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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44)] 퇴계 시대에 양명학 펼친 소재(蘇齋) 노수신 

“문자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이다” 

장원급제 뒤 33세에 을사사화로 진도 유배 19년… 양명학 몰두하다 이단 몰려
선조 발탁으로 영의정까지 올라… 퇴근 후 부엌에서 음식 지어 부모 봉양한 효자


▎노병학 종손(왼쪽)과 노진수 상주종친회장이 첨모재에 앉아 있다.
새벽달에 그림자 허전히 끌고 가니(曉月空將一影行)

노란 꽃 붉은 잎은 정을 듬뿍 머금었네(黃花赤葉正含情)

구름 모래 아마득해 물어볼 사람 없어(雲沙目斷無人間)

나루 누각 기둥 돌며 여덟아홉 번 기대었소(倚遍津樓八九楹)

육지가 그리운 섬 진도. 절해고도로 유배된 관리는 ‘벽정대인(碧亭待人)’이란 시를 짓는다. 오늘은 누가 오지 않으려나. 그는 해변을 거닐며 행여 하는 마음으로 육지 쪽을 애타게 응시한다. 부모는 별일이 없는지, 나랏일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기약 없이 기다리다 벽파정(碧波亭)을 여덟아홉 바퀴 돌고 시 한 수를 읊었다.

선조 시기 영의정을 지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신진 관료 시절 파직된 뒤 33세에 귀양살이를 한다. 중종에 이어 인종이 즉위한 직후 소재가 사간원 정언 자리에 있을 때다. 그는 당시 우의정 이기(李芑)의 유임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한다. 이기는 당시 장인의 비리로 비난받고 있었다. 노수신은 새 임금에 해가 될 이기의 유임을 반대한다. 막후 실력자인 대윤의 윤임도 이기의 탄핵을 추진했다. 윤임은 인종의 외삼촌이다. 그날의 탄핵 참여는 화근이 된다.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한다. 인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열세 살 명종은 문정대비 수렴청정을 부르고 정국은 혼란으로 빠져든다. 이번에는 문정대비의 남동생 윤원형(소윤)이 막후실력자가 됐다. 윤원형은 이기와 함께 정국을 뒤흔든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다.

노수신은 31세에 이조좌랑에서 파직된다. 이어 1547년(명종 2) 3월 순천으로 유배 명령이 떨어진다. 6개월 뒤인 9월에는 다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옥주(沃州, 진도)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가중처벌이다. 그의 유배 생활은 이후 19년이나 계속된다.

9월 20일 소재의 흔적을 찾아 그의 묘소가 있는 경북 상주시 화서면을 찾았다. 속리산으로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묘소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소나무가 둘러 선 선생의 신도비가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오른쪽으로 서원이 나온다. 봉산서원(鳳山書院)이다. 소재의 13대 종손인 노병학(58)씨와 광주 노씨 상주종친회 노진수(77) 회장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봉산서원은 소재를 주향으로 모두 7명을 함께 모신다고 했다. 서원은 대원군 당시 훼철됐다가 최근 복설 됐다. 건물은 한눈에 봐도 오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비석에 새겨진 자명(自銘)은 마모되고


소재의 묘소 위치는 봉산서원 왼쪽 산자락이다. 묘소 아래 재실 두 채는 발길이 끊긴 지 오래인 듯 퇴락해 있었다. 묘소는 추석이 지났지만 풀이 수북했다. 먼저 예를 올렸다. 묘사는 11월이라고 한다. 종손의 사양에도 풀숲을 헤치고 묘소를 찾은 것은 비석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소재는 ‘암실선생자명(暗室先生自銘)’을 남겼다. 암실은 소재와 함께 선생의 호(號)다. 자명(自銘)은 자신이 스스로 쓴 비문이다. 이 자명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6년이 지나 비석이 세워질 때 새겨졌다고 한다. 자명에 유배 시기 관련은 이렇게 나온다. “…인종대왕 재위 반년 남짓에 오랫동안 정언과 이조의 낭관에 있었구나. 인산(因山, 국장)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상주로 쫓겨나 정미년에 승평(昇平, 순천)을 거쳐 옥주에 유배되었네. 절조를 지키며 돌아보니 귀양살이도 편하구나. 지금의 임금(선조)께서 즉위하자 시독관으로 부르셨네….”

