인이 남에게 폐를 끼치면 자결하던지, 공동체를 떠나야 하는 문화 때문에 은둔형 외톨이인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들은 공동체에 소속하기 어렵다. 결국 파산이나 실연 및 왕따 등의 연유로 소식을 알리지 않고 가족이나 집단을 떠나 시코쿠 섬이나 홋카이도를 방황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힌 일본인 납치 사건은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렸다. 내치(內治)를 외교와 절묘하게 연결하는 일본 위정자들의 치밀한 통치 전략이 추진되며 불안한 국민의 속마음을 파고들었다.

결국 일본 정치인들은 납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늪에 빠졌다. 전 국민의 눈앞에서 피랍자 가족들의 비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지면서 방송사와 신문, 잡지들은 일본인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적대감과 공포, 편견으로 가득한 거대한 문화 비즈니스가 형성됐다. 최근 한·일 간 갈등과 관련해 서점가와 미디어에 혐한(嫌韓) 서적과 뉴스가 난무하는 것과 유사했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에서는 북한에 관한 책이 약 600종 출판됐는데 대부분은 혐북(嫌北) 내용이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의 방북 이후 일본 방송에서는 온종일 북한 관련 프로그램과 뉴스가 차고 넘쳤다. 탈북자·기아·부패·미사일 및 핵 위협 등 부정적 내용 일색이었다. 일본인 특유의 집단주의 경향의 발로였다.

납치 문제 해결 없이 가시밭길인 북·일 수교는 진도를 나갈 수 없다. 북·미 정상회담으로 상황이 급변했다는 것이 아베 총리의 판단이다. 처음 일본이 북·일 정상회담 의지를 밝혔을 당시,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낯가죽이 두껍다”면서 비난했다. 그렇지만 아베 총리의 정상회담 러브콜은 계속됐다. 9월 16일에도 아베 총리는 도쿄 도내 납북 피해자 가족과 만난 자리에서 “이(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이 주체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나 자신이 조건을 달지 않고 김 위원장과 마주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은 일본의 관계 개선 의지를 믿지 않는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어머니 사카에씨는 2006년 4월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딸의 구출을 호소했다.
아베 총리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고 있다. 2002년 북·일 정상회담 때 관방부 부(副)장관으로 고이즈미 총리를 수행해 북한을 방문한 아베는 납치 문제에 대한 대북 강경론을 주도해 인지도를 쌓았다. 나중에 고이즈미에 이어 집권 자민당 총재직까지 거머쥘 수 있었다.

그만큼 납치 문제는 아베 총리의 정치 경력에서 중요한 사안이다. 그는 2012년 12월 재집권 이후에도 대북 관계에 신경을 쓰는 모양새를 취했다. ‘대화와 압력’, ‘행동 대 행동’을 내세우며 북한을 압박하는 한편 물밑 대화를 반복한 아베 정권은 2014년 5월 납치 문제 재조사와 대북 독자 제재 해제를 연계한, 이른바 ‘스톡홀름 합의’를 발표하는 등 빠른 속도로 움직였으나 결실을 내지 못했다. 북·일 관계는 상호 설전을 이어가는 교착상태에 있다.

한반도 해빙 무드가 조성되면서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은 물론 북·중, 북·러 정상회담까지 열리고 북·미 핵 협상을 위한 실무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일본만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서 소외된 형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에 협력해달라고 틈틈이 부탁하는 등 북·일 외교 성과에 의욕을 보여 온 아베 총리로서는 상당히 체면을 구겼다. 아베 정권은 작년에 펴낸 외교청서(外交淸書)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향상이 “중대하고 임박한 위협이 되고 있다”며 “북한에 대한 압력을 최대한도까지 높여 간다”고 견제했으나 올해는 이런 표현을 빼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지난 5월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건을 붙이지 않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솔직하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대변인은 6월 초 “우리 국가에 대해 천하의 못된 짓은 다 하고 돌아가면서도 천연스럽게 ‘전제 조건 없는 수뇌회담 개최’를 운운하는 아베 패당의 낯가죽이 두껍기가 곰 발바닥 같다”고 밝혔다. 또한 일본의 대북 수출 제재에 대해 엄청난 비판을 하며 ‘가련한 섬 조각’, ‘평양행 차표 떼 보려고 온갖 요사를 다 부려댔다’는 희대의 명언(?)까지 남겼다.

