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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복거일 소설 ‘이승만’ | 물로 씌여진 이름 (제1부 광복) 

제17장 국치일 행사 (6) 

서재필이 긴 망명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온 때는 청일전쟁으로 조선을 둘러싼 국제 환경이 크게 바뀌고 갑오경장으로 조선 사회가 변신하려 애쓰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은 그에게 조국의 발전을 위해 힘차게 활동할 무대를 마련해주었다. 처참하게 실패한 갑신정변의 경험과 미국 생활에서 얻은 지식들은 그를 그런 임무에 적합한 인물로 만들었다.
서재필은 궁극적으로 인민들의 지식 수준이 사회 발전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다. 조선 사람들의 지식이 시민으로서 필요한 수준에 이르기 전에는 아무리 좋은 개혁 방안들도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국왕의 절대적 권한을 줄이고 인민들의 권한과 자유를 늘리려는 개화가 국왕에 대한 불충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선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아직 중세 국가의 신민(臣民)에 머무는 조선 사람들을 근대 국가의 시민으로 만드는 방안으로 그가 고른 것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지식을 널리 전파하는 신문이었다. 당시 조선엔 신문이 없었다. 1883년에 정부에서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했었지만, 그것은 관보(官報)여서 진정한 신문이 아니었고 한문을 써서 대부분의 인민은 읽을 수 없었다. 그나마 세 해 만에 폐간되었다. 대중을 상대하는 신문의 필요성은 개화파 지식인들 모두가 절감했지만, 일본 공사관이 탐탁지 않게 여겨서, 추진하지 못한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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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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