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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1)] 스페인이 만든 글로벌 자본주의의 틀 

“스페인은 암소를 길렀고 유럽은 그 우유를 마셨다” 

포르투갈과의 통합, 식민지 경영으로 세계 제국 일궈
과도한 국가 개입과 폐쇄적 이념 탓에 영국·네덜란드에 추월 허용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순간을 묘사한 그림.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의 시작점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스페인의 화려했던 과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으로 언어를 꼽을 수 있다. 스페인어는 브라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중남미 국가의 공식 언어다. 실제 스페인어 모국어 사용자는 4억 명이 넘는데 이 수치는 중국어 다음으로 많다. 영어는 외국어로 배워서 활용하는 사람이 많지만 모국어 인구에서는 스페인어가 앞선다. 유럽의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는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멕시코부터 페루 리마를 거쳐 칠레의 산티아고나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모두 스페인어 하나로 통한다.

유럽의 변방에 머물던 스페인은 15세기 말부터 해외로 진출하면서 세계적 제국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시기에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경쟁적으로 대서양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남쪽으로 전진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와 동남아에 진출했다. 스페인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을 점령한 뒤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까지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특정 지역에 한정된 제국을 넘어 역사상 처음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제국을 만들었다. 특히 1580년부터 1640년까지의 펠리페 2세 치하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왕국이 통합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이 탄생했다.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을 약탈해 중국과 인도의 비단과 향신료를 구매함으로써 지구촌 곳곳에서 유통되는 화폐를 만들었다. 또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지중해 등지에서 다양한 전쟁을 일으켜 군비로 금과 은을 지출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 노예를 강제로 데려왔다. 이들을 아메리카 식민지 대농장 노동에 투입,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최초의 소비상품인 사탕수수·담배·커피·면화 등을 생산했다. 또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행정 관료와 군인, 이민자를 세계에 파견하는 등 유럽식 문화와 사고를 식민 대륙에 이식하고 전파하는 데 힘썼다. 세계를 무대로 화폐와 상품, 노동과 문화가 교환되는 틀을 인류 역사상 처음 만들었다는 점에서 스페인 제국은 흥미로운 존재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스페인의 통치자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왼쪽)와 부인 이사벨라 황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합을 상징하는 존재다. / 사진:위키피디아
스페인이 세계 제국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군사력 덕분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당초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기독교 세계에 편입됐다가 8세기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하기도 했다. 유럽을 두고 벌이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권의 각축 구도에서 스페인이 경계지역이 된 것이다. 스페인의 기독교 세력은 1492년 그라나다를 함락시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반도의 모든 영토를 회복할 때까지 이슬람 세력과 700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그만큼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을 장기간 갈고 다졌던 셈이다. 그 결과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 군대, 명예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전사로 맹위를 떨쳤다.

현재적 관점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15세기 아메리카 진출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시각으로 본다면 스페인이 직면했던 더 화급한 과제는 반도의 통합이었다.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스티야·갈리시아·레온·아라곤· 나바라·포르투갈 등 여러 지역의 군주들이 각각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벌이면서 성장해 왔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카스티야와 아라곤, 포르투갈은 저마다 자신의 주도하에 반도를 통합하기 위해 복잡한 정략결혼과 함께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다.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의 결혼은 스페인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등장을 알렸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북유럽, 이탈리아 등지에 많은 영토를 계승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와 동일인)가 통합 왕국을 1516년 물려받음으로써 로마 제국 이후 유럽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졌다. 카를로스 1세는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면서 영향권을 더욱 넓혀갔다. 이제 이베리아 반도의 통합을 넘어 유럽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더 많은 전쟁이 필요해졌다.

