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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31)] 식생활에 관한 관습과 동물 금기 

‘사막의 지혜’에 과학을 허하라! 

음식의 보존 기술은 발전했지만 율법은 수천 년 전에 머물러
신념의 오류와 진보를 인정하는 것이 문명 발전의 원동력


▎미국의 돼지 농장에서 찍은 필자의 작품 사진. 돼지와 인간의 무차별성과 문명의 편견을 담았다.
모하메드는 내가 여행을 끝내고 자기 집에 개를 데리러 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통조림콩과 채소를 토마토소스에 볶은 요리와 신선한 오이와 토마토, 그리고 올리브 오일로 만든 후무스(빵을 찍어 먹는 페이스트)로 구성된 매우 아름다운 점심 테이블을 마련해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자마자 개에 관해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맛있는 점심을 다 끝낼 즈음 나는 게르나스에 관해 물어보았다. 내가 그 개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겠는지……. 그랬더니 그만 그날 아침 일찍 게르나스가 도망쳐버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그는 개를 반드시 붙잡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개가 도망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르나스는 목줄에서 벗어나려고 잡아당기고 또 당기고 해서 목에 상처가 났다. 그래서 철사로 목을 감아놓기까지 했는데도 필사적인 노력 끝에 다시 목줄에서 벗어났다. 나는 곧바로 게르나스를 찾으러 나서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불만이 많았지만, 혼자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게르나스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다음날, 관광객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캠프를 청소하는 이집트 일꾼이 개를 찾아 나섰다. 그 이집트인이야말로 게르나스를 주기적으로 돌봐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방에서 남은 음식을 게르나스 옆에 내다버리고 또 게르나스에게 물을 주곤 했다. 요르단에만 해도 점점 이집트, 예멘, 시리아 같은 가난하고 전쟁으로 피폐하게 된 나라들로부터 이민자나 난민이 많이 유입되고 있다. 이들을 부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베두인은 그들이 천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이 외국 노동자들에게 위탁한다.

사막 생활의 동반자가 생기다


▎게르나스의 목을 죄었던 철사.
그 이집트인이 게르나스를 발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게르나스는 그나마 그가 살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음식을 갖다 주는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르나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를 어떻게 안전하게 데려가면 좋을지 안달거리며 속을 태웠다. 그는 비록 좋지 않은 상태에 있었지만, 살라의 캠프는 여전히 그의 집이었다. 그래서 살라의 캠프로부터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의 새로운 집은 이제 살라의 캠프가 아니라 내가 거주하고 있는 타야의 캠프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할 수 없지! 아마도 타야의 캠프에 당분간은 도망가지 못하게 꽁꽁 묶어둘 수밖에 없을 거야. 그가 타야의 캠프를 새집으로 인지할 때까지!

그러나 나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게르나스는 날 보자마자 내게 달려들었다. 그를 목줄로 묶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그냥 내 곁에서 편안했고 순종적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가끔 토닥거리면서 함께 나의 캠프로 걸어왔다. 그는 전 구간을 집에 가듯이 날 따라왔다. 그 뒤로 게르나스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게르나스를 위해 사 온 목줄을 사용할 기회조차 없었다. 게르나스는 나를 죽을 때까지 따르고, 보호하고, 지켜야 할 유일한 존재로 곧바로 선택한 것이었다.

내가 와디 럼에 있는 동안, 게르나스는 자연 그대로 완벽한 자유를 누렸다. 가끔은 낮에 혼자 사라질 때도 있었지만, 어둑어둑해지면 어김없이 나의 캠프로 돌아와 텐트 문 앞에 웅크리고 밤새도록 나를 지켰다. 그가 나에게 온 것은 2013년 9월 25일이었는데, 그가 온 후로 시간은 빨리 지나갔고, 반석 위에 있는 것처럼 나의 삶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때 게르나스와 7주 동안 붙어있었다. 사막을 탐험하기도 하고 같이 산행하기도 하고, 하찮게 보이는 게임을 하면서 히죽거리고, 음식을 같이 먹고, 밖에서 캠핑할 때는 나란히 누워 잤다. 내가 친구들 자동차를 타고 사막의 깊숙한 데까지 가서 캠프를 쳤을 때도 게르나스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는 우리 차를 졸졸 따라왔다. 차를 놓쳐버렸을 때도 게르나스는 나를 어떻게 찾아내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나의 서재바위로 올라와서 책상 곁에 둔 방석 위에 누웠다. 내가 집필하는 동안에도 조용히 내 곁을 지켜주었다. 때로는 바위 절벽 끝에 서서 장엄한 사막의 파노라마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염소 떼나 낙타가 지나가면 짖어대기도 했다.


