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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의 ‘지성담론’]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9) 

가진 만큼 더 큰 책임, 힘·재물 나눔이 정의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드는 자본주의, 소외·빈곤의 ‘부정의’ 심화
묵자 ‘교상리’에 입각한 기업 헌신이 현대적 정의 실현 단초


▎사진:이정권 기자
대도(大道)가 사라지자 인의가 생기고, 지혜가 나오자 큰 거짓이 생겼다. 친척이 화합하지 않으니 효도와 자애가 나오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온다(大道廢 有仁義, 慧智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도덕경 18장)

노자(老子) 도덕경의 이 대목은 인의·지혜·효도·자애·충성과 같이 우리가 흔히 높은 사회적 덕목 혹은 가치로 여기는 것들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합니다. 노자가 보기에 이 덕목들은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이는 인간 세상의 근원적인 상태, 즉 도(道)와 덕(德)이 통하는 상태가 무너지고 난 뒤에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위적 가치’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仁),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도리를 하고(義), 자신이 속한 집단 혹은 국가를 사랑하고(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慈),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孝) 것은 사람들이 성정 안에 자연스럽게 타고난 것입니다. 그런데 인의 충효 등이 행동가치로써 강조되는 사회에선 타고난 본래의 성정으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인위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를 증명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행동강령을 가르치고, 가르치려다 보니 치장하게 되고, 치장되고 과장된 행동을 따르려다 보니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행동들이 장려되고, 때로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사회를 일깨우는 충신과 효자 이야기들은, 돌아보면 경악스러운 것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춘추시대 진(晉) 문공(文公)의 망명생활을 함께 보낸 개자추(介子推)의 일화. 즉 문공이 배가 고파 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였다는 이야기는 대표적인 충의 사례로 거론됩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꼿꼿한 충신으로 추앙받습니다. 효녀 심청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맹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겠다며 스스로 용왕의 제물이 되어 아버지의 눈과 자신의 목숨을 바꿉니다. 이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발현으로 보이나요. 도대체 이런 행동들이 칭송받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노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인위적 가치들이 강조되는 사회는 이미 인간의 진정한 본성과 도덕이 훼손됐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인의가 강조되는 사회는 실제로는 인의가 훼손된 사회이며, 충신이 강조될 때는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태이고, 효도와 자애의 덕이 강조되는 사회는 육친 간에 불화가 심한 사회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모두가 갈구하는 것은 ‘결핍된 것’ 혹은 ‘현실에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의 외치는 사회, 혐오와 증오의 말만 넘쳐


▎부정의를 응징한다며 증오와 혐오의 악플이 넘치는 세상에서 정의를 찾을 수 있을까.
요즘 우리 사회에선 모두가 ‘정의’를 외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정의의 깃발을 들면, 세상은 쫙 갈라지며 분열됩니다. 공감받지 못하는 ‘정의’들은 여기저기 나뒹굴며 거리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발목을 붙잡습니다.

그런 한편에선 부정의에 대한 혐오감이 마구 표출되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 과도하게 잔인해지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정의를 외치면서 마녀사냥과 악플, 증오의 언사들을 마구 던집니다. 그런가 하면 혐오와 증오의 언사를 과감하고 요령 있게 말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정의의 화신인 양 착각하고, 이런 자들이 스타로 떠오르는 기현상도 도처에서 나타납니다. 사회는 어느덧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부정의를 응징하고 증오하는 데 몰입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정의를 갈구하나 그것은 현실에 없는 것이어서인지도 모릅니다.

‘데카메론’. 이 시리즈의 제목이 암시했듯 10회를 예정하고 쓰기 시작했던 정의를 찾기 위한 이 논의가 이제 막바지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논의를 거듭하면서 우리를 짓누르는 현실은 ‘부정의는 분명하고, 정의는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침해·침범·불공평·차별·불평등·억압·모욕·배제, 분배의 부정의, 새로운 신분제, 운에 의한 계급화, 착취·주변화·무력함, 문화적 지배, 폭력…’.

