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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5)] 하루 차이로 갈린 이성계의 운명 

전쟁의 신, 정치 앞에 무력해지다 

고려 타도에 끝까지 우유부단했던 이성계, 아들 이방원의 독촉으로 역사 바뀌어
반대파 정몽주도 선제공격 타이밍 놓쳐 고려 망하고, 자신도 비극적 죽음


▎전북 남원 운봉에는 고려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친 사실을 전하는 승전비가 있다. 1945년 일제가 파괴한 것을 1957년 다시 만들어 세웠다.
1392년 3월 17일 이성계가 낙마했고, 3월 23일 그 소식이 공양왕에게 알려졌다. 3월 24일 세자가 개성에 도착했고, 3월 28일 상춘정에서 세자 위로연이 개최됐다. 4월 1일, 정몽주·이색 등의 요청에 따라 대간이 정도전을 죽이고, 조준 등을 심문하라고 탄핵했다. 공양왕은 이를 보류했다. 4월 2일 대간은 재차 강요했다. 더욱 강경해져서, 정도전뿐 아니라 모두를 극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왕은 정몽주, 심덕부와 논의한 뒤 이를 윤허했다. 하지만 극형은 아니고, 일단 귀양만 보내도록 했다.

이날 이성계가 개성 부근의 국제무역항 벽란도에 도착했다. 이성계는 그곳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4월 3일 개성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벽란도 근처 속촌에서 생모 한씨의 시묘살이를 하던 이방원이 달려왔다. 그는 이성계에게 즉시 개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대로 있으면 정몽주가 해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성계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방원이 거듭해 끈질기게 요청하자, 밤에 견여를 타고 개성에 돌아왔다. 그 하룻밤이 역사를 바꾸었다.

이성계가 예상보다 빨리 개성에 귀환함으로써 고려수호파는 허를 찔렸다. 이 하루의 의미가 컸다. 이성계의 처음 뜻대로 벽란도에서 하루를 더 지체했다면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은 아마 그때 죽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운명도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조선건국도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를 사는 사람들의 행위는 각자의 입장에서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 전체는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어떤 연쇄작용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야말로 나비효과(butterfly effect)가 적용되는 대표적 영역이다. 인간의 역사적 행위가 자율적이지만 동시에 운명적이라는 뜻이다. 메를로 퐁티가 역사의 근본적 성격이 모호성(ambiguity)에 있다고 생각한 이유이다. 역사에서 인간의 노력은 이 모호한 합리성을 찾아가는 고투이다. 이방원이 재촉하고, 이성계가 아픈 몸을 이끌고 개성으로 돌아온 것 같은 행위가 그렇다.

역사는 합리적인가, 운명적인가?


▎정몽주의 초상. 문관이었지만, 무인만큼 호방하고 대담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고려왕조를 지키려면, 고려수호파는 이성계가 개성에 귀환하기 전까지 역성혁명파를 모두 제거해야 했다. 시간이 거의 없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세자의 위로연 등으로 헛되이 시간을 낭비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이방원의 기민한 대처로 하루를 잃었다. 이 하루가 결정적이었다. 고려수호파에게 대처할 타이밍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황이 급박하고 위험할 때는 사소한 변화조차 심각한 심리적 불안을 초래한다. 정몽주조차 “일이 성사되지 못할까 우려해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정몽주전]) 이성계가 벽란도에 도착한 날부터 4월 4일 피살된 날까지 그는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못한 것이다.

정몽주는 문관이지만 무관만큼 호방하고 담대한 인물이었다. 고려말 “당시 국가에 변고가 많아 중요한 기밀사항이 매우 많았는데, 정몽주는 의심스러운 큰 사건을 처결하면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모든 일을 조리 있고 합당하게 처리했다”고 한다. 외교에서도 그런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377년(우왕 3) 우왕초 친원정책에 반대한 정몽주를 죽이고자 이인임 등 권신들이 그를 일본 보빙사로 천거했다. 당시 일본 사신으로 갔다가 구류되거나, 바다에서 왜구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373년 정지 장군이 남해 관음포대첩을 거둘 때, 왜구의 배를 나포해 보니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목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 배 밑에 갇혀 있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던 길에 왜적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왜구는 “만약 이기지 못하면 반드시 너를 먼저 죽여 버릴 것”이라고 을렀다고 한다.([정지전]) 1375년 2월, 일본 규슈 하카다(霸家臺)에 통신사로 파견된 나흥유는 첩자로 오인당하여 구속되었다. 거의 굶어 죽을 뻔했지만 1376년 10월 생환했다.