▎바위산 서재에 앉아있는 게르나스의 모습.
물론 그토록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막의 황무지에서 개의 충성심을 얻는다는 것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니다. 매일 내가 할 수 있는 한 성심껏 게르나스를 보살폈다. 빌리지의 상점에 갈 때마다 냉동된 염소고기와, 통조림 참치, 통조림 소시지, 그리고 때로는 얼린 닭 간 한 봉지 등을 사 왔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남긴 밥과 함께 섞어주면 게르나스는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의 왕성한 식욕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비참한 노예 생활에서 왕궁의 생활로 격상된 느낌이었을까?

그런데 냉장고가 없는 사막에서 고기 음식을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숙제였다. 특히 닭 간은 보관 기간이 짧았다. 그러니 사오는 대로 상당량의 한 봉지 전체를 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한 패킷에 든 닭 간은 개 한 마리가 한 번에 먹기에는 매우 많은 분량이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개를 위한 균형 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방식을 잘 몰랐다. 어찌 되었든, 게르나스는 사막에 사는 어떤 다른 개보다도 이미 호강을 하고 있었다. 개를 위해 누군가 매일 특별히 요리한다는 것은 사막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굴레에서 벗어난 게르나스의 왕성한 식욕


▎게르나스의 먹잇감으로 사온 염소 고기. 천장에 걸어 자연 건조를 시켜야 오래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닭 간과는 달리 염소고기는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했다. 나는 팀북투(Timbuktu)에서 도살된 염소의 내장을 발라낸 몸통 전체를 그늘에 걸어 말리는 것을 여러 번 본 적 있다. 그래서 나도 해동된 염소고기를 그늘에 걸어놓는 방식으로 보존 기간을 늘려보려고 했다. 염소고기를 소금에 비벼서 젓가락에 꿰어 꼬치를 만들고, 그 젓가락 꼬치들을 비닐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꼬치 끈을 야생동물이 쉽게 미칠 수 없는 부엌 천장에 매달았다. 그런 방식으로 고기는 사흘 동안 보존이 가능했다.

그렇게 보존한 염소고기를 요리할 때 사흘째 숙성한 고기는 특별한 향을 더욱 짙게 풍겼다. 사람에겐 그 냄새가 역겨울지 모르지만 게르나스는 그 냄새 나는 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보존 음식의 발효향은 익숙해지면 모든 동물에게 매력적인 것 같다. 나는 그 고기요리를 밥을 먹이기 위한 방편으로 조금씩 섞어주었다.

게르나스는 식성이 매우 까다로웠다. 그는 맨밥이나 그냥 빵, 그리고 생야채는 굶어 죽기 직전까지는 먹으려 하지 않았다. 야채를 고기든 밥에 섞어주면 밥만 발라 먹고 야채는 어떻게 해서든지 밀쳐 남겨놓았다. 개는 본시 늑대의 아종이기 때문에 육식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게르나스는 육식 중심으로 자라났을 것이 분명하다. 캠프에서 던져주는 닭뼈를 주로 먹었을 것이다. 나는 날카로운 닭 뼈로 인해 개가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베두인은 그런 얘기 아랑곳하지 않고 닭 뼈를 개에게 준다. 축제나 잔치 때 염소를 잡으면 그 내장을 개에게 주는데 그런 생내장에는 기생충이 많다.

그리고 염소고기를 발라먹고 나면 그 뼈를 개에게 준다. 그러나 와디 럼에 사는 다른 개들이 별로 까다롭지 않게 주는 것을 다 먹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게르나스의 까다로운 식성은 그의 열악한 환경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캠프에서 내다 버리는 썩은 밥과 야채 더미 옆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도무지 그에게는 역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식생활이 너무도 열악했던 것이다.

사막에서 개를 위해 고기를 다루는 동안, 하나의 재미있는 통찰을 얻게 되었다. 이전에는 왜 돼지고기가 이슬람이나 유대교에서 금기사항이 되었는지에 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돼지는 진흙에 뒹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더럽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막에서 실제로 고기를 보존하는 문제와 씨름을 해본 이후로는 돼지고기를 금하는 데는 아주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막의 율법은 왜 돼지를 터부시하나


▎베두인 마을을 찾은 서양인 관광객이 게르나스를 쓰다듬고 있다.
이러한 율법이 만들어진 시기에는, 돼지고기를 보존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돼지고기는 다른 고기보다도 사막의 열기 속에서 금방 상하기 마련이다. 돼지고기는 염소나 양이나 소의 고기와 같은 붉은 육질의 고기보다 훨씬 세포의 밀도가 낮다. 그래서 위험한 기생충이 살 속에 서식하기 쉽다. 돼지는 적당한 음식으로 사육되지 않거나, 그 고기가 철저하게 삶아지지 않으면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기 쉽다.

