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ZOOM UP] 3D 프린터 시대에 만난 금속활자 이수자 

한 해 수입 350만원··· “뜻 있어 즐거워요” 

국가무형문화재 아버지 대(代) 이으려 2015년 이수자로 공인
2016년 [직지]에 쓰인 금속활자 3만 자 복원에 힘 보태


▎임규헌 이수자가 주물사(砂)주조법을 통해 만든 활자를 거푸집에서 꺼내 다듬고 있다. 주물사주조법은 나무에 글자를 새긴 어미자(字)를 주물사에 찍어내 거푸집을 만드는 방법이다.
"고된 일이지만 정말 즐겁습니다.”

1월 31일 충북 청주시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에서 만난 임규헌(28)씨는 거푸집에서 갓 꺼낸 활자를 살펴보며 이렇게 말했다. 임씨는 201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무형문화재 ‘금속활자 장(匠)’ 이수자로 인정받았다. 임씨의 스승은 국가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임인호(55)씨. 임씨의 아버지다.

임규헌 이수자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아버지의 일과는 상관없이 평범한 삶을 꿈꿨다. 그러나 후학 없이 홀로 작업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늘 마음에 걸렸다. 충북 괴산군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이따금 일손을 도운 건 임씨 자신밖에 없었다. 임 이수자는 결국 아버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금속활자는 무형문화재 가운데서도 ‘비인기 종목’에 속한다. 작업이 고되고 어려운 데다, 넉넉한 수입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나라에서 벌이는 복 원사업 말고는 쓰임새를 찾기 어려운 탓이다. 임 이수자의 지난해 연간 수입은 350만원에 그쳤다.

재료 구하려 직접 양봉까지


▎국가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임인호씨(왼쪽)와 이수자 임규헌씨. 사진은 임 활자장의 금속활자 전통기술이 이수자인 아들에게 전수되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두 사람과 복원한 금속활자를 다중노출 기법으로 촬영했다.
환희의 순간도 있었다. 임인호·임규헌 부자는 2011년부터 5년 동안 매달린 끝에 [직지(直指)]에 쓰인 금속활자 3만 자를 복원해냈다. [직지](1377)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유명하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임 이수자도 휴일을 반납하고 아버지 옆을 지켰다.

제작공정에 쓰이는 재료들은 허투루 구해지는 법이 없다. 임 활자장은 직접 토종벌을 키워 밀랍을 구하는가 하면, 주물토 재료로는 갯벌 모래만을 사용한다. 그래야 수분을 품고 있으면서도 통기성이 좋아 고열에도 폭발하지 않고 견디기 때문이다.

임 이수자의 목표는 전수교육 조교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모든 기술을 혼자 힘으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임 이수자는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이 나를 키워낸 토양이 됐다”고 활짝 웃었다.


▎임규헌 이수자가 주물사로 이뤄진 거푸집에 쇳물이 들어가는 길을 파내고 있다.



▎주물사에서 어미자를 들어내면 쇳물이 흘러들어갈 공간이 만들어진다.



▎쇳물이 들어갈 때 활자의 변형이 생기지 않도록 거푸집 위아래 틀을 잘 맞춰야 한다.



▎1200℃ 고온의 쇳물이 거푸집 입구를 지나 나뭇가지 모양의 길 끝에 닿으면 비로소 활자가 탄생한다.



▎[월인천강지곡] 인쇄에 사용되는 금속활자를 임규헌 이수자가 들어 보이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1449년 훈민정음 창제 직후 한글 금속활자로 만든 찬불가(讚佛歌)다.



▎나뭇가지 모양의 가지쇠에 달린 활자를 하나씩 떼어내 다듬으면 네모난 금속활자가 탄생한다.
- 사진·글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2003호 (2020.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