당시 일본은 1336년부터 남북조 전란이 시작돼, 남조와 북조가 치열하게 싸울 때였다. 1371년 북조인 무로마치 막부는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 본명은 今川貞世, 또는 源了俊)을 규슈 탄다이(九州探題)로 파견해 남조를 공격하게 했다. 탄다이란 해당 지역의 군사지휘권과 재판권, 집행권을 모두 장악한 장관이다. 그는 1377년 히젠(肥前) 니나우치(蜷打)에서 남조군을 대파했다. 료슌은 13세기 중엽 이후 왜구 문제에 대해 고려 정부와 대화를 나눈 최초의 일본 정치가이기도 하다.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와는 독립된 외교 행위였다. 료슌은 고려가 통신사를 파견한 답례로 바로 이해에 보빙사로서 저명한 밀교 승려인 신홍(信弘)을 고려에 파견했다. 답서는 부정적이었다. 왜구란 초적으로서, 막부의 법령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금지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정몽주와 신숙주, 역대 최고의 대일 외교관


▎일본 남북조 시대의 무장이자 시인이었던 이마가와 료슌은 정몽주의 외교력을 인정하고 고려에 협조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어쨌든 1377년 고려 정부도 보빙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이인임이 정몽주를 지명한 것이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겼지만, 정몽주는 전혀 난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1377년 9월, 정몽주는 규슈 하카타에 가서 왜구 문제의 득실을 료슌에게 성공적으로 납득시켰다. 정몽주의 설명에 “주장(主將)이 경복(敬服)해 매우 후하게 접대했다”고 한다. 주장이란 료슌이다. 그는 용맹한 장군이자 뛰어난 시인으로서, 당대 일본 최고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가 정몽주의 국량을 인정한 것이다. 정몽주는 일본 승려들과도 교유를 나눴다. “일본 승려들이 시를 얻으려고 찾아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어주니, 승려들이 날마다 가마를 메고 모여들어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라고 청하였다.”([정몽주전]) 조선 시대에도 통신사들에게 너무 많은 일본인이 시와 글씨를 받으려고 해 팔이 아플 정도였다고 한다.

료슌은 1378년 6월, 즉시 신홍과 군사 69인을 고려에 보내 왜구를 토포하도록 했다. 신홍은 7월에 조양포(兆陽浦)에서 왜구의 배 1척을 노획하고 왜구를 모두 죽였으며, 포로가 된 부녀자 20여 인을 돌려보냈다. 조양포는 지금 전남 보성의 대전리로서, 660년 백제가 멸망했을 때 그 유민이 저항하다가 일본으로 떠났던 포구이기도 하다. 1378년 7월, 10개월 만에 정몽주가 귀국할 때 료슌은 주맹인(週孟仁)을 사신으로 대동시키고, 포로가 되었던 윤명·안우세 등 수백 명을 보내줬다. 또한 왜구의 근거지인 이른바 삼도(三島)의 침략을 금지시켰다. 삼도란 한반도 남부 해안을 향하고 있는 쓰시마(対馬), 잇키(壱岐), 마쓰우라(松浦)를 말한다.


▎신숙주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한국 최초의 일본연구서인 [해동제국기]를 썼다. / 사진:위키피디아
일본인이 기억하는 역대 최고의 한국 외교관은 정몽주와 신숙주이다. 임진왜란 중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통역관인 요시라(要矢羅)는 1390년 일본에 파견된 사신 황윤길·김성일·허성을 혹평했다. 반면 “홍무 연간에는 정몽주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 들어감으로써 오랫동안 해구를 제어했고, 성화 연간에는 신숙주가 또한 일본에 들어감으로써 두 나라가 오랫동안 우호를 유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두 사람은 능히 일본의 강하고 약한 형세를 살펴 조선과 비교하면서 적절하게 조처하였기 때문에, 능히 싸움을 멈추고 우호를 닦아 오랫동안 변함이 없게 하였다”고 찬양했다.([선조실록] 선조 29년 1월 23일) 요시라는 반간계를 써 이순신을 투옥시킨 이중간첩이었지만, 외교관에 대한 평가는 날카롭다.

정몽주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372년(공민왕 21),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귀국길에 배가 부서져 홍사범은 익사했다. 정몽주는 표류하다 바위섬에 표착해 13일간 말다래를 베어 먹으며 버틴 결과 간신히 살아남았다. 말다래(障泥)는 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을 말한다. 재질은 주로 유기질이나 신라 시대 유물은 자작나무, 대나무제이다. 정몽주의 말다래는 짐승 가죽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담대하고 의지가 굳센 정몽주가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으니, 고려수호파의 심리적 불안은 형언할 수 없었다.

