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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3)] 영국, 인류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 

세금 거두면 정부가 부자가 되고 생산이 자유로우면 국민이 부유해져 

프로테스탄티즘과 의회 민주주의 통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민족 통합
생산성 자극한 산업혁명으로 세계제국 일궈… 미국에 패권 넘기고 브렉시트로 위기


▎영국 의회민주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궁. / 사진:위키피디아
영국은 인류 최초로 자본주의 국가의 전형(典型)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부국굴기에서 살펴본 경제발전으로 부를 축적한 성공 사례의 특징을 조합한 결정체와 같다. 예컨대 영국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처럼 촘촘한 도시의 숲을 이뤘다. 또 바빌로니아나 로마제국보다 더 강한 군사력을 해외로 펼치는 능력을 갖췄다. 경제력에서는 네덜란드의 수준을 앞질렀다. 대영제국의 영토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을 능가했다. 경제적인 힘과 통치 영역이 최고조에 도달했던 것이다.

영국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처럼 상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부를 가졌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및 피렌체가 상인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힘을 총동원했던 것처럼, 영국은 무역을 위해 오대양을 누비는 함대를 운영했다. 영국은 군주를 내세워 국가의 통일성을 강조했다. 동시에 의회를 발전시켜 산업의 이익을 위한 목소리를 대변했다. 경제를 위한 국가체제, 이것이야말로 영국이 1840년을 즈음해 완벽하게 이뤄낸 성취였다. 그리고 바로 이 자본주의 국가의 전형은 이후 전 세계의 모델로 부상하게 됐다.

영국이란 정확하게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을 말하는 것인가. 프린스턴대의 역사학자 린다 콜리는 [영국인 : 민족의 형성, 1707~1837년]에서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이 만들어진 것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실이 합쳐진 1707년부터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1837년 사이의 시기라고 설명했다. 콜리는 바로 이 시기에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의 3개 민족이 프로테스탄티즘이란 종교와 의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대영제국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통합 민족으로 탄생하게 됐다고 분석한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전쟁을 치르고 하나의 근대적 민족으로 부상하면서 부국이 됐다. 영국 또한 브리튼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면서 세계의 중추적인 부국으로 떠올랐다. 다만 영국의 특징은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아일랜드 등 기존의 더 오래된 민족들을 통합하면서 규모를 키워 성장했다는 점이다. 영국이라는 민족이 만들어지는 18세기, 스코틀랜드 출신인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1776년 [국부론]을 발표했다. 민족 형성과 경제발전의 공명(共鳴)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부의 본질은 민간의 생산능력


▎1830년 세계 최초로 도시(리버풀)와 도시(맨체스터)를 연결하는 기차가 운행하기 시작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스미스가 집필한 [국부론]의 영어 제목은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직역하면 [민족의 부의 본질과 원인에 대한 연구]에 해당한다. 여기서 스미스가 국가(States)가 아닌 민족(Nations)을 강조한 것은 정부보다 민간 사회에서 창출하는 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스미스는 부의 본질은 금은보화를 쌓아놓아 축적된 재산이 아니라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민간 사회의 능력이라고 역설했다. 왕실이나 정부의 곳간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의 생산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또 부의 원인으로 분업을 꼽으면서, “시장이 클수록 분업이 촉진되고 경제는 발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덜란드의 사례에서는 임해(臨海) 저지대 많은 강과 수로가 교통이 발달한 통합 시장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도버 해협 건너편에 있는 잉글랜드는 네덜란드보다 교통 조건은 다소 열악했지만 국가 규모는 더 컸다. 게다가 영국은 잉글랜드를 넘어 웨일스·스코틀랜드·아일랜드 등을 하나하나 집어삼키면서 더 큰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갔다. 영국의 형성은 이런 점에서 스페인의 통합 과정과 비교할 만하다. 카스티야, 아라곤 등의 왕국이 혼인을 통해 스페인이라는 통합 왕국으로 발전했듯이, 영국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실이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통합 왕국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은 카스티야가 지배적 입장에 서서 다른 지역을 차별했다. 반면 영국은 잉글랜드 중심의 통합이지만, 다른 지역을 차별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새로운 민족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또 하나의 접착제는 16세기부터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적 동질성이었다. 그 시기 영국은 네덜란드와 유사하게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종교적 선민사상이 강했다,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자유롭고 강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폭넓게 공유하고 있었다.

