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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3)] 떠돌이 유목민 흉노의 굴기(崛起) 

적이 강해지자 그들도 뭉쳐 초강력 ‘그림자 제국’ 탄생 

농업 발전으로 힘세진 중원에 맞서 유목민 부족 급속 통합
흉노의 왕 묵특, 강력한 통치술로 주변 흡수해 ‘제국’ 이뤄


▎허허벌판에 서 있는 장성 서쪽 끝의 가욕관(嘉峪關). 이 요새는 1372년에 건축된 것이지만, 이 위치에 요새를 둔 것은 그보다 1500년 전, 한나라 때부터의 일이었다. / 사진:도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도 짓지 않았으나 각자의 세력범위는 경계가 분명했다. 글이나 서적이 없었으므로 말로써 약속했다. 어린애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활로 새나 쥐를 쏘고, 좀 자라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해서 양식을 충당했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평상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새나 짐승을 사냥하며 지내다가, 필요할 때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 싸움이 유리할 때는 나아가고 불리할 때는 후퇴하였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오직 이익을 위해서 일을 꾸밀 뿐 예의는 고려하지 않았다. (···) 건장한 사람이 좋은 음식을 먹고 노약자들이 나머지를 먹었다. 건장한 사람을 중히 여기고, 노약자를 경시하였던 것이다.”

[사기] ‘흉노열전’에 그려져 있는 전형적인 유목민으로서 흉노의 모습이다. (1) 문자가 없다는 점, (2) 모든 남자가 활에 익숙하고 병사로 동원된다는 점, (3) 예절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 농경민인 중국인의 눈에 두드러져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몇 가지 특징만 보더라도 유목민에게는 국가와 같은 대규모 정치조직이 어려울 것 같다. 카를 비트포겔(1896~1988)은 유목민 ‘사회’의 성립 자체가 단독으로 이뤄지기 힘든 것이라고 보았다. 다양한 생활용품을 자체 내에서 모두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교환을 (안 되면 약탈이라도) 행할 수 있는 농경사회가 존재해야 유목민 사회도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순수한 유목사회의 존재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유목 활동은 원래 수렵·채집에서 변형되어 나타났다. 계절에 따른 초식동물 떼의 자연스러운 이동을 따라다니는 데서 유목이 시작됐다. 따라다니는 중에 인위적 관리 작업이 조금씩 늘어난 것이다. 최초의 유목사회는 필요한 모든 물자를 자체 내에서 조달했을 수 있다. 그러나 농경사회와 접촉을 갖게 되면 교환을 통해 노력을 줄이고 편의를 늘리는 분업관계를 맺게 된다. 농경문명이 전 세계로 확산된 뒤에는 그런 접촉을 전연 안 가지는 유목사회가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20세기 후반기에 몽골과 시베리아의 유목민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다. 그 중에는 농경지와 수공업 생산시설 등을 갖춘 마을의 유적도 있다. 농경사회와의 분업관계가 완제품 수입에 그치지 않고 얼마간의 생산수단까지 도입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목 활동에 필요한 사회 조직에는 규모의 한계가 있다.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가족·씨족의 범위를 넘어 계절에 따른 이동을 함께 하는 부족 단위까지는 자연스럽게 조직되는데, 부족이 번성해서 규모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벌의 분봉(分蜂)처럼 부족을 쪼개야 한다. 한꺼번에 몰고 다닐 가축 떼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부족 간에는 물자 교환의 필요도 별로 없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정도의 관계를 가지고 나란히 존재했다.

