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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6)] 1392년 4월 3일, 급박했던 정몽주 암살 전야 

벼랑 끝 이방원 역성혁명 칼 뽑아 

이성계의 분신 이두란에게 거사 의뢰했지만 거절당해 1차 계획 무산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측근들 촉구에 왕조 정치 뒤집는 최후의 결단


▎고려의 수도 개성의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남대문. 개성은 고려 말 역사가 요동친 현장이다.
1392년 음력 4월 4일, 정몽주가 피살됐다. 이로써 4월 1일부터 시작된 고려수호파의 전면적인 공세가 나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좀 더 길게는 3월 17일 이성계의 낙마와 함께 고려 정국에 몰아친 20여 일간의 거친 폭풍이 멈췄다. 1391년 7월 이래 시작된 정몽주 등 중흥파의 반격이 실패한 것이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래 시작된 거대한 정치변동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시작된 고려왕조 혁신의 꿈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고려왕조도 474년 만에 실질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정몽주는 이 모든 역사의 끝자락에 서서, 그 퇴락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기둥이었다.

4월 3일, 공양왕과 타협할 길이 모두 사라지자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완강히 거절하고, “생사는 명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말했다. 평생 생사를 넘나들며 전장에서 살아온 무장이 갑자기 운명주의자가 된 것이다.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 앞에 섰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을 내려주기를 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빅터 프랭클 박사의 회고다.

이성계의 질책을 듣고 이방원은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하지만 속촌의 어머니 묘로 돌아갈 순 없었다. 이성계의 집에서 속촌까지 가려면 남문인 회빈문을 통과해 8㎞ 정도 서해 쪽으로 가야 했다. 급변 사태가 있을 때 거기서 개성까지 신속히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이방원은 어쨌든 개성에 남아 있으려고, 아버지 곁에서 병환 시중을 들게 해달라고 수 차 애걸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의 성격을 잘 아는 그는 이방원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으로 짐작했을 것이다. 이방원은 하릴없이 숭교리 옛 저택으로 돌아왔다.

위화도회군 뒤 가슴 속에 숨겨온 뜻


▎1392년 이방원이 머물렀던 개성의 경덕궁. 이방원은 이곳에서 가문의 운명을 놓고 고민했다. / 사진:리그베다위키
이성계의 개성 잠저는 두 곳이다. 한 곳은 당시 이방원이 살던 개성의 중부 남계방(南溪坊), 속칭 추동(楸洞)에 있었다. 개성 안쪽을 둘러싼 내성의 남대문 밖이다. 조선 개국 뒤 경덕궁으로 개축된 곳이 이 집이다. 공양왕이 일신의 안녕과 왕조의 복조를 빌고자 막대한 재정을 기울여 불사를 추진했던 연복사도 이 근처에 있었다. 이 집은 숭교리에서 약 1.2㎞ 정도 떨어져 있다. 숭교리 옛 저택이란 아마 추동 저택을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당시 이성계가 살던 집은 개성 숭인문 안쪽 안정방(安定坊), 속칭 어배동(於背洞)에 있었다. ([세종실록] 148권) 1418년(태종 18)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시는 영전 목청전이 이곳에 세워졌다. 이곳은 이성계의 별장으로, “언제나 이두란 등과 격구하며 말을 달리던 곳”이었다.([숙종실록] 숙종 19년 8월 30일) 매우 넓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1388년 위화도회군 뒤 집권하면서 이곳으로 옮긴 듯하다. 시위 군사들의 훈련장으로도 적합했을 것이다. 이 집이 소재한 안정방은 개성 외곽을 둘러싼 나성의 동문 숭인문 바로 위쪽에 있었다. 개성의 동부에 속한다. 이성계 집에서 이방원 집으로 가려면 동문인 숭인문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동서대로가 교차하는 십자로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남문인 회빈문 쪽으로 가야 한다. 그 거리는 대략 4㎞ 정도로, 유사시 즉각 달려갈 정도로 가깝지 않다.

