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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48)] 실천 성리학 주춧돌 된 일두(一蠹) 정여창 

“조선의 현인 중 이분만이 흠이 없다” 

이웃 빚문서 태우고 노비에게도 유산 분배… 학문보다 사람의 도리 먼저 실천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 연루, 저서 등 모두 소실됐지만 조선 오현에 올라


▎일두기념사업회 김윤수 이사장(오른쪽)과 정순호 사무국장이 남계서원을 찾았다.
"... 한훤 김 선생과 함께 점필재 김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다. 뜻이 같고 도(道)가 합치되어 막역한 사이로 지내며 도를 논하고 학문을 강할 때는 늘 함께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 은미한 말씀과 남긴 의론이 세상에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선생의 평소 저술은 또 무오년 재앙에 불 타 없어졌으니, 어찌 후학들이 길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조선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의 신도비에 새겨진 내용이다. 이조참판을 지낸 정온이 1639년(인조 17) 지었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도로변 구충각 왼쪽에 있는 신도비는 비각 안에 보존돼 있었다. 신도비에서 보듯 일두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아래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들의 만남은 도리 실천을 중시하는 우리 도학(道學) 역사의 한 축을 형성한다. 일두와 한훤당은 이후 향기가 같은 지초와 난초처럼 나란히 오현의 자리에 오른다. 조선 오현은 일두·한훤당을 비롯해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가리킨다.

일두는 어떤 길을 걸었기에 신도비에서 밝히듯 저술과 말씀이 거의 전하는 것 없이 유림이 우러르는 오현이 되었을까. 1월 16일 선생의 향기를 찾아 ‘선비의 고장’ 함양을 답사했다. 먼저 들른 곳은 읍내 사단법인 일두기념사업회였다. 그곳에서 기념사업회 김윤수(61) 이사장과 정순호(64) 사무국장을 만났다. 김 이사장은 오랜 기간 고전을 국역했고, 정 사무국장은 일두의 15대손으로 초등학교 교장과 교육장을 지냈다. 정 사무국장은 선조(先祖)가 “자기 수양에 철저하셨다”며 “핵심 정신은 실천”이라고 운을 뗐다.

편액 ‘남계’와 ‘서원’ 두 개로 나뉘어져


일행은 먼저 남계서원(灆溪書院)으로 향했다. 1552년(명종 7) 강익 등 유림이 일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48년 만이다. 서원 역사로 보면 주세붕이 순흥에 세운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됐다. 서원 입구에 최근 새로 세운 동판 표석이 보였다. 지난해 7월 10일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서원 9곳 중 하나임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세계문화유산이 된 뒤 관람객이 3배쯤 늘었다고 추정했다.

풍영루를 지나 서원 경내로 들어섰다. 정면으로 강당인 ‘명성당(明誠堂)’ 처마에 ‘남계서원’이란 편액이 보였다. 기둥을 사이에 두고 ‘남계’와 ‘서원’이라는 글자를 따로 떼 편액이 두 개가 된 게 시선을 끌었다. 강당 뒤 가파른 돌계단을 조심스레 오르자 지대가 높아지며 서원 앞으로 흐르는 하천 남계가 눈에 들어왔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는 진주에 이르면 남강이 되고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내삼문을 지나 사당의 문을 열었다. 뒤로 소나무가 둘러쌌다. 오른쪽에 정자관을 쓰고 심의를 입은 일두의 초상화가 놓여 있다. 벽면 가운데 집 모양 감실이 있었다. 위패에는 ‘文獻公一蠹鄭先生(문헌공일두정선생)’이라 쓰였다. 예(禮)를 올렸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정온과 강익이 각각 배향돼 있다. 남계서원은 아담했다. 한훤당을 모신 도동서원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았다.

사당을 내려오며 김윤수 이사장이 일두와 한훤당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은 허물도 지적할 만큼 막역했던 모양이다. 기록으로 남은 두 사람의 몇 안 되는 일화 중 하나다. 한훤당의 소실되지 않은 글을 모아 후대에 편집한 [경현록(景賢錄)]에 나오는 사연은 이렇다. “…일두가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갔을 적에 선생(한훤당)이 가서 방문했다. 일두가 관청에서 쓰기 위하여 금 술잔을 만들어 두었더니 선생이 이를 보고 나무라기를 ‘자네가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할 줄은 몰랐네. 이후에 반드시 이 물건 때문에 사람을 그르치는 일이 있을 것이네’ 했더니 그 후에 현감으로 온 사람이 과연 그 금잔 때문에 독직죄를 범하였다 한다.”