영국 의회는 귀족과 상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장이었는데 1689년 명예혁명을 계기로 왕권을 통제할 수 있는 본격적인 권력기반을 마련했다. 영국의 국왕은 반드시 프로테스탄트를 믿어야 한다는 원칙이 점차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1714년에는 독일 하노버 공국까지 가서 조지 1세를 영국 왕으로 ‘수입’하기까지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수립된 ‘국왕의 종교가 국민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가 된다는 원칙을 거꾸로 뒤집어 국민이 프로테스탄트니 국왕도 프로테스탄트여야 한다는 민주적 원칙을 의회의 권력으로 강제한 셈이다. 이처럼 18세기가 되면서 영국은 가톨릭 국가 프랑스나 스페인에 대적할 수 있는 프로테스탄트 대표 민족으로 떠오르게 된다.

산업혁명으로 세계의 공장이 되다


▎산업 생산에서 도자기의 종가라 할 중국을 압도한 영국 웨지우드사의 런던 매장. / 사진:위키피디아
18세기부터 1815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끊임없이 전쟁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15세기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부터 따져보면, 수백 년을 경쟁하며 전쟁을 치른 악연(惡緣)이 있다. 두 나라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라는 대립 구조뿐 아니라 정치경제 제도도 아주 달랐다. 일례로 프랑스는 국가가 경제를 주도하는 관(官) 중심의 구조였던 반면, 영국은 사회와 시장이 활발하게 경제를 리0드해 나가는 형식이었다. 이 두 모델은 어떤 쪽이 반드시 우세하다고 보기 어렵다.

인류의 경제 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산업혁명도 필연적으로 영국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18~19세기 두 나라는 모두 과학기술 분야에서 선두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순수 과학은 국가가 운영하는 전문학교나 기관에서 연구가 진행되는 프랑스가 좀 더 앞섰다. 하지만 기술과 응용의 분야에서는 민간 사회의 창의력이 만개한 영국이 앞서 나갔다.

유럽의 경제발전을 거시 역사적으로 설명한 에릭 존스 교수의 [유럽의 기적]을 보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큰 이유로 두 가지를 주목한다. 산업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혁신은 증기기관을 경제활동에 적용한 결과인데, 이 과정에서 에너지 자원인 석탄의 중요성은 결정적 요인이었다. 영국은 ‘석탄으로 이뤄진 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땅만 파면 석탄을 캐낼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1870년 영국의 연간 석탄 생산량은 1억1000만t이었던 반면 미국·독일·프랑스를 다 합쳐도 7000만t 이하에 불과했다. 영국은 철도와 기관차, 증기 함선과 방직기계 등 산업혁명의 첨단 부문에 마음껏 석탄을 댈 수 있었고 이는 영국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영국에 주어졌던 두 번째 행운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밀을 비롯한 주요 식량을 대량 생산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석탄이나 철광석을 캐내는 일부터 공장에서 철강을 만들고 기계를 돌리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영국이 농촌의 인구를 도시로 이동시켜 노동자 집단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식민지에서 저렴한 가격에 식량을 생산해서 수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 말부터 영국은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거대한 전환의 선두주자로 치고 나갔다. 기존에 바다와 강과 운하를 통해 촘촘히 연결된 내수 시장은 이제 철로로 연결된 망으로 뒤덮였고 그 결과 영국은 세계 최대의 밀집된 시장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석탄과 철강, 철도와 운하, 모직과 면직 등 다양한 산업은 상호 시너지를 일으키며 들불처럼 퍼졌다. 그 덕분에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 다양한 산업의 통계를 살펴보면 영국이라는 나라가 세계 생산량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일은 빈번했다. 일례로 1860년 선철(銑鐵) 생산량은 영국은 380만t이었다. 미국·독일·프랑스를 합쳐도 이 수치는 230만t에 불과했다. 다양한 산업에 걸쳐 하나의 국가가 이처럼 집중적 생산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두를 달리는 리더에게 생산력이 집중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상은 이처럼 영국에서 시작됐다.

