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11)] 네로의 마지막 연극, ‘포퓰리즘의 흥망’ 

자신을 예술가로 착각한 선동주의자의 폭주 

치정 이유로 아내와 어머니 연달아 살해하며 민심 잃어
민심 돌리려 대형 이벤트에 남발하고 기독교도 탄압 나서다 파국


▎로마 콜로세움은 서기 69년 네로의 황금 궁전(Domus Aurea) 터에 지어진 경기장이다.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의 청동상(Colossus Neronis)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아프로디시아스(Aphrodisias). 터키의 아시아 방면 에게 해에서 동쪽으로 100㎞ 떨어진 고도(古都)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더 대왕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된 곳이지만, 13세기 이슬람 터키에 정복된 뒤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뒤늦게 201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곳은 축구장 50개 정도 크기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그리스 로마 유물·유적 집산지다. 로마 시대 때 활용된 2만 명 수용 극장과 5만 명 수용 스타디움도 그대로 남아있다. 주변 강에서 밀려온 토사로 인해 도시 전체가 지하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초 비로소 눈을 떴다. 덕분에 전쟁·도굴·화재로 인해 흔적만 남은 다른 고대도시와 달리, 과거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아프로디시아스란 지명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서 유래된 말이다. 로마에선 비너스로 불리는 사랑의 여신이 아프로디시아스의 주인공이다. 서기 4세기 비잔틴시대 이후 정교 교회로 바뀌지만, 어린 에로스(로마명: 큐피드)와 함께 남녀의 가슴을 달군 여신이 아프로디시아스의 진짜 주인이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물론, 루브르의 그리스·로마 전시관에 버금가는 명소다.

매년 방문할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지만, 시작은 10여 년 전 처음 들렀을 때의 흥분이었다.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희귀한 대리석 입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로(Nero)와 아그리피나(Agrippina)’란 타이틀의, 높이 2m 정도의 조각이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아들에게 월계관을 내리는 장면이다. 월계관은 황제의 상징이다. 서기 54년, 황제에 오른 네로의 즉위식을 어머니를 통해 재구성한 작품이다. 대하는 순간 눈에 불이 켜졌다. 아프로디시아에서 발견된 수많은 로마시대 조각과 함께 전시돼 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원로원이 공인하는 ‘공공의 적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 아프로디시아스에서 발견한 ‘네로와 아그리피나’ 모자 입상. 네로의 즉위식 장면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로마는 물론 로마의 속주 식민지 전체를 통틀어 네로 입상 자체가 아주 드물다. 아그리피나도 마찬가지다. 네로의 두상은 물론, 아그리피나에 관한 작품도 아주 희소하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복제된 것들은 있지만, 로마 당시 만들어진 조각물은 손꼽을 정도다. 아프로디시아에는 두 사람이 함께, 그것도 어머니가 아들에게 월계관을 씌우는 입상이다. 필자가 아는 한, 세계에서 유일한 네로-아그리피나 공동 입상이다.

네로는 17살 나이로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네로가 22살 되던 때 아그리피나는 피살된다. 주범은 월계관을 받은 아들 네로다. 네로의 호위병들이 아그리피나 집에 쳐들어가 칼로 배를 갈라 살해한다. “여기를 쳐라.” 죽기 전 아그리피나가 자신의 자궁을 가리키면 던진 마지막 말이다. 아들의 소행이란 것을 알고 네로를 낳은 자궁을 지목한 것이다.

역사에 흥미가 없더라도 ‘네로=폭군’이란 도식에 익숙할듯하다. 네로는 세계가 인정하는 폭군의 대명사다. 폭정만이 아니라, 인륜적 측면에서 봐도 상상을 넘어선 ‘악의 화신’ 그 자체다. 어머니를 죽인 것은 물론, 사실상 네로를 황제의 길로 가도록 도와준 아내 옥타비아(Octavia)도 유배지로 보낸 뒤 곧바로 처형한다. 황제 측근 군인과 불륜을 벌인 뒤 쿠데타로 네로를 몰아내려 했다는 것이 유배지로 쫓아낸 명분이다.