우리가 지적한 부정의의 양태들입니다. 하나 생각해보면 이런 부정의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해왔으며, 시대에 따라 하나의 부정의를 제거하면 또 다른 양태의 부정의가 생산되는 ‘부정의의 재생산 구조’도 공고합니다. 부정의를 제거한다고 정의가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정의’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부정의의 양태와 이를 강화하는 요인부터 문학과 철학에서 풀이하는 정의, 불교와 기독교 차원에서 바라본 정의의 모습을 논의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과정을 통해 얻게 된 가장 큰 소득은, 정의의 모습이 어떻다는 뚜렷한 형상을 그려내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왜 정의를 대면하기가 어려운지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의의 약점’들을 그려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차별이 전제된 유교엔 현대적 정의감 없어


▎창극 [심청전]에서 인당수에 뛰어들기 전의 심청.
이제 동양사상의 관점에서 정의를 찾아볼까 합니다. 먼저 유학(儒學) 얘기에서 시작해보죠. 우리나라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관념적으로 유학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학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찾는 정의의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사회적 강령으로써의 정의는 ‘평등’과 ‘공정함’이 그 토대가 됩니다. 하지만 유학적 사고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이 표현하듯이 신분과 서열에 따른 차별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군주와 부모는 통치자, 신하와 자녀는 피통치자 혹은 피지배자로 봅니다. 존비귀천은 너무나도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있고, 절대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런 유교적 관념이 우리 사회 갈등구조를 이루는 갑을 문화나 다문화 차별과 같은, 나와 타자를 분리하고 차별하는 의식의 근간을 이루면서 우리 사회 ‘정의의 약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 유가들은 이익을 좇는 인간의 습성을 소인의 행동이라며 비난하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수탈과 착취, 가렴주구에 앞장서온 지배층은 모두 유가 엘리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이익을 좇는 것이 아닌 다른 명분으로 포장하는 데 급급했고, 이런 위선의 문화가 지배층의 문화가 되면서 본질보다 겉껍질들을 두껍게 쌓아 그것을 걷어내는 데도 힘든 상황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분을 깨기 위한 말싸움으로 날을 지고 새느라 실제 문제에 직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명분싸움과 말싸움으로 치닫느라 곧잘 본질을 잊는 우리나라 갈등구조도 이런 유교적 습성의 문제는 아닌지 생각합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간혹 대중교통 파업이 일어나면 언론은 일제히 ‘시민의 발을 묶는…’하면서 비난합니다. 시민에게 불편을 끼친다며 파업노동자를 비난하는 대중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데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넘칩니다. 대부분의 비난은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라는 명분으로 모아집니다.

예전에 저는 열차노조 파업기간에 프랑스 파리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제 일정 중 하나가 펑크 나기도 했습니다. 담당자가 열차편이 끊겨서 출근을 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런데 제게 그 소식을 알려준 그의 동료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열차노조 파업 때문에 불편하다는 뉘앙스로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료는 “파업은 그들의 권리다. 평소 우리가 그들의 서비스를 누렸으니 그들이 권리를 행사하는 데 방해할 순 없다”고 하더군요.

파업과 쟁의는 노동자의 권리입니다. 불법 파업과 폭력이 아닌 정당한 권리행사에 대해 나의 불편함을 이유로 비난하거나 방해해선 안됩니다. 사람에겐 집단생활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행복추구 역시 중요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왜 습관적으로 타인의 개인적 권리행사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걸까. 이건 집단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각성과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도록 강요했던 유교적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동양사상에서 정의와 유사한 개념으로 꼽을 수 있는 ‘의(義)’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의는 우리가 논하고 있는 정의의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윤리학적 실천강령입니다. 그리고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윤리체계에서 가장 사나운 성질을 갖고 있는 개념입니다. 대의멸친(大義滅親), 사생취의(捨生取義), 의무반고(義無反顧)처럼 의가 등장하는 말들은 비장하고 결연하며, 죽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버리라는 것이지요. 또 충의지심(忠義之心), 충간의담(忠肝義膽)처럼 ‘의’에 붙어있는 수식어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상 혹은 목적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북송의 시인 소동파도 “인자함은 지나쳐도 화가 되지 않지만 의로움이 지나치면 잔인하게 된다”고 했죠. 유가 중에서도 공자는 사랑(인,仁)을 강조했고, 맹자는 의를 강조했습니다. 맹자는 고대 유가 중에서도 특히 신랄하고 엄합니다.

‘정의’와 관련하여 [맹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양주와 묵적(묵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입니다. “양주가 주장하는 위아(爲我)는 군주를 무시하는 것이며, 묵적의 겸애(兼愛)는 부모를 무시하는 것이다. 부모와 군주를 무시하는 것은 짐승과 같은 것이다.”(등문공하) 그러면서 그는 “지금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에 가득하다”며 한탄합니다.

