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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14)] 프랑스, 소비가 자본주의의 미덕임을 증명한 나라 

시장과 국가 사이에서 찾은 ‘제3의 길’ 

3개의 바다·3개의 육지와 접한 유럽의 요지, 비옥한 평야에 혜택받은 강력한 중앙정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국가주도 경제발전 전략… 소비와 여가의 가치를 최초로 실현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권력을 함축한 베르사유 궁전의 도면. / 사진:위키피디아
유럽의 교통 요지를 꼽으라면 단연 프랑스다. 요지란 단순히 땅덩어리의 지리적 중심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동하는 중심 길목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고대부터 육지보다 강이나 바다를 통해 이동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스나 로마 시대부터는 해양 교통이 경제 발전의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육지와 바다가 뒤섞인 에게 해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문명이 꽃피웠다. 지중해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이탈리아반도를 중심으로 유럽~아시아~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고대 로마 제국이 건설됐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북해·대서양·지중해의 세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다. 고대에 이미 그리스인들은 프랑스 남부에 마살리아라는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이어서 고대 로마 시대에 마살리아는 중요한 지중해 항구 도시로 발전했고, 이후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성장했다. 유럽에서 프랑스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계기는 중세였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대서양을 통해 북해와 지중해를 연결했다.

프랑스 북부 지역은 한자동맹이 활발하게 운영하던 무역 네트워크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 덕분에 도버 해협 건너편의 영국이나 북해의 게르만,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러시아 지역까지 연결되는 항로를 활용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를 맞아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도 프랑스는 서부 대서양을 통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더 멀리 아시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론(Rhône)강은 지중해부터 프랑스 중부의 리옹까지 진입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프랑스 동부의 라인(Rhine) 강은 네덜란드의 저지대나 게르만 세계와 교역할 수 있는 요긴한 물길이었다. 또 이탈리아나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게르만 세계나 저지대, 심지어 영국도 서로 육지를 통해 교류하려면 반드시 프랑스를 거쳐야만 했다.

이처럼 프랑스는 일찍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젖을 먹기 시작했고, 로마 제국과 중세를 거치면서 유럽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충지로 부상했다. 물론 한반도의 운명이 보여주듯 전략적 요충지라는 조건이 반드시 이로운 것만은 아니다. 주변 강대국의 충돌과 대립의 장으로 돌변할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풍요로운 영토를 보유했고, 더 나아가 강한 국가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별칭은 에그자곤(hexagone), 즉 육각형이라 부른다. 북해와 대서양, 지중해 등 3면은 바다와 접해 있고,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 동북 국경 등 또 다른 3면은 육지로 형성돼 있다. 피레네를 넘으면 이베리아 반도가 펼쳐지고 알프스 건너편에는 이탈리아 반도와 스위스, 게르만 세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지도상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이지만 나름 바다와 산맥으로 둘러싸여 영토의 독자성을 뚜렷하게 가질 수 있었다.

다채로운 육각형의 나라

프랑스가 평야를 통해 외부로 열린 것은 유일하게 동북 지역 국경인데 이곳에는 베네룩스라고 하는 중소 국가들이 있어 안보상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프랑스 자연조건의 가장 큰 장점은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거대한 평야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드프랑스(Ile-de-France), 즉 ‘프랑스 섬’이라 불리는 이 풍요로운 대지는 센(Seine) 강이 땅을 적셔주면서 농업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유럽의 곡창이다. 산으로 가득 찬 이탈리아나 이베리아 반도에 비해 프랑스가 가지는 독보적인 장점이다.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맛시모 몬타나리는 [유럽의 음식문화]에서 대륙을 가로지르는 두 식생활의 모델을 구분한 바 있다. 남부에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빵과 포도주, 올리브가 지배하는 모델이 있다면, 북해 연안의 북부에는 고기와 맥주로 대표되는 음식 문화가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에서 빵을 올리브 기름에 찍어 먹으며 와인을 마실 때 독일이나 영국에서는 햄을 구워 먹으며 맥주를 마신다. 요즘도 호텔에서 콘티넨털(유럽 남부식) 아침을 시키면 크루아상과 커피, 오렌지 주스가 나오지만, 아메리칸(유럽 북부식) 조식이라면 계란과 베이컨이 등장하지 않는가.