4월 3일, 공양왕은 환관 김사행을 보내 이성계에게 백은 1정과 비단 1필을 하사했다. 이성계에게 위로의 뜻을 표한 것이다. 상황의 위중함을 생각하면 다소 뜬금없는 일이었다. 공양왕은 급격한 상황 변화에 크게 당황해, 이성계의 동태를 파악하려 했을 것이다.

한편 개성에 돌아온 이성계는 위급한 상황을 저지하려고 했다. 조준, 정도전 등에 대한 대간의 탄핵을 중지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둘째 아들 이방과와 아우 이화, 사위 이제, 휘하 장군 황희석, 조규를 공양왕에게 보내, 대간의 탄핵을 공박하고 대질신문을 요청했다.

“지금 대간은 조준이 전하를 왕으로 세울 때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이 이 일을 저지시켰다고 논핵합니다.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와서 대간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이방원의 ‘최후통첩

1389년 공양왕을 옹립할 때 조준이 반대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조준의 입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정몽주가 그 현장에 있었다. 따라서 이성계의 주장은 사실 여부를 가리기보다, 일단 조준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를 위해 아들과 동생, 사위, 최측근 장군을 보냈으니, 이성계의 의사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았다.” 공양왕이 이성계의 강력한 의사를 몰랐을 리 없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할 때 어떤 사태가 초래될 것인지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양왕의 의지도 강력했다. 고려수호파도 침식을 잊는 불안 가운데에서도 임전무퇴의 결의를 다진 듯하다. “여러 소인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禍)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소인들’이란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수호파를 조선 사가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성계파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고려수호파는 공세를 더 강화한 것이다.

상황은 점점 더 타협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양측이 한 발자국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사태가 이렇게 진전될 것으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속촌에서 오막살이를 하면서도, 그는 개성의 정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연락은 매제 이제(李濟)의 몫이었다. 그는 이성계의 셋째 딸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경순공주의 남편이다. 아버지는 이인임의 동생 이인립이다. 이인임이 그의 숙부인 것이다.

이제는 이성계파의 핵심 인물로서, 1388년 무진정변 이후 자연스럽게 반이인임 노선에 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차와 과일 등 제사 물품을 공급하면서 이방원에게 자연스럽게 정보를 전한 듯하다. 이제에게서 정몽주 등의 공격을 들은 이방원은 “정몽주는 반드시 우리 집에 이롭지 못하니, 마땅히 이를 먼저 제거해야 되겠다”고 말했다. 정몽주가 어느 편인지 명확히 판단을 내리고, 그를 제거할 결심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래서 벽란도로 달려가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모함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방원의 인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방원의 주장에 답하지 않았고, 즉시 개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아직 정몽주를 타협 불가능한 적으로 보지 않았고, 그를 죽여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판단에서도 이방원과 온도 차가 있었다. 그래서 개경에 도착한 이튿날 아들 이방과 등을 보내 공양왕과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아직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공양왕의 완강한 거부로 좌절됐다. 더구나 대간의 공세는 더욱 격화됐다.

그러자 이방원은 다시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죽일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여전히 거부했다. 허락을 받지 못한 이방원은 둘째 형 이방과, 숙부 이화, 매제 이제와 함께 의견을 나눴다. 이 3인은 이방원이 최후의 결정을 할 때 함께했던 사람들이다. 이성계 외에 전주이씨 일족의 향방을 결정한 4인 위원회 멤버였다. 결론은 같았다.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원은 다시 이성계에게 가서, “지금 정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정도전 등을 국문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합니다. 사세가 이미 급한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일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방원에게 “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를 마치라”고 명했다. 인제 그만 하고, 어머니 산소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성계의 고뇌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성계는 갑자기 운명주의자가 되었다. 그 의미는 자신이 직면한 당시의 상황이 이미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아무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늘에 결정권을 넘긴 것이다.

이성계는 북변에서 태어나 소싯적부터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고, 평생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빈 용사였다. 그는 활과 승마의 명인이었었다. [태조실록] 총서에 그런 이야기가 가득하다. “태조가 환조(부친 이자춘)를 따라 나가서 사냥하다가 짐승을 보고 빙판의 비탈길에 말을 달려서 쏘면, 번번이 맞히어 한 마리도 빠져 도망가지 못하였다. 야인(野人, 여진족)이 놀라 탄식하기를, ‘사인(舍人, 이성계)께서는 세상에서 당적할 사람이 없겠습니다’고 하였다. 또 들에서 사냥하는데 큰 표범이 갈대 속에 엎드렸다가 갑자기 뛰어나와서 태조에게 달려들려고 하니,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말고삐를 돌리지 못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피해 가는데, 깊은 못의 얼음이 처음 얼어서 굳지 않았으므로, 사람도 오히려 건너갈 수 없었으나, 말이 얼음을 밟고 달아나매 발자취가 뚫어져서 물이 솟구쳐도 마침내 빠지지 않았다.” 어떤 지형에서도 자유자재로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면 어느 것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이성계가 겨우 새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얼마나 심하게 낙마했는지 15일 동안 개경에 돌아오지 못했고, 견여를 타고 간신히 귀환했다.