하지만 양주와 묵자의 사상에서 우리는 동양사상에도 ‘정의’의 맹아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맹자는 양주를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털 한 올도 내놓지 않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로 몰아붙입니다. 현재 전해지는 양주의 기록은 없지만, 그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해석은 ‘천부인권론’과 ‘개인의 권리’를 주창한 고대 사상가라는 것입니다. 천하의 이익을 위한다는 이유로 내 털 한 올이라도 함부로 뽑아서는 안된다는 것. 내 털을 뽑을 권리는 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익을 나누는 게 의(義)라고 보는 묵자의 정의관


▎대화와 타협보다 대결과 갈등이 앞서는 국회의 현실. / 사진:임현동 기자
묵자는 양주와 대척점에 서 있다는 평을 받습니다. ‘정수리가 닿아 발꿈치에 이르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게 묵자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양주가 이기주의자의 대명사로 꼽히는 데 반해 묵자는 자기희생과 헌신의 아이콘으로 꼽힙니다. 완전히 상반돼 보이는 이 둘은, 그러나 ‘자주적 의식’이라는 어젠더를 공유합니다.

[묵자] 귀의편에 나오는 대화는 묵자의 헌신의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이는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가는 길에 만난 친구와 묵자가 대화하는 내용입니다.

친구 : 지금 천하에서 아무도 의를 행하지 않는데 왜 자네 혼자만 스스로를 괴롭히며 의를 행하려 하는가?

묵자 : 가령 어떤 사람에게 자식이 열 명 있는데, 한 명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 아홉은 한가하게 논다면 농사짓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먹는 사람은 많고 농사짓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네. 지금 천하에서 아무도 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응당 나를 격려해야 할 터인데 왜 나를 말리는 것인가?

유자(儒者)들은 이렇게 저렇게 하라며 훈계하고 가르치는 반면 묵자는 홀로 동분서주하며 실천합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버리라’(捨生取義)고 강요하는 것과 ‘나는 의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겠다’고 자주적으로 선언하고 실천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같은 ‘의’라도 유교적 의와 묵자의 의는 다릅니다. 묵자의 의는 현대 정의의 담론에서 주목할 만한 동양사상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겁니다. 먼저 묵자의 ‘의’에 대한 담론을 들어보겠습니다.

[묵자]에는 도처에 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일에서 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귀의)고 했습니다. 묵자의 의에 대한 정의는 명쾌합니다. “의(義)는 곧 이(利)다”(경상)라고 못 박습니다. 그에게 의로움이란 결국 이익의 문제입니다. “천하에 의가 있으면 살고 의가 없으면 죽으며, 의가 있으면 부유하고 의가 없으면 가난하며, 의가 있으면 다스려지고 의가 없으면 혼란스럽다”(천지상)고 했습니다.

묵자의 겸애는 교상리(交相利), 나눔으로 실현


▎묵적의 화상(왼쪽)과 묵자의 말씀을 담은 고전 [묵자]표지 사진.
묵자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한 단어는 ‘겸애’(兼愛)입니다. 겸애는 흔히 예수의 ‘박애’와 비견됩니다. 그래서 겸애와 박애는 여러 종류의 사랑 중에서도 그 깊이가 훨씬 깊고 심오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하지만 겸애는 박애와 같은 단순한 희생정신과 이타주의적 사랑은 아닙니다. 겸애를 이해하려면 그와 짝을 이루는 말을 묶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겸상애 교상리’(兼相愛 交相利)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이익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고 했습니다. 유가에선 의와 이를 대립적으로 봅니다. 이에 묵자는 “천하 사람들은 이로움을 얻어 기뻐하거늘, ‘성인은 사랑만 있을 뿐 이로움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가의 말이거나 외계어다.”(대취)라고 일갈합니다. 자기 부모형제를 먼저 챙기는 것을 의롭다고 보는 유가와는 반대로 묵자는 “내가 먼저 남의 부모를 사랑하고 이롭게 한 뒤에 남이 그 보답으로 내 부모를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선왕의 글 ‘대아(大雅)’에 ‘말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없고, 덕은 보답하지 않는 경우가 없네. 나에게 복숭아를 던지면 오얏으로 보답하리’라는 글귀가 있다. 남을 사랑하고 이롭게 하면 반드시 남의 사랑과 이로움을 받게 되고, 남을 미워하고 해치면 반드시 남의 미움과 상해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겸애입니다.