카를로스 1세의 유럽 제국이 확장하는 시기에 지중해 동쪽에서 오스만 제국이 부상했다. 오스만은 이슬람을 믿는 투르크 민족의 제국이었지만,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자신들이야말로 로마 제국의 영광을 계승하는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각각 마드리드와 이스탄불에 중심을 둔 두 제국이 유럽을 놓고 자웅(雌雄)을 겨루는 형국이었다. 스페인이 기독교 유럽의 대표 주자를 자임하기 위해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앞장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통합이나 유럽 세력과의 경쟁,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비하면 해외 진출은 오히려 부차적 사업에 불과했다. 아메리카에서 아즈텍(1521년)과 잉카(1532년) 등 원주민의 제국을 붕괴시킨 스페인 군대가 불과 수백 명에 불과했다. 스페인 역시 너무나도 쉽고 신속하게 거대한 해외 제국을 접수했는데 이 사례는 유럽 내에서 ‘일확천금의 신화’처럼 퍼져나갔다. 1540년대부터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스페인의 해외 제국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550년대가 되자 스페인이 엄청난 횡재를 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아직도 스페인어에서는 포토시 은광의 횡재를 빗댄 “포토시만하다”(Vale un Potosí)는 말은 ‘매우 가치가 높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황금 세기를 열다


▎스페인의 갤리언.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과 아메리카를 누볐다. / 사진:위키피디아
스페인 역사에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를 ‘시글로 데 오로’ (Siglo de Oro) 즉 황금 세기라 부른다. 카를로스 1세는 거대한 제국을 둘로 나누어 오스트리아와 독일 지역 영토를 동생에게 위임했고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남부, 그리고 해외 제국은 아들 펠리페에게 줬다. 스페인의 황금 세기는 일반적으로 펠리페 2세가 즉위하는 1556년부터 프랑스와 피레네 조약을 맺은 1659년까지를 지칭한다.

혹자는 중부 유럽이 제국에서 떨어져 나갔는데 왜 황금기라 부르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위에서 짧게 지적했듯이 펠리페 2세가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위를 통합함으로써 60여 년간 양국의 세계 제국이 하나가 됐던 시기다. 유럽의 작은 조각이 하나 떨어진 대신 거대한 세계 제국을 품은 셈이었다.

펠리페 2세의 스페인·포르투갈 제국은 세계 모든 바다를 지배했다. 대서양을 두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가 연결됐으며 포르투갈의 카라벨라는 희망봉을 넘어 인도양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스페인의 갤리언은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에 닿았다. 또한 마카오와 필리핀 마닐라를 오가는 선박은 스페인·포르투갈의 쌍두(雙頭) 제국이 지구 반대편에서 맹위를 펼치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스페인이 지배하는 아메리카 포토시에서 캐낸 은은 태평양을 건너 중국이나 인도에서 온 상품을 사는 데 사용됐다. 1493년부터 1800년 사이 세계 은의 85%와 금의 70%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생산됐다. 16~17세기 스페인 제국의 은이 세계 경제의 윤활유 역할을 담당했다면, 18세기에는 포르투갈령 브라질의 금이 유사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은은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을 살펴보면 은은 유럽보다 아시아에서 더 높은 가치로 거래됐다. 유럽 상인들은 중국이나 인도와의 교역에서 은을 사용하는 경향을 보였고 은화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화폐 질서를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거대한 중남미 지역을 지배하고자 스페인은 본토에서 많은 인력을 송출해야 했다. 스페인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한 정착민은 1570년대까지 12만 명 정도였고, 1650년대에 이르러서는 40만 명을 웃돌았다. 이처럼 스페인에서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인구가 적었던 포르투갈과 대비된다. 특히 스페인은 중남미의 행정 관료나 군인들을 카스티야 출신들로 채움으로써 신세계의 소유권이 카스티야 영역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당시 스페인 제국의 부는 일단 이베리아 반도의 지정된 항구를 거쳐야만 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시기에 따라 카디스 혹은 세비야가 제국의 독점 항구였다. 특히 금과 은은 이들 지정된 항구에서 1/5의 세금을 왕실에 상납해야 했다. 과거 베네치아가 지중해 무역을 지배하면서 모든 선박에 관해 베네치아를 거치게 한 것과 유사한 정책이다.

