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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청춘에게 ‘행동하라’던 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그는 청년들에게 ‘큰 바다’를 보여줬다 

‘대낮 부엉이’의 혜안에서 오버랩되는 김우중의 ‘영(靈)’
베트남 GYBM 청년들의 추모사가 전하는 고인의 정(情)


▎2015년 12월 15일 서울 중구 밀레니엄 서울 힐튼에서 열린 ‘대우재단 학술사업 3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황혼이 시작됐는데도 눈을 뜨지 않는다. 별 하나 찾기 어려운 칠흑 같은 밤이 됐는데도 날개를 접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지혜의 여신 아테네(로마명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언제쯤 깨어날까? 혼돈에 빠진 한국이란 나라를 지켜줄 부엉이의 혜안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2019년 1월 초, 필자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하 김우중)의 투병 소식을 접했을 때 가슴에 밀려든 회한(悔恨)을 갖고 쓴 글의 서두다.

국내 방송국 기자로 일하던 필자는 1994년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 15기생으로 들어간 뒤, 교육과정 5년간 대우의 지원을 받으며 김우중 대우 회장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됐다. 이후 필자의 눈에 비친 ‘인간 김우중’은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며 한국인의 기상을 뜨겁게 달궜던 20세기의 거인이자, ‘하면 된다’는 정신을 세계 무대로 끌고 갔던 샐러리맨의 우상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병원을 오가며 침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아파왔다.

시대와 상황이 어려워질 때일수록 세상에는 늘 반가운 영웅의 출현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한국은 정반대일까. 어느 때보다도 영웅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 왜 이들은 하나둘 사라지는 것일까. 2019년 12월 9일 밤 11시 50분, 김우중은 향년 83세에 별세했다.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학생들과 함께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 / 사진:유민호
부음 소식을 접하기 하루 전, 필자는 에게해에 인접한 작은 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곳은 차가운 바닷바람이 뺨을 스치는 고대 유적지인 탓에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보기 힘든 곳으로 유명했다. 해풍에 흔들리는 소나무 바람 소리만 가끔 느껴질 뿐, 우주가 정지한 듯 적막했다.

고대 유적지는 예로부터 대리석 시신(屍身) 전시장이라고도 불린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쪼개진 돌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깊고 넓은 느낌을 준다.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역사를 마주한 무언(無言)의 대화가 가능하다. ‘저렇게 무거운 대리석을 2500여 년 전 어떻게 다듬고 옮겼을까?’ ‘왜 저렇게 엄청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옮겨 신에게 바쳤을까?’ ‘고대 그리스 훨씬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원시인들은 왜 큰 바위 앞에서 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했을까?’

‘영(靈)’이라는 공통분모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영결식이 2019년 12월 12일 오전 경기도 수원 아주대 병원에서 거행됐다. / 사진:우상조 기자
현대인 관점으로 보면 의문투성이의 무대가 고대 유적지다. 필자가 내린 결론이지만, ‘돌이 전해주는 영(靈)의 메아리가 고대 인류에게 선명히 전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상식 논리로 무장된 현대인이 아닌, 인간 본능에 기초한 고대 인류만이 느낄 수 있는 혼의 목소리다.

그리고 이곳에서, 김우중 별세의 바로 전날, 필자는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와의 만남을 가지게 됐다. 고대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내 뭔가가 느껴졌다. 성문 바깥쪽 왼쪽 5m 높이 틈 속에 숨겨진 어두운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지만, 뭔가가 일직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듯한 강한 시선이 와닿았다. 동공을 천천히 움직이며, 성벽 틈 속의 그것에 집중했다.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부엉이 한 마리였다. 몸을 고정한 채 필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의 전체 삶을 통틀어, 자연 속에서 처음 만난 부엉이였다. 동물원이나 부엉이 카페에서 접한 적은 있지만, 자연 속에서의 부엉이는 처음이었다. 반갑고도 놀랍고 신기로웠다. 순한 날개털을 고려해볼 때, 어린 부엉이란 느낌이 들었다. 표정·소리·몸동작도 없지만, 뭔가를 기다리는 애절함, 고독 같은 것이 표류했다. ‘어디론가 날아간 부모나 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막 시작한 독립생활에서 찾아온 외로움 때문일까?’

믿어지지 않겠지만, 부엉이를 보는 순간 떠오른 단상이 바로 ‘김우중’이다. 올해 초 투병 소식을 들었을 때 쓴 위의 글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우중이란 세 글자가 고대 유적지 성문을 지키는 부엉이와 오버랩됐다. ‘지혜의 여신 아테네를 상징하는 부엉이는 왜 밤이 아닌 대낮의 성문을 뜬눈으로 지키고 있을까? 왜 사람이 다가가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필자를, 아니 성문 밖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일까?’

