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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2부)] 중세 중국화와 유교 수용의 주역들(3) 권부·이제현 성리학을 확산시키다 

세상을 보는 철학적 방법 제시 

당초 과거에 도움 못 된다는 이유로 국자감 학생들 관심 밖
'사서집주' 국왕 교육 기초과목 되면서 관료 시선 집중


▎2016년 경희궁에서 재현된 ‘과거제 재현 행사’에서 응시생들이 저마다 답안을 작성하고 있다.
1290년(충렬왕 16) 성리학을 수용한 안향은 확산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당시 현실에서 성리학을 배워 봐야 크게 써먹을 데가 없다는 사실이 큰 문제였다. 안향은 국자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리학을 열성적으로 가르쳤지만, 학생들에게 성리학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성리학과 과거시험 사이에 이렇다 할 만한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광종 때부터 시작된 고려 과거에서 핵심 시험과목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주례] 등 6경(經)이었다. 6경 시험에서 정답은 한나라와 당나라의 훈고학자들이 해설한 주석(註釋)을 기준으로 했다. 그러므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한·당대 훈고학에 입각한 6경을 공부해야 했다. 고려시대 1차 시험은 국자감시(國子監試)라고 했는데, 당연히 시험 과목은 6경이 핵심이었다. 2차 시험은 예부시라고 했으며 역시 6경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과거시험 1차 또는 2차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6경을 중심으로 공부해야만 했다. 지방의 향교와 개경의 국자감에서 가르치는 시험과목도 당연히 6경 중심이었다. 고려시대 사학(私學)을 대표하던 최충헌의 문헌공도 등에서 가르치는 시험 과목 역시 6경 중심이었다.

반면 성리학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4서(書)에 대한 주희의 집주(集註)가 핵심이었다. 주희는 [대학]의 ‘격물치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8조목을 유교 이론의 핵심으로 인식하고, [대학집주]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각각의 단계를 철학적·논리적으로 해설했다.

또한 [중용집주]에서 성리학의 철학적 성격을 강조했고, [맹자집주]에서는 성리학의 개혁적·실천적 성격을 강조했으며, [논어집주]에서는 역사적 성격을 강조했다. 따라서 주희의 성리학은 [사서집주(四書集注)]에 종합적으로 구현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광종 당시에는 주희의 [사서집주]가 등장하기 훨씬 전이었다. 당연히 고려 과거제에서 주희의 [사서집주]는 시험 과목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국자감 학생들은 입학 전에 6경 중심으로 공부했고, 입학 후에도 6경 중심으로 2차 시험을 준비할 뿐 [사서집주]를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안향이 수용한 성리학은 국자감 학생들에게 별로 절박하지도 않았고 현실적이지도 않았다. 대부분은 섬학전이라는 장학금 때문에 관심을 가졌고 간혹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는 수준이었다. 이러다 보니 안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리학 확산은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에서 성리학을 획기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딱 하나였다. 과거시험 과목에 [사서집주]를 포함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지방의 향교와 개경의 국자감 그리고 유명 사학(私學)에서는 [사서집주]를 정규과목에 포함할 것이 분명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도 [사서집주]를 공부할 것이 확실했다. 그러면 [사서집주]를 매개로 성리학이 급속히 확산할 것임은 불문가지였다.

문제는 [사서집주]를 과거시험 과목에 포함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사서집주]를 과거시험 과목에 포함한다는 것은 고려의 과거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것은 국왕을 위시해 정책 입안자들 다수가 찬성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점진적 개편 추진한 그들


