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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2)] 변방의 오랑캐 초(楚)·오(吳)·월(越), 중원을 품다 

춘추시대 천자의 자격 솥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 

인구·경제력 키운 주변 국가들, 중심부로 진출해 패권 경쟁
‘스포츠’ 같았던 전쟁, 초나라 등장 후 전면적 끝장 승부로 격화


▎상(商)나라 말기에 제작된 구정(九鼎). 구정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했다. 상하이 박물관 소장. / 사진 : 마운틴
권력을 장악하는 지름길은 어떻게 생겼을까. 중심과 주변(the core and the periphery) 중에 어디를 먼저 장악해야 할까. 권력 상층부인 엘리트와 하층부 민중(the top and the bottom) 중 어느 쪽 마음을 장악하는 게 더 시급할까. 춘추전국시대의 패자들은 주변을 장악함으로써 중심 장악에도 성공했다.

“초나라 제후가 육혼 오랑캐를 정벌하다가 낙에 이르러 주나라 땅에서 열병식을 함에 정왕이 왕손만을 보내 초 제후를 위로할 때 초 제후가 솥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楚子伐陸渾之戎, 遂至于雒 觀兵于周疆. 定王 使王孫满 勞楚子, 楚子 問鼎之大小輕重焉.)”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3년(기원전 607년) 조의 기사다. 초(楚)나라 제후를 ‘초자(楚子)’라 한 것은 제후의 등급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 중 ‘자’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낮은 등급에 속했다. 제후의 등급은 족보(族譜)가 첫째 기준이었지만 국력도 그다음으로 중요한 기준이었다. 주(周)나라 초기, 초나라 제후가 ‘자’의 등급을 받을 때는 초나라의 국력도 약소했다. 오랑캐 지역의 작은 세력 하나가 주나라 조공체제에 들어와 최소한의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300년 후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초나라 세력이 당시의 어느 제후국 못지않게 커진 기원전 704년, 초나라 임금 웅통(熊通)은 자기네가 3황5제(三皇五帝) 중 전욱(颛頊)의 자손이고 조상인 죽웅(鬻熊)이 주 문왕(文王)의 스승이었다며 등급의 상향 조정을 주나라 천자에게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스스로 ‘왕’의 칭호를 취했다. 그때까지는 ‘왕’이 천자만의 칭호여서 제후가 감히 취할 수 없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 초 장왕(莊王)이 구정(九鼎)의 ‘스펙’을 따져 묻고 있었다. 구정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했다. 구정은 “중국 하(夏)나라의 우왕(禹王) 때에, 전국의 아홉 주(州)에서 쇠붙이를 거두어서 만들었다는 아홉 개의 솥”이다.(표준국어대사전)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물은 데는 ‘내가 지금 천자를 천자로 존중해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구정을 구리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천자의 권위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니 절대적 상하관계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경고의 뜻이 담긴 것이었다. 그래서 ‘솥에 관해 묻는다(問鼎)’는 말이 하극상을 가리키는 숙어로 쓰이게 되었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대다수 제후국이 지금의 허난(河南)성 일대와 그 인접 지역에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이것이 상(商)나라 시절부터 ‘중원(中原)’으로 전해져 온 오래된 동네였다. 그중에서 인구가 몇만에 이르는 나라면 큰 편이었고 10만을 넘는 나라가 별로 없었다. 도시국가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나라들이었다.

춘추시대 천하 지배 원칙은 ‘존왕양이’ ‘계절존망’


▎장쑤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 소재 반문(盤門)에 있는 오자서 조각상. / 사진 : Peter Potrowl
그런데 주변부에는 제(齊)·연(燕)·진(晉)·진(秦)·초(楚) 등 인구100만을 바라보거나 넘어서는 나라 몇 개가 계속 커나가고 있었다. 상나라 때는 중원 바깥, 외이(外夷)의 지역이던 곳이다. 외이라고는 하지만 농경 문명이 자리 잡고 있었고, 황하문명권에 동화되지 않을 뿐이던 곳이 많았다. 주나라 시대 들어 그런 지역을 끌어들인 몇 개 제후국이 ‘강대국(great power)’을 넘어 그 시대의 ‘초강대국(superpower)’ 자리를 넘보게 된 것이다.