숭교리 옛 저택의 사랑방에 앉아서 이방원은 근심에 근심을 거듭했다. 이성계가 무슨 수를 쓰지 않는 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황급히 밖에 나가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그는 “백성의 이해가 지금 결정됩니다. 그러나 소인의 무리가 이처럼 반란을 꾀하는데, 공(公)이 어떻게 떠나십니까?” 이방원에게 속촌 여막으로 돌아가라는 이성계의 엄명이 추종자들 사이에 퍼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방원마저 떠나면 이성계파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추종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들을 대표해 정탁이 이방원을 만류하러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정탁은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겠습니까?”(王侯將相 寧有種乎) 명백히 역성혁명을 촉구한 것이다. 이성계파가 거리낌 없이 역성혁명을 표방한 최초의 발언이었다. 또한 정몽주를 죽이는 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명백히 밝힌 것이었다. 이런 말을 순간적인 충동으로 할 수 없다. 더욱이 정탁은 성질이 중후하고 말이 적었다고 한다. 추종자들이 최후의 결단을 촉구한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가 하지 않는다면, 이방원이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위화도회군 뒤 가슴 속에 숨겨온 뜻이 드디어 발출됐다.

왕을 왕으로 보지 않다


▎정탁의 묘 앞에 서있는 비석. /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후장상에 씨가 없다는 말은 진나라의 학정에 저항해 농민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의 선언이다.([사기] 진섭세가) 고려 중기 사노 만적도 그렇게 외쳤다. “장상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할 수 있는 것이다.”(將相寧有種乎 時來則可爲也) 한국 역사 최초의 노예해방 선언이었다. 1198년(신종 원년), 만적은 북산에서 땔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6명의 동료를 모아놓고, “국가에서 경인년(1170)과 계사년(1173) 이래로 높은 관직도 천예(賤隷)에서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경인년은 정중부 등의 무신 난, 계사년은 무신 난을 진압하고 의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김보당의 난을 말한다. 무신난 이래 세상이 뒤집혔다. 이의민 같은 천민도 까마득히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왜 자기들은 여전히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 체제와 신분에 왜 복종해야 하는지 처음으로 의문이 생긴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인간이 명령에 복종하는 이유는 전통, 합법, 카리스마 때문이다. 혁명과 반란의 시대에는 전통과 합법이 무너진다. 3대 무신 집권자 이의민은 본래 천민이었다. 아버지 이선은 소금장수였고, 어머니는 연일현(延日縣, 현포항) 옥령사(玉靈寺)의 종이었다. 이의민은 글자도 몰랐다. 전통과 법대로라면 이의민은 노비로 살다가 노비로 죽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무너졌다. 만적과 그 동료들이라고 왜 이의민이 되지 못하겠는가? 단, 목숨을 걸어야 한다. 노예가 노예인 이유는 자유보다 목숨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적 등은 궁궐 앞 흥국사 회랑에서 거사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먼저 최충헌을 죽인 뒤 각기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노예 문서를 불태워, 그리하여 삼한에서 천인을 없애면, 공경과 장상이라도 우리가 모두 할 수 있을 것이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만적 등 100여명은 체포돼 강에 던져졌다. 그 거사가 성공했다면, 한국 역사 최초로 귀천 없는 사회가 탄생했을 수도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자 이성계파는 왕조 체제의 금기를 넘어섰다. 광흥창은 관리의 녹봉을 담당하는 관청이었고, 광흥창사는 그 책임자(정6품)였다. 정탁은 청주 정씨로서, 조선 개국 1등 공신이 된 인물이었다. 1391년(공양왕 3) 척불논쟁 때 성균박사 김초가 상서해 불교를 비판하자, 공양왕은 선왕의 성전(先王成典)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김초를 죽이고자 했다. 김초의 상소에 ‘선왕의 법’(先王之法)이란 문구가 있는데, 그것을 역이용한 것이다. 공양왕은 왕건이래 고려의 왕들이 국가이념으로 천명해 온 숭불정책을 ‘선왕의 성전’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김초가 불교를 비판했으니 국가이념을 부정한 것이다. 하지만 공양왕은 김초를 처벌할 근거를 찾지 못해 고심했다. 밀직대언 이첨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태조 이래 역대로 불법을 숭앙하여 믿어왔는데, 지금 김초가 그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선왕의 성전을 허무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벌을 준다면 구실이 없다고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병조정랑 정탁이 김초를 옹호하고 나섰다. 근거는 “선왕의 성헌을 본보기로 하여 영원히 허물이 없도록 한다.”(監于先王成憲 其永無愆)는 [서경]의 문구였다. 여기서 ‘선왕의 성헌’이란 요순우탕 같은 성왕들이 남긴 불변의 원칙들이다. 요컨대 선왕을 누구로 볼 것인가가 문제였다. 공양왕은 고려의 역대 왕들로, 정탁은 중화 문명의 성왕들로 보았다. 본래는 두 뜻이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유교 경전만 보면 정탁이 옳다.