한꺼번에 몰고 다닐 가축 떼, 너무 많으면 안 돼


▎몽골국립박물관에 전시된 흉노 활의 복제품. / 사진:네이선 매코드, 미국 해병대
그렇다면 ‘유목 제국’이란 하나의 형용모순이 아닐까? 농경사회에 비해 유목사회에서는 구성원 대부분이 같은 일을 하며 살고 잉여생산도 크지 않기 때문에 국가와 같은 대규모 조직을 운영할 전문 인력을 많이 키울 수 없다. 부족 단위를 넘어서는 큰 조직 활동은 농경사회와의 관계 때문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 농경사회의 공격을 막고, 필요할 때는 약탈에 나서기 위해. 보다 일상적으로는 물자의 교환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그래서 기원전 3세기 말에 건설된 ‘흉노 제국’은 하나의 ‘그림자 제국’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쪽 농경사회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는 데 따라 그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거대한 군사·정치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발전시킨 조직 기술과 원리를 활용함으로써 유목민들이 오랫동안 유리한 조건을 누릴 때도 있었다. 조직의 필요와 방법이 모두 농경사회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그림자 제국’이라 하는 것이다. [사기] ‘흉노열전’ 에 보이는 묵특(冒頓) 선우(單于, 흉노가 군주나 추장을 높여 이르던 이름)의 굴기 과정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묵특은 두만(頭曼) 선우의 맏아들이었지만 두만은 다른 아들에게 선우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서 일부러 묵특을 위험한 지경에 빠트렸다고 한다. 월지(月氏)에 인질로 보내놓고 월지를 공격함으로써 묵특을 죽이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묵특이 위기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초인적 지혜와 용기를 증명했기 때문에 두만도 그를 물리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아들에게 계승시키기 위해 묵특을 제거해야 했다는 데서 당시 흉노 사회에 장자 계승의 원칙이 인식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을 겪어 중용된 뒤에도 묵특이 두만을 공격해서 살해한 데서는 이 원칙이 아직 확고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묵특(재위 기원전 209~174) 이후 선우 자리는 노상(老上, 기원전 174~160)과 군신(軍臣, 기원전 160~126)으로 부자 계승이 되었으나 군신의 아들 어단(於單)이 숙부 이치사(伊雉斜, 기원전 126~114)에게 쫓겨나 한나라에 투항하면서 이 원칙이 무너졌다.

지난 호에서 설명한 것처럼 임금 자리의 장자 계승은 국가 규모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원칙이다. 개인의 지혜와 완력보다 확실한 계승권이 보장해 주는 권위와 안정성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묵특이 이 원칙을 도입한 것은 제국 규모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이 원칙이 무너진 것은 한 무제(漢 武帝)의 흉노 정벌이 시작된 뒤의 위기 속에서였다.

묵특이 두만을 제거하고 선우 자리를 탈취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묵특은 부하들에게 자기가 언제든 명적(鳴鏑, 쏘면 공기에 부딪혀 소리가 나는 화살)을 날릴 때는 모두 즉각 같은 표적을 향해 활을 쏘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자기 애마에게 명적을 날렸다. 망설이며 쏘지 못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다음에는 자기 애첩에게 명적을 날렸다. 역시 망설인 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고 나서 기회를 만들어 두만에게 명적을 날렸다. 두만은 바로 고슴도치가 되었다.

흉노의 병사란 적령기의 모든 남성이었다. 생업에 종사하다가 필요할 때 자기 말 타고 자기 활 들고 모이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병사들이 상식과 인정에 어긋나는 명령을 일사불란하게 따른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묵특은 그들을 직업군인으로 훈련시킨 것이다. 이 훈련의 효과가 두만의 제거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유목세력을 통합하는 데도, 한나라 군대에 대항하는 데도 두루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유목세력 통합의 과정이 동호(東胡)를 공격하는 장면으로 예시되어 있다.

묵특이 선우에 올랐을 당시 동호가 세력이 강했다.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동호 왕이 듣고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두만이 가지고 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묵특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말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특은 말했다. “서로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천리마를 동호에 보내주었다.

묵특이 자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줄로 안 동호 왕이 얼마 뒤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閼氏 선우의 처첩) 한 사람을 얻고 싶다고 청했다. 묵특이 또 좌우에 물었다. 모두 성을 내며 말했다. “동호가 연지를 요구하는 것은 무례합니다. 출병해서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특은 말했다. “남과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끼는 연지 한 사람을 골라 동호에 보내주었다.

애첩·명마는 내줘도 국토는 한 치도 안 된다


▎흉노 무덤에서 출토된 독수리 머리를 한 수사슴. 중국 산시 역사박물관이 소장한 기원전 3~4세기 작품. / 사진:제시(Jessie)
이로써 동호는 더욱 교만해져서 서쪽을 넘보게 되었다. 당시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천여 리에 걸쳐 비어 있는 황무지가 있었다. 쌍방은 각각 지형에 따라 수비 초소를 세워놓고 있었다. 동호가 사자를 보내 묵특에게 전했다. “흉노와 우리가 지키고 있는 초소 밖의 황무지는 흉노에게 어차피 무용지물이니 우리가 차지하면 좋겠소.” 묵특이 이 문제를 신하들에게 묻자 몇 사람이 말했다. “버려진 땅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겠습니다.”