이처럼 지구 각지에서 온 보물은 스페인 왕실을 살찌우고, 문화를 융성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예컨대 펠리페 2세는 마드리드 근교에 엘에스코리알(El Escorial)이라고 하는 왕궁과 성당 및 수도원을 겸한 거대한 복합 건축 타운을 건설했다. 종교 개혁의 바람이 세차던 16세기 유럽에서 스페인 왕실이 가톨릭을 수호하는 데 으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엘에스코리알은 다음 세기 프랑스에서 베르사유 궁을 건축하는데 모델이 되었고 유럽에서 왕실마다 국가를 상징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왕궁 건설의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스페인의 황금 세기는 예술 분야에서도 화려한 시대였다. 미술 분야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나 엘 그레코 등이 서구 예술사의 한 획을 그었다. 문학에서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통해 근대 소설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스페인의 군사력과 제노바의 자본이 결합

“스페인은 암소를 길렀고 유럽은 그 우유를 마셨다.” 이는 독일 계몽주의의 선각자로 통하는 17세기 법학자 겸 철학자인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의 말이다. 여기서 암소란 아메리카 대륙을 칭하며 우유란 은을 말하는 것이다. 한 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1545년부터 1800년 사이 아메리카의 은 생산량은 13만t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10만t이 유럽으로 왔다. 나머지 3만t은 아메리카에 남아 있거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유럽에 온 아메리카 은의 30~40%는 다시 아시아 무역에 사용됐다는 분석이다.

요약하자면 아메리카에서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이 생산한 은을 유럽인, 그중에서도 특히 스페인 사람들이 독점해 사치와 전쟁과 무역에 사용했다. 그 시기 스페인의 사치와 전쟁과 무역은 유럽을 먹여 살리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이 은이 없었다면 유럽은 중국 도자기나 인도의 면직물, 동남아의 향신료와 같은 상품을 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제국 정책은 자국민을 우선시하고 카스티야 출신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독점적 성격을 띠었지만, 그와 동시에 상당히 개방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개방성은 귀족 중심의 편협한 사고가 빚어낸 결과였다. 군사 강국 스페인의 귀족은 전통적으로 상업이나 금융을 멸시했고, 이 분야는 외국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페인 왕실의 자금을 관리한 주체는 바르셀로나의 상인이 아니라 독일의 푸거 가문이나 제노바 자본가들이었다.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분석하는 죠바니 아리기와 같은 학자는 스페인의 황금 세기를 ‘제노바의 축적 주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제노바의 자본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군사력을 활용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방점을 군사력에 두든, 자본에 두든 스페인 제국은 실제 스페인과 제노바의 협력체제였음이 틀림없다.

18세기 초 스페인 제국의 항구 카디스에는 84개의 상사(商社)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제노바가 26개, 네덜란드와 플랑드르가 18개, 스페인이 12개, 그리고 프랑스(11개), 영국(10개), 함부르크(7개) 등의 순이었다. 또 18세기 말 카디스에 거주하는 8734명의 외국인도 이탈리아인(5018명), 프랑스인(2701명), 독일 및 플랑드르인(277명), 영국인(272명) 등 국적이 다양했다. 스페인 제국의 우유를 유럽 여러 국가가 나눠 마시는 다양한 통로를 엿볼 수 있다.

아메리카로부터 급격하게 대량 유입된 은은 유럽 전체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1500년부터 1630년 사이 식량 가격은 3배, 그리고 다른 상품의 가격은 5배나 뛰었다. 물론 이 인플레이션이 모두 화폐량 증가에 기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14세기 중반 흑사병이 유럽 인구를 크게 줄인 뒤 인구가 서서히 증가했고, 그로 인해 생필품 수요가 팽창하면서 인플레가 초래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상호관계를 거시적으로 연구한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은 합스부르크 스페인에 관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스페인이야말로 세계적 차원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한 최초의 국가다. 케네디는 스페인이 유럽은 물론 세계무대를 지배하는 핵심 강대국으로 떠올랐지만 바로 그 광범위한 제국을 지키는 과정에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


▎볼리비아 포토시 광산. 이곳에서 은광이 발견됐고, 세계 역사가 바뀌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유럽의 인플레이션에 덧붙여 스페인은 막대한 비용을 전쟁을 치르는 데 사용했다. 카를로스 1세 시대에 스페인의 영토는 북유럽 플랑드르에서 남유럽 이탈리아까지, 동쪽의 비엔나부터 서쪽의 마드리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돼 있었다. 펠리페 2세 때 오스트리아와 독일 지역 영토가 분리된 뒤에도 스페인은 여전히 이탈리아와 북유럽 영토를 지키려고 잦은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중에서도 플랑드르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네덜란드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80년 전쟁(1568~1648)은 스페인의 국력을 소모하는 데 결정타를 날렸다.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생산해 관세수입을 확보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자금을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지출했다. 실제 1566년에서 1654년 사이 스페인이 네덜란드에 보낸 자금은 2억 두카토가 넘었는데,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수입은 1억 두카토 정도에 불과했다.