동아시아에 천하태평(天下泰平)이라는 개념이 있었다면 유럽에서는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지배 아래 평화를 누린다는 생각이 있었다. 산업혁명의 영국은 그 어떤 부국보다도 높은 생산성을 자랑했기 때문에 전 세계를 대상으로 경제활동을 벌여야 했다. 영국은 아메리카의 밀이나 담배, 사탕수수를 수입해 식품이나 기호품 산업을 발전시켰다. 면화와 모를 수입해 직물과 의류 산업을 성장시켰다. 과거 스페인 제국이 그랬듯이 세계를 누비며 안전한 교역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스페인은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전투 능력을 키웠고, 네덜란드는 종주국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에서 군사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해양세력 영국은 18세기 유럽 대륙의 군사 강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군사력을 키웠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9년 전쟁(1688~1697년), 스페인 상속전쟁(1701~1714년), 오스트리아 상속전쟁(1740~1748년), 7년 전쟁(1756~1763년),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1792~1815년) 등 유럽과 세계의 무대에서 전개되는 반복된 전쟁에서 영국은 프랑스나 스페인을 대상으로 싸웠다.

그리고 영국은 이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승승장구하면서 세계에 자신의 제국을 넓혀갔다. 이 시기에 영국이 패배한 유일한 전쟁은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년)이었다. 이후 미국의 13개 주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는 했지만 영국은 여전히 북아메리카에 캐나다라는 넓은 식민지를 유지했다. 비슷한 시기 오대양의 호주와 뉴질랜드 같은 새로운 식민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은 했으나 여전히 앵글로 색슨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팍스 브리태니커의 중요한 정점(頂點)은 중국과의 아편전쟁에서 거둔 1842년의 승리다. 중국은 중세 송나라 시기부터 인류의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떠올라 그 위상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라시아 대륙의 변방이었던 영국이 새로운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멀리 동아시아까지 진출하면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거대한 제국인 중국을 무릎 꿇게 한 셈이다. 이보다 앞서 이미 17~18세기에 인도를 식민지로 차지한 바 있는 영국에 대항할 세력은 더는 없었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19세기 유럽의 질서를 ‘백 년의 평화’라고 표현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된 181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까지 백 년 동안 영국이 지배하는 평화와 질서가 유럽에서 국제적 자본주의가 무르익으면서 발전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시기라는 분석이다. 물론 유럽 대륙에서는 여전히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전쟁이나 크림전쟁 등이 있었지만, 무역이나 경제활동을 크게 저해할 만한 규모의 전쟁은 없었다. 영국은 특히 바다에서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교역을 보장하는 세력으로 군림했다. 당시 영국의 국가 전략은 해군력에 있어 세계 최강의 선두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2위인 국가보다도 두 배 이상의 능력, 즉 절대적 우위를 항상 보유한다는 목표를 지향했다.

유럽의 강대국이 세계를 무력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서 대영 제국은 분명 과거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네덜란드 제국의 계보를 잇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제국의 무역을 세비야나 리스본 항으로 집중한 뒤 교역을 통해 이익을 취했다. 네덜란드도 동인도주식회사(VOC)를 통해 독점권을 추구했다. 영국 역시 동인도주식회사(EIC)나 다양한 식민지무역 회사들은 기본적으로 독점 무역의 형식이었다.