그러자 묵특은 크게 성을 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한 다음, 말에 오르며 전국에 명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서 후퇴하는 자는 즉시 죽이겠다.” 동호는 애초에 묵특을 업신여겨 흉노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 묵특이 군사를 이끌고 습격하여 순식간에 동호를 대파하고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을 사로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월지를 쳐서 패주시켰고, 남쪽으로 누번(樓煩)·백양(白羊)·하남왕(河南王) 등의 영지를 병합하였다. 또 연(燕)과 대(代)를 공격하여 일찍이 진나라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사기] ‘흉노열전’)

가치관의 전환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애첩도 버릴 수 있고 명마도 버릴 수 있지만 땅은 버릴 수 없다는 묵특의 관점, 이것은 유목민의 관점이 아니다. 영토국가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전환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목이 달아난 부하들은 ‘영토’ 같은 데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옮겨 다니며 살던 시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묵특의 제국 건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많은 장정이 상비군으로 편성되면서 생산 활동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리고 좌·우 현왕, 좌·우 녹려왕, 좌·우 대장, 좌·우 대도위 등 작위와 관직, 그리고 왕부(王府) 등 정치기구를 만들었고 이 조직 운영에도 더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다. 통합된 다른 유목사회의 착취를 통해 그 비용을 조달했을 것 같지는 않다. 상호 착취를 통해 큰 조직을 지탱할 만한 잉여생산이 유목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요한 작위와 관직을 좌·우로 나누어 좌를 동쪽에, 우를 서쪽에 배치한 것만 보더라도 묵특의 제국은 남쪽의 중화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중원 농경사회의 생산력 증대로 유목사회에 대한 압력이 늘어났다. 향상된 군사력과 경제력을 무기로 토지·인력과 물자 등 유목사회의 자원을 탈취하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이 진행된 것이다. 유목민의 조직 확장과 강화는 그 대응으로 방어적 입장에서 시작되었다.

유목민의 조직 확장 성공 여부는 농경사회와의 관계로부터 조직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조직력 덕분에 물자 거래에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었고 약탈 활동으로 이득을 얻기도 했다. 유목사회의 대규모 조직은 그 동기와 수단이 모두 농경사회의 발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농경사회가 분열되어 있던 전국시대까지는 유목사회의 통합 규모에도 한계가 있었다. 조(趙)나라·진(秦)나라·연(燕)나라 등 인접한 제후국들이 모두 중원 내의 쟁투에 집중할 필요 때문에 인근의 유목민에게 극단적인 공세를 취할 수 없었고, 유목민 사이에도 근접한 제후국과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조나라 무령왕(武寧王, 기원전 326~299) 이 병사들에게 오랑캐의 복식이던 바지를 입혀 기병(騎兵)을 양성한 일이 알려져 있다. 바지만 빌려왔겠는가? 그 무렵의 제후국들은 오랑캐를 용병으로도 활용했을 것이다.

진나라의 통일로 상황이 바뀌었다. 농경사회를 통일한 후 진나라의 큰 사업 하나가 장성 축조였다. 군사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유목민과의 거래를 일원화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진나라의 통일 직후 묵특 선우의 유목세력 통합은 그 반작용이었다. 묵특이 아무리 군사적 천재라 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 내에 그 많은 세력을 우격다짐만으로 복속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경사회 쪽의 일방적인 창구 일원화로 피해를 보고 있던 여러 세력이 통합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묵특의 창구 일원화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둔 결정적 계기가 중국사에 ‘평성의 치욕(平城之恥)’이란 이름을 남긴 기원전 201년의 전투였다. 항우(項羽)를 막 물리치고 황제에 즉위한 유방(劉邦)이 체면을 구기는 일이 하나 생겼다. 한왕 신(韓王 信)이 흉노에 투항한 것이다. 분노한 유방이 30만 대군을 일으켜 정벌에 나섰는데 흉노는 40만 대군으로 이를 공략, 한나라 황제가 7일간 포위되어 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 70여 년간 한나라는 흉노에게 해마다 막대한 재물을 보내고 황실 여인을 흉노에 시집보내는 등 굴욕적일 정도의 유화정책을 취하게 된다. 이 거래로 흉노가 얻은 이득이 조직의 비용을 충당하고 통합된 여러 세력을 만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흉노 정벌 나섰던 한 고조 유방 ‘평성의 치욕’

평성의 싸움에 관한 사서의 기록은 극히 간략한데 그 상황은 너무나 극적인 것이라서 많은 의문이 남는다. 천하를 통일한 30만 대군 앞에 거칠 것이 무엇이랴, 호호탕탕 진군하다가 막 통합된 유목세력의 40만 대군 앞에서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40만 대군을 그 시점에서 그 장소에 집결시킨 것은 엄청난 수준의 준비가 필요한 일인데, 통합된 지 얼마 안되는 유목세력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손·오자(孫吳子) 수준의 병법가가 있었던 것일까?