춘추시대 천하질서의 원리를 대표한 구호는 ‘존왕양이(尊王攘夷)’와 ‘계절존망(繼絶存亡)’이었다. ‘존왕양이(임금을 받들어 외적을 물리친다)’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비슷하게 통할 만한 구호였는데, ‘계절존망(끊긴 것을 이어주고 사라진 것을 남겨준다)’ 구호에는 춘추시대의 특색이 담겨 있었다.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 단계로 넘어가는 고비에서 끊기는 가문, 사라지는 국가가 너무 많은 시대였다. 세상이 좀 덜 시끄럽고 참혹한 일이 적기 바라는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 ‘계절존망’ 구호였다.

기원전 771년 주나라가 오랑캐의 공격을 피해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부근에 있던 왕도를 허난(河南)성 뤄양(洛陽) 부근으로 옮기면서 동주(東周)시대가 시작되었고, 동주시대의 전반부를 춘추시대, 후반부를 전국시대라 부른다.

동쪽으로 옮겨오면서 주나라 천자의 천하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중원 바깥에서 덩치를 키운 강대국들의 세력 경쟁이 중원 내부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강대국들은 굳이 팽창의 야욕이 없는 방면에서도 다른 강대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 정책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계절존망’ 원리의 필요가 더욱 절실했다.

왕도가 최상, 패업(霸業도 버금가는 권력 원리


▎오왕광청동감(吳王光靑銅鑑). 오나라 왕 광, 즉 합려(闔閭, 재위 기원전 514~ 496)의 딸이 초(楚)나라로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가져간 청동감이다. 감(鑑)은 중국 고대 동기(銅器)의 하나로 음식물 저장하거나 목욕통으로 사용됐다. 당시 혼인동맹은 세력균형의 주요 수단이었다. / 사진 : Cangminzho
춘추시대를 통해 ‘존왕양이’·‘계절존망’의 원리가 철저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지만, 그 원리를 존중하는 태도는 대체로 지켜졌다는 점에서 약육강식의 풍조가 휩쓴 전국시대와 구별된다. 천하질서의 전면적 붕괴를 막을 필요 위에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이 유지된 기간이었다.

천하의 질서가 천자의 권위로 지켜지는 것을 ‘왕도(王道)’라 할 때 강대국의 세력균형으로 최소한의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를 ‘패도(覇道)’라 할 수 있다. 후세에는 ‘패도’가 ‘벌거벗은 힘’을 가리키는 뜻으로 많이 쓰이게 되지만, 원래 패도는 왕도만은 못해도 그에 버금가는 괜찮은 원리를 뜻했다. ‘패(覇)’ 자는 ‘백(伯)’에서 나온 것으로 흔히 해석한다. ‘백’은 천자를 보좌해서 한 방면의 질서를 주도하는 우두머리 제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패도는 권력보다 권위와 신뢰에 의지하는 질서의 원리였다. [사기] ‘자객(刺客)열전’에 노(魯)나라 장군 조말(曹沫)이 회담장에서 제 환공(齊 桓公)을 비수로 협박해 노나라에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에 서명하게 한 일이 적혀 있다. 환공은 나중에 이 조약을 원천무효로 파기할 마음이었는데 관중(管仲)이 말렸다고 한다. 강요당한 약속까지도 존중하는 자세로 천하인의 믿음을 얻는 것이 목전의 득실보다 더 크다는 이유였고, 환공이 이 건의에 따름으로써 큰 패업(霸業)을 이뤘다는 것이다.

춘추시대의 패도를 대표하는 제후 5인을 꼽아 춘추5패(春秋五覇)라 부른다. 그런데 문헌에 따라 5패의 명단에 차이가 있다.