또 종교적 관점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도를 로마법의 이름으로 처형하게 한 인물도 네로다. 원래 기독교도는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는, 로마 내 수많은 종교 중 하나였다. 네로는 기독교도만을 콕 집어내, 로마 황제와 로마의 신, 로마 자체를 부인하는 공적(公敵)으로 규정한다. 고문 처형은 기본이고 검투사의 희생물, 나아가 동물의 먹잇감으로 기독교도를 몰아세운다. 현재 로마 바티칸 지하에 잠자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도 네로 당시 처형된 순교자다.

‘호스티스 푸부리쿠스(Hostispublicus).’ 폭군 네로를 떠올릴 때 따라붙는 말이다. 라틴어로 호스티스는 Enemy(적)란 의미다. 푸부리쿠스는 영어의 Public(공중)·People(사람)·Popular(인기)란 뜻이 있다. 종합해보면 공공의 적(Public Enemy)으로 풀이할 수 있다.

로마 역사를 통틀어 호스티스 푸부리쿠스 즉, 공공의 적이란 말이 유행한 것은 네로 때부터다. 로마 국회에 해당하는 원로원이 법의 이름으로 ‘공공의 적’을 공표한다. 황제 네로가 주범이다. 이미 수많은 위험인물이 로마에 대한 공공의 적으로 규정됐지만, 살아있는 현직 황제에 대한 원로원의 파문은 처음이다.

공공의 적이란, 보는 즉시 체포·살해하라는 의미다. 보통 칼이 아닌, 돌도 쳐 죽이는 것이 공공의 적에 대한 형벌이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가 처형 무대다. 공공의 적을 제거한 사람에게는 원로원 이름 하의 포상금이 제공된다. 공공의 적으로 규정되는 순간, 로마 대제국 6000만 모두의 적이 된다.

네로에 반기를 들다가 네로 사후 황제에 오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도 원래 공공의 적으로 규정됐던 인물이다. 그러나 갈바는 자신을 따르던 충성 군대를 갖고 있었다. 원로원 파문에도 불구하고 기반인 스페인 지역에서 안전하게 지냈다. 네로는 다르다. 4명의 노예 외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공공의 적이란 타이틀이 내려지는 순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떠났다.

아내의 기일에 목숨을 끊다


▎나폴리 박물관에 전시된 네로의 흉상. ‘인류 최초의 대중스타’로 꼽히던 그는 집권 기간 도덕적·경제적으로 파산하고 만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네로 최후의 날을 복원해보자. 네로가 세상을 떠난 날은 서기 68년 6월 9일 아침이다. 31세로, 황제에 오른 지 13년 9개월째다. 6월 9일은 아내 옥타비아가 살해된 날이기도 하다. 죽음을 맞이하기 하루 전 네로는 왕실에서 자다가 깬다. 자신에게 불리한 낌새를 알고 있던 참이었기에 불안감 때문에 깨어났다고 볼 수 있다. 침실 밖에 나가서 호위병을 불렀지만, 아무도 없다. 노예를 시켜 자신을 보호할 호위병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근위병 대장에게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다. 당시 네로는 “나에게는 친구도 적도 없단 말인가(Have I neither friend nor foe)”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결국 자신에 대한 암살이 임박했을 것이라 보고 4명의 노예와 함께 탈출에 나선다. 로마 외곽 황제 전용 별장으로 도망친다. 도착 즉시, 자신의 무덤을 파라고 노예들에게 지시한다. 원로원이 자신을 공공의 적으로 파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노예에게 자신을 목을 단칼에 치라고 명령한다. 멀리서 추적에 나선 로마 군인들의 함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노예가 칼로 내리치자 곧바로 쓰러진다. 그 유명한 “오, 슬픈 예술가의 죽음이여(What an artist dies in me)”라는 말을 내뱉는다. 로마 군인이 달려와 죽음을 막으려 했지만, 네로는 “너무 늦었다, (자살이야말로) 나의 정절의 상징이다(Too late. This is fidelity)”라는 비명과 함께 숨진다.

