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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47)] ‘충절의 표상’ 사육신 충정공(忠正公) 박팽년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일 뿐 어찌 나으리(세조)의 신하입니까?” 

집현전 18년간 훈민정음 창제 참여 등 경술, 문장, 필법 집대성
세종·문종 총애 입고 성삼문과 의기투합해 단종 복위 모의


▎육신사로 들어가는 외삼문 앞에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 박종혁 부회장(오른쪽)과 박기형 사무국장이 나란히 섰다.
1456년(세조 2). 조선 6대 임금 단종(丹宗)을 복위 시키려는 모의가 실패하자 100여 명의 관련자는 잇따라 죽임을 당했다. 화란(禍亂)의 한가운데 사육신(死六臣)이 있었다. 생육신 남효온이 남긴 [육신전(六臣傳)]을 통해 이야기는 남았다.

1456년 봄 단종 복위를 도모하는 쪽에 기회가 온다. 그해 4월 20일 명(明)나라는 조선의 새 임금 세조를 승인하는 문서를 전달한다. 조정은 6월 1일 임금이 명의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를 창덕궁 광연전에 마련한다. 이날 연회장에 큰 칼을 들고 왕을 호위하는 운검(雲劒)으로 동지중추원사 유응부(兪應孚),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 성승, 박쟁 등 세 사람이 뽑혔다. 모두 단종 복위에 뜻을 같이 하는 무관이었다. 거사는 이들 운검이 연회장에서 세조를 시해하고 단종을 복위시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명나라에도 바로 알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어긋난다. 운명은 단종 편이 아니었다. 세조 측 꾀주머니 한명회가 연회가 열리기 직전 장소가 좁다며 운검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 성삼문과 박팽년(朴彭年, 충정공), 유응부는 다급히 대안을 모색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시나리오는 직전에 좌절되고 만다.

거사 불발은 화근이 된다. 모의에 동참한 김질(金礩)의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날 장인 정창손을 찾아가 상의한다. 정창손은 김질과 함께 세조를 알현하고 경위를 고한다. 세조는 곧바로 국청(鞠廳)을 열고, 모의를 주동한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 등을 체포해 차례로 국문한다.

충(忠)이란 무엇일까. 지난해 12월 20일 사육신의 절의(節義)를 기리는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육신사(六臣祠)를 찾았다. 마을 가운데로 곧게 올라간 끝에 높다란 외삼문이 있었다. 묘리 또는 묘골이라 불린 이곳은 사육신 중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순천 박씨 충정공파 집성촌이다.

선생은 당시 자신은 물론 아버지와 형제, 아들까지 3대가 모두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이른바 멸문(滅門)의 화(禍)를 당한 것이다. 이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멸문이란 철벽을 뚫고 취금헌의 혈육인 손자가 묘골에서 태어난다. 대(代)가 이어진다.

이날 일행을 안내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 박종혁(70) 수석부회장, 박기형 사무국장(63)은 “사육신 중 직계 후손이 이어지는 가문은 우리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마을은 밖에서 지형이 보이지 않고 안에서도 밖이 보이지 않아 묘리(竗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 오묘함 속에 멸문지화를 막은 기운이 있었던 것일까.

멸문(滅門)의 화(禍) 입고 용케 이어진 가문


다시 당시로 돌아간다. 세조는 성삼문에 이어 박팽년을 국문한다. 박팽년은 세조의 물음에 흐트러짐 없이 당당히 단종 복위 모의를 시인한다. 거기다 세조를 “나으리”로 호칭한다. 그는 창덕궁 연회장에서 ‘나으리’를 시해하고 단종을 복위하려 했는데 호위 계획이 바뀌면서 뒷날 야외 권농 의식 때로 거사를 조정했다고 밝힌다.