그 시기에 이성계의 고뇌는 극심한 것이었다. 역성혁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1391년 4월, 공양왕의 구언교서를 계기로 벌어진 역성혁명파와 고려수호파, 보다 직접적으로는 정도전과 정몽주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혁명파가 패배했다. 표면적인 논쟁은 척불 문제와 윤이·이초사건의 진상이었다. 정도전은 공양왕의 불교 신앙을 비판하고, 윤이·이초사건의 주모자로 이색, 우현보의 극형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불교 신앙이 고려의 국가이념이며, 윤이·이초사건은 죄상이 불확실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종연사건이 일어나고, 다시 심덕부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이성계파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이 연루되고, 고문당하고, 유배되고, 처형됐다. 주로 유력한 무장들이 대부분 제거됐다. 그런데 공양왕은 이 사건의 진상이 불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성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이는 왕실의 안위에 관련된 것이지, 신의 이해에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김종연을 숨겨주고 또 일부러 놓아주기도 하였으니, 반역 음모를 몰래 도와주거나 함께 꾀한 것입니다.”([고려사] 공양왕 2년 12월 5일) 또한 “창왕을 세우고 우왕을 맞이해오려고 윤이·이초와 함께 도모한 사람들은 공술과 증거가 이미 명백”하다고 주장했다.([고려사] 공양왕 3년 6월 30일) 이성계가 이처럼 강하게 주장하자 겁에 질린 공양왕은 “시중을 아버지처럼 우러러보고 있는데, 시중은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는가?”라며 눈물을 터트렸다.

7월 들어 이성계는 공양왕과 화해했다. 한편 정몽주는 7월에 반격을 개시했다. 위화도회군 이후 벌어진 옥사를 최종적으로 판단해 마무리하자는 것이었다. 9월에 사헌부와 형조가 정몽주의 요청대로 모든 사건을 논핵하고, 왕과 정몽주 등이 모여 최종 판결을 내렸다. 9월, 정도전이 마침내 축출됐다. 그해 말까지 잇달아 혁명파 인사들이 물러나거나 제거됐다. 이성계는 이 사태를 수수방관했다. 정도전은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다. 그것은 이성계가 정도전의 혁명노선을 버리고 정몽주의 중흥노선으로 선회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성계는 1391년 초부터 정계 은퇴를 깊이 고려하고 있었다. 증오와 질시, 유혈이 낭자한 정치의 세계에 깊은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 동북면으로 귀향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도전 등 측근과 경처 강씨가 강하게 만류했다. 이성계는 길을 떠나려고 행장까지 다 쌌다가 주저앉았다. 1391년 한 해 동안 그는 혁명과 은퇴, 중흥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1392년 3월, 세자 왕석의 귀국을 영접하러 황주로 떠나는 이성계의 마음은 조각난 유리 같았다. 벌써 1년이나 그런 상황이 지속하고 있었다. 죽으면 이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황주로 가던 행로에서 해주에 이르러, 이성계는 새 사냥에 나섰다. 시름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평생 자신의 몸의 일부와 같았던 말에서 떨어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다쳤다. 그런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계속 결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어려운 전투보다 난해했던 것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를 암살하는 우발적 사건으로 1차대전이 일어났다. 역사적 사건은 합리가 아니라 모호성이 지배한다.
정치는 전쟁보다 어렵다. 무인으로서 이성계에게는 적수가 없었다. 어떤 전투도 피하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많은 싸움에서 단 한 차례도 진 적이 없다. 13세기 중엽 이후 한반도에 닥친 거센 전쟁의 회오리는 오히려 이성계의 빛나는 무대였다. 한반도 전역을 물론 만주에까지 그의 말굽이 이르렀다. 하지만 가장 빛나는 전투는 1380년(우왕 6) 9월 황산전투이다. 진포대첩에서 500척의 배를 잃은 왜구 2만 명이 남원 지리산 자락 인월역에 이르렀다. 이들을 쫓아 남하한 이성계의 친병 2000명은 인월역 근처 황산에서 왜구와 대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왜구의 전력도 막강하여 승패를 가리기 어려웠다. 왜구 진영에는 걸출한 용장이 있었다. “나이 겨우 십 오륙 세 되는 적장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수려하고 용맹스럽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오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아군은 쓰러져 감당하지 못했는데, 아군은 아지발도(阿只拔都)라 부르며 다투어 피했다.” 아지는 어린 사람을 뜻하는 아기이며, 발도(拔都)는 용사나 영웅을 가리키는 몽고어 바투르(ba’atur)이다. 소년용사쯤 되겠다. 이성계로서도 이렇게 힘든 싸움은 처음이었다. 그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자 즉시 바꿔 탔으며, 또 맞아서 거꾸러지면 다시 바꿔 탔다. 날아온 화살에 왼편 다리가 맞았으나, 태조는 화살을 뽑아버리고 더욱 기세를 올려 전투를 더욱 세차게 몰아가니, 군사들은 태조의 부상도 알지 못하였다. 적이 태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몇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왔으며, 적이 또 태조의 앞으로 돌격해오니 태조가 그 자리에서 8명을 죽이자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며 좌우의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겁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과 싸우다 죽으리라!’고 하니 장수들이 감격하여 용기백배하며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적은 요지부동이었다.”([변안열전])

