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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30)] 개에 대한 종교적 관념의 폭력 

‘알라’의 뜻으로 포장된 편견 

구전적 가르침에 따라 ‘불결한 동물’로 인식해 학대
문화적 차이로만 이해하기 힘든 비이성적 야만의 사례


▎베두인이 키우던 개 ‘게르나스’가 사막의 언덕에서 자기가 살던 와디 럼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나를 보고 미칠 듯이 좋아 날뛰는 이 비극적인 개. 온몸이 갈색의 흡혈 파리들로 덮여있었고, 내장에는 온갖 종류의 기생충이 득실득실할 게 뻔한 이 개의 이름은 게르나스라고 했다. ‘게르’의 R 발음은 혀를 무겁게 말아 떨어야 한다. 마지막 실러블에 악센트가 있다. 베두인들이 사냥에 쓰는 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귀여운 땅의 종자에게 그토록 장엄한 하늘의 이름을 주었고, 또 그런데도 이렇게 곤혹스러운 경지에 처박히게 된 이 개의 운명은 실로 헤아릴 길이 없었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하는 모하메드가, 자기 집 개가 짧은 줄에 묶인 채 완벽한 고독 속에 방치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의 태연함에 나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게르나스의 목에는 가죽끈도 아닌 철사가 그의 목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고, 24시간 그리고 일주일 내내 사막의 열기 속에 그늘도 없이 방치되어 있어도, 모하메드의 일상적 감각에는 문제 될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개를 인식하는 방법은 물론 서구적 관점에 물들어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개는 인간의 가장 좋은 벗이고 가족의 정당한 구성원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 이외의 다른 문화에 있어서,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개를 그렇게 인식하지 않는다. 1980년대 서울, 내가 자라날 때만 해도 오토바이 뒤에다가 커다란 장을 묶고 길 잃어버린 개나 실종 견, 그리고 사람들이 팔려고 하는 개를 고르기 위해 주택가 골목을 종일 배회하는 사람들, 우리가 보통 ‘개장수’라고 부르는 사람을 목격하는 일은 전혀 희한한 광경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개들을 식용견 농장에다 판매 처분할 수 있었다. 나는 오빠와 함께 [래시] 계열의 영화 한 편을 본 후에, 영화에 나오는 종자와 비슷하게 생긴 콜리(Collie) 강아지를 사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대한극장 옆으로 가서 정말 의젓하게 생긴 콜리 강아지 한 마리를 사주셨다. 그런데 이 강아지를 기를 만한 공간이 우리 집에는 없었다.

어린 시절 키웠던 ‘덕구’의 추억


▎게르나스가 살던 바위. 철사로 된 목줄에 묶여 방치되다시피 키워졌다.
그래서 차고 한 귀퉁이에 억지로 집을 지어 길렀는데, 이 강아지가 계속 설사를 했다. 아버지와 엄마가 교수 생활로 바쁘셨으므로 이 개를 간호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개를 키울 만한 환경이 우리 집에는 마련되기 어렵다고 계속 우리를 설득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강아지를 봉원동에 있는 할머니 집에 갖다 놓았다. 할머니는 매사에 경험이 풍부하신 분이므로 개를 잘 키우실 것이다. 이 개는 얼굴이 뾰족하고 옅은 갈색 털과 목 주변의 흰털이 길게 늘어지는 종자였는데 원래 스코틀랜드의 종자로서 양 떼를 지키는 목양견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이 개 이름을 ‘덕구’라고 지었다. 그것은 이름이라 할 것도 없이 할머니가 개를 부르는 방식이다. 그것은 ‘덕(dog)’이라는 영어 발음을 한국식으로 한 것인데, 할머니는 ‘덕구(德九)’라는 한문으로 개 이름을 설명하셨다. 영어로 하면 ‘버츄 나인(Virtue Nine)’이 된다. 구수(九數)가 끼어 도교적인 냄새도 나는 이름이 되고 만다. 영국 순종 개에 덕구라는 이름은 정말 코믹하다.