세조는 “거사를 누구와 모의했느냐”고 추궁한다. 박팽년은 주저 없이 답한다. 성삼문·이개·성승·유응부·김문기·박쟁·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자신의 아버지(박중림)까지 거명했다. 세조가 배후 인물을 더 추궁하자 “아버지까지 밝혔는데 무엇이 무서워 더 숨기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조가 회유에 나선다. 평소 박팽년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다. 세조는 모의를 숨기고 지금부터 자신을 따른다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 박팽년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거기다 고문이 거듭돼도 박팽년은 세조를 호칭할 때마다 꼭 “나으리”로 불렀다. 세조를 임금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세조는 박팽년에게 “그대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장계(狀啓)를 올릴 때 이미 신(臣)이라고 쓰지 않았느냐. 지금 와서 나으리로 부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따진다. 박팽년은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일 뿐 어찌 나으리의 신하입니까.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장계한 문서에 ‘신(臣)’이라고 칭(稱)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고 했다. 이에 세조가 계목(啓目)을 살피게 하니 과연 ‘신(臣)’이라는 글자는 없고 그 자리에 ‘거(巨)’자가 교묘히 쓰여 있었다.

박팽년은 국문 내내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끝마다 “나으리”라 부르니 세조는 더욱 진노한다. 고문은 더 혹독해졌다. 결국 박팽년은 6월 7일 옥사(獄死)하고 만다. 그날 시신은 먼저 자결한 허조·유성원과 함께 형장인 군기시 앞으로 옮겨져 공개적으로 거열형(車裂刑, 수레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해진 뒤 목은 베어져 효수되고 시체는 토막이 났다.

고문치사 뒤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다


▎사당 숭정사 내부. 맨 왼쪽에 박팽년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육신이 화를 입은 실상은 30여 년쯤 지나 집필된 남효온의 [육신전]에 생생히 남아 있다. 그때까지 화란은 은밀히 구전되기만 했다. 남효온이 [육신전]을 쓰려 하자 제자들은 화가 미친다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어찌 죽는 것이 두려워 지극히 어질고 충성스럽고 의로운 이름을 끝내 역사에서 잊히게 하겠는가”며 글을 썼다.

홍살문을 지나 육신사 경내로 들어섰다. 사당 앞에 사육신의 행적이 새겨진 육각비가 우뚝하다. 그 뒤로 박정희·최규하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돌이 서 있다. 1979년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 준공을 앞두고 박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마무리가 된 것이다. 그 오른쪽으로 13·14·15대 국회를 이끈 박준규 의장의 표석도 보인다. 그는 박팽년의 18대 후손이다.

경내 가장 높은 위치에 사당이 있다. 이름하여 숭정사(崇正祠).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사육신의 위패가 옆으로 나란히 모셔져 있다. 맨 왼쪽에 박팽년 선생의 표준영정이 있고 그 옆에 ‘충정공’이라 쓴 위패가 있었다. 위패 뒤로 충정공이 남긴 초서 천자문 병풍이 서 있다. 절로 숙연해진다. 예(禮)를 올렸다.

묘골의 박팽년 후손은 처음에는 절의묘(節義廟)라는 사당을 지어 할아버지 제사만 지냈다고 한다. 이후 현손 박계창이 고조부 제사를 지내고 잠을 자는데 사육신으로 함께 죽은 다섯 분이 배를 주린 채 사당 밖에 서성이는 꿈을 꾼다. 박팽년을 제외한 나머지 사육신은 멸문을 당해 제사를 지낼 후손이 없었던 것이다. 현손은 깜짝 놀라 사당을 짓고 사육신 여섯 분을 함께 추모하기 시작했다. 그 뒤 낙빈서원(洛濱書院)이 세워져 사육신이 배향된다. 박종혁 부회장은 “지금도 음력 9월 이곳 향사에는 다섯 선생의 지정된 봉사손 등 150여 명이 참석한다”고 말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남효온은 [육신전]에서 모의의 출발을 성삼문과 박팽년의 의기투합으로 규정한다. [육신전]의 기록은 이렇다. “을해년(1455) 상감(세조)이 임금 자리를 물려받자 박팽년은 나랏일을 끝내 건지지 못할 줄 알고 경회루 연못에 나와 스스로 빠져 죽으려 했다. 성삼문이 굳게 만류한다. ‘이제 옥쇄가 비록 옮겨갔지만, 아직 상왕이 계시고 우리가 죽지 않았으니 오히려 뒷날을 도모할 수 있다. 도모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아 죽는다 해도 또한 늦지 않으니 오늘 죽음은 나라에 보탬이 없다.’ 박팽년이 그 말을 좇았다.”