닭고기도 부패나 오염의 측면에서 동일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우선 닭은 작기 때문에, 닭 한 마리가 통째로 쉽게 요리될 수 있고 하루에 깨끗하게 소비될 수 있다. 그러나 돼지는 상황이 다르다.

닭이나 염소, 양은 사막의 환경 조건에 그나마 적응이 쉬운 편이지만, 돼지는 많은 물과 많은 먹이가 필요하기 때문에 실제로 사막에서 키울 수가 없다. 돼지는 떼몰이도 불가능하고 수송이 매우 어렵다. 돼지가 사막권의 종교 문명에서 한결같이 터부로 규정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풍요로운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사람이 먹고 남긴 것으로 돼지가 자연스럽게 사육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돼지가 먹는 것은 모두 사람이 먹을 수 있다. 돼지는 사람과 식재료의 경쟁 상대인 것이다.

일례를 들면 소는 사람과 식재료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사람이 먹지 않는 것을 먹는다. 더구나 소는 문명에 많은 노동력을 제공하고 똥은 귀한 연료가 된다. 소는 인간 문명에 공헌하는 존재다. 그러나 돼지는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육될 뿐이다. 그러니 사육되는 식재료는 모두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돼지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곡식이나 과일, 채소, 뿌리류의 식량자원이 낭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맛있고 매력적이다. 한 사회의 특권층이 돼지고기를 선호하게 되면, 그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민중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사라지게 된다. 돼지고기는 민중에게 원수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러한 식량자원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적 권위의 힘을 빌려 돼지고기를 금지했다는 것이 인류학자들의 공통된 정론이다. 모든 사회의 터부가 매우 불합리한 것도 많지만, 그 이면에는 어떠한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것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명의 측면들이다.

돼지는 식욕이 왕성해서 뿌리나 과일 같은 것이 없을 때는 쓰레기더미나 동물의 썩은 시체 같은 것도 마구 먹어버린다. 그래서 돼지의 살에는 기생충이 스며들 가능성이 높다. 닭도 돼지와 똑같이 먹이 스펙트럼이 넓은 잡식동물이지만, 날카로운 부리로 음식을 선별해서 먹는 능력이 발달해있고, 또 놀랍게도 산란 주기가 짧아 다량의 알을 인간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식량 순환에 있어 효율성이 지극히 높은 동물이다. 인간이 한 달에 한두 개의 난자를 생산하는 것에 비하면 닭이 알을 생산하는 주기는 동물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닭은 모든 문명에 있어서 종교적 터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진보의 간극


▎돼지는 땀샘이 없어서 체온 유지와 기생충 제거를 위해 진흙 목욕을 즐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발생하던 시기와 달리, 21세기에는 육류를 안전하게 가공하고 보존하는 기술이 발달했다. 위생이나 에코 시스템이나 경제적 구조 때문에 1400년 전에 형성된 음식 금기를 지금도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은 좀 어리석은 일이다. 무슬림에게 왜 돼지고기를 안 먹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논리를 전개한다. “돼지는 더러운 동물이야. 예언자께서 이미 돼지고기는 인간에게 해롭다는 것을 아셨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이미 근대과학에 의해 다 증명되었지.”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과학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종교는 인간에게 ‘믿을 것’을 강요한다. 믿는다는 것은 ‘신념의 도약’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문 없이 증거도 없이 교설을 맹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의 종교적 경전에 위배되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 그 증거는 배척되어야만 한다. 이전의 교설이나 학설을 부정하는 새로운 증거의 수용이야말로 과학의 정신이요, 인류 문명을 진보시킨 힘이다.

[구약]과 [쿠란]이 돼지고기는 더럽다고 규정해버렸기 때문에 돼지는 더러운 동물로 남아있어야만 한다. 베두인들이 개들이 더럽다고 말할 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아마도 그러한 신념은 광견병이 많았을 때 생겨났을 것이다. 지금은 근대과학이 광견병을 백신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은 사람들이 이러한 과학적 진보조차도 합리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한다.

사실 음식 금기는 인종적 편견을 조장키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 무슬림이나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 더럽기 때문이지. 저 돼지고기를 먹는 크리스천이나 이교도나 무신론자들은 우리보다 열등한 족속들이야.” 음식 금기는 자기들이 싫어하는 음식을 먹는 자들을 혐오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과거에 김치를 먹는 한국인을 서구인들이나 일본인들이 혐오스럽게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던 것과도 같다.