자명을 새긴 뒷면은 마모가 심해 423년이 지난 지금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글자의 흔적이 간간이 보일 정도였다. 앞면은 가운데 “…영의정(領議政)…”이란 글씨가 선명했다. 비석을 세울 때 서애 류성룡이 자명 뒤에 적었다는 노수신의 간략한 행적과 내력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종손은 “서애가 자명 뒤에 글을 붙였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 말했다.

진도 유배는 노수신의 세계관을 바꾼다.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자신이 아무런 잘못 없이 귀양살이한 억울함이 작용한 것일까. 천리(天理)와 현실의 괴리. 그는 주류 학문이던 주자학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공부를 시도한다.

소재는 진도 유배 5년째인 37세에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쓴다. 성리학의 시간대별 수양 방법에 자신의 논지를 붙인 것이다. 그는 초고를 쓴 뒤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에게 보내 질정을 구한다. 퇴계는 소재보다 14년 연장(年長)이다. 소재는 퇴계의 비판을 대부분 수용한다. 퇴계는 이 글에 “이 땅에 정주학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길이 남을 저작”이라고 평했다.

소재라는 호도 진도 유배 시기에 붙여졌다. 그는 38세에 진도 바닷가에 초가를 짓고 ‘소재(蘇齋)’라 편액했다. 소재는 진도 생활 13년째인 1559년 [인심도심변]을 쓴다. 다시 3년 뒤엔 [집중설]을 저술한다. [인심도심변]은 특히 주자의 인심도심설에 이견을 제시한 글이었다. 퇴계와 기대승 등 주자학자들은 소재의 [인심도심변]을 비판하고 나섰다. 신향림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와 관련 “퇴계는 소재의 사상을 양명학·상산학(象山學)으로 규정하며 비판했다”며 “소재는 퇴계의 비판에 맞서며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견지해 후대에 ‘주자(朱子)의 시대에 홀연히 나타난 육상산(陸象山)’에 비유되곤 했다”고 정리했다. 조선에서 비주류 양명학이 시작된 것이다.

유배지 진도에서 양명학을 파고들다


▎상주 옥연사 전경.
1565년 소재는 양명학에 몰두했던 진도를 떠나 괴산으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소재는 주자 학설에 이견을 내고 퇴계와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 당대 사림의 거센 비판을 받는다. 역설적으로 학문의 폭은 확장됐다. 이동환(80) 고려대 명예교수(한문학)는 “주자학 일변도로 획일화되던 16세기 조선에서 소재는 주자학에서 볼 때 좌도(左徒)·이단(異端)이라 할 사상을 수용해 자신의 철학을 구축해간 사상가”라며 “철학이나 사상은 다채로울수록 좋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종손의 답변이 궁금했다. 그는 “소재 선조가 본래 주자학에 바탕을 두었다”며 “공부하는 과정에서 양명학까지 두루 섭렵한 것이지 거기에만 심취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상이 이 땅에 양명학을 처음 받아들이고 정립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거북해했다. 그는 집안에 내려오는 양명학과 관련된 별다른 전통이나 예법 같은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면 소재가 쓴 자명에도 자신의 학문과 관련된 언급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봉산서원과 묘소를 나와 1.3㎞ 떨어진 옥연사(玉淵祠)에 들렀다. 옥연사는 소재의 사당과 종택 등이 모여 있는 곳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옥연사의 맨 위는 소재의 신주를 모신 사당인 도정사(道正祠)와 오현영각(五賢影閣)이 있다. 사당 참배를 요청하자 종손은 “도난을 우려해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고 있다”고 답했다. 사당 왼쪽은 중국 송대(宋代) 주자학을 정립한 5현(주돈이·정호·정이·장재·주희)이 배치된 그림을 모시던 공간이다. 이 영정은 소재의 외할아버지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구해왔으며 노수신은 책을 읽을 때는 진도를 포함해 어디서든 이 그림을 마주했다고 전해진다. 문중은 이 그림을 상주박물관에 기탁해 오현영각도 비어 있었다,

사당 아래는 제사 지내는 강당인 첨모재(瞻慕齋)다. 오른쪽으로는 유물전시관인 유장각(遺章閣)이 보였다. 편액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글씨다. 이곳 역시 유물을 상주박물관으로 옮기면서 비어 있었다. 상주종친회 노 회장은 성씨를 소개했다. 노(盧)씨는 광주 등 9개 본관이 있는데 전체 숫자가 20만가량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적은 인구에 비해 대통령 2명이 나오고 영의정이 2명, 국무총리급이 노백린(임시정부)·노신영·노재봉 등 3명이 배출됐다고 설명했다.