이성계는 이 어려운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무인으로서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정치가로서는 때때로 심약했다. 1391년 초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것부터가 그렇다. 그리고 이제 자신은 물론 이씨 일족, 추종 집단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지막 순간이 도래했는데도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정치를 전쟁으로 생각한다면, 이성계만큼 우유부단한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옳은 자가 아니라 강한 자가 이긴다

하지만 이것은 왕조를 바꾸는 일이다. 그것도 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한 왕조였다. 당시 고려인들의 관념 속에서는 고려왕조 외에는 어떤 왕조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하지만 실은 거대하고 복잡한 관념의 퇴적물 위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 전통의 깊이와 관념의 견고함에 직면해 무인으로서의 이성계의 단호함과 기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정치가란 인간과 조금 다른 종족이다. 인간이면서 야수여야 한다.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는 반인반수의 켄타우르(Kentaur)족 현자 카이론(Chiron)에 의해 양육됐다.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는 이리의 젖을 먹고 자랐고, 동생 로무스를 죽였다. 그리고 동생의 이름을 따 로마를 세웠다. 칭기즈칸은 이복동생을 죽였고, 당의 실질적 건국자 당 태종 이세민은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됐다. 조선 태종 이방원도 이복동생 둘을 죽이고, 아버지 이성계를 왕위에서 쫓아냈다. 보통 사람에게 이런 행위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하지만 위대한 정치가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왕의 신체는 인간이지만, 그 존재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왕은 신이 되고 싶어 한다.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 존재의 본질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렇고, 로마의 황제가 그랬다. 진시황이 그랬고, 칭기즈칸이 그랬다.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도 모두 그랬다. 불생불멸의 생명을 갈구했으며, 생전에 이미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모두는 인간 욕망의 한 종류이며, 그런 의미에서 삶의 한 형식이다. 그러나 어떤 정치가도 신이 되지는 못했다.

인간의 그런 절대적 한계를 깊이 자각한다면, 인간은 철학자나 신자가 되어야 한다. 로마제국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가 그런 사람이다. 조선의 세종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가는 매우 희소하다. 그러나 정치가가 야수적이며 신처럼 되고자 한다고 해서, 인간의 역경에 직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자주, 더 빈번하게 그런 일에 부딪힌다. 그럴 때 아우렐리우스는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다. 2차대전 말 원자탄을 개발했을 때, 미국 대통령은 그런 문제에 직면했다. 1945년 7월 16일, 사상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 성공한 다음 날 미국의 핵 과학자들은 대통령에게 두 가지 요청을 했다. 첫째는 일본이 항복을 거부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 것, 둘째, “결정에 앞서 모든 도덕적 책임과 우리가 제기한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해줄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은 리처드 러셀(Richard Russell Jr.) 상원의원에게 보낸 서신에서 “나는 일본의 여성과 아이들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있지만, 나의 목적은 가능한 많은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앞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야수의 길을 마다치 않을 용의가 있었다. 결국 미국은 원자탄을 사용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일본이 극도로 잔인하고 야만적인 전쟁 국가지만, 그들이 짐승이라고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을 나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1392년 4월 2일에서 4일 사이에 이성계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정치가로서 절대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있었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라도 이런 상황을 회피할 수 없다. 아니 위대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정치적 한계, 그리고 인간적 한계를 솔직히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역성혁명은 천명이다. 역성혁명이 천명인 것은 단순히 유덕자에게 주는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천명의 문제에 직면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치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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