덕구는 보통 콜리보다도 훨씬 더 몸집이 크게 자라났다. 할머니는 이 개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키우셨는데, 마당에 묶어놓았을 뿐 마땅한 훈육을 시키지는 못하셨다. 사실 할머니 집도 이 큰 개를 키우기에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이 개를 보러 자주 놀러 오는 재미 때문에 키우신 것같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개는 선천적으로 그리 영민한 개가 아니었다. 생기기는 너무도 잘 생겼는데 머리가 나빴다. 그래도 우리가 가기만 하면 좋다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덕구가 너무 흥분되거나 크게 짖으면 할머니는 매를 든다. 그러면 덕구는 할머니 방문 밖에 조그만 툇마루가 있었는데 그 밑으로 쑤시고 들어간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삶이었다. 우리가 개를 데리고 나가기도 몸집이 너무 커서 버거웠고, 또 뒷산에서 체조하는 사람들이 개를 못 데려오게 했다. 어느 날, 덕구는 줄을 끊어버리고 집을 탈출했다. 그러고는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와 나는 온종일 울었다. 생각만 하면 오토바이 개장수에게 붙들려 보신탕집으로 직행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만 하면 울음이 나왔다. 부모님은 그러한 좋은 품종의 개들은 식용고기를 얻기 위해 도살되는 법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주셨다. 우리는 시간 나는 대로 덕구를 찾아 헤매었으나 덕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도무지 행방이 묘연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맞아! 덕구는 더 좋은 집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야!”하고, 희망을 뇌까리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내 의식의 뒤편에서는, 그러한 희망이 구현될 기회는 거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을 뿐이다.

서양 사람들에게 개고기 먹는 나라의 대표적 사례로서 전형화되고 저주의 대상이 되는 나라에서 자라난 나의 입장에서는, 베두인들이 개를 다루는 방식에 관해 비판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개에 대한 편견과 문화 상대주의


▎영화 [래시]에 나오는 개는 필자가 어릴 때 키웠던 ‘덕구’와 꼭 닮았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dget Bardot)가 한국을 지목해 개고기 먹기를 중단하라고 국제적 캠페인을 벌였고 한국 문명을 “야만”으로 규정한 유명한 사건에 대해, 나는 나의 친구들에게 정당한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녀의 오만한 이른바 ‘개 권리 운동’이라는 규탄은 내가 열거하는 몇 개의 사례만 들어도, 그것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며, 무지의 소치이며, 인종 편견적인지 금방 들통나고 만다.

예를 들어보자! 돼지는 지능지수가 개보다 더 높다. 알고 보면 매우 영리한 동물이다. 그러나 돼지는 서양에서 식탁의 고기용으로 전혀 권리를 운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육되고 있다. 개를 먹는 습관은 기근 시기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개고기는 칼로리가 높으며 동방에서는 약효가 있다고 생각된다. 개고기는 상식(常食)의 소비재로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보신탕이라는 개념으로 먹는 것이지 일상적 밥상 음식으로서 먹지는 않는다.

개에게 잔인한 짓을 한다고? 이것 또한 참으로 웃기는 역설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최고급 요리로서 꼽는 거위 간, 푸아그라(foie gras)를 생산하기 위해 하는 짓을 보면 가공스럽다. 푸아그라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기름기가 잔뜩 낀 병든 거위 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방간이 최대치에 달한 부어오른 간이다. 이 간을 생산하기 위해 거위에게 과도한 음식량을 강압적으로 주입한다. 이렇게 기름기가 많이 낀 간일수록 사치품목으로서 고가에 팔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짓거리가 과연 식용 개 사육보다 더 훌륭한, 아무 문제 될 거리가 없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화적 상대주의를 파악하고 있는 내가 과연 모하메드에게 그가 게르나스에게 별 생각 없이 하고 있는 짓을 도덕적 악으로서 항의할 수가 있단 말인가?

개발도상의 나라에서는 대체로 방치된 실종 견들의 증가, 그에 따른 질병 컨트롤이 문제가 되어 개를 무자비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와디 럼 빌리지에서도 이런 상황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사람들도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의 수 증가 방지를 위해 난소 제거, 혹은 거세의 수술을 한다든가, 질병 예방을 위해 백신을 주사한다든가 하는 것은 애초에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개의 개체 수 감소를 위해 베두인들은 암컷 강아지를 총으로 사살하는 데 익숙해 있다. 단지 수컷 강아지만 일하는 개로서 양육하는 것이다. 길 잃은 개들이 공격적이거나 광견병 증상이 있으면 가차 없이 쏘아버린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스포츠오락으로서 쏘기도 한다.