▎성리학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제현의 초상.
당시 고려에서 성리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안향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충렬왕 등 정책 입안자들 대다수는 성리학을 잘 몰랐다. 충렬왕이나 정책 입안자들은 성리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과거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성리학 확산을 위한 과거제도 개편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향의 제자인 권부(權溥) 그리고 권부의 제자이자 사위인 이제현(李齊賢)이 충선왕·충숙왕·충목왕 때 [사서집주]를 과거시험 과목에 포함하는 제도 개편을 점진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제현이 지은 권부의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권부는 안동 권씨로 1262년(원종 3) 11월 11일 출생했다. 부친은 과거 출신인 권단(權㫜)이었다. 그런데 권부는 그의 부친이 복령사(福靈寺)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에서 기도한 결과 출생했다고 한다. 이 사실로 본다면 권부의 부친인 권단은 과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돈독하게 신앙했다고 생각된다. 성리학이 수용되기 전에는 과거 출신들이 유교와 불교를 동시 신앙하는 것이 보편적이었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권부는 15세 되던 1276년(충렬왕 2) 국자감시에 합격해 국자감 학생이 되었고, 3년 후에는 예부시에 합격했다. 이후 권부는 충렬왕대에 국학학유(國學學諭)·우정언(右正言) 등을 역임했는데, 안향이 성리학을 수용한 1290년(충렬왕 16) 이후 안향으로부터 성리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렇게 성리학자가 된 권부의 삶은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24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즉위하면서 극적인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충선왕의 부친은 충렬왕, 모친은 원나라 건국 시조 쿠빌라이 칸의 공주 제국대장공주였다. 즉 충선왕은 한국사 최초의 혼혈 왕자이자 혼혈 국왕이었다.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 충선왕은 인생의 대부분을 원 수도 북경에서 지냈다. 이에 따라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원나라 관학(官學)인 성리학을 학습했다.

원나라를 건국했던 쿠빌라이 칸은 1294년(충렬왕 20) 세상을 떠나고 후계자로 성종 황제가 즉위했다. 당시 쿠빌라이칸의 부마였던 충렬왕은 후계자 선정을 위한 쿠릴타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성종 황제 대신 다른 후보자를 지지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성종 황제는 즉위 후 충렬왕을 소외시키다가 결국 1298년 양위하게 하고 대신 충선왕을 즉위하게 했다.

이런 사정으로 고려 국왕에 즉위한 충선왕은 과거 출신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때 충선왕에 의해 발탁된 과거 출신 중 한 명이 권부였는데 권부는 주로 인사권을 담당했다. 이후 권부는 수십 년에 걸쳐 인사권을 장악해 수많은 성리학자를 발탁했다. 그렇게 권부가 발탁한 대표적인 인물이 이제현이었다. 권부는 1301년(충렬왕 27) 치러진 과거시험의 책임자였는데 그때 이제현이 합격했다.

뿐만 아니라 권부는 이제현을 사위로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이후 40여 년에 걸쳐 이제현은 권부를 스승이자 장인어른으로 모셨다. 이런 인연에 의해 이제현 역시 성리학자가 됐다.

원나라 성종 황제에 의해 1298년 즉위했던 충선왕은 독단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왕위에서 밀려나고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충선왕은 북경에 머물며 궁중정치에 몰두했다. 1307년(충렬왕 33) 성종 황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때 충선왕의 궁정정치는 빛을 발했다. 충선왕은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는 신분 그리고 북경의 고려인들을 이용해 원 황제의 후계 경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무종(재위 1307~1311)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무종 황제가 즉위한 1307년부터 다음 황제인 인종(재위 1311~1320) 황제가 승하하는 1320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충선왕은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그 당시 충선왕은 고려왕과 심양왕 등 2개의 왕을 역임하는 등 고려인을 넘어 명실상부한 세계인으로 활약했다. 1308년(충선왕 복위년) 고려왕으로 복위했던 충선왕은 북경에서 궁정정치에 전념하기 위해 1313년(충선왕 5) 아들 충숙왕에게 고려 왕위를 물려주기도 했다.

이후 충선왕은 북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해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고려 성리학자들과 원나라 성리학자들의 학술 교류를 주선하기도 했다. 상왕으로서 돈과 권력을 장악한 충선왕은 북경 만권당에 고금의 귀중한 서적들을 모으고 고려와 원나라 최고의 성리학자들도 초빙했다.