김우중 부음 뉴스를 접한 것은 부엉이와 만난 바로 다음 날이다. 세상을 떠난 지 하루 뒤 소식이 전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면한 바로 그날 부엉이와 마주친 셈이다.

20여 년 전부터지만, 필자는 세상을 ‘욕(欲)·속(俗)·성(聖)·영(靈)’으로 4등분해서 보고 있다. 일정 부분 섞이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사회 전체에 흐르는 대세는 있다. 중국과 중국인은 ‘욕(欲)의 화신’이다. 돈이 세상의 기준이자 의미다. 따라서 권력·명예·공부 모두가 돈으로 연결된다. 중국 어디에 가도 볼 수 있는 삼국지의 관우(關羽)는 ‘돈의 신’이다. 유비, 장비, 조조가 100명, 아니 1000명이 나와도 관우한 명만 못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과 한국인은 어떨까? ‘속(俗)의 대명사’다. 욕보다는 한 단계 세련됐지만, ‘남보다 위에 올라서는 것’을 세상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는 없다. 나만의 절대적 세계가 아닌, 남을 통해 본 상대적 우위가 삶의 가치다. 경쟁에서 탈락할 경우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아파트 평수, 자식 출세 여부, 학력, 승진에 대한 집착이 그 어떤 나라보다도 강하다고 느껴진다.

필자가 성과 영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은 것이 10여 년 전이다. 특별하고 잘나서가 아니다. 욕과 속에서 싸워 뭔가를 얻어낼 자신도 건강도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욕과 속에서 멀어지면서 남겨진 부분으로 도망가는 과정에서 성과 영을 만나게 됐다. 남과의 비교가 아닌, 나에 대한 답이 전부다. 표현이나 방식이 다를 뿐,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언젠가 맞이할 세계관일 듯하다. 죽을 때까지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죽기 직전 아니 병과 더불어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 깨닫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욕과 속의 기준으로 보면 세상은 욕과 속으로만 채워져 있다. 욕과 속에서의 가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조롱과 시대착오의 대상일 뿐이다. “이해해야 하지만, 그래도…”가 통상적인 답이다. 반대로 성과 영의 가치를 이해한다면 욕과 속의 한계를 알게 된다. 성과 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욕과 속이 전부가 아니란 사실쯤은 체득하게 된다.

‘영(靈)’은 유적지의 부엉이와 하루 뒤 접한 김우중 부음 소식에 걸쳐진 공통분모다. 10번 정도 가까이서 접한 게 김우중과의 개인적 연(緣)의 전부지만, 성문 밖 담벼락 부엉이를 통해 김우중의 영, 나아가 혼이 필자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확신한다. 깊은 어둠 속에 빠진 나라를 뒤로한 채, 멀고도 먼 세상으로 떠난 김우중의 분신으로서의 ‘대낮 부엉이’였으리라 믿는다.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은 김우중 생애 마지막 활동이자 업적으로 평가된다.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태국 4개국에 세워진, 말 그대로 ‘청년 사업가 양성소’다. 한국인 20·30세대를 이미 불어닥친 동남아 특수에 맞춰 준비, 양성하자는 것이 GYBM 설립 취지다. 2011년 창립 이래 지금까지 1000여 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국인에 대한 무언의 ‘사랑과 덕(徳)’이 느껴진 영결식


▎일명 김우중 사관학교로 불리는 베트남 하노이의 GYBM에서 수업 중인 학생들. / 사진:문희철 기자
GYBM은 필자가 목격한 김우중 인생의 마지막 현장이기도 하다. 2015년 11월 GYBM 5기생을 위한 강의가 그 시작이었다. 1주일에 불과한 단기 강의지만, 주로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얘기를 중심으로 진행했다. 장소는 하노이 문화대학이다. 이후 강의는 2018년까지 3년간 지속했다. (당시의 자세한 상황은 월간중앙 2016년 1월호에 소개됐다.)

1994년 맺어진 김우중 회장과의 작은 만남에서 비롯된 GYBM 체험이었지만, 5기, 6기, 7기로 이어진 학생들과의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2월의 김우중의 영결식을 보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대우 슬로건 그 자체로 느껴진다. 빈소가 서울만이 아닌 미국, 베트남 등 대우의 흔적이 남은 세계 곳곳에 차려져 조문객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3일간 지속한 김우중 장례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사회적 열기로까지 느껴졌다.