[사기색은(史记索隐)]에 들어 있는 제 환공, 진 문공(晋 文公), 진 목공(秦 穆公), 초 장왕(楚 莊王), 송 양공(宋 襄公)의 명단이 제일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다른 문헌에는 이들 중 한두 명이 빠지고 오왕 합려(吴王 闔閭), 월왕 구천(越王 勾践), 정 장공(鄭 莊公)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진(秦)나라와 초나라는 춘추시대 들어 비로소 존재가 나타난 나라였고, 더욱이 오나라와 월나라는 춘추시대 말기에 와서야 일어난 신흥국이었으므로 이 나라 임금들을 춘추5패로 꼽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의 천하 질서에 미치는 힘이 워낙 큰 세력들이었기 때문에 5패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서주시대까지 오랑캐 취급을 받던 진(秦)·초·오·월 등 신흥국들이 경쟁의 압력이 적은 주변부에서 실력을 키워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그 성장의 주된 수단은 전쟁이었다. 춘추시대를 통해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초기의 전쟁은 운동경기처럼 한 차례 접전의 결과에 따라 진 쪽이 적당히 양보하는 맹약을 맺고 끝내는 방식이 표준이었다. 그런데 춘추 말기에는 상대방을 끝장내자는 전면적 지구전(持久戰)이 유행하게 되었다. 지난 회에 소개한, 송 양공의 몰락을 가져온 기원전 638년의 전쟁도 그런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병법의 대명사로 통하는 손무(孫武)와 오기(吳起)가 중원의 오래된 나라 출신이면서 오나라와 초나라에서 활동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사실이다. 새로운 전쟁 방식이 변방의 신흥국가에서 더 쉽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사기] ‘손자오기(孫子吳起)열전’에는 제(齊)나라 출신의 손무가 오왕 합려에게 등용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궁중의 여인으로 병법을 시연하다가 합려의 애첩 둘이 군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목을 쳤다는 이야기다. ‘애첩’이라 해서 여색을 아끼는 합려의 마음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 뜻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군주의 처첩은 나라 안팎의 중요한 동맹 관계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손무의 책략에는 임금의 군령(軍令)을 절대화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기원전 506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할 때 보름 동안 다섯 차례의 연이은 전투 끝에 초나라 수도 영(郢)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그보다 백여 년 전 무식한 공격으로 송 양공을 혼내준 초나라 군대도 그사이에 중원의 우아한 전쟁 방식에 길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달려드는 오나라 군대에 기가 질렸을 것이다. “우리도 한때는 빡세게 놀았는데, 이놈들은 진짜 너무한다!”

같은 열전 뒤쪽에 나오는 오기는 손무보다 약 100년 후 위(衛)나라 출신으로, 초년에 노(魯)나라와 위(魏)나라에서 장군을 지내고 뒤에 초 도왕(悼王)에게 등용되었다. 그는 “법령을 정비하여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고 왕족의 봉록을 폐지하여 군대를 키웠다”고 적혀있다. 한 마디로 왕권 강화였다. 이런 정책으로 왕족과 대신들의 미움을 받은 오기는 도왕이 죽은 후 그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도왕의 시신 곁으로 피해서 그를 향해 쏜 화살 중에 시신에 맞은 것이 있었다. 숙왕(肅王)으로 즉위한 태자가 이 불경죄를 빌미로 공격에 가담한 자를 모두 처단했으니, 오기는 자기 죽음으로까지 초나라의 중앙집권에 공헌한 것이다.

형제 대신 장자 왕권승계는 엄청난 역사 발전


▎청두(成都)에 있는 금사(金沙) 유적지. / 사진 : 벤벤
5패 중 오왕 합려의 행적이 특히 흥미롭다. 두 개의 두드러진 대목이 있는데, 하나는 왕이던 사촌동생 료(僚)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 또 하나는 그 9년 후 초나라를 거의 멸망시킨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두 대목에 모두 깊이 얽힌 인물이 오자서(伍子胥)였으므로 [사기] ‘오자서열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오나라 역사가 사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합려의 할아버지 수몽(壽夢, 재위 기원전 586~561)부터인데, 합려의 아버지 제번(諸樊, 기원전 561-548)이 그 장남으로 뒤를 이었다. 제번 후에 그 동생 여제(余祭, 기원전 548~531)와 여매(余昧, 기원전 531~527)가 뒤를 이었는데 여매 다음에 문제가 생겼다. 수몽의 넷째 아들 계찰(季札)이 굳이 왕위를 사양하는 바람에 여매의 아들 료에게 왕위가 넘어갔다고 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합려가 기원전 515년에 료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합려의 계승권 주장은 장자(長子) 상속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합려 이전의 오나라에는 그런 원리가 없었음을 그 숙부들의 왕위 계승이 보여준다.

