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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셰익스피어 이야기’(3)] 시대 초월한 희비극 '베니스의 상인' 

사랑을 선택한 자, 모든 것을 걸라 

친구 위해 유대인에게 6억원 빌린 뒤 벌어지는 반전 드라마
타임머신 타고 미래 엿본 듯, 21세기에도 유효한 ‘가치’ 담겨


▎영국 화가 존 에드먼드 버클리(1820~1884)가 그린 ‘달은 밝게 빛난다’(1859). 샤일록의 딸 제시카와 베니스의 청년 로렌조가 벨몬트에 있는 어느 정원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다. / 사진 : 폴저 셰익스피어 도서관
셰익스피어(1564~1616)는 ‘비누 같은(soapy)’ 작가다. 지나친 힘으로 셰익스피어라는 미끈미끈한 비누를 쥐면, 그는 우리 손아귀를 탈출해 튕겨 나간다. 이 ‘까다로운’ 대문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편향되지 않은 적당한 ‘지적인 악력(握力)’으로 그를 잡는 게 필요하다.

역사를 만든 많은 천재들은-예컨대 니체나 이제마-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후세의 인정을 확신했고 또 평가를 두려워했다. 셰익스피어도 그랬을 것 같다. 그 또한 100년 후나 500년 후에도 자신의 작품이 이러쿵저러쿵 운위되리라는 것을 내다본 듯하다. 마치 미래로 타임머신을 타고 미리 가본 듯이, 그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비난을 예상하고 빠져나갈 퇴로를 작품 곳곳에 마련했다.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도 그런 경우다.

천재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 셰익스피어는 부자와 빈자,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모두 만족시켰다. 요즘 용어로 표현한다면, 좌파·우파, 보수·진보가 모두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울고 웃는 어린이였다.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영국인의 분노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당시 영국인들에게 유대인은 괴물이었다. 죽으면 지옥행인 악마의 하수인이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유대인들 또한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인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역설했다.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현묘하고 혼란스러운 ‘셰익스피어 코드’가 있다.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이야기의 단초를 마련한 가상 인물은 배사니오(Bassanio)다. 그는 돈을 흥청망청 써버리는 습관이 있다. 그에게 돈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수단은 결혼이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구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물 마련 등 돈이 필요했다.

포샤(Portia)라는 상속녀가 배사니오의 레이더망에 잡혔다. 포샤는 베니스(베네치아)에서 가까운 가상의 도시 벨몬트에 산다. 포샤는 아름답고 똑똑하고 돈 많은 여성이다. 최상의 신부감이다. 포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페넬로페처럼 구혼자(suitor)들에게 시달린다.

배사니오는 포샤에게 청혼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 앤토니오(Antonio)에게 돈을 꿔 달라고 부탁한다. 앤토니오는 해상무역 거상이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주인공 ‘상인’이 샤일록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아니다. 앤토니오가 ‘베니스의 상인’이다. 사실 이 작품이 초기에는 ‘베니스의 유대인’으로 공연됐다. 일반인들이 헷갈릴 만하다. 셰익스피어 자신이 제목을 두고 고민한 것 같다.

배사니오는 앤토니오에게 3000더컷(ducat), 즉 요즘 돈으로 53만 달러(6억원)를 빌리려고 한다. 거상(巨商)인 앤토니오는 트리폴리·인도·멕시코·영국·리스본·북아프리카로 떠난 무역선에 재산을 몽땅 투자했다. 지금 수중에는 한 푼도 없다.

현금 유동성 위기에 처한 앤토니오는 친구 배사니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결국 유대인 대금업자 샤일록(Shylock)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샤일록은 “재물은 축복이다, 사람이 재물을 얻기 위해 훔치지만 않는다면(Thrift is blessing, if men steal it not.)”이라고 말하는 시원적(primal) 금융 자본가다.

지나친 모멸감은 물불 안 가리는 복수심 불러


▎미국 초상화가 토머스 설리(1783~1872)가 그린 ‘포샤와 샤일록’(1835). / 사진 : 폴저 셰익스피어 도서관
불행히도 앤토니오와 샤일록 사이에는 구원(舊怨)이 있다. 앤토니오는 돈을 꿔줄 때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라 이자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는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꿔줬다. 샤일록 입장에서는 업계 관행을 혼탁하게 하는 일종의 업무방해다. 게다가 앤토니오는 샤일록에게 침을 뱉고 그를 개 취급했다.