프랑스는 이 두 문화를 함께 보유한 나라다. 남부 문화의 대표적 산물인 포도주 하면 역시 프랑스다. 보르도와 부르고뉴라는 고급 와인은 물론 론 강, 라인 강, 루아르 강변에서 각각 독특한 향의 포도주를 생산한다. 남서부에서 저가의 포도주를 대량 생산하는 한편, 샹파뉴(영어 발음으로 샴페인) 지역은 세계 최고급 와인 생산지다. 반면 포도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프랑스 북부는 독일이나 영국처럼 맥주 문화가 뿌리 깊고, 사과주(沙果酒)를 즐겨 마신다.

21세기인 지금도 프랑스는 여전히 농산물 수출 강국이다. 또 세계의 성공한 엘리트들은 여전히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에 열광하고 샴페인을 터뜨리며 파티를 즐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이 프랑스와 무역 전쟁을 벌일 때 제일 먼저 공격하는 부문이 포도주나 치즈와 같은 고급 농산물 분야일 정도다. 세계 명품 시장을 지배하는 프랑스 LVMH 그룹은 루이뷔통(LV, Louis Vuitton)과 샴페인 모엣(M, Moët), 그리고 코냑 엔시(H, Hennessy)를 합친 명칭으로 불린다. 의류(LV)와 주류(MH)의 결합이 프랑스 스타일의 삶을 규정한다는 뜻이다.

전쟁을 통해 왕실 권력집중 강화


▎거대한 평야 일드프랑스 중심에 자리 잡은 파리 전경. / 사진:위키피디아
드넓은 바다와 높은 산, 광대한 평야와 구릉이나 고원 등, 다양하고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는 프랑스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프랑스의 기원을 찾아보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현재 규모로 만들어져 어느 정도 통일성을 갖게 된 것은 불과 200여 년 전 프랑스대혁명 시기부터다.

중세 프랑스는 사실 파리 중심의 ‘일드프랑스’라는 지역에 거주하는 게르만계 프랑크족이 세운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먼저 왕실을 넘어 대중의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전쟁, 즉 14~15세기라고 알려졌다. 말하자면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은 상호 전쟁을 통해 봉건 귀족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면서 대중을 동원해 권력을 집중하는 데 제일 먼저 성공한 셈이다.

특히 프랑스는 잉글랜드보다 더 적극적으로 권력의 중심을 왕실에 집중하는 강한 국가 만들기를 시작해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영토의 취약성을 핑계 삼아 왕이 권력의 정점에 서서 봉건 제후를 휘하에 둘 수 있었다. 실제 빈번한 전쟁은 재정과 군사력의 중앙 집중을 촉진했고, 프랑스 왕실은 유럽의 가장 강력한 국가의 중심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국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강한 국가의 상징은 역시 거대한 영토다. 프랑스는 15세기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한 뒤 점차 주변의 영토를 왕실의 휘하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17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확보한 나라가 됐다. 프랑스는 이 시기부터 중앙에서 지방으로 관료와 군대를 파견해 전국의 부(富)를 수도의 정부로 빨아들이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프랑스는 지금까지 살펴본 부국굴기의 다른 나라들과 상이하다. 프랑스는 날쌘 야수와 같이 활동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비하면 거대한 코끼리처럼 덩치가 큰 나라다. 산이 많아 농업이 어려웠던 스페인이나 국토가 바다보다 낮은 척박한 자연환경의 네덜란드와 비교해도 프랑스는 풍요로운 영토에서 농산물을 생산하기가 수월해 오히려 자연의 혜택을 누렸다. 자연의 조건이 얼마나 좋았는지 해외 진출에 대한 관심조차 다른 나라에 비해 적었을 정도였다.

또한 프랑스는 수많은 인구를 군인으로 동원했다. 무력을 통한 강한 국가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 중심에 드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가 됐다. 특히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국가의 발달로 넓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수탈하고 착취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네덜란드나 영국이 해외로 부를 찾아 활발하게 진출할 때, 프랑스는 국내의 부를 흡입해 국가의 능력을 유지했다. 물론 프랑스도 해외 식민지 개발에 나서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국이나 네덜란드만큼 국가의 운명을 세계 경영에 걸지 않았고, 그보다는 유럽 대륙을 통제하려는 야심을 키웠다.