왜 이두란이었을까?

그러면 고려는 자신의 고유한 정신적 전통에서 정당성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정탁은 그렇다고 본다. 유교의 보편원리만이 옳다는 것이다. 중화일통주의이다. 성리학자에게 이런 태도는 일반적이다. 정도전도 ‘조선’이란 국호의 의미를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에서 찾았다. 조선 후기의 존주론이나 위정척사론도 조선을 소중화로 자부하고 정통성을 중화문명에서 찾았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공양왕이야말로 국가이념을 훼손했다. 이게 정탁의 비판 논리로서, 왕조체제의 선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 무렵 정도전이나 남은의 상소도 공양왕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무너뜨렸다. 왕을 왕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왜 이렇게 도발적이었을까? 당시 정도전 등 역성혁명파는 이성계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드는 한편, 공양왕과 정몽주의 본격적인 공세에 대처해야 했다. 정탁도 그 일각을 담당한 것이다.

정탁의 가문은 언관으로 유명했다. 정탁의 아버지 정공권(鄭公權)도 그랬다. 초명이 정추(鄭樞)인 그는 언관인 좌사 의대부가 되자, 이존오와 함께 신돈을 처음 탄핵했다. 죄목은 국가를 오도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돈은 왕의 섭정에 가까웠고, 왕에 필적하는 절대 권력자였다. 연저수종공신으로서 공민왕의 최측근이었던 유숙조차 축출·처형됐고, 최영도 겨우 죽음을 면했다. 이렇게 서슬 퍼런 신돈을 비판하고 나섰으니,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실제로 신돈은 이 사건을 확대해 자신에 반대하는 구가세족 집단을 일망타진할 작정이었다. 심문관 김달상이 정공권에게 “무릎을 꿇게 했지만 정공권이 굽히지 않자, 사람을 시켜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발로 차서 꿇게 했다.” 심한 고문에도 정공권은 다른 사람을 연루시키지 않았다. 모두 정공권을 죽은 목숨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색이 공민왕을 무마하고, 심문관 이춘부를 설득해서 간신히 처형만은 면하게 했다.

정탁의 맏형 정총(鄭摠)은 문명을 날렸다. 정도전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했고,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서문을 썼다. 위화도회군 뒤 이숭인이 반(反)이성계 입장에 서자,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도 대부분 그가 썼다. 이자춘과 신덕왕후의 비문도 그의 작품이다. 정탁 형제는 1392년 7월 16일,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 참여했다. 형제가 함께 역성혁명에 가담한 것이다. 정총도 조선개국 1등공신이 됐다. 1395년(태조 4), 정총은 이성계의 책봉을 요청하러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전 문제로 억류돼 2년 뒤 중국에서 숨을 거뒀다. 한편 정탁은 제1차의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 편에 서서 정사2등공신에 봉해졌다. 평생 이방원과 정치 노선을 함께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신(史臣)은 그가 “뛰어난 재능이 없고, 자못 재물을 탐한다는 이름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태종 때 우의정이 됐지만, “자기의 의견을 진달하여 무엇 하나 제의한 것이 없으니, 당시의 공론이 가볍게 말하였다”고 한다.([세종실록] 세종 5년 10월 21일) 탐관오리로서, 무능하고 무사안일한 출세주의자로 평가한 것이다.

정탁의 극언을 들은 이방원은 즉각 추동 저택을 떠나 어배동 이성계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 머물던 둘째 형 이방과, 이화, 이제와 대책을 논의했다. 이른바 전주이씨 4인 위원회이다. 이제는 이인임의 조카로서 성주 이씨이지만, 이성계의 3녀 경순공주와 결혼했다. 고려 때는 아들딸 차별이 없고 처가살이도 많아서 사위도 일족이었다. 4인 위원회의 결론은 같은 것이었다.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이두란(李豆蘭, 조선이 건국된 뒤 이지란으로 개명)에게 거사를 부탁했다. 만약 이 거사라면 이성계도 노여워하지 않을 것으로 본 것이다. 이성계의 허락을 받지 않고 거사할 수 있는 묘책을 찾은 것이다.