박팽년은 그때부터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를 추진하기로 뜻을 모은 뒤 그의 아버지와 먼저 상의했다. 종친회 박종혁 부회장은 “취금헌 할아버지는 충신이면서 동시에 효자였다”며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충이 먼저라며 충과 효의 순서를 정해 주었다”고 설명한다. 후일 세조의 국문에 거사의 배후로 아버지를 굳이 포함시킨 까닭이다.

“충신이면서 동시에 효자였다”


▎드론으로 촬영한 육신사 전경.
후손들은 충정공이 청백리였음도 강조한다. 일화가 전한다. 충정공은 집현전 학사로 있을 때 광주(廣州) 전답을 샀다. 벗이 알고 “봉록이 밭갈이를 족히 대신할 것인데 전지는 사서 무엇하려는가” 책망하자 곧 도로 팔아 버렸다. 그만큼 물욕을 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청백(世守淸白)’을 가훈으로 이어간다.

박팽년은 1417년 충청도 회덕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이다. 그는 본래 성품이 조용하여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고 말수가 적으며 몸가짐이 단정했다고 한다. 18세인 1435년(세종 16) 알성문과로 급제한다. 박팽년은 39년의 생애 중 21년을 관직에 있었는데 후반 외직 3년을 제외하고 18년 동안 집현전의 학사로 일했다.

최완수는 [조선왕조 충의열전]이란 저서에서 “세종은 박팽년의 실력을 인정했다”고 정리한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사실을 기록해 경계한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예로 든다. 안견이 그림을 그리고 박팽년·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이 사실을 기록하자 세종은 박팽년에게 다시 서문을 짓게 한다. 이 글은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남아 있다.

박팽년은 ‘비해당기’라는 경사(經史)의 지식이 총동원된 명문장 ‘비해당기(匪懈堂記)’를 남기기도 했다. 안평대군이 세종으로부터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받고 그 전말을 밝히는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박팽년에게 부탁한 글이다. 박팽년과 안평대군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다. 또 박팽년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서문을 남겼다. 안평대군이 도원에서 노닌 꿈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고 자신은 기문을 지은 다음 꿈속에서 같이 노닌 박팽년에게 다시 서문을 짓게 한 것이다.

박팽년은 한글 창제에도 힘을 보탰다. 1446년(세종 28) 훈민정음이 반포됐을 때 그는 30세 집현전 부교리로 해례본을 만드는데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박팽년은 이후 성삼문·신숙주·이개 등과 함께 한자의 음을 훈민정음으로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세종의 문치(文治) 기틀 마련에 기여한다.

집현전에서 박팽년은 학자들로부터 학문과 문장 그리고 글씨가 뛰어난 수장(首長)으로 칭송받았다. 성현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박팽년을 이렇게 평한다. “세종이 처음 집현전을 설치하고 글과 공부 잘하는 선비들을 이끌어 들이니 박팽년·성삼문·유성원·이개·하위지가 일시에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성삼문은 글이 호방했으나 시에서 부족하고,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 상소문)에 뛰어났으나 시를 알지 못했으며, 유성원은 천재지만 본 것이 넓지 않고, 이개는 맑은 재주가 피어나고 시도 빼어났다. 그러나 동료들은 박팽년을 집대성(集大成)으로 삼고, 그 경술(經術)과 문장, 필법이 모두 좋다고 했다. 그러나 모조리 죽임을 당해 그 저술한 바가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다.”

집현전 학사 박팽년은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449년 훗날 문종의 세자 교육에 참여한다. 문종이 즉위하면서 세자 즉 단종의 시강원 인사에서 보덕(輔德)에 겸임 되면서 박팽년은 문종과 단종에 걸쳐 세자 교육을 맡는다. 또 박팽년은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단종의 보필을 당부받는다. 그는 이후 충청도관찰사, 형조참판을 거쳐 중추원부사 때 단종 복위 실패로 생을 마감했다.

육신사를 나와 마을에서 가장 오랜 태고정(太古亭)을 거쳐 내려오니 입구에 2010년 개관한 ‘사육신기념관’이 있다. 사육신이 모두 멸문의 화를 입었으니 전하는 자료가 있을 리 만무하다. 전시 자료는 빈약했다. 그나마 박팽년은 후손이 이어져 자료가 다소나마 발굴이 됐다. 초서 천자문 등 유묵이 있다. 전시된 교지는 대부분 사육신의 복권 뒤에 내려진 시호 등이다. 육신사 경내 등 묘골 곳곳에는 충절의 혼을 붉은 꽃으로 피우는 배롱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겨울을 나고 있었다.