자금의 규모도 문제였지만 카디스나 세비야에서 전쟁이 진행되는 네덜란드로 자금을 이전하는 일은 당시로써는 큰 골칫거리였다. 네덜란드 독립 세력과 연합한 영국이 도버 해협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의 선박이 북해까지 진출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또 다른 경로로 은을 이전하는 방법은 일단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이탈리아의 제노바를 거쳐 육로로 알프스를 넘어 네덜란드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육로 이동은 느리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아예 프랑스를 지나 파리를 통해 네덜란드로 자금을 이전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프랑스는 자금의 1/3을 통행세로 받으려 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역으로 자금을 이전해야 하는 문제는 스페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유럽 금융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의 자본가들은 어음을 사용해 실질적인 은의 이동을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비용을 절감했다. 예를 들어 자본가들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 군자금을 대는 조건으로 그 가치에 해당하는 은을 스페인에서 받아 자신들이 필요한 곳으로 수출하는 권리를 얻는 식이었다.

스페인은 전쟁으로 인한 지출 때문에 80년 전쟁 기간 잦은 파산을 선고했다. 1576년, 1596년, 1607년, 1627년, 1647년, 1653년 등에 일어난 스페인 정부의 파산은 자금을 빌려줬던 푸거 가문이나 제노바 은행가들의 연쇄 파산으로 이어졌다.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은 17~18세기 스페인의 쇠퇴와 영국, 네덜란드의 부상을 금융제도의 차이에서 찾기도 한다. 식민지의 은에 대한 징세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스페인보다 선진적 국채 금융시장을 통해 국내 자본가들로부터 성공적으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던 영국이나 네덜란드가 장기전에서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경제 발전에서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더글러스 노스는 그의 핵심 저서인 [제도, 제도변화, 경제적 성과]에서 스페인과 영국을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비교·분석했다. 두 나라는 이탈리아 중심의 지중해에서 대서양의 북해로 세계 경제의 중심이 이전하는 16세기에 경쟁하는 양대 세력이었다. 영국은 개방적이었고 시장을 중시하는 전통을 가졌던 데 반해 스페인은 폐쇄적 사회로 국가가 과도하게 경제에 개입하는 성향이 짙었다. 또한 영국은 독립적 사법부가 소유권을 강력하게 보호했던 반면, 스페인은 파산이 잦았던 중앙 집권적 정부가 과도하게 세금을 올리곤 했다.

노스의 제도주의 해석의 핵심은 거래 비용과 경로 의존성이라는 개념이다. 영국처럼 개방성과 민간 즉, 개인의 권리가 잘 보장되면 시장에서 거래하는 사람들의 비용이 줄어든다. 반면 스페인처럼 국가나 정부의 임의적 개입이 빈번하고 사회의 강한 계급의식으로 상업에 대한 멸시가 심각하면 거래 비용은 늘 것이다. 노스는 이런 차이가 단기적으로는 작을 수 있지만 장기간에 걸쳐 누적되면 커다란 성과의 불균형으로 표출된다고 주장한다.

경로 의존성은 한번 특정 궤도에 올라가 전통과 관습이 뿌리내리게 되면 궤도수정이 어렵다는 개념이다. 이런 현상이 얼마나 강한지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인 미국에도 비슷한 제도를 이식했고, 스페인 역시 중남미에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사회 모델을 수출했다. 신세계에서는 새로운 제도를 실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로 의존성으로 인해 결국에는 기존에 하던 방식을 단순하게 반복했다는 말이다.