고려에서는 1314년(충숙왕 1) 1월에 이제현·박충좌 등 당시 고려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을 만권당에 파견했고, 원나라에서도 조맹부(趙孟頫)·염복(閻復)·우집(虞集)·요봉(姚烽) 등 원나라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만권당에 초빙됐다. 당시 이제현과 박충좌를 만권당에 파견한 주체는 권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국제 교류를 통해 이제현·박충좌 등은 국제적인 성리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북경의 충선왕은 원나라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대표적인 것이 1314년(충숙왕 1) 인종 황제에게 건의해 시행한 원나라 과거제도였다. 충선왕의 건의로 시행된 원나라 과거제도에서 핵심 시험과목은 주희의 [사서집주]였다. 당시 원나라 관학이 성리학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충선왕이 고려·원 학술 교류 추진한 까닭


▎몽골제국 제5대 칸이자 중국 원나라의 시조 쿠빌라이 칸. 칭기즈칸의 손자이다.
원나라 과거시험은 민족별로 정원을 배정해 선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당시 원나라를 구성하는 4대 민족은 몽고인을 위시해 색목인(色目人)·한인(漢人)·남인(南人)으로 구별됐다. 색목인은 중앙아시아 출신 등 유럽계 외국인이었고, 한인은 양자강 북쪽의 한족(漢族)을 위시하여 거란족·여진족·고려인 등이었으며, 남인은 양자강 이남의 남송 사람들이었다.

지역별로 시행된 1차 시험에서는 몽고인 75명, 색목인 75명, 한인 75명, 남인 75명 등 총 300명이 선발됐다. 이들은 북경의 국자감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2차 시험에 응시했는데, 2차 시험에서는 4대 민족별로 25명씩 총 100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황제가 주관하는 3차 시험에 합격한 후 관직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충선왕은 고려인들이 원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하도록 만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에서 고려인을 대상으로 1차 시험을 치러 3명을 선발하게 했고, 그 3명이 다시 북경의 국자감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2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 최종적으로 원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한 고려인은 원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고려로 귀국할 수도 있었는데 귀국할 경우 세계적인 인재로 간주해 고관대작에 임명될 수 있었다.

원나라에서 과거시험이 시행된 1314년 이후로 고려 최고의 인재들이 원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서집주]를 공부해야만 했다. 1315년(충숙왕 2) 3명의 고려인이 최초로 원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1318년(충숙왕 5) 안진(安震)이 최초로 원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한 이후 최해(崔瀣)·안축(安軸)·이곡(李穀)·이인복(李仁復)·안보(安輔)·이색(李穡) 등 10여 명의 고려인이 합격했다. 그들은 고려를 대표하는 인재로서 국제적인 활약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최고 인재들 사이에서는 [사서집주]를 핵심으로 하는 성리학이 자연스럽게 퍼지기에 이르렀다.

원나라에서의 과거 시행을 계기로 충선왕은 고려의 과거제도를 개편하고자 했다. ‘충선왕이 국자감시(國子監試)를 폐지했다’는 [고려사] 지(志)의 기록이 그것이었다. 이는 충선왕이 상왕으로 있던 충숙왕 때의 사실인데 ‘국자감시를 폐지했다’는 것은 고려 과거시험의 1차 시험을 폐지했다는 의미다. 충선왕이 그렇게 한 이유는 기왕의 1차 과거시험을 정동행성에서 시행하는 원나라 1차 과거 시험에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기왕의 국자감시를 폐지했다는 것은 6경 위주의 시험 과목을 폐지했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그것이 정동행성의 1차 과거시험에 통합됐다는 것은 시험 과목이 [사서집주]로 바뀌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일차적인 이유는 고려인들이 원나라 과거시험에 적극적으로 응시하기 만들기 위해서였지만, 그 개편은 자연스럽게 [사서집주]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을 확산시키는 효과도 불러왔다.

고려 과거시험에서 정동행성의 1차 시험이 기왕의 국자감시를 대체하면서 [사서집주] 수요가 팽배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와 관련해 [고려사] 권부 열전에는 ‘일찍이 주자의 [사서집주]를 간행하자고 건의했으니, 동방의 성리학이 권부로부터 번창했다(嘗以朱子四書集註 建白刊行 東方性理之學 自溥倡)’는 표현이 있다.