루이 14세가 만든 베르사유 궁은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왕궁이었다. 건축·미술·조각 등 최고의 예술을 결집한 완벽한 사치의 쇼윈도였다. 프랑스에선 지방에 상당한 영토를 보유한 귀족이라도 베르사유 궁에 체류하며 왕에게 충성을 증명해야 했다. 베르사유 궁이 만들어낸 패션과 예술의 유행은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에서 모방했다.

17세기 베르사유와 파리로 집중되면서 축적되기 시작한 프랑스의 부는 18세기에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이웃 봉건주의 스페인은 해외 무역에서 벌어들인 부를 과시하듯 탕진했다. 프랑스 역시 중앙의 왕실이 국가의 군사력과 예술을 육성하는 데 부를 활용했다. 하지만 부의 창출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치적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성의 문제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 왕권에 대한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도전을 의미했다. 동시에 중앙집권적 국가가 국민과 지방이 생산한 부를 약탈하는 데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혁명 세력은 너무 거대해진 절대 왕정의 중앙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혁명 세력의 도전을 막기 위해서는 전보다 더욱 강한 국가체제를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국가에 대한 반발로 더욱더 강한 국가가 탄생하게 됐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프랑스 대혁명과 국민경제의 형성


▎소비 시대를 연 세계 최초의 백화점 봉마르셰(Bon Marché). / 사진:위키피디아
대혁명은 두 가지 측면에서 프랑스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나는 혁명이 갖는 근대성으로 과거 중세부터 내려오던 다양한 길드의 특권 전통을 깨고, 자유시장 원칙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프랑스 대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하는 이유다. 프랑스는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정치적 보편 원칙을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전국에 확장했고, 이를 다시 경제 분야에도 적용했다. 이제 귀족이나 장인(匠人)의 특권은 사라지고 누구나 원하는 제품을 생산하고 사고파는 세상이 도래했다.

또 혁명을 통해 유럽에서 제일 커다란 통합된 시장, 즉 국민경제를 형성했다. 영국은 바다나 강, 운하 등 수로를 통해 민간 중심으로 시장을 개발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국가가 중심이 돼 도로·도량·언어 등의 통합에 앞장서는 국가 주도의 국민경제 모델을 제시했다. 부연하자면 영국에서는 시장이 주도한 경제적 통합을 정부가 동반자 입장에서 조정해 줬다면, 프랑스는 국가 주도로 정립된 국민경제의 틀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장 세력이 서서히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이웃 나라와 비교했을 때, 프랑스는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균형 잡힌 길항 관계가 형성됐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해외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워낙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국가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결국 봉건적 국가는 시장을 압살하고 말았다. 반면 네덜란드나 영국은 국가의 능력이 강하긴 했지만, 민간이 주도하는 시장이 훨씬 능동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국가가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의 비판에 상당히 부합한 셈이다. 이들과 달리 19세기 프랑스는 국가와 시장의 팽팽한 관계 속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돼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다만 프랑스는 18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큰 인구를 가진 대국이었지만 18세기 말 러시아에 그 자리를 내준 뒤, 19세기에는 독일, 그리고 20세기에는 영국에도 인구에서 밀리게 됐다. 특히 독일이나 영국 인구의 상당 부분이 신대륙으로 이민을 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프랑스의 인구 증가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얼마나 느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는 이미 18세기 말부터 자녀의 수를 조절해 가족 공동체의 미래에 투자하는 현대적 전략이 사회 전반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시민들의 ‘선진적 행태’는 국제무대에서 국가 위상을 약화하는 역할을 했다.

세계의 공장이 아니라 소비의 신전


▎모네의 작품으로 트루빌 해변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들. / 사진:위키피디아
산업혁명의 기수였던 영국은 19세기 ‘세계의 공장’이었다. 산업 생산능력 측면에서 본다면 19세기 후반부터는 미국과 독일이 영국을 따라잡아 세계의 공장이라는 명예를 이어받았다. 반면 프랑스는 한 번도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만한 지위에 올라선 적이 없다. 물론 프랑스가 석탄·철강·철도·전기 등 거의 모든 분야 생산의 선두권에서 뒤처져 내려온 적도 없었다. 군사나 산업 분야에서 팍스 브리태니커에 대적할 만한 시대를 열지는 못했지만, 세계 패권의 선두주자와 항상 경쟁하는 세력으로 존재했다.