안음은 함양 안의(安義)의 옛 지명이다. 일두는 관청이 임금의 하사주를 받을 경우 쓸지 몰라 금 술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반가운 벗이 찾아오자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일두의 후임자는 금 술잔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도 [중종실록]에 실렸다. [중종실록] 35권(중종 14년)의 관련 기록은 이렇다. “…전 안음현감 윤효빙은 체직되어 돌아올 적에 바야흐로 상중(喪中)이었는데, 봉(封)해 놓은 창고를 열고 관에 저장해 놓은 물품을 꺼냈으며, 또 조정이 모두 알고 있는 금잔·은잔을 가져갔습니다….”

이 일화는 조선을 대표하는 도학자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한훤당도 흠결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암집(靜菴集)] 부록 권2의 어류(語類)편을 보자. “선생(정암 조광조)이 희천에서 한훤당을 사사(師事)할 때 나이는 겨우 17세였다. 한훤당이 어떤 맛있는 음식을 얻어 어머니에게 보내려 했는데 지키는 자가 삼가지 않아 솔개가 차갔다. 한훤당의 목소리와 기가 자못 거칠어졌다. 정암이 나아가 ‘선생이 부모를 봉양하는 정성은 참으로 지극하지만 군자의 말씨와 기색은 잠시라도 흐트러져서는 안 됩니다.’ 하니 한훤당은 정암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네 스승이 아니요, 네가 실로 내 스승이다.’”

남계서원을 나오자 오른쪽 바위언덕 옆에 또 하나 서원이 보였다. 청계서원(靑溪書院)이다. 스승 점필재 아래서 일두와 같이 공부한 또 다른 벗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을 기리는 서원이다. 본래는 청계정사였다. 일두는 탁영보다 14살이 많았고 한훤당보다도 4살 연장(年長)이다. 일두는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같은 뜻으로 공부하니 벗으로 지내자는 자세였다. 일두는 탁영과도 교분이 깊어 학문을 논의하는 것은 물론 1489년 봄 16일 동안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을 같이 오르기도 했다. 또 유람 중 함께 밀양으로 가 점필재를 찾아뵙고 돌아온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섬진강에서 배를 타고 진주 쪽으로 가면서 각각 시 한 수씩을 지었다.

“물 위 부들 잎은 바람 따라 흔들리고/사월 화개 땅엔 보리가 다 익었네/두류산 천만 봉을 두루 다 돌아보고/배는 또 섬진강을 강물 따라 내려가네”

일두가 당시 읊은 ‘악양(岳陽)’은 남아 전하는 그의 유일한 시가 됐다. 탁영은 두류산을 유람하면서 보고 들은 것, 일두와 나눈 이야기 등을 적어 [속두류록]이란 기행문을 남긴다. 두 사람은 이듬해 관직을 임무 교대하는 인연으로 이어진다. 1490년(성종 21) 일두가 41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자 당시 예문관 검열로 있던 탁영은 자신의 후임으로 일두를 추천한다. 김윤수 이사장은 “탁영이 사초(史草)를 정리하는 사관(史官) 자리를 일두에게 물려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두는 이후 세자 연산군을 가르치는 스승이 된다.

김일손, 사초(史草) 정리 후임에 일두 추천


▎드론으로 촬영한 남계서원 전경.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이다.
일두와 탁영의 인연은 1498년(연산군 4) 비극적인 무오사화로 마감된다. 앞서 성종 임금은 세조 이래 권력을 휘두른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점필재·한훤당·일두·탁영 등 사림파를 발탁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유자광 등 훈구파는 마침 점필재가 쓴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 탁영이 사초에 포함하려 하자 성종을 이은 연산군에게 그 일을 대역죄로 고한다. 연산군은 증조인 세조 임금을 욕되게 하는 자들은 처벌해야 한다며 사림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다.

