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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2부)] 중세 중국화와 유교 수용의 주역들(4) 이색, 성리학 교육의 초석을 세우다 

성균관 신진사대부의 힘 조선 건국으로까지 이어져 

원나라 과거제도 등 원용해 고려에 맞게 시행
정몽주·정도전·이숭인 등 유능한 성리학자 발탁도


▎충남 서천에 있는 문헌서원. 유생들을 가르쳤던 곳으로 목은 이색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아들 이색(李穡)은 1328년(충숙왕 15) 태어났다. 호(號)는 목은(牧隱)이다. 포은(圃隱)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과 더불어 고려 말 3은(隱)으로 불린다.

제자 권근이 지은 ‘신도비’에 의하면 이색은 어릴 때부터 비할 데 없이 영특했으며, 글을 읽으면 암기했다고 한다.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한 이색은 어려서부터 소년 진사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색의 삶은 21세 되던 1348년(충목왕 4) 극적으로 변했다. 그해 부친 이곡이 원나라의 종5품 관직인 중서성(中書省) 감창(監倉)으로 승진해 아들 이색을 데리고 북경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이곡은 원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했기에 원나라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곡이 아들 이색을 북경에 데려간 이유는 원나라 국자감에 유학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원나라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은 초시 합격자, 백관 자제, 서민 자제 등이었다. 초시 합격자 정원은 100명으로 몽고인 50명, 색목인 20명, 한인(漢人) 30명이었다. 백관 자제는 종5품 이상의 백관 자제로 정원은 200~300명이었고, 서민 자제 정원은 114명이었다. 이에 따라 원나라 국자감에는 대략 500명 내외의 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었다. 이색은 부친 이곡이 종5품 감창에 임명됐기에 백관 자제로 입학할 수 있었다.

원나라 국자감에 입학한 학생들은 명륜당(明倫堂) 앞에 자리한 6재(齋)에서 기숙 생활을 했다. 6재는 명륜당 앞의 동쪽과 서쪽에 배치된 기숙사의 건물 이름이었다. 동쪽의 기숙사를 동재(東齋), 서쪽의 기숙사를 서재(西齋)라고 했는데, 동재와 서재를 각각 3개의 재로 구분하고 아랫부분을 하재(下齋), 중간 부분을 중재(中齋), 윗부분을 상재(上齋)로 했다.

하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소학(小學), 중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4서(四書), 상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5경(五經)을 중심으로 공부했는데, 하재의 소학을 마치면 중재로 진급해 4서를 공부하고, 중재의 4서를 마치면 상재로 진급해 5경을 공부하도록 규정했다.

이런 규정으로 본다면 원나라 국자감의 학습 과정은 처음 입학한 학생은 초급 과정인 하재에 들어가 소학을 공부하게 하고, 소학을 이수하면 중급 과정인 중재에 들어가 4서를 공부하게 하며, 4서를 이수하면 마지막으로 고급 과정인 상재에 들어가 5경을 공부하게 하는 3단계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하재·중재·상재에서 배우는 소학·4서·5경은 성리학자들의 해석을 기본으로 했는데, 그 이유는 원나라가 주자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색이 원나라 국자감에 입학해 공부한 유교는 곧 주자성리학이었다.

원나라 국자감 유학에서 이색을 가장 괴롭힌 것은 중국어였다. 이색은 한문은 잘했지만, 중국어는 잘하지 못했다. 원나라 국자감 수업은 명륜당에서 이뤄졌는데, 당연히 중국어로 진행됐다. 수업은 일단 전날 공부한 내용을 학생 중 한 명이 추첨으로 선발돼 중국어로 설명한 후, 선생님이 새로운 진도를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이색은 중국어가 약해 선생님의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쩌다 전날 공부한 내용을 설명하는 역할에 추첨으로 선발되면 제대로 말하지 못해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이런 사정을 이색은 ‘유회성균관(有懷成均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명륜당에 올라 제일 두려운 것은 ‘어제 수업한 내용을 해설하는 일에 추첨될까’였으니(升堂最怕抽籤講)/ 이는 발음이 서툴러 뜻을 전달하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爲是音訛意莫傳)/ 당시 여러 학생은 모두가 진정한 유학자여서(當時諸子摠眞儒)/ 설명이 정밀하고 말도 유창했는데(說到精微肯囁嚅)/ 나만 홀로 오래도록 입을 꾹 다문 채로(獨有牧翁長閉口)/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마치 고목 같았네(中堂兀坐似枯木)”

중국어는 서툴렀지만 한문 실력은 탁월

이렇게 중국어가 서툴렀던 이색인지라 국자감 유학 생활 내내 하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색의 한문 실력과 작문 실력은 아주 탁월했다. 이색이 한문으로 쓰는 과제물이나 답안을 본 선생님이나 동기들은 탁월한 작문 실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곤 했다.