겸애의 핵심적 가치는 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의를 실천하는 방식은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즉 교상리의 정의관입니다. “힘 있는 자가 남을 위해 노력하고, 재물이 풍족한 자가 남에게 나눠주는 것”이라는 말은 노문편과 상현하편 등 여러 편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은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묵자의 이런 나눔, 이익의 공유라는 기본 정신은 코뮤니즘(공산주의)과 통합니다. 그리고 묵자는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노동자철학자라는 점에서 코뮤니즘의 원시 형태로 분류하기도 하죠. 하지만 계급투쟁을 주창하는 현대 코뮤니즘과 달리 묵자의 해결책은 ‘사랑’입니다. 즉 묵가에서 이익을 나누는 방법은 나눔이며, 사랑이란 이로움을 베푸는 것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긴 데를 잘라 짧은 곳을 메우고, 많은 곳에서 덜어 약자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묵자의 탁월성은 바로 그의 현실 인식에 있습니다. 묵자는 수많은 갈등과 분쟁, 사회문제는 결국 이익을 탐하고 서로 뺏으려는 데에서 나왔다는 것을 간파합니다. 실제로 이익은 혼자 챙기면서 좋은 말과 마음만 표현하는 것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부자가 내민 봉투에 돈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편지만 담겨 있으면 누구나 분노하게 됩니다. 부자의 가장 큰 죄는 ‘인색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처럼 교상리는 일상적이고 기초적인 정의관입니다.

실제로 인간 행동의 동기가 자기 이익에 있다는 쿨한 통찰을 묵자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한비자도 “신하가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은 군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고 간파합니다. 이렇게 본질을 쿨하게 인정하면 문제를 직시하기도 쉬워지고, 대안을 내기도 수월합니다. 중국의 고전해설가 이중톈(易中天)은 “춘추전국시대 혼란의 근원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묵자였고, 유일하게 대안을 제시한 것은 한비자”라고 했죠.

묵자의 문제 진단은 이처럼 예리했던 반면, 그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습니다. 그의 방법론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나눔과 베풂이지요. 그가 의심받는 것은 나눔과 베풂이라는 사랑의 실천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인간이 정녕 그런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그의 겸애의 방법론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론자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거나 천 년에 한 번 아무도 모르는 새에 피었다 지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 취급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눔과 사랑에 의한 해결방식은 예수의 방법론과 통하고, 유가 중에서도 순자(荀子)의 경제관과도 일부 통합니다. 물론 순자는 사랑을 논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나눔을 통한 분배로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눔’을 통한 이익의 분배라는 이상은 고대인들이 가졌던 순수함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역사가 거듭되며 이익이란 빼앗지 않으면 나누려 하지 않는다는 경험이 쌓이면서 ‘계급투쟁’으로 변질됐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현대 ‘기업시민성’에 영감을 주는 교상리 정의관


▎지난해 프랑스 파리의 철도노조 파업 당시의 모습.
그럼에도 묵자의 정의관, 즉 교상리의 정의는 우리 시대에도 많은 영감을 주는 고대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이것으로 지금 시대의 모든 정의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익과 부의 분배 갈등에서 빚어지는 미시적인 정의 관련 문제들의 한 해결책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인의 부와 재산을 나누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게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개인에게 있어 교상리의 정의는 그의 선의에 맡기거나 국가의 세금정책을 통해 실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 시대 교상리 정의의 주체로서 기업의 의무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하나의 단초로 요즘 부각되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사회공헌, 기업시민성의 논의를 교상리 차원으로 더 확장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기업은 생산과 고용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 기업은 과거의 전통적인 기업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으로 놀라운 변신을 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초국적 기업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이제 정부를 능가하는 규모의 금력을 가지고, 시민사회에 대한 영향력도 막강해진 세계 권력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가진 자의 의무를 강조하는 묵자 정의관의 관점에서 이젠 금력과 영향력이라는 권력까지 갖게 된, 과거와는 다른 기업에 대한 정의와 권리·의무·책임감을 다시 규정해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기업도 근대 시민사회의 시민처럼 사회의 공공선에 헌신할 의무가 있다는 ‘기업시민성’에 대한 각성을 요구할 때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글로벌 세계금융위기를 전후로 기업들이 부의 쏠림과 양극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그동안 많은 사회적 혜택을 받은 기업들이 실제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서구사회 초국적 기업들이 이런 사회적 요구에 대응해 고안해낸 것이 기업의 사회공헌이나 기업시민성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애초엔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을 타고 기업에서 마케팅 방안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원래 자유시장 관점에서 기업의 책임은 ‘이윤의 극대화’뿐입니다. 하지만 세계화 이후 초국적 기업들이 진출국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들도 그 사회의 시민임을 강조하며 동질성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CSR과 기업시민성 등의 개념을 활용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이 공익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익창출에도 훨씬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기업과 미국의 학자들은 기업시민성의 개념을 ‘시민권’과 같은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과 사회의 관계 맺음과 역할’에 관한 문제로 정의하면서 새로운 마케팅 전략으로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즉, ‘착한 기업’의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한 경영 전략적 차원에서 광고비와 홍보비를 더 많이 쓰는 것보다 광고홍보비 수준의 비용으로 사회를 위한 캠페인 등을 벌이는 것이었지요. 의도의 순수성이 떨어진다고 보이는지요. 그러나 ‘교상리’는 이익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부자의 헌신의무도 있지만 부자도 얻는 게 있어야겠지요.