탁영은 함양 청계정사에 머물다 체포된다. 당시 일두는 점필재의 제자라는 이유로 난언죄(亂言罪)를 받아 장(杖) 100대에 종성부(鍾城府)로 유배됐다. 한훤당도 같은 죄목으로 귀양을 간다. 일두는 유배될 때 “환난은 성인(聖人)이라도 면치 못했다”며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문제는 자료였다. 부인은 선생이 귀양 가고 많은 선비가 죽임을 당하자 집에 남은 책과 글을 모두 아궁이 속에 던져 버린다. 자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일두의 저술로 전해지는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主客問答)] [진수잡저(進修雜著)] 등과 편지 등이 모두 당시에 사라졌다. 그래서 일두는 학문의 규모를 알 수가 없다고 평가된다. 지금 전하는 [문헌공실기]는 일두가 세상을 떠난 지 130여 년이 지난 1635년 정구와 증손 정수민이 남아 있거나 관계된 자료를 모아 펴낸 것이다.

49세 일두는 귀양지 두만강가 함경도 종성에서 관가의 화부 노릇을 했다. 그는 불 지피는 하찮은 일을 하면서도 바른 태도를 잃지 않았다. 또 시간이 나면 그곳 젊은이를 모아 글과 사람됨을 가르쳤다. 그는 7년 귀양살이 동안 학자로서 자세를 잃지 않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황의동 충남대 교수는 “일두의 정신은 옛 학문을 믿고 의리를 좋아하며 배움은 실천을 힘쓰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1504년(연산군 10) 일두는 향년 55세로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했다. 선생이 운명하자 종성의 제자들은 함양까지 2000리 길을 수십 일에 걸쳐 정성을 다해 운구했다.

유배지서 운명하자, 현지 제자들이 2000리 운구


▎함양군 수동면 승안산 자락에 마련된 정여창 묘소. 봉분은 사각 모형이다.
일행은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을 지나 일두의 묘소를 찾았다.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승안산이다. 묘소 아래 재실 앞에 최근 선생의 사각기둥 한글 신도비가 새로 세워졌다. 재실 주변은 고찰 승안사 자리였다. 절터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니 산자락에 묘소가 나왔다. 앞은 선생이, 뒤쪽 약간 높은 위치엔 부인이 모셔져 있었다. 봉분은 형태가 특이하게 둘 다 사각형이다. 정순호 사무국장은 “지금도 묘제 때는 제관이 30명쯤 모인다”며 “사각 봉분은 그 연유를 들은 게 없다”고 했다. 일두는 안장된 뒤 영면(永眠)에 들지 못한다. 장례 3개월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기 때문이다.

묘소에 참배한 뒤 함양군 지곡면 일두고택을 방문했다. 3000평에 건물 12동이 배치된 저택이다. 고택 건너편에 산다는 종손은 자리를 비웠다. 일두는 1450년 이곳 덕곡리 개평촌에서 태어났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에 붉은색 충·효 정려 편액 5점이 걸려 있다. 또 대문 오른쪽 기둥에는 ‘일두종택’, 왼쪽 기둥에는 ‘충효전가(忠孝傳家)’라고 썼다. 선생의 호 일두(一蠹)는 ‘한 마리 좀’이라는 뜻이다. 송(宋)나라 정이(程頤)가 “나는 사람들에게 혜택도 주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천지간에 한 마리 좀과 같은 존재다. 다만 성인(聖人)이 남긴 글을 모아 엮어 보충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한 데서 따온 것이다.

청년 정여창은 효자였다. 신도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좌윤공(아버지)이 함길도 우후가 돼 반란군 장수 이시애를 막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기절했다가 소생해 쌓인 시체들에 들어가 유체(遺體)를 찾아 돌아와 장례 지냈다. 이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장례를 마치자 조정은 관례대로 순국한 사람의 아들이라며 군직(軍職)을 제수한다. 그러나 일두는 눈물을 흘리며 사양한다. 그는 이후 어머니를 부지런히 봉양하며 한 번도 모친 곁을 멀리 떠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비 없는 자식이 공부하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꾸중하자 마음을 다지고 밥 먹는 일도 잊을 정도로 열심히 글을 읽었다.

일두는 처음 경기도 이천의 진사 이관의에게 배웠다. 이후 점필재 문하에 들어가 먼저 [소학]을 읽고 사서(四書)를 배웠다. 특히 [대학]과 [중용]을 정밀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류산에 들어가 3년 동안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80년 성종이 성균관을 통해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선비’를 구했는데 성균관은 31세 일두를 첫 번째로 천거했다. 그는 이후 34세에 진사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간다.