서거정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이색이 처음 원나라에서 벼슬할 때, 그곳 학자 중 한 명이 중국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색을 경멸하면서 “술잔을 들고 바다에 들어간들 많은 바다를 알까?(持杯入海知多海)”라고 놀렸다. 다양한 바다의 맛을 알려면 물을 떠먹어야지 떠먹지도 못하면서 잔을 들고 물속으로 들어가 봐야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즉 중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북경에서 벼슬해 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조롱이었다.

그러자 그 말을 알아들은 이색은 즉석에서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는 작은 하늘이라 말하네(坐井觀天曰小天)”라고 받아쳤다. 중국말을 제대로 못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너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람이라는 반박이었다. 이에 이색을 조롱하던 학자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고 한다. 이색은 부족한 중국어 실력을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만회했던 것이다.

1348년(충목왕 4) 원나라 국자감에 입학했던 이색은 1351년(충정왕 3) 1월 부친 이곡이 세상을 떠나자 만 3년 만에 북경을 떠나 귀국하게 됐다. 21세에 북경으로 유학을 떠났던 이색은 귀국했을 때 24세의 한창 나이가 됐다.

그런데 이색이 귀국하던 1351년에 고려와 원나라에서는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다. 먼저 원나라에서 홍건적의 난이 발발했다. 홍건적(紅巾賊)은 이마에 붉은 두건을 쓴 도적이란 뜻인데, 백련교(白蓮敎)라고 하는 비밀 종교조직이 중심이었다.

본래 백련교는 중국 남송 때 모자원(茅子元)이라는 사람이 창시한 불교계 교단이었다. 모자원은 극락왕생하려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된다고 설법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의 호응을 받았다.

또한 악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채식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기에 그의 교단이 백련채(白蓮菜) 또는 백련교(白蓮敎)로 불렸다고 한다. 모자원이 죽은 후 백련교는 미륵사상과 결합하면서 점점 더 반체제 조직으로 변했다. 그와 비례해 국가권력의 탄압이 가중돼 결국 비밀 종교화했다.

1351년 여름 황하 유역에서 큰 홍수가 발생했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치수공사를 위해 대대적으로 농민들을 징발했다. 이에 반발한 백련교도들이 홍건을 이마에 두르고 1351년 5월 봉기하면서 농민반란이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특히 농민군이 양자강 이남의 강남 지역을 장악하자 원나라는 크나큰 곤경에 빠져들었다. 당시 원나라의 국가재정 약 80%를 강남 지역에서 담당했는데, 그 강남 지역이 농민반란군에게 장악되자 국가재정이 파탄 상태로 악화됐던 것이다.

홍건적의 난이 발발한 후 원나라는 전국적인 내전 상태에 더해 극심한 재정 곤란까지 겪게 됐다. 당연히 원나라는 주변 국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1351년 12월 공민왕이 고려왕으로 즉위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내분 상태를 틈타 국정을 일신하고 자주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동북아 각국 인재들 응시한 시험에서 2등 차지