권부가 주자의 [사서집주]를 간행하자고 건의한 시점이 어느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동행성 1차 시험이 국자감시를 대체한 이후였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정동행성 1차 시험과목이 [사서집주]였기에, 권부는 고려인들이 정동행성 1차 시험에 많이 응시하게 하려면 [사서집주]를 국가에서 간행해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사서집주]가 간행됐을 것이다.

이런 사실로 미뤄 본다면 충선왕이 고려 국자감시를 폐지할 때 권부와 이제현이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나아가 권부는 그 기회를 이용해 성리학을 확산시키고자 [사서집주] 간행을 건의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충선왕이 결행했던 국가감시 폐지는 충선왕이 몰락한 후 다시 폐지됨으로써 기왕의 과거제도로 복귀됐다.

이제현은 고려시대의 국왕 교육 즉 경연에서도 [사서집주]를 사용하게 제도화함으로써 성리학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1344년(충혜왕 5) 1월에 충혜왕이 원나라에서 갑자기 승하했는데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2월, 충혜왕에 뒤이어 8세의 충목왕이 즉위했다.

'사서집주'는 원나라 과거제도의 핵심 시험과목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유학의 재해석을 시도한 주희.
[고려사]에 의하면 8세의 충목왕을 환관 고용보가 안고 들어가 원 황제에게 보이자 원 황제는 “너는 아비를 배우겠느냐? 아니면 어미를 배우겠느냐”라고 물었다 한다. 그 당시 충혜왕은 고려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경의 건달들과 어울리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에 원 황제는 8세의 충목왕에게 충혜왕 같은 악당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러자 충목왕은 “어머니를 배우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충목왕의 어린 소견에도 부왕 충혜왕은 본받지 말아야 할 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린 충목왕이 즉위하자 무엇보다도 국왕 교육이 중요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5월, 이제현은 상소문을 올려 당장 해결해야 할 국정 현안들을 언급했는데 그중 하나가 국왕 교육이었다.

이제현은 상소문에서 “국왕의 덖을 닦는 방법은 학문을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하면서 “국왕의 학문을 닦기 위해서는 [효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강의해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의 도를 배워야 하고, 나아가 4서(四書)의 공부가 익숙해지면 6경을 차례대로 공부해 교만·사치·음란·방탕과 노랫가락이나 여색이나 사냥질과 같은 쾌락을 이목에 접하지 않도록 해 습관이 성격을 이루게 되면, 모르는 중에 덕이 이뤄질 것이니 이것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기왕의 고려시대 국왕 교육에서는 과거시험과 마찬가지로 6경을 중심으로 교육했는데, 이제현은 그 6경에 앞서 [사서집주]를 먼저 기초과목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경 역시 유교 윤리관과 유교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개인적·철학적 방법론이 미약했다.

반면 주희의 [사서집주]는 이런 부분들을 철학적으로 쉽게 해설함으로써 개인적·철학적인 면에서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예컨대 [대학]의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국왕이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8조목으로 구분해 쉽고 간명하게 설명하는 내용인데, 이를 주희가 [대학집주]에서 철학적으로 쉽게 해설했으므로 어린 충목왕이 [대학]을 위시한 [사서집주]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결과 고려의 국왕 교육에서 [사서집주]가 기초과목으로 확정됐다. 당연히 국왕 교육에 참여해야 하는 관료들도 [사서집주]를 비롯한 성리학 서적들을 깊이 공부해야만 했다. 이에 왕실과 관료들 사이에 성리학이 퍼진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런데 이제현은 [사서집주] 이외에 [효경]을 언급함으로써 국왕 교육에서 [효경]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효경]은 ‘효도에 관한 경전’이란 제목 그대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를 강조하는 유교 경전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감히 손상하지 않음이 효도의 시작이요(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입신행도로 부모를 후세에 현창하는 것이 효도의 완성이다(立身行道 以顯父母於後世 孝之終也)’라는 구절에 압축돼 있다.