국가 주도의 장례식을 제외하고 김우중만큼 국민 모두의 애정 속에서 생을 마친 인물이 얼마나 될까? 세상을 뜬 뒤 아무리 세(勢)를 과시해봤자 욕과 속 차원의 모래 거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이 머물고, 살아생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추모 무대로서의 열기라면 전혀 다르다.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품격으로서의 추억이다. 김우중이 보여준, 한국인에 대한 무언의 ‘사랑과 덕(德)’이 3일 장례 기간 동안 고스란히 반영된 듯하다.

추모 열기에서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자신보다 2세대 아래, 즉 2030세대 청년에게서 나타난 추모의 정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해도, 동 세대나 바로 아래 세대 기억에 그치는 게 순리이고 상식이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둘러싼 논쟁이 정쟁의 핵심 중 하나지만, 당시 성인으로서 직접 경험했을 지금의 80대, 학생 위치에서 접했을 지금의 50대, 역사 교과서로 배우는 지금 20대의 세대별 감각은 전혀 다르다. 좌우를 떠나 평가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필자가 대하는 김우중에 대한 20·30세대 청년의 반응을 보면 이 같은 세대별 차가 거의 없다. 아니 거꾸로 더 진하고 깊다. 당대의 80대, 이후의 50대 못지않다.

언젠가 누구에게나 닥치겠지만, 자기 죽음이 갖는 의미를 장례식 당일 나타날 ‘작은 징표’ 하나로 증명해낼 수 있다. 대통령, 혹은 정치가와 재벌 2세, 3세의 몇만 원짜리 화환이 아니다. 죽은 자를 기리는 청년이 ‘단 한 명’이라도 자진해서 장례식에 들를 수 있을지, 죽은 자를 삶의 나침반으로 여기며 살아가려는 ‘단 한 명의 청년’이 존재할지가 생전의 삶의 의미를 가늠하는 척도라, 필자는 확신한다. 청년은커녕 자신의 가족으로부터도 소외된 채 세상을 접는, ‘허장성세’ 장례도 적지 않다.

필자는 김우중 전 회장의 부음을 접하면서 SNS로 맺어진 GYBM 졸업생 100여 명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GYBM 졸업생들의 김우중에 대한 추모의 정은 필자가 모르는 한국 2030 청년의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김우중에 올리는 2030 청년 추모사인 그들의 목소리를 아래와 같이 가감 없이 전한다.

‘김우중 바로오’에게 올리는 2030세대 청년의 추모사


▎GYBM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교실 벽에 붙여놓은 구 대우그룹 표어. / 사진:문희철 기자
“어제저녁 하노이 번찌 골프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회장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짧은 인사 드리고 왔습니다. 빈소가 마련된 곳이 2016년 가을 회장님과 첫 식사를 함께했던 곳이라 그때 기억이 나더군요. 그때 회장님이 저에게 ‘자넨 좋은 직장 그만두고 사업하려고 왔다며? 조금만 둘러보면 좋은 사업 기회가 많으니, 열심히 해’라고 응원해주셨죠. 지금은 한국계 은행 베트남법인의 디지털 금융 사업을 담당하고 있지만, 제 사업을 이루는 그 날을 위해 거목 김우중 회장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편안한 곳에서 영면하시길 빕니다.”_이재남

“7기인 저에게는 아쉽게도, 회장님의 숙환으로 말씀을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영광스럽게도 GYBM 면접 때를 포함하여 총 5번 뵌 적이 있습니다. 회장님에게서 와닿았던 것은 젊은 시절 회장님 사진과 같은 카리스마보다는, 인자하게 손자를 바라보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회장님께서 온화하게 저희를 바라봐주시는 모습에서 무언가 무거운 책임감과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이 벅차오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해외에 정착해 조국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품어주신 점,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바르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_안세홍

“GYBM을 설립하시고 우리 동문이 세계 각국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업들 하나하나를 방문하시고 이끄신 회장님이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5기 연수 당시에는 하나라도 좋은 말, 좋은 것을 챙겨주시고자 거동이 불편하신 몸을 이끄시고 연수원에서 강연을 해주셨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GYBM을 생각해주시던 회장님의 그 큰마음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작게나마 보답을 하고자 전 세계 GYBM 총동문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총동문회 모임을 통해 전 세계 GYBM 동문들이 모여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완성작은 아니더라도 회장님께서 그리신 저희에 대한 기대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길 바랍니다. 행사 직전, 회장님의 소식은 저희 GYBM에게는 큰 상실로 다가옵니다. 지치고 외로울 때면, 늘 가슴으로 품어주시던 회장님이 벌써 그리워집니다. 비록 어려운 현실이지만, 살아생전에 보여주신 행보에 따라 저희 GYBM은 회장님이 이끌어주신 방향대로 열심히 전진하겠습니다. 한없이 남겨주신 가르침 잊지 않고, 서로 힘을 합쳐 나라에 이바지하겠습니다.”_이남오