▎1. 이색의 제자로 온건개혁파였던 정몽주. 2. 조선 500년 유교사회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되는 이색. 3. 조선 왕조 개창의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정도전.
공민왕이 즉위했을 때 이색은 부친 이곡의 3년상을 치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색은 국정을 일신하고자 하는 공민왕의 이상과 열망에 동조했다. 1352년(공민왕 1) 4월, 이색은 상소문을 올려 토지겸병, 왜구침략, 과거제 문란 등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했다. 특히 과거제 문란의 원인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아도 응시할 수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성균관 입학생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 같은 대안은 물론 원나라 국자감의 유학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색은 유학 경험에서 터득한 지식을 활용해 고려의 현실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던 셈이다. 하지만 아직 나이도 어리고 벼슬도 없어서 많은 한계점이 있었다. 1353년(공민왕 2) 봄에 부친 이곡의 3년상이 끝나자 이색은 곧바로 과거 2차 시험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했다. 당시 시험관은 이제현이었고 이색은 26세였다. 이제현이 주관한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함으로써 이색은 이제현을 계승하는 고려 최고의 인재이자 차세대 성리학자로 공인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색은 그해 가을 시행된 원나라의 정동행성 향시(鄕試)에 고려 대표로 참가해 역시 장원으로 합격했다. 이로써 원나라 과거시험 2차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다음 해 봄에 이색은 북경에서 시행된 원나라 과거시험 2차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했다. 원나라를 비롯해 동북아 각국을 대표하는 인재들이 다 모인 2차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할 정도로 이색의 문장 실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당시 2차 시험 출제자는 원나라 국자감 박사 구양현(歐陽玄)이었다. 그는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을 원나라 관학으로 만든 허형(許衡)의 정통 학문을 계승한 학자로 평가받는 위대한 성리학자였다. 그런 구양현이 출제한 2차 시험에서 이색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2등으로 합격했던 것이다.

합격 후 이색이 인사차 찾아가자 구양현은 “나의 의발(衣鉢)이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전파될 것(衣鉢當從海外傳)”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자신의 학문이 이색을 통해 또다시 고려로 전파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즉 이색으로 말미암아 고려의 성리학이 중국본토의 성리학과 대등하게 발달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런데 “나의 의발이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전파될 것”이라는 구양현의 예언은 화엄학을 의상 대사에게 가르친 지엄(智儼) 스님의 꿈과 비슷한 면이 있다. 삼국시대 때 의상 대사는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갔다. 장안 남쪽에는 종남산(終南山)이 있는데, 그곳의 지상사(至相寺)에 화엄학의 대가 지엄 스님이 계셨다. 의상 대사는 지엄 스님에게 화엄학을 배우고자 장안까지 유학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의상 대사가 지상사에 도착하기 전날 밤에 지엄 스님이 꿈을 꿨다. 꿈에 보니 큰 나무 하나가 해동(海東)에서 나서 그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에까지 와서 덮었고, 그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지엄 스님이 나무에 올라가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가 하나 있어 광명이 멀리까지 비쳤다.

꿈에서 깨어난 지엄 스님은 놀랍고 이상히 여겨 청소하고 기다렸더니 의상 대사가 바로 왔다. 이에 지엄 스님은 의상 대사를 특별한 예의로 맞이하고 조용히 말하기를, “나의 어제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다”며 제자가 될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고려와 원나라 양국 관직 두루 역임

[삼국유사]에 실린 이 같은 지엄 스님의 꿈은 의상 대사를 통해 수용된 신라 화엄학이 장차 중국 본토보다 더 발달할 것이라는 예언에 다름 아니었다. 실제로 의상 대사를 통해 수용된 신라 화엄학은 세계 수준으로 발달했다. 따라서 “나의 의발이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전파될 것”이라는 구양현의 예언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첫째, 이미 안향에 의해 수용된 고려 성리학은 성리학이기는 하지만 정통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이색이 수용한 성리학이 정통 성리학이다. 둘째, 이색이 수용한 정통 성리학을 바탕으로 고려 성리학이 중국 본토에 버금가는 성리학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는 결국 이색이 원나라 국자감 유학과 원나라 과거 합격을 통해 고려 성리학을 국제 수준으로 발달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시 원나라 최고의 성리학자인 구양현에 의해 국제적으로 공인받기까지 했다는 뜻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색이 구양현에 의해 국제적으로 공인받았을 때 그의 나이 27세에 불과했다. 이색은 26세에 고려 과거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했는데, 또 27세에 원나라 과거시험에서 차석으로 합격함으로써 명실상부 국제적인 성리학자이자 국제적인 인재로 공인받은 것이나 같았다.

원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색은 원나라에서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 承仕郞 同知制誥 兼國史院編修官)에 임명됐다. 황제의 명령 및 원나라의 실록을 담당하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과거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기에 가능한 관직이었다.