첨모재 아래 종택이 있었다. 한 채뿐인 조촐한 현대식 기와집이다. 본래 종택은 200년 전쯤 화재로 소실되고 이후 그냥 지내다가 후손들이 25년 전 십시일반으로 종택을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1567년 선조 임금은 즉위 직후 을사사화의 피해자인 노수신을 유배에서 풀고 홍문관 교리에 임명한다. 얼마 뒤엔 기대승의 천거로 홍문관 직제학에 제수된다. 그러나 소재는 어머니 곁을 20년 동안이나 떠나 있었다며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 효도하고 싶다고 사직을 청했다. 선조는 윤허하지 않는다. 대신 벼슬하면서 어머니를 봉양할 방법은 없는지 찾게 했다. 소재는 이후 청주목사, 충청도 관찰사, 호조 참판,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1573년(선조 6) 59세에 우의정이 된다. 64세엔 다시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못다 한 효(孝)를 지극하게 실천했다. 소재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기(李墍)의 [송와잡기(松窩雜記)]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소재가 부모를 봉양하는데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극진히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짧은 옷을 입고 부엌에 들어가 몸소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바쳤으며, 관직이 높아진 뒤에도 이 일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지극한 효는 때로 허물이 되기도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 기술]에는 사헌부 장령 김성일이 임금과 소재가 함께 있는 경연 자리에서 소재가 옷 하나를 받은 걸 문제 삼는 대목이 나온다. 대신이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소재는 “신의 일가 사람이 신에게 노모가 있다고 조그만 담비 갓옷을 보내왔는데 물리치지 못했다”고 인정한다.

퇴근하면 부엌에서 음식 만들어 부모 봉양


▎노수신의 신도비.
1581년 소재는 모친상을 당한다. 67세 소재는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선조 임금은 소재의 건강을 염려해 시묘살이를 금하고 서울로 돌아올 것을 명한다. 소재는 서울로 돌아와 중문 밖에 여막을 지어 거적자리에서 자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삼년상을 마쳤다.

1585년(선조 18) 71세 소재는 신하로서 가장 높은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사림의 화합에 공을 들이고, 경연에서 임금에게 양명학을 논했다. 그는 “사람은 마땅히 존심(存心)에만 힘쓸 것이며, 문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경서의 훈고는 이미 의미가 풀렸으니 문자는 잊어버려도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학문보다 마음공부를 강조했다.

1587년 12월 소재는 병이 깊어 조정에 나가지 못하고 서울 근교 사가에서 지낸다. 1590년(선조 23) 3월 정여립 옥사가 일어난다. 소재는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죄명으로 파직되고 4월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이다.

노수신은 1515년(중종 10)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고 경서에 밝았다고 한다. 15세에 이연경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17세에 그의 사위가 됐다. 27세엔 회재 이언적을 만나 제자가 된다. 1543년 29세 노수신은 문과의 초시·회시·전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한다. 30세엔 홍문관 수찬이 돼 퇴계를 만나 학문적 동지이자 비판자가 됐다. 1545년 노수신은 앞에서 봤듯 사간원 정언이 돼 이기를 탄핵하고 파직시키는 데 참여한다. 소재는 자명에 “작은 일이 투철하지 못해 혹 잘못이 있기도 했지만, 큰 뜻이 분명했으니 정녕 부끄러움이 없도다”라고 자신의 일생을 정리했다.

하지만 평가는 엇갈린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노 정승은 팔짱을 끼고 앉아 먹는 사람과 같아서 이익도 없지만, 해를 주는 것도 없다”고 꼬집었다. 정승이 된 뒤 귀양 전과 달리 현실적 현안 해결에 힘쓰지 않고 자리만 보전했다는 비판이다.