네로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개국한 제정 로마의 5대 황제다. 아우구스투스가 75살까지 장수한 황제인 데 비해, 2대 티베리우스(Tiberius)와 3대 칼리굴라(Caligula), 4대 클라우디우스(Claudius) 모두 불행한 사건으로 최후를 맞았다. 칼리굴라는 호위병에 의해 암살당했다. 티베리우스·클라우디우스 두 황제의 죽음도 암살과 독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네로의 경우 자살이란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한 황제다. 카이사르에서 시작된 이른바, ‘줄리오 클라우디안 왕조(Julio-Claudian dynasty)’가 네로의 자살과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오른 기원전 27년부터, 네로가 자살한 서기 68년까지 95년간의 역사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후광이 95년간 이어진 셈이다. 로마 역사를 이탈리아 반도 내 서로마로 한정할 경우, 서기 476년 9월 4일이 최후 멸망의 날이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피와 전혀 무관한 인물들이 네로 이후 등장하지만, 그래도 인류 초유의 대제국은 400여 년이나 더 지속한다.

네로는 죽은 뒤에도 공공의 적으로 취급된다. ‘담나티오 메모리아(Damnatio Memoriae)’, 즉 기록말살형을 받아 관련된 모든 기록이 철저히 매장된다. 네로의 흉상이 극히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원로원의 결정에 의한 공식적인 말살은 아니다. 원로원은 줄리오 클라우디안 왕조를 부정하지 않았다. 원로원 대부분은 피를 통해 세습되는 종신 정치인으로 구성돼 있다. 선조 대로 올라가면 모두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로 연결된다. 황제와 다투기는 하지만, 사실상 같은 배를 탄 처지라 볼 수 있다. 공공의 적으로 규정은 했지만, 네로 사후 담나티오 메모리아를 공식적으로 적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네로의 폭정을 잊지 못했다. 특히 기독교도들에게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네로와 관련된 모든 것들도 부정된다. 네로는 자식이나 친척도 없었다. 옥타비아 살해 후 두 번 더 결혼하지만, 놀랍게도 상대는 남성들이다. 네로 본인은 처음에는 여성, 두 번째는 남성 역할로 동성 결혼식에 임했다. 숨기면서 몰래 한 것이 아닌, 대규모 오픈 결혼식이었다. 네로를 변호해 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담나티오 메모리아의 대상으로 잊혀 간다.

황제는 부업, 예술가가 본업


▎네로는 67년 올림픽 축제 기간 동안 열린 마차 경주에 나섰다가 큰 부상을 당하고 만다. 당시를 기록한 그림.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예술과 어머니.’ 네로라는 인물을 분석할 때 등장하는 두 개의 키워드다. 네로를 이해하는, 폭군 황제의 내면은 물론 외면을 알 수 있게 만드는 배경으로서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예술이란 키워드로 들어가 보자.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한 인물이다. 황제로서 국경선을 지키고 외적과 협상을 하며 경제발전에 매달리는 인물이 아니다. 황제는 부업, 예술가가 본업이라고나 할까? 17세 나이로 황제에 오른 탓이기도 하겠지만, 책임보다 권력자의 특권을 탐닉했다.

그리스 문화는 네로의 머릿속에 박힌 예술세계의 전부다. 의상·악기·드라마 모두 그리스식으로 꾸미고, 스스로가 무대에 올라가 시·노래·연기를 행했다. 네로는 예술·공연 팀을 직접 운영한 황제이기도 하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엔터테인먼트 프로덕션 사장쯤이라 볼 수 있다. 각종 드라마 세트와 장비를 갖춘 2000명 스태프와 5000명의 박수부대를 황제 직권으로 운영했다. 나폴리·폼페이로 가서 그리스어로 드라마 연기를 모두에게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워낙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속주였던 그리스에 대한 세금도 감면해줬다.

그리스 올림픽 경기는 네로 당시에도 4년에 한 번씩 개최됐다. 67년 그리스 올림픽은 네로에 의해 창조된 특별 이벤트다. 원래 예정에 없었지만, 네로의 명령으로 갑자기 열리게 된 것이다. 원래 그리스 올림픽 경기는 웃고 즐기는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다. 신의 이름을 건, 성스러운 의식으로 통한다. 네로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올림픽 개최를 명령한다. 그리고 네로 자신도 참가한다.