형제 계승에서 장자 계승으로 넘어간 변화는 국가 형태의 큰 발전이었다. 국가 규모가 작을 때는 권위보다 권력이 중요했다. 임금이 죽었을 때 나이 어린 아들보다 장성한 동생이 역할을 이어받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규모가 큰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존중받는 권위가 임금 개인의 힘보다 더 중요해진다. 누가 더 힘이 세냐에 따라 이 사람도 될 수 있고 저 사람도 될 수 있는 모호한 기준이 아니라,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천명(天命)의 확실한 소재를 밝혀야 한다.

상나라 세계(世系)에는 부자 계승보다 형제 계승이 압도적으로 많다. 반면 주나라는 장자 계승의 원칙이 확고했다. 공자가 주공(周公)을 성인으로 받든 큰 이유가 이 원칙의 확립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형인 문왕(文王)이 죽은 후 어린 조카 성왕(成王)의 섭정을 7년간 맡아 실제로 천자 노릇을 하면서도 신하의 자리를 지킨 것이 주공의 공로였다. 당시 새 왕조에 가장 큰 위협을 가한 것이 성왕의 다른 숙부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었다는 사실로 볼 때 장자 계승의 원칙은 그때까지 확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보다 500년 후까지 형제 계승이 시행되고 있었던 사실에서도 오나라의 후진성을 알아볼 수 있다. 이웃의 초나라는 왕을 칭한 지 200년이 되어 문명국 행세를 하며 오나라를 깔보고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 말에 이르러 오나라의 국력이 급속히 자라나는 과정에는 선진국에서 넘어온 인재들의 역할이 컸다. 손무도 그런 인재의 하나였지만, 가까운 초나라에서 넘어온 사람이 많았다. 오자서처럼 원한을 품고 초나라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복수를 위해서도 경륜을 펼치기 위해서도 기술 수준이 낮으면서 잠재력이 큰 오나라가 매력적인 대안이었으리라고 이해된다.

오자서는 료왕에게 초나라를 공격할 뜻이 강하지 않음을 알자, 합려를 위해 료왕을 암살했다. (암살의 선진기술도 가져온 모양이다.) 합려가 즉위 후 초나라에 적극적 공세를 취한 데는 군사적 긴장상태로 정치적 반대를 가로막고 대외적 성공으로 자기 왕위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오자서는 자기 시대의 모순을 상징한 인물이었다. 초나라에서 달아난 지 20년 만에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 수도를 함락시킨 그는 자기 아버지와 형을 억울하게 죽인 평왕(平王)의 무덤을 허물고 그 시신에 매질을 했다. 아무리 잘못이 있더라도 자기가 모시던 임금을 그토록 가혹하게 대한다는 것은 춘추시대의 윤리에서 벗어난 짓이었다. 전국시대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그러나 다시 20년이 지난 후 오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에게 월나라 구천을 철저하게 짓밟을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역 패권을 확고히 다지자는 것이 오자서의 주장이었는데 부차는 위세를 중원에까지 떨치고 싶은 마음이 바빴고, 그를 위해 월나라를 포용해서 활용하려는 정책이었다. 오자서는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았고, 몇 해 후 부차가 중원으로 출정한 동안 월왕 구천이 기습으로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오랑캐가 중원 문화에 물들면 ‘오랑캐스러움’ 잃어버려