최근에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종료에 찬성하며 일본이 전쟁광 야욕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김정일 총서기가 납치를 인정하고 사죄했는데도 국교 정상화와 거기에 따르는 경제 지원을 실행하지 않은 배신자가 일본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확실한 일본의 대북 지원 약속이 선행되지 않으면 2002년 평양선언의 재판은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김정일이 대담하게 납치 문제를 고백해서 북·일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변심으로 오히려 사태만 악화됐다는 입장이라 비밀 접촉은 지속하지만, 외부적으로는 강한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아베 총리는 북한이 납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은 고수하면서도 북·일 정상회담의 돌파구를 여는 방식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1·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대북 압박과 제재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평양~원산에 신칸센이 달리는 날

납치 문제의 쟁점은 양측의 숫자 맞추기다. 일본 정부가 확인한 공식 납치 피해자 수는 12건에 17명이지만 일본 경찰과 민간단체들은 ‘700명 이상의 실종 사건이 북한과 관련 있다’며 의심해왔다. 일본 정부는 10월 7일 동해에서 자국 어업 단속선과 충돌해 침몰한 북한 어선의 승선원 약 60명 전원을 아무런 조사 없이 북한으로 곧바로 송환했다. 정치권에서 ‘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이 북한에 저자세를 보였다고 비난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참의원에서 전날 수산청이 북한 승선원들을 조사하지 않고 북한 선박에 인도한 것을 지적받자 “북한 어선의 불법 조업이 확인되지 않아 (북한 승선원들의) 구제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정상회담 분위기 조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다.

평양이 북·일 정상회담을 통해 납치 문제에 진전을 보이면 평양선언의 2항에 의거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은 무상자금, 인도주의적 지원, 저금리 장기차관 등 경제협력의 규모와 내용을 논의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진행될 수 있다. 평양선언 2항이 근거다. “국교 정상화 이후 쌍방이 합의한 적절한 시간이 지난 뒤에 무상자금 협력, 저금리 장기차관 제공이나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 경제협력을 하는” 것이 공동선언 정신에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교 정상화 협의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상당 규모의 ‘원조 및 개발(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프로그램이 이어질 것이며 이는 자민당 핵심 파벌 및 그 측근들에게 수지맞는 사업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일본은 북한의 계산과 달리 현금 지원 대신 일제 강점기 건설했던 사회간접자본(SOC) 개보수에 일제 강점기 배상금을 직접 투자할 복안이다.

불경기에 허덕이는 미쓰비시 중공업 등 일제 강점기 수풍발전소, 흥남비료공장, 성진제철소 등을 건설했던 일본의 건설 및 중공업 관련 회사들이 오래된 설계도를 가지고 평양~개성 간 도로·교량·댐·발전소·고속철도 등 북한의 인프라 재건에 나설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 도중 김정은이 일본과 접촉할 의향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는 소문은 일본에서 나왔다. 2019년 9월에는 북한이 몽골에서 일본과 비밀리에 만나 평양~원산 구간에 일본의 고속철인 신칸센을 놔달라고 제안했다는 미확인 보도까지 나왔다. 기타무라 국장은 10월 11일 자 [주간 아사히] 인터뷰에서 “올해 안에 북·일 정상회담 개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당국자 간 사전 교섭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공개했다. 보안을 중요시하는 NSS 국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정상회담을 예고한 것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아베 내각의 의지가 강하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아베 총리의 전략과 기타무라 국가안전보장국 국장의 전술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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