이후 이색은 원나라와 고려를 오가며 양국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이색은 원나라의 교육제도와 관직제도뿐만 아니라 고려의 교육제도와 관직제도 역시 두루 경험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고려와 원나라 양국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던 이색은 1356년(공민왕 5)부터 연로한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원나라 관직을 버리고 고려로 돌아왔다. 그 뒤로 이색은 고려의 관직만 역임하면서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도왔다. 당시 이색과 더불어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돕던 일군의 성리학자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불렀다.

그런데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홍건적 10만이 고려로 쳐들어오는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1351년 이래 중국을 휩쓸던 홍건적이 원나라 관군에 밀려 만주를 거쳐 고려까지 쳐들어온 것이었다. 10만의 홍건적을 감당하지 못한 공민왕은 11월 개경을 버리고 안동으로 파천했다.

그때 이색은 공민왕을 호종(扈從)해 안동까지 갔다. 홍건적에게 함락 당한 개경은 1362년(공민왕 11) 1월에야 수복될 수 있었다. 그 3개월 동안 개경의 주요 궁궐과 관청이 모두 불타거나 파괴됐다. 개경의 동대문 안쪽에 있던 성균관 역시 불타버리고 말았다.

안동까지 파천했던 공민왕은 1년 3개월 만인 1363년(공민왕 12) 2월 개경으로 환도했다. 하지만 불타버린 궁궐과 관청들을 복구할 여력이 없었다. 궁궐을 복구하지 못한 공민왕은 대신 사찰에서 지내야 했다. 그런데 성균관이 불타버렸다고 해서 교육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개성부 산하의 학당(學堂)에 학생들을 모아 교육하도록 했다.

이런 와중에 1366년(공민왕 15) 11월 원나라 하남왕(河南王)이 파견한 곽영석(郭永錫)이 개경에 도착했다. 당시 원나라 하남왕은 홍건적 토벌에 앞장서며 고려와의 군사협력을 모색 중이었다.

홍건적 때문에 안동까지 파천했던 공민왕은 원나라 하남왕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자 했다. 공민왕은 하남왕이 파견한 곽영석을 접대할 관반(館伴)으로 이색과 임박(林樸)을 임명했다. 이색은 고려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손꼽혔고 임박은 공민왕이 신임하던 신돈의 측근이었다.

성균관 중건에 나서는 공민왕


▎조선시대 과거시험 풍경을 그린 민화(民畵).
그런데 임박 열전(列傳)에 의하면 곽영석은 관반 임박에게 “고려의 산천이 빼어나다는 것과 아직도 기자(箕子)의 풍속이 남아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지도와 예악 및 관제(官制)를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한다.

아마도 곽영석은 하남왕이 고려와 더불어 홍건적을 토벌하고자 했기에 정말 고려가 유용한 파트너인지 확인하기 위해 지도와 예악 및 관제를 보려 했을 듯하다. 지도를 이용해서는 고려의 군사적 가능성과 역량을 확인하고, 예악과 관제를 이용해서는 고려의 문화적 역량을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당연히 임박은 곽영석의 요청을 신돈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신돈은 거절했다. 아마도 신돈은 홍건적에게 쑥대밭이 된 고려의 현실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을 듯하다. 이와 관련해 ‘임박 열전’에는 “우리나라 산수의 신령스러움과 빼어남을 알려거든 원나라의 황후와 황태자를 보십시오. 그분들이 바로 우리나라 산수의 빼어난 기운을 타고났습니다”는 말로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박이 언급한 원나라의 황후는 공녀로 파견됐다가 황후에 오른 기황후이고, 황태자는 기황후가 출산한 태자다. 신돈은 원나라의 기황후와 황태자가 있으면 되지 뭘 더 알고 싶은가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하도록 했을 듯하다. 이렇게 거절당하자 곽영석은 “드디어 세상 부모들 마음으로 하여금 아들보다는 딸을 낳는 것이 귀하다고 믿게 하는군요”라고 응수했다.

임박의 말대로라면 홍건적을 토벌하겠다는 고려는 달리 믿는 것이 없고 오직 기황후와 황태자만 믿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고려는 홍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딸들을 낳아 공녀로 보내겠다는 뜻이냐고 모욕했던 것이다. 이런 모욕을 들은 고려 사람들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곽영석이 관반 이색과 함께 12월에 성균관 문묘(文廟)를 참배했다고 한다. 이로 보면 곽영석은 임박에게 거절당한 후 같은 요청을 이색에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이색은 고려의 현실을 있는 대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지도를 보여 주는 한편 고려 예악의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 성균관 학생들을 임시로 수용한 개성 학당으로 안내했을 것이다.