모처럼 달콤한 복수의 기회를 얻은 샤일록은 돈을 빌려주는 대신, 3개월 안에 못 갚으면 앤토니오의 살 1파운드(453.592g)를 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조롱하면 절대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지나친 모멸감은 물불을 안 가리는 극단적인 복수심을 초래한다. 샤일록은 돈을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와 복수심은 돈에 대한 애착을 무력화했다. 그는 오로지 앤토니오의 죽음을 바랐을 뿐이다.

배사니오는 절친 앤토니오가 마련해준 3000더컷을 밑천으로 포샤에게 청혼하러 간다. 그런데 포샤와 결혼하려면 포샤의 아버지가 남긴 유서가 조건으로 내세운 ‘사위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런 시험이다. 금·은·납으로 만든 캐스킷(casket), 즉 장식함 내지는 보석함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과제다. 금으로 만든 장식함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많은 사람이 바라는 것을 얻으리라(Who chooseth me shall gain what many men desire.)”라고 적혀 있다.

결과는 ‘꽝’이다. 함을 열면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All that glisters is not gold)”라는 문구와 함께 해골이 모습을 드러낸다.

은으로 된 상자도 허망하다. 정답이 아니다. “나를 선택하는 자는 그의 자격에 합당한 만큼을 얻으리라(Who chooseth me shall get as much as he deserves.)”라고 적힌 은으로 된 상자를 열면 눈을 깜빡이는 멍청한 바보의 초상이 보인다.

배사니오가 선택한 납 상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를 선택하는 자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위태롭게 내놓아야 한다(Who chooseth me must give and hazard all he hath.)”

납 상자를 여니 포샤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배사니오는 죽은 장인의 사위로 뽑힌 것이다. 한데 반칙도 있었다. 배사니오가 맘에 쏙 든 포샤는 배사니오가 납 상자를 선택하도록 은근한 힌트를 줬다.

포샤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는 일찍 세상을 떴지만, 야심가나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위를 바랐던 것 같다.

배사니오는 구애에 성공했지만, 그의 ‘절친’ 앤토니오는 절체절명(絕體絕命) 위기를 맞이한다. 그가 투자한 상선들이 모두 파선했다는 ‘가짜 뉴스’가 들려왔다. 샤일록에게 살점 1파운드를 뜯길 위기에 처했다.

당시 상업·무역 자본주의의 선봉에 선 가톨릭 도시국가 베니스는 법치국가였다. 그야말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무시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때 새댁 포샤가 남장(男裝)을 하고 법학박사 법관으로 위장해 핀치히터로 나선다. ‘살은 베어도 피는 한 방울도 안 된다’는 계약 해석으로 샤일록의 살기(殺氣)를 무력화시킨다. 더 나아가 샤일록은 모든 재산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이방인인 샤일록이 그리스도교인의 목숨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포샤는 수습안을 제시한다. 샤일록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재산의 일정 부분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앤토니오가 투자한 상선 세 척이 짐을 싣고 입항했다는 기쁜 소식도 들린다. [베니스의 상인]의 여성 주인공들은 남편들이 사랑의 증표인 반지를 남에게 주었다는 문제로 사랑싸움에 몰두하는 척하다가 서로 이해하고 용서한다.

‘사람은 모두 같다’는 샤일록 연설의 21세기 보편성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에르몰라오 파올레티 (1834~1912)가 그린 ‘포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배사니오’(1912년 이전). / 사진 : 크리스티
정의와 자비와 우정이라는,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다룬 희비극(喜悲劇·tragicomedy) [베니스의 상인]은 20세기 초까지 가장 인기 있는 연극 중 하나였다.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스의 만행으로 [베니스의 상인]은 ‘뜨거운 감자’가 됐다. 나치스 독일은 [베니스의 상인]을 1930년대 반유대주의 프로 파간다의 수단으로 삼았다.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베니스의 상인]의 주요 주제다. 금이나 은보다 납이 더 소중한 가치를 담을 수 있다. 우선 ‘겉’인 피부색이나 생김새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유대인을 만난 적이 없다. 유대인은 1060년대 노르만족과 함께 영국에 진출했지만, 1290년 영국에서 추방됐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영국으로 돌아온 것은 그의 사후 40년 후인 1655년이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대인 샤일록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 속 유대인, 텍스트로 접한 유대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유대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샤일록의 입을 통해 표현한다. 다음과 같은 일장연설, 절규다.