더욱 신기한 것은 한나라 황제를 통쾌하게 잡아 죽이는 대신 실컷 골려 준 뒤 풀어주고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어 70여 년간 누린 사실이다. 그렇게 유리한 조건을 그렇게 오래 누린다는 것은 인질 잡아두는 방법 정도로 되지 않는 일이다. 이 역시 정상급의 병법가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이다.

병법가만이 아니라 온갖 인재들이 묵특 선우의 막하에 모여 있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 한왕 신의 흉노 투항을 이야기했다. 기원전 202년 한제국의 출범 때 강역의 서쪽 절반은 군현으로 편제하고 동쪽 절반은 제후국으로 쪼개놓았다. 제후 중에는 종실(宗室) 제후와 이성(異姓) 제후가 있었고, 이성 제후는 유방의 동맹세력들이었다. 일단 제국이 성립된 뒤에는 이성 제후를 밀어내기 위한 압박이 시작되었는데, 한왕 신에게는 흉노 제압이라는 과중한 짐이 지워졌다. 흉노를 제압할 군사력을 갖지 못한 한왕은 흉노와 타협하는 고식책(姑息策)을 쓰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내통’으로 단죄될 위기에 빠지자 흉노에 투항해 버린 것이었다.

한왕에게 제후 비슷한 신분을 제공할 수 있는 제국 체제가 흉노 측에 갖춰져 있지 않았다면 투항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묵특의 유목사회 통합에 중원에서 전파된 정치·행정·군사 기술이 많이 활용되었을 것이다.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넘어온 것처럼 전국 말기에는 중원에서 오랑캐 땅으로 망명하는 고급 인력이 많았다. 각국의 중앙집권화에 밀려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진나라에게 멸망당한 나라 지배층의 도피도 있었다. 그들은 유목사회에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있는 대로 재능을 바쳤고, 그 공헌을 제일 잘 활용한 지도자가 묵특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중항열(中行說)이란 인물을 소개한 일이 있다. 한 문제(文帝)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눌러앉은 사람이라 한다. [사기] ‘흉노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처음 흉노는 한나라의 비단·무명·음식 등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중항열은 그 점을 들어 선우에게 진언하였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군(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한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單于)께서 풍습을 바꿔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서 채 소비하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게 되거든 그것을 입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한나라의 음식을 얻으시면 모두 버리십시오. 그것이 젖과 유제품처럼 편리하고 맛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농경사회의 소비문화를 차단해야 흉노의 전략적 우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중항열의 주장이었다. 당시 흉노사회에 사치 풍조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락이 주어지면 거기 길드는 인간의 습성은 이런 경각심으로 어느 정도 늦출 수는 있어도 아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두 세대가 지나 한 무제가 즉위하는 기원전 141년 무렵에는 흉노의 요구는 너무 많아지고 한나라의 국력은 자라나 ‘평성 체제’의 한계에 이르게 된다.

출범 당시의 한 제국은 중앙집권력이 약했다. 한 고조(高祖) 유방은 진나라가 무너질 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항우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할거세력과 동맹을 맺어야 했다. 심지어 유방의 명목상 신하 중에도 동맹세력의 성격을 가진 한신(韓信) 같은 인물이 있었다.

한신은 유방의 천하 제패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그런데 유방이 천자 자리에 오른 후 반역의 죄목으로 숙청된 것이 무척 억울한 일로 보인다. 하지만 한신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자초한 일로 볼 수 있다. 제(齊)나라 정벌 때의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 고조, 내부 정비 위해 흉노와 굴욕적 화친


▎월지 왕과 그 신하들을 형상화한 고대오리엔트박물관에 있는 1세기 석조 작품. / 사진:PHGCOM
한신은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임명된 후 동북방을 원정,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평정했다. 그보다 동남쪽에 있던 제나라가 또 하나 중요한 대국이었는데, 유방은 제나라까지 군사력으로 정벌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 생각해서 역이기(酈食其)를 사신으로 보내 (실제로는 동맹 성격의) 투항을 권유했다.