▎[삼국지]의 세계에서 천하 쟁패의 관문이었던 한중분지와 쓰촨성 사이의 검문관(劍門關). / 사진 : 먼퍼드
부차가 합려의 복수를 위해 장작 위에서 잠을 자고 구천이 부차에게 복수하기 위해 쓸개를 먹었다는 뜻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널리 쓰였지만, [사기]에는 ‘상담’만 나오고 ‘와신’은 보이지 않는다. 합려가 월나라와 싸울 때 입은 손가락 상처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오자서의 입장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지어내거나 부풀린 것 같다. 합려가 정말로 구천 때문에 죽은 것이라면 부차가 아무리 불효자라도 적당히 넘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구천을 보좌해 부차를 격파한 두 사람,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의 훗날 행적도 흥미롭다. 초나라 출신의 친구 사이로 경륜을 펼치기 위해 함께 월나라로 넘어가 구천을 모신 사람들이었다. 구천이 패업을 이룬 후 범려는 그를 떠나 제2의 인생을 꾸린 것으로 전해진다. 송(宋)나라 도(陶) 땅에 가서 주공(朱公)이란 이름을 쓰며 장사로 엄청난 재물을 모았다고 하여 ‘도 주공’은 재신(財神)의 대명사가 되었다. 범려가 떠나면서 문종에게 “구천은 어려움을 함께 겪을 사람이지 편안함을 함께 누릴 사람이 아니”라며 함께 떠날 것을 권했지만 문종은 남아 있다가 얼마 후 오자서와 비슷한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춘추시대를 통해 오랑캐의 땅으로 여겨지던 장강 유역에서 초·오·월 세 나라가 나타나자마자 중원을 호령하는 위세를 보인 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중원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오랑캐스러움’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기원전 638년 송양공을 곤경에 몰아넣은 것은 중원 문화에 물들지 않은 초나라 군대의 씩씩한 기세였다.

그러나 그런 오랑캐의 씩씩함이 얼마나 오래, 그리고 넓게 통할 수 있었을까? 중원의 오래된 나라들도 새로운 전쟁 방식을 익히고 있었고, 오랑캐도 중원에 일단 끼어들면 중원 문화에 물들어 오랑캐다움을 잃어버리는 추세가 있었다.

더 중요한 조건은 획득할 인적·물적 자원이 주변부에 풍성하다는 점에 있었다. 농경문화를 발전시켜 큰 인구와 생산력을 키워놓고 있으면서도 하·상·주 중심의 조공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있던 지역이 가장 중요한 정복 대상이었다. 그런 지역은 장강 유역에 많았다. 장강 중·하류 유역은 춘추시대에 초·오·월을 통해 중원에 편입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지역인 장강 상류 유역, 쓰촨(四川) 분지는 어떤 사정이었을까?

몇 백 년 후 한(漢)나라가 쇠퇴할 때 제갈량(諸葛亮)이 내놓은 천하 3분지계는 과거 황하문화권· 장강문화권·파촉문화권의 영역으로 세력권을 가르자는 것이었다. 한나라 400년 동안 쓰촨 지역은 제국체제의 주변부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한나라 이전부터 갖고 있던 풍부한 자원으로 촉한(蜀漢)의 근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쓰촨 지역 고대사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이 극히 적다. [사기] ‘진(秦)본기’에는 혜왕(惠王) 9년(기원전 316) 사마조(司馬錯)가 촉(蜀)을 정벌해 멸망시켰다는 기사에 이어, 몇 차례 촉후(蜀侯)의 반란 등 짧은 기사 몇 개가 보일 뿐이다. [화양국지(華陽國志)]·[산해경(山海經)]·[태평어람(太平御覽)] 등에 얼마간의 기록이 실려 있지만 사료로서 신뢰성이 약하다.

그런데 최근 30년 동안 이 지역의 고고학 발굴이 놀라운 내용을 쏟아내고 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1986년 삼성퇴(三星堆) 유적의 제사갱(祭祀坑) 출토였다.