“회장님과의 식사 회식 중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여쭤봤었습니다. ‘삶은 행동이다. 머뭇거리지 마라. 젊은이들이 머뭇거리고 있어서 GYBM을 만들었다. 일단 시작해서 해보면 다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GYBM을 ‘정부 보조금을 받아 사람 장사하는 조직’이라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편협함과 달리, 방황하고 머뭇거리는 젊은이에게 회장님께서는 ‘일단 세계라는 큰 무대에 몸을 던져봐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 큰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험담을 한들, 주어진 삶에 있어 1초의 낭비 없이 완성된 삶을 사신 훌륭한 스승임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훗날 회장님을 다시 뵙게 될 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도록 하겠습니다.”_익명

“‘성당에서 활동을 오래 했다고?’ GYBM 면접에서 회장님께서 유일하게 던지신 질문입니다. ‘김우중 바오로’. 빈소에 적힌 그분의 이름과 세례명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그분을, 나라와 국민들은 죄인으로 낙인찍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 나라와 청년들을 위하여 병으로 싸우면서도 여생을 전부 바치신 분이셨습니다. 김우중 바오로. 저에게 그분은 그 어떤 성공한 기업가보다, 진정으로 희생의 삶을 살아가신 한 분의 성인으로서 기억될 것입니다. 하노이에 머물던 회장님과의 대화는 일생일대의 큰 기쁨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_익명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생전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988년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자전거로 현장을 다니던 모습.
장례식이 진행되던 날에도 필자는 에게해에 바로 인접한 작은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새벽부터 비와 바람이 거세게 몰아닥쳤다. 기원전 8세기에 남긴 호머(Homer)의 ‘오디세이(Odyssey)’는 트로이 전쟁 후 귀향하던 길에 만난 거친 바다에서의 모험을 다룬 대서사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이가 무려 10년간 에게해 지중해를 떠돈다.

필자가 에게해에서 접한 12월의 비와 바람을 보면, 왜 오디세이가 10년이나 떠돌아다녔는지 이해가 된다. 넓고도 깊은 태평양과 달리, 육지로 둘러싸인 좁은 바다가 에게해 지중해의 이미지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반대다. 바닷가 호텔에서 느끼는 비와 바람조차 엄청나다. 바다로 나아갈 경우 얼마나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수정처럼 맑던 호텔 앞바다가 한순간 육지에서 밀려온 흙탕물로 메워졌다. 억수로 내리는 비가 한꺼번에 바다로 향하면서 먼바다까지 전부 황톳빛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가 그친 뒤 2시간 정도 흐른 뒤에 가서 보니, 바다가 거짓말처럼 수정빛으로 변해 있었다.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 많던 바닷속 흙탕물은 전부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쩌면 저렇게도 빨리 바닷물 빛깔이 변할 수 있을까?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흙탕물은커녕, 태풍이 와도 결국은 수정빛 바닷물로 되돌아가는, 한국인의 ‘큰 바다’로서의 김우중이다. 장례식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저 세상에서 만난다면 에게해 흙탕물 얘기를 전해주고 싶다.

맑아진 수정빛 바다를 배경으로 한 무지개도 봤지만, 혹시 그 무지개가 당신께서 하늘로 올라갈 때 이용한 다리가 아니었는지도 물어볼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25년 전 겪은 김우중과의 작은 연(緣) 하나를 되새겨본다. 당신에게는 너무도 평범한 일상이었겠지만, 청년의 나이였던 필자의 머릿속에는 영원히 남겨질 추억이다. 만났던 시간 1분 1초가 고맙고 기쁘고 너무도 큰 영광이자 행운이었다는 말도 하늘나라의 당신에게 부친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김우중과 다시 만난 것은 같은 날 오후였다. 현지 직원들과 함께 대우자동차 공장 시찰에 나설 때 동행했다. 김우중과 필자를 포함해 전부 다섯 명이 5인용 자동차 안을 꽉 채운 채 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앞자리에 탄 김우중이 가던 도중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햄버거 가게를 가리키며 ‘새로 들어선 듯하다’고 들뜬 어조로 말했다. 그러더니 김우중은 차에서 내려 곧장 혼자 가게 안으로 뛰어갔다. 비가 온 뒤라 햄버거 가게로 향하는 땅은 진흙탕에 가까웠다. 잠시 뒤, 숨찬 모습으로 되돌아온 김우중의 손에는 햄버거 다섯 개가 들려 있었다. 구두는 물론 바지 전체가 흙탕물 범벅이었다. 까마득한 어제의 일이기에, 햄버거 맛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자동차 안에서 햄버거를 함께 나눠 먹었을 때의 ‘감동’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그때 김우중이 준 것은 햄버거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情)이었기 때문이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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