프랑스의 특징은 생산보다 소비에서 찾아야 한다. 영국이 생산 부문의 과학기술과 노하우에서 첨단을 달렸다면, 프랑스는 소비와 서비스업에서 혁신의 선두를 달렸다.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서비스업이라면, 요식업을 빼놓을 수 없다. 21세기 SNS의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즐겨 공유하는 주제 중 하나도 분위기 있는 식당과 요리 사진이다. 프랑스는 레스토랑이라는 소비문화의 아이콘을 발명한 나라다.

개인에게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은 18세기 파리를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인 발전의 계기는 프랑스 혁명이었다. 왕족과 귀족이 혁명으로 피난과 망명을 떠나자 일자리를 잃은 요리사들이 부르주아를 대상으로 레스토랑을 열면서 요식업이라는 근대적 서비스업이 부각됐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강한 국가에서 부가 집중된 결과로 큰 시장이 형성된 모양새다. 부르주아들이 레스토랑에서 귀족 흉내를 내는 동안, 노동자들은 카페에서 부르주아 흉내를 내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요식업이 생성됐다.

19세기 중반 세계 최초의 백화점을 연 것도 런던이 아닌 파리다. 현대의 이미지와는 달리 당시 백화점이란 귀족이나 부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이 아니라, 다양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일종의 아울렛이었다. 21세기 관점으로는 백화점이 고급 손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지만 19세기에는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전환하는 소비 패턴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봉마르셰, 라파예트, 프렝탕과 같은 프랑스 백화점들은 파리에 거대한 ‘소비의 신전’을 열었고, 그 명성은 아직도 프랑스가 명품 산업을 주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를 비교하는 것도 두 나라의 자본주의 문명을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영국의 부르주아란 산업에 투자해 사업을 열심히 추진하는 비즈니스맨의 이미지를 갖는다. 반면 프랑스의 부르주아란 많은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을 보유해 일하지 않고 문학이나 예술을 즐기는 ‘부자 선비’에 가깝다. 영국의 부르주아가 슘페터의 기업가라면, 프랑스의 부르주아는 소비와 사치를 즐기는 베블렌의 귀족적 유한계급인 셈이다.

프랑스가 자본주의 소비 사회의 첨병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바캉스다. 프랑스어에서 바캉스(Vacances)란 휴식, 휴가를 의미한다. 영국과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열심히 일하는 노동이나 사업과 통한다면, 프랑스의 자본주의는 소비하고 즐기고 노는 영역이다. 19세기에 이미 프랑스는 해수욕이나 스키와 같은 바캉스 활동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유급 휴가를 법제화하면서 바캉스의 대중화를 주도했다. 21세기 관광 산업의 발전을 보면 자본주의에서 소비의 측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 경제사가 국가와 시장의 균형적 길항 관계였다면 20세기는 국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시장을 이끌었던 시기다. 19세기 프랑스 사회는 대혁명 이전의 귀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점차 부르주아가 권력을 차지하는 사회로 대체되는 과정이었다. 부르주아 내부에서도 국가 경제가 발전하면서 그랑 부르주아, 즉 대부호들이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국가주도 경제 모델의 종언


▎1852년 프랑스은행의 이사회. 경제 권력의 집중 현상을 상징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프랑스 노동세력은 국가 경제를 지배하는 ‘200개의 가문’(Les deux cents familles)이 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역사는 작용과 반작용의 연속이다. 국가 경제 권력이 소수의 대부호 가문으로 집중되자 노동세력과 진보적 정치세력은 국영화를 통해 경제력 집중을 견제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강한 국가에 대한 반발로 대혁명이 일어나자 더 강한 국가가 탄생된 것처럼, 경제력 집중에 대한 반발로 국영화를 추진하면 이후에 더 강한 경제력 집중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프랑스식 국가 주도 경제 모델의 절정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부터 1981년까지다. 1940년대는 영국을 비롯한 다수 국가가 전통적 자유주의에 대해 반성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의 방향을 모색하는 시기였다. 그 와중에 프랑스는 매우 독특하고 강력한 방향 전환을 추구한 대표적 사례다.

프랑스는 일단 경제를 좌지우지한다고 알려진 ‘200개 가문’의 영향력 아래 있던 중앙은행인 프랑스은행을 비롯해 주요 금융기관 및 나치 독일과 협력했던 대기업을 국영화했다. 이에 덧붙여 미국의 자유 시장경제나 소련의 중앙 집중 계획경제를 모두 비판하면서 프랑스식 자율적 계획경제를 내세웠다.