곽영석은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성균관 시설이 너무나도 형편없자 “내가 듣건대 귀국은 예로부터 문(文)을 숭상한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런 지경이 됐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색은 “1361년(공민왕 10) 성균관이 불탔는데, 고려 국왕은 백성들을 혹사하지 않고자 아직 궁궐도 수리하지 못했습니다. 이곳은 개성 산하의 학당입니다”라고 사정을 설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폐허가 된 성균관을 5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한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왕인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공민왕의 마음을 눈치챈 신돈은 측근 임박을 시켜 성균관 중건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1367년(공민왕 16) 5월, 임박이 상소문을 올려 성균관 중건을 요청하자 공민왕은 곧바로 허락했다. 공민왕은 특별히 신돈·이색·유탁 3명으로 하여금 성균관 중건을 책임지도록 했다.

그때 신돈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선성(先聖)에게 “정성을 다해 중건하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자 신돈 측근들은 “옛 제도를 약간만 고치면 쉽게 완성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최대한 비용을 줄이자 건의했다. 국가재정도 빠듯하고 유교 교육이 꼭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돈은 “공자는 천하 만세의 스승님이다. 작은 비용을 아끼다가 예전의 규모를 어긋나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신돈은 퇴락한 성균관 때문에 크게 부끄러워하는 공민왕의 자존심을 세워 주려면 전보다 더 웅장하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500년 유교사회의 초석 다져

이에 공민왕은 부족한 비용을 충당하려고 백관들로부터 품계에 따라 기부금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신돈은 성균관의 건물 배치, 교육 과정, 평가 방법 등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스님 출신인 신돈에게 성균관 교육은 생소한 분야이기 때문이었다. 그 분야에 대한 자타공인 최고 전문가는 단연 이색이었다. 공민왕은 이색을 개성 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해 성균관 중건과 관련된 세부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이색은 성균관을 중건하면서 건물 배치, 교육 과정, 평가 방법 등을 대대적으로 개혁했는데 자신이 원나라 국자감에서 유학할 때 보고 배운 내용을 기준으로 했다. 예컨대 성균관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각각 4서재(四書齋)와 5경재(五經齋)로 편성했는데, 4서재는 대학재(大學齋)·논어재(論語齋)·맹자재(孟子齋)·중용재(中庸齋)였고, 5경재는 예기재(禮記齋)·춘추재(春秋齋)·시재(詩齋)·서재(書齋)·주역재(周易齋)였다.

동재와 서재를 이렇게 4서재와 5경재로 구분한 것은 물론 원나라 국자감의 3재 중 중재(中齋)와 상재(上齋)를 본뜬 것이었다. 원나라 국자감의 중재에서는 4서를 교육했고, 상재에서는 5경을 교육했는데, 그 방식을 그대로 원용해 4서재와 5경재로 구분했던 것이다. 교육 과정과 평가 방법 역시 원나라 국자감을 원용해서 4서재의 대학재부터 시작해 마지막으로 5경재의 주역재에서 끝내는 것으로 했다.

이처럼 동재와 서재가 4서재와 5경재로 개혁되면서 교육 내용도 성리학 위주로 개편됐다. 4서재에서 교육하는 4서는 당연히 주자의 4서집주(四書集注)를 기준으로 했고, 5경재에서 교육하는 5경 역시 주자의 집주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367년(공민왕 16) 이후 성균관 교육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됐다. 또한 이색은 원나라의 과거제도를 원용해 성균관 교육을 지방의 향교 교육뿐만 아니라 과거시험과도 연계시켰다.

아울러 이색은 정몽주·정도전·이숭인·김구용·박상충·박의중 등 유능한 성리학자들을 학관(學官)으로 발탁함으로써 성균관을 명실상부한 성리학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와 성리학이 정치적·학문적으로 힘을 길러 결국에는 조선 건국을 성사시키기까지 했다.

원나라 구양현의 공인까지 받은 이색에 의해 초석이 세워진 성균관 교육 제도 그리고 과거 제도는 조선시대로 이어져 500년 유교사회의 초석이 됐다. 이런 점에서 이색은 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한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으로 손꼽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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