내가 이들의 개에 대한 태도를 좀 자세히 연구해본 결과, 물질적 자원의 결핍이 꼭 개 학대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인도에서 목격한 바로는 길거리의 동물들이 아주 못사는 사람들의 구역에서도 음식을 공급받고 있고, 또 소와 같은 동물은 그들의 생계와 무관한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게 모셔진다. 소들이 길바닥에 꽤 많은 양의 똥을 남기거나, 교통을 막고 있어도 지역 사람들이 그들을 해치거나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간디가 소를 잡아먹는 것이 조국 근대화의 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인도 사람들은 소에 대해 종교적 숭배심을 가지고 있다.

개에 대한 관념이 숭배와 학대를 가른다


▎힌두교에서 개는 신성한 존재다. 티하르 축제에서 목에 화환을 걸고 이마에 티카를 찍은 개.
내가 이미 앞서 설명했듯이, 인도에는 쥐를 숭배하는 사원도 있다. 우리가 그토록 원망시 하는 쥐들을 보호하고 숭배하고, 스스로 먹을 것이 부족한 지역민들도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네팔에서는 매년 열리는 종교축제에서 개가 숭앙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네팔의 힌두이즘에서는 개가 상당히 훌륭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대강 10월 아니면 11월에 거행되는데, 티하르(Tihar)라고 불리는 5일간의 긴 힌두페스티벌의 둘째 날, 노란 금잔화로 만든 화환을 개의 목에 걸어주고 두 눈 사이 미간의 인당(印堂, 불교에서는 백호라 한다)에 빨간 염료로 점을 찍어준다(네팔사람들은 티카라고 하는데, 그것이 자비의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거리의 개든, 애완용이든지를 막론하고 이날은 개들이 음식을 대접받고 숭앙을 받는다.

[마하바라타]에 이미 언급된 대로, 네팔사람들은 시바신의 아주 맹렬한 현현인 바이라바(Bhairava)가 개를 옆에 두고 있다고 믿는다. 죽음의 신인 야마(Yama)도 두 마리의 경호견을 지니고 있는데 이 두 마리의 개는 눈이 4개이며 나라카(Naraka, 지옥)의 문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개에게 잘 보이는 것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물론 네팔이나 인도에도 주민들은 딴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길거리 개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길거리 개들 또한 매우 빈곤한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 개들을 학대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와디 럼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개에게 돌을 던지도록 격려되고 있으며, 어른들은 개들을 사살하는 것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일반적으로 베두인들이 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 매우 호기심을 느꼈다. 그들의 관념을 비판하기 전에 그 연유를 깊게 파고들어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라는 주제에 관해 내가 베두인과 토론을 벌이면, 그들은 천편일률적으로 “개는 이슬람의 신념체계 속에서 나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곧 개라는 동물이 종교 제식상 더러운 존재로서 취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순수하게 종교적인 이유에 의해 맹목적으로 동물을 학대한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아주 강력한 무슬림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터키에서는 길거리에 공공의 개집이 마련되어 있고, 사람들이 개들에게 먹이를 제공한다. 요르단 같은 나라에서는, 암만과 같은 대도시의 부유한 엘리트층의 사람들이 서구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개를 애완견으로서 양육하고 있다.

베두인은 왜 개를 멸시하나


▎양치기의 개들. 사막의 개들은 양 떼와 같은 가축을 돌본다.
그러나 와디 럼에서는 개는 오로지 일하는 도구로만 취급되며, 경비견의 기능을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기 위해 개들을 꽉 붙잡아 매둔다. 개 주인들조차 자기 개들이 텐트나 집으로 너무 가까이 오면, 오지 못하도록 지팡이나 신발을 던진다. 그러니까 개들이 자기 생활권에 있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그들의 행태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개가 사람의 생활권에 같이 있으면 안 되는가에 관해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항상 같은 대답을 한다. “선지자 무함마드께서 개는 불결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베두인들이 왜 동물 학대를 묵과하는 그러한 혼란스러운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 그 실상을 알아내는 데 상당한 시간 동안 연구를 감행해야만 했다.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씀의 정통 기준인 쿠란에는 개에 관한 부정적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러나 선지자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해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모아 편찬한(물론 이것은 무함마드의 사후, 몇 세대를 거친 후에 편찬된 것이라서 그 진실성에 관한 논란이 있다) 또 하나의 경전 하디스(Hadith)에 개가 불결하고 불순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몇 개의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베두인들이 가장 인용하기 좋아하는 구절은 사히흐 무슬림(Sahih Muslim, 9세기에 편찬된 하디스 6대 컬렉션 중 하나) 속의 정결의 장(the Book of Purification)에 있는 것이다. “알라의 메신저 무함마드께서 그 개들의 죽임을 명령하시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었다. 나머지 개들은 어떻게 할까요 하자, 무함마드께서는 개들은 사냥을 위해서, 또 사육하는 가축 떼를 보호하기 위하여 양육할 것을 허락하시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었다: 개가 그릇을 핥았을 경우, 그 그릇은 물로 일곱 번 씻고 마지막 여덟 번째는 흙에 문지른다.”(Muslim Book 002, Hadith 0551)