역이기가 제나라 왕 설득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한신이 듣고 군대를 쉬게 하려 할 때 모사 괴통(蒯通)이 그를 부추겼다. 한신은 힘든 전투로 조나라 50여 성을 겨우 얻었는데 일개 서생 역이기가 세 치 혀 운동만으로 제나라 70여 성을 얻는다니, 그 꼴을 어떻게 가만히 보고 앉았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 말에 넘어간 한신이 제나라를 향해 ‘닥치고 공격’에 나서자 제왕은 역이기를 솥에 삶아 죽이고 도망쳐 항우의 원조를 청했다.

결과는 한신의 대성공이었다. 항우가 보낸 용저(龍且)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제나라 확보에 성공했다. 그런 뒤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제나라 왕에 봉해달라고 청했다. 제나라는 항우 세력과 직접 마주치는 곳인데 민심이 불안하기 때문에 ‘임시 왕(假王)’으로라도 세워줘야 통치가 안정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항우군의 포위 아래 곤경에 빠져 있던 유방은 한신의 요청에 발끈했다. “빨리 와 도와주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놈은 제 몫 챙기기만 바쁘구나!” 욕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측근들이 유방의 발을 슬쩍 밟아 입을 막아놓고 귓속 말을 했다. 지금 성질부릴 형편이 아니니까 해달라는 대로 해주라고. 상황을 깨달은 유방은 오히려 더 통 크게 나왔다. “임시 왕은 무슨 임시 왕이야! 진짜 왕 하라고 그래!”

그래서 한신은 제왕이 되기는 했는데, 십여 년 후 뒤집어쓴 죄목보다 이것이 진짜 ‘반역’이라면 반역이었다. 유방이 그를 제왕에 봉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

[사기] 권 89~93에는 한신을 비롯한 한나라 초기의 이성 제후들 이야기가 실려 있다. 황족도 여러 명 제후에 책봉된 것은 이성 제후들을 견제하는 번병(藩屛)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유방이 기원전 202년에 세운 제국은 아직 제국다운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다운 제국을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정리한 것이 이성 제후였다. 기원전 195년 유방이 죽을 때까지 이 사업이 진행되었다. 흉노에 유리한 조건으로 화친을 맺은 것도 이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이 죽을 무렵 연왕 노관(盧綰)이 흉노에 투항했는데, 한나라 권력구조의 변화가 단적으로 비쳐진 사건이었다. 노관은 유방의 세력이 미미할 때부터 한결같은 충성을 바친 심복이었다. 그런 노관도 이성 제후의 정리를 피해갈 수 없었고, 막장에 몰린 그의 선택은 흉노 행이었던 것이다.

이성 제후가 정리되자 이번에는 황실 내의 모순이 이리저리 터져 나왔다. 안으로는 여후(呂后)가 권력을 장악하여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밖으로는 종실 제후들이 중앙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는 추세가 나타났다. 여후의 세도는 15년간 계속되다가 기원전 180년 문제(文帝)의 즉위 후 해소되었으나 제후 통제 문제는 20여 년이 더 지나 기원전 154년에야 오·초(吳楚) 7국의 난을 계기로 겨우 극복되었다. 제국의 선포로부터 50년이 지나서야 제국다운 제국의 틀이 잡힌 셈이다.

7국의 난을 촉발한 계기는 조조(晁錯)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문제와 경제(景帝)의 큰 신임을 받은 조조는 제후국의 세력을 줄여나가는 삭번책(削藩策)을 추진했고, 오왕·초왕 등 제후들이 이에 반발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반란 초기에 제후들은 자기네가 황제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조 같은 간신을 처단하려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경제는 조조를 처형하고 제후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고, 결국 전면적 내전을 통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흉노 약화시킨 한나라, 서쪽으로 무역 외교에 착수


▎둔황(敦煌)에 있는 한나라 때 망루 유적. 기원전 117년 한 무제가 건설한 둔황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 사진:The Real Bear
조조가 또한 제안했던 흉노 대책도 그의 억울한 죽음으로 막히고 말았다. 그가 문제에게 올린 ‘수변권농소(守邊勸農疏)’는 대규모 둔전(屯田)으로 변경을 충실하게 하는 정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40여 년간 계속되어 온 굴욕적인 대 흉노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적극적 시도가 나타난 것이다. 현실에서는 조조가 죽은 20여 년 후 그보다 훨씬 더 강경한 정책이 무제(武帝)에 의해 추진되었다.