그만큼 이두란은 이성계와 가까운, 혈육 같은 의형제였다. 이성계를 따르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성계가 분신처럼 여긴 단 한 사람은 이두란이었다. 이성계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딸을 이지란에게 출가시켰다. 고려말 이성계가 활약한 전장에서 이두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본명은 퉁두란(佟豆蘭)이다. 여진족 관습에 의해 어머니 성씨인 퉁((佟, 동)을 따른 것이다. 몽골 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이다. 고려에 귀화한 뒤 본관이 청해(靑海, 북청)인 이씨 성을 하사받아,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조선 개국 후 이지란(李之蘭)으로 개명했다. 원래 여진족 추장으로서, 원나라 천호(千戶)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진족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 Arabuqa)로서, 청해이씨세보(靑海李氏世譜)에는 아원(雅遠)으로 기록돼 있다.

이성계 가문 동북면에 반(半)독립왕국


▎이지란(이두란)의 영정. 이지란은 여진족 출신 무장으로서 이성계의 의형제였다. / 사진 : 청해이씨 종친회 홈페이지
이두란은 여진족이 아니라 원래 한족이며,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 1103~1141)의 6대손이라고도 한다. 청해이씨세보에는 송인(宋人)설과 고려인(高麗人)설, 두 가지가 적혀있다. 송인설에 따르면, 1140년(고종 10) 금나라의 침략을 받은 남송이 고려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요동에 파견된 고려군 중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한 15세 여성이 악비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 그 후손이 이두란이라는 것이다. 고려인설에 따르면, 무신란 때 정중부에게 살해된 문신 이모의 자손이 삭방으로 도주했다. 그 자손이 남송에 갔다가 악비의 수양딸과 혼인해 낳은 자손이 다시 고려로 돌아왔다. 그 자손이 이두란이라는 것이다.(서병국, [이지란연구]) 많은 한국인의 성씨가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왕건의 고조부도 당 숙종이었다. 의종대 김관의의 [편년통록]에 따른 것이다. 고려 왕가조차 선조의 중국 도래설을 차용한 것이다. 모두 가문의 격을 높이려는 소박한 심정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이두란은 1371년(공민왕 20) 2월 고려에 내투(來投)했다. 41세 때였다. 그전에 자신의 관하에 있던 백호 부카(甫介)를 먼저 보내 귀화시켰다. 이후 북청에 거주하면서 이성계의 휘하에 소속됐다. 그런데 이두란은 본거지를 떠나 고려로 온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북청이 근거지인 토착여진이었다. 고려말 동북면의 화주(영흥) 이북 천리장성 위쪽은 여진족이 살고 있었다. 그 이남 안변 이북은 고려인과 여진족이 섞여 살고 있었다. 이성계의 고모는 길주의 다루가치 김방괘와 결혼했는데, 그 아들인 삼선과 삼개는 여진족 사이에서 자랐다. 그들은 1364년 여진족과 함께 함주를 공략했다. 피아 구별이 없었던 것이다. 이성계의 가문도 이두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안사 이후 원의 다루가치였고, 그 아들 이행리 이후 대대로 쌍성총관부 관하 지역에서 살았다. 이성계도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그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도 안변 출신이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단행해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면서 동북면 지역에 변화가 시작됐다. 크게는 원이 멸망하고 명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만주와 요동, 동북면 지역에 대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은 그 커다란 흐름의 한 지류였다. 공민왕은 쌍성 지역을 넘어 압록강 초산에서 동북면 길주에 이르는 지역까지 지배권을 확장했다. 공민왕의 이런 발 빠른 조치가 없었다면, 뒤에 명나라는 이곳을 중국 영토로 주장하고 절대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의 4군 6진 개척도 공민왕의 업적을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1356년 이후에도 안변 이북은 여진족의 땅이었다. 공민왕의 본래 계획은 동북면 일대를 확고히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고려군과 협력한 이자춘에게 판장작감사를 제수하고 개경에 옮겨 살게 했다. 보답처럼 보이지만, 실은 토착 세력을 뿌리 뽑고 중앙정부가 대신 지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원 지배기에 고려나 원 정부의 직접 지배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살던 동북민들이 고분고분했을 리 없다. 1356년 뒤에도 쌍성 지역에는 고려 정부의 영향력이 미미했다. 고려 정부도 결국 힘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래서 1361년(공민왕 10) 이자춘을 다시 동북면병마사에 임명했다. 어사대가 “이자춘은 동북면 사람이고 또 그 지역의 천호이니, 그를 병마사로 임명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를 강행했다. 이자춘은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본국인으로 저 땅에 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천명에 순종하여 다시 나오게 되었습니다”라고 신속히 보고했다. 고려 정부가 간섭하려고 하자 이를 피해 여진족 거주지로 이주했던 동북민들이 이자춘이 돌아오자 다시 귀환한 것이다. 이를 보면 이자춘에게 상당한 재량권이 부여된 듯하다. 이후 이 지역은 이성계 가문의 반독립왕국이 되어,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이 됐다.([태조실록] 태조 4년 12월 14일)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어사대의 의심이 옳았다. 공민왕이 이자춘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이성계의 창업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네 살 아래 이성계를 평생 형으로 모셔