박팽년에게 충(忠)은 무엇일까. 한충희 계명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박팽년의 충심을 “지조를 굽혀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 지조를 지키고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거사를 도모해 스스로를 불사른 의기”라고 표현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다. 그를 참혹하게 처형한 세조조차 일찍이 “당대의 역신이요, 만대의 충신”이라고 자탄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려 한 정의의 투쟁”


▎충정공 박팽년에게 내려진 교지. / 사진:대보사
2006년 [육선생유고]를 국역한 류용우는 발문에서 “그때 변란은 너무 참혹하고 이 나라 발전에도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며 “만약 수양(세조)이 학살된 여러 어진 이와 세상을 등진 현사(賢士)들과 합심해 어진 자질이 있던 단종을 주나라 주공(周公)이 조카 성왕을 도와 왕업을 계승한 것처럼 보필하여 세종이 이룬 성업(聖業)을 계승·발전토록 했다면 빈번한 사화(士禍)도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박팽년은 1691년(숙종 17) 사후 235년이 지나 명예를 회복한다. 숙종은 사육신의 참화 당시 벼슬을 회복시켰으며, 1758년(영조 34) 박팽년은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는다. 이어 정조 시기 서원과 사육신묘 등지에서 치제(致祭)가 시작돼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사육신의 충절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그치지 않는다. 단종 복위 모의는 왕위를 찬탈한 불륜의 임금을 제거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 역사를 바로 세우려던 정의의 투쟁이었다. 박팽년 등 사육신이 오늘날까지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는 까닭이다.

[박스기사] 멸문의 화 겪었음에도 후손 이어진 비화 - 자기 딸과 바꾸며 박팽년 손자 지킨 여종의 헌신

충정공 박팽년은 세 아들 헌·순·분을 두었다. 단종 복위 실패로 이들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 후손인 박승규·박성규가 엮은 [사육신 박팽년]에 멸문의 화를 입은 이후 이 집안에 혈손이 이어진 전말이 나온다.

박팽년의 둘째 아들 순의 부인 성주 이씨는 화란 이후 친정인 대구 관아의 관비가 되기를 자청한다. 일부 자료에는 이씨 부인이 단종 복위 사건이 있기 전 해산하기 위해 묘골에 와 있었다고 돼 있다. 당시 부인이 대구로 내려와 친정 묘골에 머문 과정이다, 그는 임신 중이었다. 조정은 몸을 푼 뒤 아들이 태어나면 연좌해 죽이고 딸이 태어나면 관비로 삼으라는 명을 내린다.

마침 친정의 여종도 임신 중이었다. 그는 이씨 부인에게 “만약 저가 마님과 함께 똑같이 아들을 낳으면 제 자식으로 대신 죽음을 받게 하겠습니다”며 주인집 혈육을 지키기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킬 뜻을 비쳤다. 해산 일이 왔고, 이씨 부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종은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의 딸을 부인의 아들과 바꾸었다. 박팽년의 혈손은 이렇게 죽임을 면하고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종의 자식이 돼 살았다.

17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박순의 동서인 이극균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뒤 처가에 들렀다가 박비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17세 청년 박비를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이실직고(以實直告)를 권한다. “내가 이미 장성했는데 어찌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박비는 그길로 자수했다.

성종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며 그를 사면한다. 성종 대에 이르러 벌써 사육신은 옳은 일을 했다는 여론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일산(壹珊)’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바다 가운데 산호섬처럼 멸문이 된 사육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육이란 뜻이다. 신분을 회복한 박일산은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정착한 뒤 종택을 짓는다.

순천 박씨 충정공파의 연원이다. 박일산의 묘는 묘골 아버지 순의 의관묘(衣冠墓) 앞에 있다. 성주 이씨의 묘는 부부 합장이다. 숨은 의인 여종의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종친회 박종혁 부회장은 “안타깝게도 여종의 이야기는 이후 전하는 게 없다”고 말했다. 다만 경산문화원이 발간한 [경산의 산하]에는 그 여종이 묘골에서 120여 리 떨어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선의산 생기골에 숨어 박일산을 길렀다고 나와 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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