노스의 제도주의 해석


▎마드리드 근교의 엘에스코리알.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 영향을 끼친 왕궁 건설의 백미다. / 사진:위키피디아
현대 학계에서 논의되는 스페인 정치·경제의 문제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당대에 스페인의 경제학자들은 화폐의 혼란, 상업과 공예에 대한 사회적 멸시, 과도한 강압적 징세, 사치와 방랑, 산림 황폐화, 교회의 과도한 역할 등을 비난했다.

경제사에서 유명한 스페인의 문제는 메스타(Mesta)라 불리는 목양업자의 조합으로 상징된다. 스페인에서 기독교 귀족들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차지한 토지에서 엄청난 규모의 양을 키우는 데 몰두했다. 이슬람 세력이 도입한 관개사업을 활용한 농업을 포기한 대신 거대한 양떼가 계절에 따라 이동함으로써 스페인의 곡물 재배는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메스타 조합이 방목의 특권을 대가로 지불하는 자금에 더 기울었다. 결국 스페인은 16세기가 되자 증가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해외로부터 곡물을 수입해야만 했다.

스페인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소로는 종교의 극단적 배타성을 들 수 있다. 상대적으로 건조한 스페인에 이슬람 세력의 관개 농업은 식량 생산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이 영토를 회복한 이후 스페인은 이슬람교도들을 추방하거나 억압함으로써 그들이 국가 경제 발전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유대인들도 수공업, 금융업, 상업 등에서 스페인의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인적 자원이었으나 순수한 가톨릭 국가를 표방하는 스페인은 이들을 추방하거나 강제 개종시켰다. 이에 덧붙여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 제도를 도입해 그렇지 않아도 보수적인 사회에 더욱 강한 종교적 경직성을 부과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공식 인정했다.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 전통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통해 처음으로 세계를 무대로 하는 단계로 도약했다. 과거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제국 전체로 쉽게 확산됐듯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제국은 제노바 상인과 자본가들을 통해 자본주의가 확산하는 틀로 작동하였다. 스페인의 함대와 기마부대가 이탈리아 제노바의 자금력을 동원해 세계를 지배한 셈이다.

이런 자본주의적 틀은 다시 스페인 왕조의 지배에 저항해 독립을 주창한 북유럽의 네덜란드로 전파됐다.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80년이라는 긴 세월을 전쟁하며 대립했지만 동시에 서로 간에 긴밀한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플랑드르에는 독립하려는 네덜란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페인 편에 섰던, 향후 벨기에가 될 가톨릭 세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북미에서 독립하려는 미국과 여전히 영국에 충성하는 캐나다가 분리됐던 상황과 유사하다.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흐름 이동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 유대인 공동체는 상당 부분 네덜란드와 영국 등 북유럽으로 떠났다. 개방적인 네덜란드와 영국은 종교로 인한 박해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소수자들도 활동할 수 있는 자유가 더 많이 보장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종해 이베리아에 남은 친척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유럽의 무역 및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1640년대가 되면 스페인 항구에 들어오는 상품 가운데 75%가 네덜란드 배에 실려 올 정도로 네덜란드는 신흥 해상 세력으로 떠오른다. 또한 이런 사실은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드러내 준다. 17세기 이후 스페인이 줄기차게 쇠퇴의 길을 걸어간 것만은 아니다. 18세기가 되면 스페인은 동부 카탈루냐와 북부 바스크 지역 등을 중심으로 잠시 상업과 제조업이 번영했다. 또 프랑스로부터 계몽주의 사상이 전파돼 개방적 사고가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19세기 초 유럽을 뒤흔든 전쟁의 와중에 스페인의 중남미 식민지들이 1820년대까지 반란을 일으키면서 마침내 스페인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스페인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유럽 안에 있지만 유럽이 주도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은 뒤에서 간신히 따라가는 처지로 전락했다.

스페인은 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제국을 성공적으로 건설했지만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심장, 즉 튼튼한 국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다시 말해 스페인 제국은 용감한 전사들을 활용해 영토를 확장하기는 했지만, 그 넓은 지역을 오랜 기간 지배할 수 있도록 부를 창출하는 경제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스페인 제국의 은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자본가와 사업가들이 자본주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현찰로 기능했고,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금융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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