원래 소련에서 시작한 5개년 개발계획을 모방해 프랑스도 5개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다만 소련처럼 모든 산업을 국가가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가 협력해 계획을 수립하고 시장세력이 자율적으로 이 계획을 참고해 추진하는 식의 모델이었다. 프랑스가 헌법기관으로 설립한 경제사회위원회는 각 산업 분야의 대표는 물론 노조나 사회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되며 경제계획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과 권리를 인정받는다. 이 기구는 2008년 경제사회환경위원회로 확장됐고, 현재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를 시민사회위원회로 개정할 예정이다.

1946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정국에 만들어진 프랑스식 국가 주도 자본주의는 1981년 새로운 발전 국면을 맞았다.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공산당과 연합정부를 꾸렸고, 그 여파로 강력한 국영화 드라이브를 걸었다. 당시 정부는 산업 분야의 세계적 기업 6개와 금융 분야 은행들을 단숨에 국영화시켰고 그 결과 1983년 프랑스 임금 노동자 가운데 25%가 공공분야에 근무하게 됐다.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정책을 프랑스가 편 것이었는데,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나고 외환위기에 직면하는 쓰디쓴 실패를 맛봤다. 그 결과 사회당·공산당 연정이 계획했던 야심 찬 ‘자본주의와의 단절’ 정책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프랑스는 ‘국가를 통해 시장을 관리하겠다’는 야망을 포기한 뒤 점진적으로 시장의 세력을 존중하면서 국가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전략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전환에 크게 기여한 것이 유럽통합이다. 왜냐하면 1980년대 유럽통합의 방향을 선택할 때 영국의 대처 총리는 ‘시장 중심 통합이 아니면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밝혔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방점이 유럽의 지역통합에 있었다면, 영국의 방점은 시장에 있었다. 결국 1986년 유럽 단일 의정서로 묶인 통합 계획은 프랑스·독일·영국 등 세 나라의 관점을 타협적으로 반영해 단일시장을 만들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유럽 통합의 기수

시장 중심 통합에 가장 거부감을 나타냈어야 할 프랑스가 이런 계획에 동의한 것은 당시 프랑스 정국 때문이다. 국영화와 분배 정책이 가혹하게 실패한 상황에서 미테랑 정권은 탈출구를 강구했다. 유럽통합은 비록 그것이 시장 통합이라 할지라도 좌파 정체성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있었다. 유럽이 하나 돼 평화와 번영을 함께 누리자는 메시지는 좌파의 인류애와 친화성과 합치되는 목표였기 때문이다.

단일시장을 향해 유럽이 통합 조치를 조정하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 시기가 종결됐다. 당시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는 역사적인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급격한 통일을 추진했다. 프랑스는 독일의 통일이 막을 수 없는 대세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유럽통합을 심화시켜야만 통일된 독일이 주변국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통일을 이룩하는 조건으로 유럽 단일화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독일은 결국 라인 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도이칠란트 마르크를 포기함으로써 통일을 얻어냈다.

1992년 체결된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연합이라는 강화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냈고, 특히 유로로 화폐를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국가들이 모여 평화적으로 자국 화폐를 포기하고 하나의 새로운 단일화폐를 만든 사례는 전무하다. 영국은 이 화폐 통합의 계획에서 빠졌다. 프랑스와 독일은 1993년 단일시장을 만들고, 1999년 단일화폐를 출범시킴으로써 하나의 경제로 통합됐다.

유럽을 하나로 묶어내는 능력은 프랑스가 역사로부터 부여받은 운명인지도 모른다. 육각형의 지리를 통해 세 바다와 세 땅을 하나로 연결하는 요지에 있는 나라, 그래서 유럽의 주요 세력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프랑스는 북유럽과 남유럽을 연결하는 핵심이며, 독일과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유럽연합 3강이 만나는 접점이다.

정치경제의 모델을 보더라도 프랑스는 국가와 시장의 길항 관계를 균형적으로 유지해 온 사례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시장에 치우치지도, 소련이나 중국처럼 국가에 함몰되지도 않았다. 강렬한 혁명과 변화가 자주 역사를 강타했지만 한 방향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시계추처럼 좌우를 오가는 형식이었다. 한 번도 세계 경제의 패권을 쥐지는 못했지만, 항상 선두권에는 속했던 수백 년의 프랑스 전통이 21세기에도 지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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