▎양 떼를 지키는 개. 사막 유목민의 일원이 되려면 개에게도 자기만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다른 구절이 있다. “알라의 메신저 무함마드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 하나라도 개가 핥은 후에는 첫 번째는 모래로 닦고 일곱 번을 물로 씻어 정화한다.” (Muslim Book 002, Hadith 0549)

이 구절 중에서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개들의 죽임’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에 관한 것이다. 학자들은 ‘그 개들’이라는 것은 ‘광견병에 걸린 개들’의 뜻일 것이라고 의견을 모은다. 정화에 관해서는, 나는 첫 번째 인용문보다는 두 번째 인용문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일곱 번을 물에 씻고 난 후에 다시 흙에 문댄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지역의 흙이란 모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릇을 먼저 모래로 씻고 나서 일곱 번을 물로 씻는 것이 더 사리에 맞다는 것이다.

어쨌든, 베두인들은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신봉하여 확대해석했다. 그들의 손을 포함해 무엇이든지 개의 침이나 개의 젖은 코와 맞닿기만 하면 무조건 모래로 문지르고 일곱 번을 물로 씻는 것을 율법화한 것이다. 나는 모하메드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하디스를 쓴 사람들의 시대에는 비누나 살균제가 없었기 때문에 일곱 번 운운한 게 아닐까?”

도무지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완벽하게 임의적이었다. 한 번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규정성도 전혀 없었다. 그러니 한 번 길게 하면 수십 번도 되는 것 아닌가?

이슬람 경전에도 없는 개에 관한 혐오


▎모로코의 에르그 체비 사막.
내가 모하메드에게 종교적 주제에 관해 얘기하면, 나의 과학적 탐색은, 예를 들면 개의 입으로 인해 생겨난 박테리아를 씻어내는 일에 관한 디테일한 탐색 같은 것은 곧 그의 모호한 종교적 관념에 부닥치고 만다. 그는 바로 현대과학이 이슬람의 고문헌에 쓰여 있는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모호하게 주장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알아, 알아. 과학자들이 말야! 개 입에 모래로만 씻길 수 있는 박테리아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어! 선지자 무함마드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바로 현대과학에 의해서 다 입증되고 있단 말야!”

나는 그 과학자가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종교적으로 세뇌된 소년과 논쟁을 펼 이유가 없었다. 실상 그는 종교 경전도 읽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개 침’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 베두인들이 알고 있는 이슬람이라는 것은 경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입술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타 신앙가가 말한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믿는 데만 익숙해진 것이다. 전 세계의 종교인들이 그들의 고래의 신념이 필요하기만 하면 근대과학으로 정당화하곤 하는 아주 흔한 오류를 신봉한다. 역사적으로 모든 종교인이 과학을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그토록 저주하고 방해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과학을 자기 정당화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에 분개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의 정체를 깊게 탐색하곤 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려고 성문화된 텍스트를 더욱 깊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하디스에 있는 몇 개의 다른 구절들은 사냥이나 가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없는 상태에서 개를 기르는 것은 하람(haram)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람이란 이슬람의 율법에 위배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검은 개는 사악하다는 규정도 있다. 우리의 기도를 듣기 위해 오는 천사들을 방해한다는 것이다(Muslim Book 004, Hadith 1032, 그리고 Bukhara Volume 004, Book 054, Hadith 448).


▎모로코에서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필자.
이런 구절들은 종교라기보다 그 시대의 문화와 연관된 것 같다. 왜냐하면 가장 신성한 경전, 쿠란에는 개를 포함한 모든 짐승에 대하여 어떠한 편견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동물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너희들이 훈련한 짐승이 너희들을 위해 잡아 온 것은 먹어도 좋다고 기술되어 있다. 개가 잡아 온 짐승에는 물론 개 침이 묻어있을 것이다. 그것을 잡아먹기 전에 반드시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전혀 없다. 쿠란의 주석가들은 개를 불결하게 규정하는 이슬람전통은 전혀 경전의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쿠란 5:4, 6:38, 24:41 참고).