모든 문화에 있어서 사람들은 동물을 의인화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돼지의 경우는 공연히 아주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정말 억울한 것이다. 사람들은 돼지가 진흙 목욕을 즐기기 때문에 더럽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땀구멍이 없기 때문에 체온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가 ‘호미오스타시스(homeostasis)’라 부르는 생체항상성의 한 메커니즘일 뿐이다. 그리고 돼지를 욕심꾸러기, 탐욕스럽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잡식동물인 돼지가 진화 과정에서 많은 음식을 섭취하도록 진화되어왔을 뿐, 탐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탐욕이란 오로지 인간의 속성일 뿐이다. 돼지의 ‘잘 먹음’은 자연스러운 생리일뿐이다.

동물에 관한 편견에서 차별이 비롯돼


▎베두인에게 얻어와 동반자가 된 게르나스. 일반적인 사막의 개(뒤)는 옅은 색깔이다.
그리고 그들의 불운한 누명과 달리, 돼지는 적합한 자연환경 속에서는 매우 청결한 동물에 속한다. 나는 이 동물과 친해보기 위해 미국의 대규모 돼지사육농장에서 작품 사진 촬영을 감행한 적이 있다. 수천 마리의 돼지들이 매우 좁은 공간의 우리에 폐쇄된 아주 불안한 산업농장에서, 그리고 몇 달씩 전혀 청소해주지 않는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돼지들은 자기 배설물을 모두 우리 밖으로 밀어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먹고 자는 장소 가까이에서는 똥이나 오줌을 싸지 않는다. 나의 개 게르나스도 행위양식이 이와 동일했다. 그는 살라의 캠프에서 줄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배설물을 관리할 공간적 여백이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 온 후로는 항상 캠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소변을 가렸다. 얼마나 이런 문제에 관해 세심하였는지, 나는 사막에서 일 년 내내 단 한 번도 그가 똥 누는 것을 보지 못했다. 훗날 인도어 덕(indoor dog, 집안에서 키우는 개)이 되었을 때 특별한 훈련을 하지 않아도 대소변을 정확히 가렸다. 그는 집안에서 단 한 번의 사고를 친 적이 없다. 게르나스는 정말 깨끗한 개였다. 게르나스는 오물과 악취 속에서 살았어야만 했던 세월의 불행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게르나스는 칠칠치 못한 털과 더러운 냄새로 찌든 초라한 똥개로부터 독일 셰퍼드를 방불케 하는, 빛나는 털과 당당한 체구를 지닌 귀족적인 개로 매우 빨리 변해갔다. 주변 사람들의 인식도 따라서 같이 변해갔다. 게르나스는 ‘누라의 개’(누라는 사막에서의 필자 이름)로 통했고, 어떤 지역민들은 그 개를 내가 외국에서 데려온 것으로 인지했다.

와디 럼에서 전신이 새까맣거나, 까맣고 갈색의 털로 덮여 있는 개를 보기는 매우 힘들다. 이 지역의 대부분의 개는 옅은 색깔이다. 하얗거나, 옅은 브라운, 그리고 반점을 곁들인 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디쓰(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구전 자료 전승)에는 까만 개는 사악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어떤 베두인은 게르나스가 경찰견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텔레비전에서 본 할리우드 경찰 영화 속에 나오는 독일 셰퍼드를 연상한 것 같았다.

살라도 게르나스가 내 밑에서 변모한 후에는 그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가 개를 가져간 이후로 2주가 지났을 때 저녁 즈음, 그는 나의 캠프로 예기치 않은 방문을 했다. 나는 게르나스와 함께 있었다. 그는 아들 모하메드가 캠프 일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려 찾으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살라에게 모하메드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 살라는 게르나스를 보았다. 게르나스는 순간 그의 옛 주인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거절했다. 참으로 놀라운 상황이었다. 보통 개들은 옛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살라는 나에게 물었다. “게르나스가 어때? 참 보기가 좋군.”

게르나스는 나의 훌륭한 반려라고 내가 사랑을 담아 이야기했을 때,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제 이 개는 네 것이야. 가져!” 이 순간 게르나스는 공식적으로 나의 개가 되었다.