성종 “그대의 행실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


▎남계서원 사당의 감실에 모셔진 정여창의 위패. 사당 왼쪽과 오른쪽에는 정온과 강익이 종향돼 있다.
1486년(성종 17) 일두는 어머니가 병환을 앓자 정성을 다해 돌보고 장례를 치른 뒤에는 3년 여묘살이를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지리산 아래 섬진강 어귀에 악양정을 지어 대나무와 매화를 심고 거처했다. 1490년(성종 21) 같은 고을 사람이 일두의 효행을 조정에 알리자 성종은 그를 소격서 참봉에 제수한다. 일두는 은혜에 감사한 뒤 글을 올려 “자식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며 벼슬을 사양했다. 하지만 성종은 “그대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며 벼슬 사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두는 그해 12월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첫 관직인 예문관 검열을 거쳐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로 옮긴 뒤 세자 연산군을 가르쳤으나 세자가 좋아하지 않았다. 1494년 45세 일두는 외직인 안음현감으로 나간다. 그는 거기서 어진 정치를 펼치고 인근 합천에 머물던 한훤당을 자주 만나 학문을 논했다. 이후 무오사화를 당한다.

일두는 중종반정 이후 재평가를 받는다. 1568년(선조 1) 조헌 등은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을 사현(四賢)으로 문묘에 종사할 것을 상소한다. 1575년(선조 8)에는 ‘문헌(文獻)’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1610년(광해군 2)에는 사현에 퇴계 이황을 더해 오현이 문묘에 배향되고 교서가 반포됐다. 남명 조식은 생전 남계서원을 찾아 “우리나라 현인들 가운데 오직 이분만이 거의 흠이 없는 분일 것”이라고 했다. 선비는 학문보다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 먼저임을 일두의 삶이 보여준다.

[박스기사] 효행과 덕치(德治)의 표본 - 병든 어머니 대변까지 맛본 지극한 효심

일두 정여창은 사람의 도리 실천에서 남다른 데가 있었다. 행장(行狀)에는 효성의 극진함을 서술한 대목이 자주 나온다. 1486년 일두는 모친이 이질에 걸리자 대변을 맛보고는 날마다 하늘에 호소하며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보고 들은 자들이 다들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이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사를 예에 맞게 지냈고, 한 해 동안 죽을 먹으며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았다. 또 하루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별세 뒤 어머니가 받아 둔 채권문서는 원망이 따른다고 전부 불태워 어려운 사람의 빚을 면제해줬다. 유산을 배분할 때는 노비들에게도 나눠줬다. 노비들에게 유산을 배분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또 가난한 누이가 집을 짓자 일두는 자기 집 기와를 걷어 지붕을 이어줬다.

일두는 중년에 술을 과하게 마셔 죽을 뻔했는데 어머니가 구제한 적이 있었다. 이후로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문과에 급제한 뒤 어사주까지도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사양했다고 한다. 또 한 모임에서 소고기를 마련해 먹었다. 어떤 이가 금물(禁物)을 사용했다고 고발하자 어머니가 크게 근심했다. 일두는 그때부터 소고기도 먹지 않았다고 행장에 적혀 있다.

안음 현감으로 있을 때는 교화(敎化)를 실천한 사례도 있다. 일두가 현감으로 재직하던 어느 날 서상(西上) 노루목에 사는 박돌(朴乭)이라는 죄인이 감옥을 탈출했다. 관속들은 죄인 대신 그의 아비를 대신 붙들어왔다. 그때 일두는 관원들에게 “악한 자식을 둔 죄로 아비까지 욕보일 수는 없다. 그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아들을 붙들어 오라!”고 영을 내렸다. 며칠 뒤 탈출한 죄인이 스스로 관가로 찾아왔다. “사또! 제가 감옥을 탈출하여 도망친 박돌이라는 죄인이옵니다. 저의 아버지를 욕보이지 않고 사또께서 풀어 주셨다 하기에 감복하여 자수하러 왔습니다. 처벌하여 주십시오.” 일두는 박돌이 자수하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한 것을 인정해 처벌하지 않고 방면했다. 그 뒤 박돌은 고을에서 이름난 효자가 됐다. 정재경의 [정여창연구]에 나오는 일화로, 신도비에는 보이지 않는다.

선조 시기 유희춘의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을 보고 일두를 처음 알게 된 퇴계 이황은 “김굉필과 정여창은 학문과 행실에서 모두 높은 수준에 올라 뒷사람이 본받을 만하다”고 평가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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