8세짜리 충목왕 즉위가 불러온 효과


▎[대학]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나 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이 치국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이 중에서도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감히 손상하지 않음이 효도의 시작이요’라는 구절은 고려시대 성리학자들에게 불교 비판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효경]에서는 자식이 부모로부터 신체발부를 받았기에 감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이 논리는 당연히 부모의 신체발부는 조부모에게서 받았기에 그 역시 감히 손상하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로 확장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불교 신자들은 부모가 돌아가면 시체를 화장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따라서 고려 성리학자들은 부모 시체를 화장하는 불교 신자들을 [효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오랑캐들이라 주장하곤 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이제현은 고려 왕실의 불교 관행을 제압하기 위해 [효경]을 국왕 교육 과목으로 명시했다고 이해된다.

이처럼 이제현이 [사서집주]와 [효경]을 국왕 교육의 핵심과목으로 제시한 이유는 혼자만의 신념이 아니라 권부 등 성리학자들의 공통된 신념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권부와 이제현 등은 성리학을 확산시키고 나아가 불교 관행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사서집주]와 더불어 [효경]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권부와 이제현은 [효경]의 가르침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한국사 최초로 [효행록(孝行錄)]을 편찬하기도 했다.

권부의 증손인 권근의 [효행록후서(孝行錄後序)]에 의하면 권부는 부친 권단을 섬기면서 능히 아들 된 직분(職分)을 다했고, 권부의 큰아들 권준(權準) 역시 아침저녁 부드러운 얼굴로 봉양해 부친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본다면 권부는 이미 가정생활에서도 [효경]과 [주자가례]를 근거로 유교적 생활을 솔선수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이제현은 국왕 교육에서도 [효경]의 가르침이 절실하다고 생각해 [효경]을 명시했을 것이다. [효행록]의 편찬 경위는 이제현의 서문(序文)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서문에 의하면 권부의 큰아들 권준은 역사상 유명한 효자 24명을 고르고 화가들이 그들의 모습을 그리게 한 후 이제현이 찬(贊)을 붙이게 해 한 책을 만들어 부친 권부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렇게 한 이유는 연로한 부친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자 권부는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도 38명의 효자를 골라 추가하고 이제현이 찬을 붙이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총 62명의 효자와 그림 및 그들에 대한 찬을 핵심으로 하는 [효행록]이 한국사 최초로 편찬됐는데 편찬 목적은 궁극적으로 [효경]의 가르침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실은 당시 권부·이제현 등이 성리학을 확산시키기 위해 국가적 차원은 물론 가정적 차원에서도 노력했음을 잘 보여준다.

마침내 고려도 과거시험 과목으로


▎팔공산 자락에 있는 부인사 전경. 이 절에서 고려 초조대장경을 보관했으나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두 불탔다.
권부와 이제현의 이 같은 노력은 과거제도 개편으로 결실됐다. [고려사]에 의하면 1344년(충목왕 즉위년) 8월 ‘과거법을 개정해 초장(初場)은 6경의 뜻과 4서의 의(義)를 시험’하는 것으로 개편했다고 한다. 이는 기왕의 과거시험에서는 초장에 6경만 시험 봤는데 새로이 4서까지 시험 보는 것으로 개편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4서는 [사서집주]를 의미한다.

당시 이런 개편을 주도한 인물은 당연히 이제현이었다. 이제현은 이미 3개월 전에 국왕 교육에서도 6경에 앞서 [사서집주]를 기초과목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 결과 국왕 교육에 참여하는 관료들도 [사서집주]를 알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국왕 교육에 참여하는 관료들은 기본적으로 과거 출신이었다.

따라서 과거 출신도 당연히 [사서집주]를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고, 그것이 과거시험 1차에 [사서집주]를 포함하는 개편으로 결실됐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개편을 계기로 고려 과거시험에서는 새로이 주자의 [사서집주]가 공식적인 시험과목이 됐다.

이에 따라 지방의 향교와 개경의 국자감은 물론 과거 준비생들은 [사서집주]를 정식과목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성리학이 고려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이처럼 고려 과거제도의 개편 및 성리학의 확산에서 절대적인 기여를 한 주인공은 권부와 이제현이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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