나중에 암만에 사는 친구 사이드, 관광 사업을 오래 했고 베두인의 관습에 정통한 나의 친구 사이드는 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은 이랬다. “베두인들은 자기가 키우던 개를 타인에게 주는 법이 없어. 사막에서는 소유관념이 강해서, 한번 자기 소유가 되었던 것을 남에게 양도하지 않아. 도대체 미루가 어떻게 그 개를 얻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천덕꾸러기 개에서 사랑받는 존재로


▎베두인에게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게르나스는 필자를 만난 뒤 마치 셰퍼드 경찰견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살라는 내가 게르나스에게 백신주사를 맞히고, 기생충 약을 먹이고, 그를 잘 보살펴준 것에 대해 감사히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캠프로 게르나스를 데려와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관광 손님이 있을 때도 게르나스는 자유롭게 배회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게르나스에게 “앉아, 누워, 굴러”하는 구령을 알아듣게 하였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그의 재롱은 관광객들의 관심의 한 초점이 되었다. 내가 게르나스를 살라의 캠프로 데려올 때마다, 살라와 그의 아들들과 조카들은 내가 하는 대로 구령을 해보고는 게르나스가 따라 하는 모습을 깔깔거리며 쳐다봤다. 게르나스는 곧 그들에게 찬미의 대상이 되었다.

아주 더럽고 귀찮기만 한 존재로 인식되어 줄곧 묶여만 있던 바로 그 개가 이제는 목줄도 없이 자유롭게 그들의 생활 공간을 누비고 관광객과 캠프에 있는 모든 사람과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직 그가 미루와 같이 있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베두인들에게 게르나스는 ‘서구화되었고 청결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은 정말 한 개의 생애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행운이었고 극적인 운명의 전환이었다. 오직 나의 소유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마도 게르나스는 나의 눈빛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미 이러한 운명의 전환을 다 기획했을지도 모르겠다. 신만이 알 것이다!

이런 조크를 잠시 제쳐놓더라도, 개는 어떠한 조건에서 그 생존을 위해 인간의 사랑을 얻는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거지를 진화시켰음이 분명하다! 적자생존의 법칙을 잘 아는 종자들이 그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쏟는 인간에게 충성할 줄 알았을 것이다. 이 양자를 묶는 감정을 공고히 하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지속해서 식량과 포근한 삶의 환경을 제공해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여튼 늑대가 양순한 개로 가축화되어간 과정은 다양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개의 직계조상 늑대는 현존하는 야생늑대와는 계통을 달리한다는 학설도 있다. 하여튼 게르나스는 현명하게도 그에게 최고의 생존기회를 허락하는 공급자를 선택한 것이다. 게르나스는 모하메드의 생각과는 달리 정말 현명한 개였다.

베두인들이 게르나스를 학대했고 그의 비참한 삶으로부터 내가 게르나스를 구했다고 떠들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말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의 이전 주인들은 그냥 그들이 보통 개를 기르는 방식으로 길렀을 뿐이다. 오랫동안 목을 묶어놓는다는 것은 결코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흔한 일이며, 게르나스에게는 차라리 자비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래도 게르나스를 먹여주었고 계속 살도록 두었다. 그들은 쓸모없는 개라고 인정된다면 총으로 쏴버리는 것이 상례이다.

학대에 관한 다양한 인식과 시선


▎베두인의 캠프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들과 게르나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게르나스가 착한 성품의 개라는 데 있다. 착한 개이기 때문에 나쁜 개가 된 것이다. 그들이 개를 키우는 유일한 이유는 가축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베두인의 개는 반드시 공격적이어야 하고 집이라는 코스모스 이외의 존재들에게 배타적이어야 한다. 마초가 강한 두목 기질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게르나스가 목줄에서 빠져나와 도망쳤을 때마다 살라는 그를 트럭으로 추격해 더는 뛸 힘이 없을 때까지 휘몰다가, 두 사람이 그의 목과 다리를 덮쳐 그를 묶어서 트럭에 싣고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게르나스가 살라의 곁으로 가지 않은 이유, 트럭만 보면 멍멍 짖는 이유를 알만했다. 그렇지만 동물에 대한 이런 정도의 거친 다룸은 와디 럼에서는 정상적인 것이다. 결코 학대로 볼 수는 없다.

살라와 그의 가족들은 동물을 고의로 해치는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살라는 나에게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게르나스가 강아지였을 때였지. 매우 아팠어. 죽을 것 같았어. 나는 그놈을 나무 밑에 묶어두고 음식과 물을 계속 주었지. 그래서 몇 달 후에 건강이 좋아졌어.” 그의 말 중 나무 밑에 묶어둔다는 것은 아픈 개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의미하는 것이다. 보통 개는 그늘도 없는 곳에 묶어두기 때문이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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