네로는 마차 경주에 중독된 인물이다. 영화 [벤허]에서의 장면처럼, 마차 경주가 시작되자 네로가 등장한다. 말을 10마리나 대동한 초대형 마차다. 원래 규정은 4마리지만, 황제 특권을 주장하며 10마리 마차로 참가한다. 10마리 말을 한꺼번에 다루려면 엄청난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당연하지만, 경기에 나서는 순간 추락해 크게 다친다. 그러나 심판은 네로를 최종 승자로 결정한다.

네로는 마차 경주에 앞서 올림픽 문화축제에도 참여한다. 스포츠 선수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그리스 신들을 찬미하기 위한 문화 경연이 시작됐다. 역시 네로도 참가한다. 축제 기간 전체를 통틀어 1800여 명의 응모자가 각종 경연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1등은 다름 아닌 네로였다.

월계관을 하사했던 ‘상왕’ 어머니


▎로마 팔라티노 언덕에 위치한 궁전 도무스 트란시토리아(Domus Transitoria)가 지난 4월 일반에 공개됐다. 네로가 즉위 직후부터 대화재가 난 64년까지 기거했던 곳이다. / 사진:AP/연합뉴스
네로는 빵과 서커스로 표현되는 글래디에이터 이벤트에는 무관심했다. 대부분 황제가 보여준 무공을 통한 권위에도 무심했다. 변방을 돌며 군인들을 격려하는 이벤트도 벌이지 않았다. 종래의 근육질 황제가 아닌, 시·노래·연기를 탐닉하는 예술가의 길이 황제 네로가 보여준 삶이다. 21세기 관점에서 본다면 문화진흥공로상을 받을 만한 인문미학 황제쯤으로 불릴 듯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정반대다. 드라마·노래·시는 황제나 영웅이 아닌, 하층민이나 노예들의 일로 풀이됐다.

네로는 로마 역사상, 아니 인류 정치사상 처음으로 복권 제도를 국가정책에 활용한 인물이다. 10대의 네로는 호위병 없이 혼자서 로마거리를 돌아다녔다. 술과 함께 시민들과의 잡담도 즐겼다. 시장에서 번호표를 나눠준 뒤 당첨자를 뽑아 음식·말·보석·노예를 선물로 제공했다. 거의 매일 엄청난 복권표가 로마시민들에게 뿌려졌다. 덕분에 로마시민들의 아이돌에 오른다.

오해하기 쉬운데 집권 초기 네로는 폭군이 아닌, 로마시민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젊은 성군이었다. 대중친화력과 복권추첨제가 가장 큰 이유다. 역사가들은 네로를 인류 최초의 대중스타라 말한다.

스타 인기는 거품과도 같다. 인류 최초의 대중스타 네로라고 하지만, 집권 5년째인 서기 59년부터 인기가 급추락한다. 이유는 어머니 아그리피나 살해에 있다. 로마시민 모두가 네로가 범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아그리피나는 피로서의 어머니만이 아닌, 자식의 머리 위에 올라선 상왕(上王)으로 활동했다. 아프로디시아스 모자 입상에서 보듯, 네로를 황제로 만든 1등 공신은 어머니 아그리피나다.

아그리피나는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여동생이다. 네로와 더불어 로마 폭군의 대명사가 칼리굴라다. 암살 피해망상증에 빠지면서 주변 모두를 처형한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여동생 아그리피나와 성적관계를 맺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그리피나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믿고 유배를 보낸다. 이후 칼리굴라가 정말 암살되면서 아그리피나는 복권된다. 놀랍게도 칼리굴라의 후임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의 4번째 부인으로 들어간다. 아그리피나는 용의주도한 음모 끝에, 클라우디우스의 3번째 부인 메살리나(Messalina)를 불륜 사건에 연결해 제거한다.