기업시민성이 정책적 고려 사항으로 제시된 일도 있습니다. 1996년 미국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기업시민성과 사회적 책임’연설이 그것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민간기업이 종업원 후생복지와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하면 각종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던 것입니다.

미국에선 자유시장의 원칙에 따라 정부가 기업의 내적 활동에 관여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관례를 깨고 정부가 기업 측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이에 따른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당시 클린턴이 주장한 기업시민 정신의 기준은 첫째, 가정친화적인 직장. 둘째, 종업원 건강과 은퇴 이후의 보장. 셋째, 직장의 안전과 보장. 넷째, 사원의 능력개발. 다섯째, 기업과 사원의 동반 정신 등이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사회적 관점에서 기업시민성 담론으로 제시된 사건이었습니다.

빌 게이츠 ‘창조적 자본주의’의 교상리적 성격


▎정부보다 막강해진 기업들에게 공공에 대한 헌신의 시민성이 기대된다.
기업시민성과 관련하여 가장 논쟁적인 제안을 한 것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인 빌 게이츠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2008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의 기조연설에서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제안했는데 이것은 기업시민성의 개념을 확장시키는 가장 획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창조적 자본주의의 기본이념은 “자본주의가 가난과 불평등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드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가 빈곤계층을 가난에서 탈출하도록 돕는 시스템을 만드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를 위해 기업들은 이윤 추구와 함께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고, 자선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했지요. 또한 여기에 ‘이익’과 ‘인정(recognition)’을 포함한 새 가치체계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또 정부·기업·NGO(비정부기구)들이 시장(market)의 힘을 가난한 나라들을 돕는 데 더 적극 활용해 세계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시장경쟁의 주체였던 기업에 대해 ‘호혜적 경제’의 실천자로서 역할을 주문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업의 활동과 책임의 범위를 자체 기업을 넘어 시민사회로 확산시키는 한편, 과거엔 정부가 도맡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던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사회 문제 해결 주체’로서의 역할에 기업도 동참해야 한다는 점을 강변한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나온 기업시민 관련 논의 중 가장 ‘급진적’인 생각이며, 대단히 논쟁적인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창한 빌 게이츠 부부는 현재 자선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동안 기업은 고용과 생산을 통해 시장을 활성화하고, 세금 납부를 통해 정부가 복지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는 게 일반적인 자본주의 시장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고전적 기업의 관점에서 볼 때 ‘창조적 자본주의’는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사회적 요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 경기가 나빠지면서 현상 유지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기업들도 많습니다. 이런 마당에 사회적 분배에 참여하라는 것은 가혹한 요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창조적 자본주의는 일부 혁신적 기업인 출신 자선사업가들의 실천 활동의 일환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아직 이론적 정립의 단계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의 쏠림을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 시대 정의를 논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국가보다 더 큰 부와 영향력을 갖게 된 초국적 기업들의 정의를 위한 헌신은 우리 시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부정의를 개선하는 것으로 정의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정의와 부정의의 탄생루트는 다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정의를 깨부수기 위해 애쓰는 것은 부정의에 대한 대응책이 될 뿐이고, 이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정의는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묵자의 교상리 정의관에 입각한 기업 정의 구현의 노력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교상리적 정의관은 ‘힘 있는 자가 남을 위해 노력하고, 재물이 풍족한 자가 남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비대등한 참여를 통해 결과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기업이 아니라 더 큰 기업이 더 큰 사회적 책임감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정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과 공정함을 위한 노력입니다. ‘부의 쏠림’을 해결하기 위한 정의관의 한 관점으로 묵자의 교상리를 생각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 [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 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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