‘팍스 브리태니커’의 탄생

하지만 영국은 1840년대부터 자유무역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나와 기존 제국주의의 틀을 바꿔버렸다. 그때까지 제국이란 무역에서 세금을 거둠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형식이었지만, 영국은 자유무역 정책을 통해 세금을 거두기보다는 수출입 사업 자체로 돈을 버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영국은 무역을 통한 이윤보다 생산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모델로 이행하는 데 성공했다. 스미스의 구분을 다시 인용하자면 세금을 거두면 정부가 부자가 되지만 민족이 부유해지려면 생산자들이 자유롭게 수입과 수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대영제국은 안정적으로 무역할 수 있는 틀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금본위제를 통해 사실상 세계 경제를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묶었다. 영란은행은 1694년 명예혁명 직후 세워진 근대적 중앙은행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1844년에는 영란은행의 발행권을 영국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법정 화폐로 지정함과 동시에 이를 금으로 바꿔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쉽게 말해 영란은행의 지폐는 금만큼 신뢰할 수 있는 화폐가 된 것이다. 이후 19세기 후반 다른 나라들도 금본위제를 선택하면서 세계는 마치 금이라는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는 시장처럼 됐다.

19세기 영국이 만든 세계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의 이동도 활발했다. 18세기까지는 소수의 본토 출신 군인이나 관료가 식민지를 지배하는 형식이었다면, 19세기에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나 오대양 등으로 대거 이주하는 양상을 띠었다. 물론 이 시기에 중국인들의 아메리카 이주나 인도인들의 아프리카 진출도 활발하게 나타났다. 영국의 자유무역 정책으로 상품이 세계를 손쉽게 드나들고 금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파운드화로 금융 거래를 하듯이, 사람들도 일자리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선택지를 가졌던 것이다.

최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화에 앞서, 이미 19세기에 인류는 첫 번째 세계화를 경험했다. 영국은 또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만들면서 동시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학이라는 지적인 틀을 세상에 내놓았다. 애덤 스미스의 자유무역이론은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이론을 낳았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사회관이나 앨프레드 마셜의 한계효용이론 등은 실제 영국의 런던과 케임브리지, 옥스퍼드라는 작은 공간에서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켰다. 프랑스나 독일에서 발전한 경제학이 다른 사회과학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강조한다면, 영국의 경제학은 시장이라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의 운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처럼 영국은 새로운 부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부국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여기에 더해 경제학이라는 이론까지 패키지로 제시한 셈이다.

영국 노동당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브리타니아와 사자상. / 사진:위키피디아
1840년대가 영국에서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전형이 만들어진 시기라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은 영국의 모델이 대영제국을 통해 세계로 전파되면서 하나의 자유주의 질서를 형성한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19세기 중반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지만, 20세기에는 이미 미국이나 독일이 영국의 산업 능력을 추월하면서 생산과 수출 대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에 발맞춰 영국은 처음에는 생산력으로 세계 경제를 지배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금력과 금융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서서히 변해간 것이다.