▎1922년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 샤일록 배역으로 출연한 미국 배우 월터 햄던(1879~1955). / 사진 : 플로이드
“나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눈이 없다는 말인가? 유대인은 손, 오장육부, 신체 용적, 감각, 감정, 정열도 없단 말인가? 유대인은 그리스도교인인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무기로 상처받고, 같은 질병에 걸리고, 같은 수단으로 치료되며, 같은 겨울과 여름의 추위와 더위를 느낀다. 그대들이 우리를 찌르면 피를 흘리지 않는가? 그대들이 간질이면 우린 웃지 않는단 말인가? 그대들이 우리에게 독을 먹이면 우리는 죽지 않는가? 그대들이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면, 우리는 복수하지 않겠는가?(I am a Jew. Hath not a Jew eyes? Hath not a Jew hands, organs, dimensions, senses, affections, passions? Fed with the same food, hurt with the same weapons, subject to the same diseases, healed by the same means, warmed and cooled by the same winter and summer as a Christian is? If you prick us, do we not bleed? If you tickle us, do we not laugh? If you poison us, do we not die? And if you wrong us, shall we not revenge?)

19세기까지 [베니스의 상인]은 그리스도교의 자비와 사랑을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주의를 대비시키는 작품이었다. 20세기부터는 반유대주의의 대표적인 허구적 희생자인 샤일록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생각을 분석하는 자료가 됐다.

[베니스의 상인]은 다음과 같은 앤토니오의 말로 시작된다. “정말로 나는 내가 왜 이토록 슬픈지 모른다(In sooth, I know not why I am so sad.)”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를 제외하고는, 앤토니오는 지극히 선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우울했을까. 그의 멜랑콜리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앤토니오의 슬픔은 비즈니스 걱정 때문일까. 천성이 지나치게 진지하기 때문일까. 어떤 비평가는 앤토니오의 배사니오를 향한 동성애적 사랑을 슬픔의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앤토니오와 배사니오와 포샤를 3각 애정 관계로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시대의 우정을 동성애적 사랑과 연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볼 수 있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또 다른 심각하게 우울한 사람은 포샤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과 더불어 작품에 등장한다. “…거대한 이 세상은 작은 내 몸을 몹시 지치게 한다.(… my little body is aweary of this great world.)” 포샤의 우울함은 상대적으로 설명하기 쉽다. 포샤는 자칫 잘못하면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다.

[베니스의 상인]의 앤토니오와 포샤의 멜랑콜리는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1844~1896)의 ‘내 가슴속에 눈물이 흐르네(Il pleure dans mon coeur)’(1874)를 연상시킨다.

도시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속에 눈물이 흐르네
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이 우울함은 무엇인가
오, 땅에서 지붕 위에서 들리는 달콤한 빗소리여
앙뉘(ennui)에 빠진 어느 한 가슴을 위로하는 빗물의 가(聖歌)여
속이 메스꺼운 이 가슴에 이유 없이 눈물이 떨어지는구나 뭐라고배신은
‘왜’를 알 수 없는 고통이 최악의 고통이다
사랑도 없이 미움도 없이 내 가슴은 이토록 큰 벌을 받는 구나!


'베니스의 상인'은 21세기 기준으로도 ‘현대적’인 작품


▎영국 화가 리처드 웨스톨(1765~1836)이 그린 ‘앤토니오를 퇴짜 놓는 샤일록’(1795). / 사진 : 폴저 셰익스피어 도서관
[베니스의 상인]에는 오늘의 고민을 연상시키는 고민이 담겨 있다. (물론 달라진 것도 있다. 16세기 베니스의 유대인들은 게토에서 생활했다. 오늘날 게토는 사라졌다.)

하지만 [베니스의 상인]이 그리는 초기 상업자본·금융자본의 문제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도 현재진행형이다.

그 시대에도 샤일록처럼 ‘법대로 하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법과 권력이 미묘하게 연결됐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샤일록 또한 ‘법대로 하자’고 주장하다가 자칫 무일푼이 될 뻔했다.

극중 인물인 배사니오나 샤일록의 딸 제시카는 돈이 생기면 흥청망청 다 써버린다. 21세기에도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개종’이 대표하는 다문화 갈등도 [베니스의 상인]에 나온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인종과 관련된 편견이 있었다. 그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을 했고, 인간적인 욕구 때문에 갈등을 했다. 선택도 했다.

사족으로 한가지 덧붙인다면 극중 앤토니오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앤토니오는 이렇게 말했다. “악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성서를 인용할 수 있다.(The devil can cite Scripture for his purpose.)”

※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중앙일보에 지식전문기자로 입사, 심의실장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서강대·한경대·단국대 등에서 강단에 섰다.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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