중원·오랑캐 관계사 뒤집는 삼성퇴·금사 유적


▎삼성퇴(三星堆)에서 출토된 특이한 작품 중 하나인 청동입인상 (青銅立人像). 왕 혹은 무당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 : 모모
삼성퇴 발굴의 역사 자체가 참으로 기구하다. 청두(成都)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곳에서 1930년대 초 상당량의 옥기(玉器)가 우발적으로 출토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1934년부터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몇 차례 발굴이 있었다. 그러나 중원에서 파생된 변방문화에 불과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중시되지 않았다. 1980년에 이르러서야 신중국의 본격적 발굴이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사방 2㎞ 크기 도성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원전 2000년대 후반, 상나라와 같은 시기에 상나라 도읍 유적과 맞먹는 크기의 도성이 이 지역에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도성의 확인에 따라 발굴작업이 심화된 결과 1986년에 제사갱이 발견된 것이다. 두 개 구덩이의 풍성한 출토 내용은 ‘중국의 경이’를 넘어 ‘전 세계의 경이’를 불러일으킬 수준이었다. 병마용(兵馬俑)보다 더 큰 발견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당시 중국 문명의 중심지로 인식되어 온 상나라의 유적 출토 내용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뒤지지 않으면서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삼성퇴 유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봄 충칭(重慶)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의 고대 상황에 궁금증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여행 후 [바이두백과]로 삼성퇴에 관한 기초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귀국 후 동네 도서관에서 웨난(岳南)의 [삼성퇴의 청동 문명](심규호·유소영 옮김, 2책, 일빛 펴냄)이 눈에 띄었다. ‘고고학 르포’라 할 수 있는 이 책으로 삼성퇴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중국 고고학계의 상황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화양국지] 등 신뢰성이 약한 문헌 자료 내용을 새 고고학적 발견에 비추어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이 담겨있는데, 바람직한 노력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1986년 이후 쓰촨 지역의 고대문화를 바라보는 고고학계의 시각이 달라졌다. 황하문명의 한 지류가 아니라 그와 대등한 하나의 큰 흐름이 이 지역에 있었다고 보게 된 것이다. 그 흐름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 작업이 넓게 펼쳐졌고, 1990년대에 몇 개 중요한 유적지가 발견된 끝에 2001년 삼성퇴와 맞먹는 품질과 규모의 금사(金沙) 유적이 청두시 서쪽 교외에서 발굴되었다. 다량의 뛰어난 청동기와 옥기 외에 가면(假面)·관대(冠帶) 등 특이한 금제품이 여럿 나왔다고 한다. 고촉국(古蜀國)의 도읍이 삼성퇴에서 금사로 옮겨간 것으로 많은 학자가 추측한다고 한다.

기원전 316년에 진나라가 촉나라를 정복한 후 바로 군현제에 편입시키지 않고 촉후(蜀侯)를 임명했는데, 그 후 30여 년간 진나라가 임명한 촉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사기] ‘진 본기’에 몇 차례 보인다. 촉나라 왕조를 멸망시키고도 그 지역의 독립성을 소멸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의 촉나라 정복에 관한 설화가 있다. 촉나라가 진나라의 도움을 얻으려고 사신을 보냈을 때 혜왕이 그 기회에 촉나라를 잡아먹으려고 꾀를 썼다는 것이다. 큰 석우(石牛) 다섯 개를 만들어 촉왕에게 준다며, 꼬리 밑에 금 조각을 붙여놓고 금똥(屎金)이라고 했다. 대단한 보물로 여긴 촉왕이 장사들을 보내 석우를 끌어오게 해서 넓은 길이 생겼다. 그 길로 혜왕이 군대를 보내 촉나라를 공격했다는 것. 산시(陝西)성에서 쓰촨 성으로 넘어가는 길에 ‘석우도(石牛道)’라는 별명이 남아있다.

상나라에서 주나라 시대에 걸쳐 황하문화권과 대등한 수준의 문화와 세력을 이루고 있던 장강문화권과 파촉 문화권이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중화문명으로 합류하는 과정에서 황하문화권이 주도권을 갖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제철기술의 획기적 발전이 황하 유역에서 시작된 것 아닐까 궁리를 해봤지만, 지금까지 고고 발굴 성과가 이 가설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문자의 발달로 생각이 끌린다. 장강 유역의 청동기 유적에서는 상나라 유적처럼 풍부한 명문(銘文)과 복골(卜骨)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문명에서 문자의 역할은 워낙 의미가 넓고 큰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지만 앞으로 생각을 모아봐야겠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7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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