과거 18세기의 잦은 전쟁이 영국이 도약하는 데 중요한 과정이었다면, 20세기 치러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쇠퇴하고 미국이 새로운 패권(霸權)으로 떠오르는 과정이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를 두고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영국은 세계를 리드할 능력이 없었고, 미국은 리더의 의지가 없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세계 정치경제의 리더십을 발휘하기에 영국은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세력이었다면, 미국은 자신의 능력을 미처 깨닫지 못하면서 의지를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노동세력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노동조합이 합법적인 조직으로 인정받은 것은 1871년이며 그후 조합원이 지속해서 늘었다. 석탄산업처럼 노동자가 지리적으로 집중된 도시의 노동조합은 강한 조직력과 행동력을 자랑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을 거치면서 조합원의 수는 400만에서 800만 명 규모로 대폭 증가했다. 과거 왕권에 대해 귀족과 상인의 목소리가 성장하면서 의회 민주주의를 낳았듯이, 이제 세계의 공장 영국에서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에서 정치세력으로 노동당이 출범한 것은 1900년이다. 정당이 노조를 지배하는 구조인 독일이나 정당과 노조가 따로 발달한 프랑스와 달리 영국에서는 노조운동이 정치를 지배하는 모습을 갖추었다. 따라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등의 정치혁명을 추구하는 유럽대륙과 달리 영국에서는 노동자의 실질적 삶의 질을 향상하는 실용적 정치가 우세했다. 노동당은 1923년과 1929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집권하는데 성공한 바 있으며, 영국 정치에서 자유당을 대체하는 진보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1840년대 영국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 전형은 노동자에게는 가혹한 착취의 체제였다. 그러나 100여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집권한 영국의 노동당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동자의 복지를 국가가 책임지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모델을 새롭게 제시했다. 영국은 새로운 복지국가 모델과 함께 존 메이나드 케인스라는 걸출한 경제학자를 통해 국가가 경제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이론의 경제학도 함께 제시했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영국이 제시한 새로운 자본주의 전형은 혼합경제나 복지국가, 포디즘이나 사회적 자본주의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신자유주의와 브렉시트

주지하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지배한 것은 더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신대륙의 새로운 대국이었다. 그렇다고 세계 자본주의에서 영국의 역할을 경시할만한 시대가 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국은 1970~80년대 여전히 자본주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개척자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적 흐름을 처음으로 정책에 적극적으로 적용한 것은 바로 영국의 보수당과 마거릿 대처 총리의 정부였다.

신자유주의 정책 패러다임은 1979년 집권한 영국의 대처와 1980년 당선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주도했다. 국제적 영향력으로 따지면 미국이 앞서지만 전통적으로 미국은 영국만큼 복지국가나 노동운동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정책 변화의 적극성을 따져보면 미국은 영국을 따라올 수 없다는 말이다. 대처는 노조의 나라에서 노조의 역할을 대폭 축소했고, 공공부문이 방대한 나라에서 철도·전기·가스·항공 등의 분야에서 대규모 민영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1986년 대처의 금융 부문 탈규제 정책은 우주 탄생을 의미하는 ‘빅뱅’(Big Bang)으로 불릴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대처는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신자유주의 바람을 불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 1986년 유럽 단일시장 계획은 대처의 자유 시장과 경쟁을 통한 변화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대륙 차원에서 실현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1993년 단일시장이 출범할 때가 되자 유럽은 나라별로 칸막이가 쳐있는 시장에서 벗어나 하나의 통합된 시장으로 커질 수 있었다. 영국에서 대처의 영향력은 워낙 강해 1997년 등장한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과 ‘제3의 길’도 대처의 개혁을 되돌려 놓지는 못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신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나 고든 브라운 총리가 아니라 2016년 보수당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이나 이후 총리직을 맡았던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이 영국을 유럽으로부터 탈퇴시키는 브렉시트(Brexit)를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신노동당이 대처의 유산을 이어받은 반면, 오히려 보수당이 국민의 민족주의적 반발에 편승해 유럽과의 결별을 이끈다는 뜻이다.

물론 보수당에서는 브렉시트가 민족주의적 고립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정치적 수사(修辭)일 뿐 먼 미국이나 중국과 친하기 위해 가까운 유럽에서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누가 들어도 억지스럽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제국을 만들고, 일방적 자유무역을 선포했던 나라가 이제 브렉시트라는 퇴행적 길목에 들어서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은 세계를 자유주의로 이끈 뒤, 복지국가로 균형추를 잡아주고, 다시 신자유주의의 방향을 제시했던 나라지만 이제 미래의 길을 여는 역할은 하지 못하는 듯하다. 의회민주주의의 조국에서 의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통합민족의 형성에 성공한 나라였지만 이제 스코틀랜드는 그곳에서 탈출하겠다고 반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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