이어 아그리피나는 황제 남편 클라우디우스도 제거한다.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만찬 음식에 독버섯을 넣어 살해했다고 한다. 독버섯 중독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안 죽자, 토하게 하려 한다면서 독을 바른 새 깃털을 클라우디우스 목에 쑤셔 박아 즉사시켰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어 아들 네로가 신임 황제로 선포된 것은 물론이다.

아프로디시아스의 모자 입상은 바로 그 같은 상황을 직접 설명해주는 증거다. 보통 로마 조각에서 황제에게 월계관을 씌우는 역할은 날개를 단 여신에게 주어진다. 로마 황제는 신으로 추앙된다. 어머니라 해도 감히 인간이 월계관을 ‘하사’할 수 없다. 아프로디시아스 모자 입상은 황제에 대한 아그리피나의 파워가 절대적이란 점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바로 상왕으로서의 어머니다. 청소년 네로가 황제에 올랐지만, 실제 권력은 아그리피나에게 집중된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네로는 상왕 어머니를 멀리하게 된다. 집권 1년 만에 어머니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

적폐청산 정치의 말로


▎1999년 복원된 황금 궁전 내부 모습. 네로는 로마 대화재 이후 시내 면적의 3분의 1에 달하는 대지를 몰수해 궁전을 신축한다. / 사진:AP/연합뉴스
모자간 불화의 기폭제는 네로의 여자 문제에서 시작된다. 네로는 아내 옥타비아를 버리고 노예 출신 그리스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아그리피나는 맹렬히 반대한다. 둘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마침내 네로는 어머니를 살해한다. 어머니로서만이 아닌, 황제를 통제하려던 상왕을 제거한 것이다. 더불어 네로의 명령 하에 아그리피나에 대한 담나티오 메모리아가 시행된다. 서기 59년, 네로가 22살 되던 때다.

상왕이 사라지면서 네로의 인기도 동반 하락한다. 어머니에 이어, 옥타비아를 살해한 뒤부터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인륜에 반하는 행동도 원인이지만, 각종 명목의 세금을 징수하면서 로마시민들과 멀어진다. 설상가상으로 64년 7월, 대규모 화재가 로마 전체를 초토화한다. 대략 로마의 3분의 2가 잿더미로 변한다.

흉흉한 민심을 달래려고 기독교도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화재 방지를 위한 세금을 신설해 모든 것을 잃은 로마시민들을 한층 더 분노케 한다. 세금은 네로의 궁전건립과 복권자금으로 활용됐다. 네로가 자신의 초호화판 궁궐을 짓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얘기도 나돈다. 상왕의 도움으로 황제가 된 네로는 너무도 무능했다. 그러나 상왕이 사라지면서 무능함은 극에 달한다. 원로원의 파문은 그 같은 배경 아래에서 터져 나온 최후의 해결책이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2000여 년 전의 네로를 둘러싼 얘기는 지금 당장 한국에서도 접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한국에도 공공의 적들이 넘치기 시작했다. 특정인에 대한 담나티오 메모리아도 횡행한다. 적폐라는 이름의 파문이 들리더니, 요즘은 거꾸로 적폐라 비난한 사람들이 공공의 적으로 공격당하는 듯하다.

로마시민들이 네로에 등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는 세금, 즉 돈이다. 재난을 당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세금 고지서를 올린 것이다. 극소수 복권 당첨자들의 행복을 과대 포장해 복권 운영용 자금도 모두에게 요구한다. 고상하고 우아한 예술가 황제도 좋지만, 경제·국방·외교·치안 전부 무너져 내린다. 기독교도를 희생양으로 해서 책임을 모면하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들통이 난다. 사실 네로는 기독교 확산의 1등 공신이다. 핍박이 더해갈수록 기독교 신자도 급증했다. 네로라는 악에 맞서는, 정의로서의 기독교다.

2019년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부주도 하의 국가정책들을 보자.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일까? 곁가지가 아닌 국민이 당장 필요로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이런 핑계, 저런 명분으로 덮으려 들지만 곳곳에서 불만과 불신이 터져나온다. 네로를 둘러싼 교훈이 한국에도 당분간 필요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911호 (2019.10.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