▎이제의 조선 개국공신 교서. 이성계의 사위로서 역성혁명을 추진한 핵심 멤버였다. / 사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1368년 원이 중국 본토에서 축출돼 몽골 초원으로 쫓겨난 뒤, 만주와 요동 지역은 일종의 권력 공백 상태가 됐다. 그 지배권을 둘러싸고 원 잔류세력과 고려, 명이 경쟁했다. 대표적인 원 잔류세력은 만주 일대의 심양행성승상 나하추(納哈出), 요동반도의 요양행성평장사 유익(劉益), 평정산(平頂山) 일대의 고가노(高家奴), 압록강에서 요동반도 사이 동녕부에 웅거한 기철의 아들 기사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 등이 존재했다. 공민왕의 야심은 원대해 한반도에 머물지 않았다. 1370년 1월, 공민왕은 이성계를 주장으로 삼아 1만5000명의 군대로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를 공격하게 했다. 원 잔류세력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공민왕은 공요군에게 대둑(大纛)을 보냈고 환구(圜丘)에 제사를 지냈다. 대둑은 천자의 깃발이고, 환구의 제사는 천자의 제천(祭天) 의식이다. 1370년 8월, 2차 요동 공벌에서는 요동성을 함락시켰고, 1371년 9월에는 고구려의 첫 수도 오로산성을 점령했다. 하지만 여진족 등 이 지역 토착세력의 협력 없이 고려의 국력만으로는 요동을 지킬 수 없었다.

한편 건국 초 국가기반이 취약한 명나라는 내정에 힘쓰고, 초원 지역의 북원과 대결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요동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힘이 미치지 못했다. 1371년 4월, 요양행성의 유익이 명에 항복했다. 이를 계기로 명은 요양에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遼東都司)를 설치했다. 요동 공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387년 나하추를 격파해 만주와 요동 일대를 석권했다. 그리고 명은 1388년 고려 철령 이북의 영토와 백성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한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여진족은 고려와 명을 두고 정치적 선택에 직면했다. 고려가 요동을 공략하고, 명이 정요도위를 설치한 1370년에 이두란이 최종 선택을 한 것은 이런 배경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로서도 선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선택은 상당히 늦은 것이다. 1356년(공민왕 5)부터 이미 여진인의 내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두란과 이성계의 만남에는 많은 설화가 존재한다. 1774년 건립된 이지란신도비(李之蘭神道碑)에 따르면, 원나라 지정 연간에 이성계가 고광성(古匡城)을 정벌할 때, 어머니 최 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개강(价江)에 활을 잘 쏘는 자가 있어 패왕(覇王)을 보필할 사람이다”고 했다고 전한다. 고광성의 소재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지정(至正)은 순제의 연호(1341~67년)다. 이 시기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싸운 것은 1361년 박의, 1362년 나하추, 1364년 삼선·삼개와의 전투가 있다. 이두란이 이성계를 따라나선 첫 전장은 나하추와 전투(이지란신도비)이니,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이 무렵으로 추측된다. 이성계는 28세, 이두란은 32세 때였다. 그런데 이성계가 어머니 꿈대로 개강에 가 보니 이두란이 사슴을 사냥하고 있었다. 개강은 아마 북청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의기투합해 의형제를 맺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대망을 품고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두란도 관하 여진인이 500호나 되는 대추장이니 당연히 야심을 가졌을 법하다. 이두란이 남긴 유일한 글로 ‘초산에’라는 시조가 있다.