오·초 7국의 난을 계기로 한나라의 중앙집권체제가 안정되자 재정이 풍족해졌다. 십여 년이 지난 기원전 141년 무제가 즉위할 때는 엄청난 분량의 곡식이 국가의 곳간에 쌓여 썩어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자원을 발판으로 무제의 흉노 정벌이 시작된다.

15세 나이에 즉위한 무제가 본격적 흉노 공격을 시작한 것은 8년 후인 기원전 133년이었다. 그러나 흉노와의 관계에 변화를 꾀하려는 의지가 더 일찍부터 그에게 있었다는 사실은 즉위 직후인 기원전 139년 장건(張騫, 기원전 164~114)의 월지 파견에 드러나 보인다. 25세의 근위대 장교 장건은 월지를 한나라 편으로 끌어들여 함께 흉노에 대항하도록 설득하는 사명을 띠고 장안을 출발했다.

한나라의 서북방, 지금의 간수(甘肅)성 방면에 있던 월지는 흉노의 유목사회 통합 이전에 가장 강성한 유목세력의 하나였다. 두만 선우가 묵특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일을 보더라도 당시 월지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묵특의 흥기 이후 수세에 몰려 있다가 기원전 170년대에 흉노의 큰 공격을 받아 왕이 살해당한 후 월지의 주력이 서쪽으로 멀리 옮겨간 것을 대월지라 하고 일부가 남쪽 고원지대로 옮겨간 것을 소월지라 한다.

월지의 패망 30여 년 후에 장건을 사절로 보낼 정도로 한나라의 이 방면 정보가 어두웠을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장건은 월지의 옛 땅을 헤매다가 흉노에 사로잡혀 10년간의 억류 끝에 기회를 보아 탈출했고, 탈출한 뒤 다시 월지를 찾아 서쪽으로 향했다. 멀리 아무다리야(옥수스)강 상류의 박트리아 지방에 정착해 있던 월지인들에게 흉노를 협공하자는 황제의 제안을 전했으나 그들은 동쪽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장건은 월지에서 한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흉노에게 붙잡혔다가 기원전 126년 군신 선우가 죽은 후의 혼란을 틈타 다시 탈출, 사행(使行)을 떠난 지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건은 10년간 억류되어 있는 동안 아내를 맞아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사서에 전해지는 내용만으로는 그가 처했던 상황을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흉노사회에서 포획한 중국인을 단순한 노예 이상으로 활용하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생존을 넘어 생활까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가 첫 번째 탈출한 기원전 129년은 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전면적 공격이 시작될 때였다. 그가 ‘탈출’해서 한나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서쪽으로 향한 것이 애초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고 사서에는 적혀 있지만, 흉노 측에서 상황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그에게 뭔가 역할을 주어 파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로부터 3년 후 장건이 한나라로 돌아올 때 동행한 것은 호인(胡人) 시종 한 사람뿐이었다고 하니, 그의 거취를 설명할 근거는 그 자신의 진술 외에 거의 없었을 것 같다.

한나라에 대해서나 흉노에 대해서나 장건의 역할에 군사적 측면보다 경제적인 측면이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파미르고원 서쪽에는 문명 수준이 높은 큰 경제권이 있었고 중국과의 교역이 작은 규모로 시작되어 있었다. 한나라는 흉노에 대한 군사적 공격과 함께 이 교역로 확보를 위한 노력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흉노세력을 제압한 뒤 한나라는 기존의 장성 이북으로는 지속적 관리를 시도하지 않았으나 서쪽으로는 서역도호부를 설치해서 지금의 신장(新彊) 일대를 강역에 편입시키면서 장성을 서쪽으로 연장해서 쌓기까지 했다.

발레리 한센은 [실크로드: 7개의 도시](류형식 옮김, 소와당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황제가 장건을 파견한 이유는 국방문제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역 때문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 항상 목적은 북방의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404쪽) 한센은 근년의 고고학 연구 성과를 활용해서 중국과 서역의 관계에 관한 좋은 관점을 많이 제시했지만 이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무제가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한 실크로드 방면에는 보호가 필요한 농경사회가 없었다. 보호가 필요한 것은 교역이었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7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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