퇴계 만나 학문적 동지이자 비판자로


▎오현 영정.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 주희·정이·주돈이·정호·장재. / 사진:상주박물관
소재는 퇴계와 학문적으로 다른 길을 추구했지만 그래도 마음으로는 퇴계를 존경했던 모양이다. 소재는 퇴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제퇴계문(祭退溪文)’이라는 제문을 지었다. 신향림 선임연구원은 “퇴계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제문은 215자로 그가 남긴 제문 가운데 가장 길다”며 “소재는 이 제문에서 자신이 긴 유배 생활로 삶을 포기하려 할 때 퇴계가 책망을 그치지 않고 독려했음을 회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문은 또 정계에 복귀한 뒤 퇴계를 의지해 의심나는 것을 헤아리고 잘못을 고치려던 차에 부음을 들었다며 애통해 한다.

소재가 남긴 사상 관련 저작과 시문은 어렵다는 평이 많다. 그에 대한 연구를 가로막은 장벽 중 하나라고 한다. 그의 저작은 국역도 여전히 일부만 이뤄졌다. 다행히 한국고전번역원이 소재의 전체 저작을 국역하는 일을 시작했다. 전체 목표 9권 중 2013년부터 현재까지 4권이 발간됐다. 나머지는 번역 중이다.

종손에게 물었다. 소재 가문에 내려오는 정신으로 맨 먼저 내세우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종손은 바로 “효”라고 답했다. 자신도 실천해 보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화서면 소재지에서 봉산서원·옥연사로 가는 길은 이름이 ‘효자로’다. 도로 명의 유래가 궁금했다. 효자로는 옥연사 옆 300m 떨어진 ‘효자정재수기념관’에서 끝이 나 있다. 효자 정재수는 1974년 아버지와 함께 큰집에 설을 쇠러 가느라 재를 넘던 중 폭설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하려고 자신의 옷을 덮어 주고 함께 동사(凍死)한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였다. 아직 50년이 채 지나지 않은 현대의 효자 이야기다. 상주에는 ‘유유발 효자각’ 등 효자각·효녀각·효자비 등이 13곳에 있다. 노수신의 지극했던 효행 실천이 지역에 감화를 준 덕분일까.

[박스기사] 인품으로 유배지 섬사람들을 감화시키다 - 귀양 당시 홀대했던 진도군수도 나중에 영전

노수신은 유배지 진도에서 주민들과 어떻게 지냈을까.

진도로 귀양 간 것은 그의 나이 33세 때. 섬사람들은 처음에는 노수신이 중앙 관료 출신이지만 함부로 대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유 없이 적개심을 드러내며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들을 얕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 뒤 시신을 바다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주민들 뒤에는 당시 실력자인 이기의 환심을 사려는 진도군수 홍인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수신도 배경을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진도군수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다.

노수신은 섬사람을 어떻게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그래서 그들이 함부로 나와도 좀체 화를 내지 않고 온화하게 대했고, 험하게 위협하면 타일렀다. 또 섬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궁중 이야기, 역사와 설화 등을 들려주며 세상에 눈뜨게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틈틈이 예법을 가르치고 교화해 나갔다. 그렇게 공을 들이자 주민들 마음이 조금씩 돌아섰다. 주민들은 노수신의 인품에 이끌려 쌀이며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모르는 게 있으면 와서 묻기도 했다.

군수 홍인록은 섬 분위기가 변해가자 “죄인이 어찌 쌀밥을 먹을 수 있나”라며 산간 마을에서 좁쌀로 바꾼 뒤 노수신에게 배급했다. 또 김시양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는 노수신이 어린 종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즐겨 듣는다는 보고를 받고는 홍인록이 “죄인이 어찌 음악을 즐길 수 있는가”라며 종을 가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세월이 흐른 뒤 처지는 뒤바뀐다. 노수신이 훗날 선조 임금의 발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자 언관들은 홍인록의 죄상을 끄집어내 여러 해 집에 있게 만든다. 윤기헌의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는 “소재가 그 일을 알고 홍인록을 구제해 풍천부사로 영전토록 돕자 홍인록이 감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노수신의 아우 노극신은 형의 유배 생활이 험난한 것을 알고 대안을 마련한다. 노극신은 어린 아들 노대해를 진도 유배지로 보내 큰아버지를 봉양하게 한다. 노대해는 진도에서 큰아버지를 봉양하며 성리학을 배운다. 유배 생활이 길어지자 노수신은 후사를 볼 기회마저 얻지 못했다. 결국 큰아버지 노수신의 양자가 됐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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