베두인들은 개들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비롭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 자신의 종교의 원래 규정에 따랐다면 금지되었어야 할 그러한 행위들을 오랫동안 마구 자행해온 것을 새삼 고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의 학대에 관해서도 신경을 쓰기에는 그들의 삶의 문제가 너무 복잡한 것이다. 개의 학대에 관해 외국인들이 항의하면, 자동으로 종교를 내걸어 비판이나 구차한 변명을 다 봉쇄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기 빌리지의 베두인들은 이미 관광사업과 텔레비전의 정보교환을 통해 서양에서 개들이 다르게 취급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서양의 관습을 매우 비열하게 바라본다.

개들이 주인의 얼굴을 핥는다든가, 개들이 집안에서 같이 산다든가 하는 서양인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치를 떨며 분개한다. 개가 사람의 집안에서 같이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론상 서양 사람들이 기르는 개들이 깨끗하고 건강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해도, 실제로 그러한 삶의 직접경험을 그들은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이 개를 다루는 방식은 이미 종교적 율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나는 개들이야말로 정당하게 취급하면 너무도 훌륭한 사람의 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베두인의 방식은 서양과 다르다


▎필자가 그린 유화. 베두인에게 얻어온 게르나스를 모델로 삼았다.
게르나스를 처음 본 후에, 곧바로 그 개를 집으로 데려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직접 개를 길러 본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다 커버린 야생의 훈련 안 된 똥개를 내가 관리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다. 게르나스는 힘이 센 개였다. 나는 그가 펄쩍펄쩍 뛰면서 줄을 잡아당기는 위세 때문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우선 그는 목욕해야 하고, 백신을 맞아야 하고, 구충제를 먹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를 물 수도 있다. 내가 실제로 겪어보지 않는 한, 내가 게르나스를 제어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처해있는 비참한 신세를 쳐다보고 그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게르나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어야 할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그를 곧바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나는 에르그 체비(Erg Chebbi)라 불리는 엄청나게 거대한 모래언덕 지역에서 2주간 작품 사진 활동을 하고자 모로코로 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9월 4일, 와디 럼을 떠나기 전에 나는 모하메드에게 내가 돌아오는 대로 게르나스를 맡아 키우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여러 번 간청했다. “제발 개를 묶어두지만 말아줘. 하루에 한 번은 꼭 풀어주기도 하고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기도 해야지. 온종일, 일주일 내내 꼭꼭 묶어두는 일은 금물이야!” 모하메드는 그냥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기엔 내가 없는 동안 개를 한 번이나 보러 갔을까?

모로코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요르단 암만에서 며칠을 보냈다. 나는 암만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기에, 개를 위한 것들을 포함해서 사막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나는 그곳의 수의사로부터 광견병 백신주사를 구했다. 물론 자세한 시술설명서가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알약 형태의 구충제를 샀다. 개의 피부에 관해서는, 개에게 뿌려도 안전한 살충제 파우더를 샀다.

그리고 2개의 다른 타입의 목줄을 샀다. 하나는 목걸이와 줄이 분리되는 것이고, 하나는 긴 밧줄로 끝이 올가미같이 되어 있는 형태의 것이다. 크게 고리를 만들어 개의 머리에 씌우면 그냥 쑥 들어가게 되어 있고, 또 잡아당기면 적당히 목을 졸라맨다.

두 가지 형태의 목줄을 산 이유는 내 캠프로 데려가려고 할 때 개가 반항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게르나스가 공격적이 되면 별로 접촉을 안 해도 올가미를 쉽게 씌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게르나스를 떠올리면서 암만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날 때 어떤 시나리오가 만들어질까 마냥 궁금하기만 했다.

2013년 9월 24일, 와디 럼 사막의 내 집에 도착했다. 내가 진정 집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게 된 최초의 계기였다. 모로코에서 여행하고 있는 동안, 모로코의 분위기는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모로코에서,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와디 럼에 있는 나의 텐트가 그리웠고, 나의 귀향처처럼 느껴졌다. 암만에 있는 아파트나 뉴욕에 있는 아파트보다도 더욱 그리운 그 무엇이었다. 나의 물건을 다 풀어놓고 난 후에 나는 곧바로 밧줄로 된 목줄을 집어 들고 살라의 캠프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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