초산(楚山)에 우는 범과 패택(沛澤)에 잠긴 용이
토운생풍(吐雲生風)하야 기세도 장헐시고
진나라 외로온 사슴은 갈 곳 몰라 하도다
([고시조대전] ; 임주탁, 이지란 시조의 맥락과 함의)


초산의 범은 항우고, 패택의 용은 유방이다. 사슴을 쫓는다(逐鹿)는 것은 천하를 놓고 다투는 것이다. 이두란이 과연이 시조를 지을 정도로 지적 소양을 갖췄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의 작품이라면, 명과 고려 사이의 세력 다툼에 끼인 자기의 곤란한 처지를 외로운 사슴에 빗댔을 수 있다. 처량한 신세다. 하지만 앞 두 구절만 보면, 그의 스케일과 웅지가 느껴진다.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순오지](旬五志)에 따르면, 이두란은 이성계를 시기해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이성계가 뒷간에 있을 때 세 번 활을 쏘았다. 그런데 이성계가 화살을 손으로 잡고 나와 돌려주자, 이두란은 진심으로 감복했다. 그 뒤 평생 네 살 아래인 이성계를 형으로 모셨다. 경상북도 예천군 금당실 설화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 두 사람이 활쏘기 시합을 해서 이두란이 졌다. 그래서 이두란이 “고만 그 서로 야욕은 버리고 니가 고만 임금질 해라”고 포기했다고 한다.([한국구비문학대계] 7집 17책, pp. 511~517) 이성계의 잠저 시대를 기술한 [태조실록] 총서에도 이두란이 이성계의 출중한 무예에 감복한 기사가 여럿 나온다. 두 사람이 사슴 한 마리를 쫓는데, 갑자기 쓰러진 나무가 앞을 가로막아 사슴이 나무 밑으로 빠져 달아났다. 이두란은 말고삐를 잡아 돌아갔다. 그러나 이성계는 나무 위로 훌쩍 뛰어넘어 나무 밑으로 빠져나온 말을 다시 타고 뒤쫓아 가 사슴을 쏘아 잡았다. 이두란이 놀라서 “공은 천재이므로 인력으로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고 탄복했다고 한다.

“세상에 드문 재주는 많이 보여줘선 안 돼”

이후 이성계는 “출병할 때마다 반드시 공과 상의하고 공을 대동하였다”(이지란신도비). 이두란 없이는 이성계의 찬란한 전공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태조를 좇아 여러 장수의 우두머리가 돼 100여 차례 전투를 치르고 북쪽으로 몽골을 쫓아내고, 남으로는 왜노를 꺾고, 여진을 회유하여 천 리에 이르는 땅을 개척하였다.”(이지란신도비) 그야말로 일생을 바친 것이다. 이성계도 이 무공을 높이 평가했다. “두란의 말 달리고 사냥하는 솜씨는 혹 비교할 사람이 있겠지만, 전투에 임해 적을 치는 데(臨陣擊賊)는 그보다 나은 자가 없다.”([용비어천가]) 그러나 이두란은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여인과 같았다”(靚和端麗如婦人)고 한다.

두 사람이 합작해 일군 승리 중 가장 빛나는 전투는 황산대첩이다. 1380년(우왕 6), 왜구 침입 사상 최대 규모의 왜구가 진포에 상륙해 지리산 운봉까지 남진하며 하삼도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삼도도순찰사 이성계는 친병을 이끌고 운봉 황산에서 왜구와 격돌했다. 전투가 너무 격렬해 승패를 점칠 수 없었다. 한 왜장이 이성계 뒤로 달려와 창으로 찌르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편장(偏將) 이두란이 말을 달려와, “영공, 뒤를 보시오! 영공, 뒤를 보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나 이성계가 미처 보지 못하자 이두란이 활로 쏘아 죽였다. 이성계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왜구 지휘관은 15세의 아지발도로 용감무쌍하여 당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투구를 쏘아 떨어뜨리고 이두란이 얼굴을 쏘아 사살했다. 두 신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두란은 정몽주를 죽이라는 이방원 등의 요청에 “우리 공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라고 거절했다. 이성계의 명이 없으면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지란신도비에는 이두란이 정색을 하고, “익양백(益陽伯, 정몽주)은 충신이다. 내 어찌 충신을 해쳐서 스스로 불의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겠는가”라고 했다고 전한다. 단순한 거절에 그치지 않고, 정몽주가 충신이며 그를 죽이는 일이 불의라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는 태종 이방원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도비가 세워진 18세기에는 아마 이런 평가도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이두란은 평범한 무장은 아니었다. 우왕이 행궁에서 활쏘기 시합을 열었을 때, 이성계는 그야말로 신궁 같은 솜씨를 과시했다. 그러자 이두란은 “세상에 드문 재주는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충고했다. 그의 생각이 얼마 깊고 신중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심모원려는 오히려 이성계보다 나은 것이었다. 어쨌든 이두란이 거절함으로써, 이방원 등 4인 위원회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묘책보다 결단이 필요한 때가 왔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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