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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5)] 독일, 후발주자에서 유럽의 중심국가로 

사회적 시장경제로 빚어낸 라인 강의 기적 

영국·프랑스보다 민족국가 성립 늦고 1·2차 세계대전 패배로 경제 초토화
기술력과 개방경제로 재건 후 통일까지… 과거사 반성으로 도덕성 확보


▎21세기 유럽의 금융 중심으로 기능하는 프랑크푸르트의 스카이라인. / 사진 : 위키피디아
21세기 독일은 유럽의 최강대국이다. 그러다 보니 독일처럼 강하고 부유한 나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차근차근 번영의 길을 걸어왔을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고대 게르만(German)이라 불리던 민족이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뒤, 중세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현대의 독일로 발전했다고 단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게르만이란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호칭이다. 우선 게르만은 언어학적으로 라틴, 슬라브와 함께 유럽의 3대 계통 가운데 하나다. 독일어는 물론 영어나 네덜란드어, 스칸디나비아의 언어들이 모두 게르만 계통 언어다. 당연히 게르만 계통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나의 민족을 형성한다고 보기 어렵다.

게르만은 또 고대에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지역에 뿌리를 둔 부족들을 통칭하는 이름이었다. 이들은 고대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유럽의 남부와 서부로 대거 이동했고, 심지어 북아프리카나 중앙아시아 등으로도 침투했다. 프랑스 지역에서 나라를 세운 프랑크족이나 영국에 정착한 앵글과 색슨족은 모두 게르만 민족의 부류들이며,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고트족이나 바이킹족도 모두 게르만 계통이다.

끝으로 게르만은 근대 독일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지칭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부 학자는 중세 신성로마제국을 독일의 모태라고 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제국은 베네룩스,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등을 포함하는 전형적 다민족 제국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독일 지역도 수백 개의 정치 단위로 분열돼 있었다. 그들 중 현재까지 근대 독일어를 사용하는 게르만 민족으로 형성된 나라도 독일과 오스트리아 둘로 나누어져 있다. 또 스위스나 룩셈부르크 국민의 다수는 게르만 계통이다.

슬라브나 라틴계를 하나의 민족이라고 할 수 없듯이 게르만도 독일로 대표된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독일이라는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까지 중유럽 지역의 분열된 정치체제에 속하는 게르만 집단이 가졌던 후진성과 콤플렉스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민족주의적 노력과 원동력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독일의 근현대사가 보여주는 심각한 기복은 후진성을 벗어나 강한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후발주자로서의 부침이었다.

분열에서 통합으로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서 1871년 독일제국을 선언하는 광경. / 사진 : 위키피디아
유럽에서 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부족이나 민족을 하나의 정치 단위로 묶음으로써 보다 커다란 새로운 통합 민족을 만드는 작업이다. 일례로 런던을 중심으로 잉글랜드 민족을 형성한 다음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아일랜드를 통합하여 브리튼이라는 민족을 만들었다. 또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크족이 프랑스 민족을 만든 뒤 주변을 점차 통합해 간 과정이 그렇다. 서유럽의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중세 말기 대표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은 바로 이러한 민족 통합에서 놀라운 포용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게르만 민족은 너무 넓은 영토에 흩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통합을 주도할만한 마땅한 세력도 없었다. 실제 게르만계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는 게르만 민족의 나라를 만들기보다는 넓은 영토를 포괄하는 다민족 제국의 형성에 더 관심을 보였다. 게르만 민족만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 노력을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베를린을 중심으로 프로이센 왕국이 출범하면서부터다. 특히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버금가는 독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왕국과 공국, 교회령, 자유도시 등으로 분열된 게르만 민족을 통일하는 과업에 나섰다.

프로이센은 군대를 보유한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가진 군대라고 불릴 정도로 군사력을 중시했다. 덕분에 영국이나 프랑스는 물론 오스트리아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프로이센은 유럽 강대국 반열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말 프랑스가 대혁명 이후 보다 강화된 중앙집권적 국가와 군대의 파격적인 힘으로 등장하면서 독일 서부 지역은 프랑스의 지배 아래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독일의 통합성을 크게 앞당긴 계기는 강한 국가로 발돋움한 프로이센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세력의 지배였다. 천 년 넘게 분열됐던 독일 지역은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초강대국이 된 프랑스가 통치하면서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권력과 법 체제 아래 놓이게 됐다.

외세가 닦아놓은 통일의 바탕 위에 프로이센은 19세기 내내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815년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과 연합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를 무릎 꿇게 했지만,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1870년까지 수많은 전쟁을 통해 통일의 주도력을 군사 및 외교적으로 발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의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의 중대한 역할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무력이 강대국의 유일한 조건일 순 없다.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을 추진하기 위해선 경제력과 문화적 우수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1830년대부터 프로이센이 적극 추진한 관세동맹인 졸페라인(Zollverein)은 통일의 기반으로 작동했다. 정치는 여러 나라로 분열돼 있었지만, 관세동맹을 통해 독일은 하나의 국민경제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던 셈이다. 졸페라인은 산업혁명을 독일에서 실현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1923년 하이퍼인플레이션 당시 가치가 떨어진 지폐로 벽을 도배하고 있다. / 사진 : 위키피디아
또한 프로이센은 베를린에 대학을 세우고 박물관을 설립하는 등, 독일제국의 소프트파워를 형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프로이센이 탄생시킨 독일제국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나라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수 세기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그늘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힘든 시기를 보낸 독일에도 영광의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독일 제국이 형성된 후 유럽 최강대국으로의 떠오른 것은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축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대국의 존재는 주변국과의 위험한 충돌 및 대립 가능성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통일 독일제국의 초창기 반세기(1871~1914년)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모두 강화되는 승승장구의 시절이다. 독일의 인구는 이 시기에 4100만명에서 6800만명으로 55% 이상 늘어났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독일과 미국이 영국을 뛰어넘어 새로운 산업혁명의 시대를 연 기간이다. 당시 신흥 산업국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은 영국보다 훨씬 새로운 기술로 보다 큰 규모의 공장과 회사를 만들어 유럽 제1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철강이나 석탄 등 산업혁명의 기초 생산에서 독일은 영국을 초월했고, 전기나 화학 등 새로운 기술과 산업에서도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은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산업혁명과 비교했을 때, 거대 규모의 기업군을 탄생시켰다. 독일어에서 유래하는 콘체른(Konzern)이라는 말은 한 산업을 지배하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기업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매김했다. 21세기까지도 세계적 대표기업인 지멘스(Siemens)나 회슈트(Hoecht), 크루프(Krupp),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등이 바로 이 시기에 부상한 독일 대기업들이다. 현재까지 세계 시장에서 고급 자동차의 대명사로 명성을 떨치는 메르세데스 벤츠나 BMW 또한 20세기 초에 등장한 독일 기업들이다. 특히 BMW는 바이에른 자동차 회사라는 명칭의 약어로, 뮌헨 중심 남부 독일의 산업 기수이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비행기 엔진을 생산하는 군수 기업으로 탄생했다.

후발주자의 특징은 선발주자와 달리 앞선 나라를 무조건 추종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고찰하고 반성하는 과정도 거치지 않고 말이다. 성공적인 후발주자였던 독일에 선발주자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가 자연스럽게 모방의 대상이 된 이유다. 독일은 1884~85년 베를린 국제회의를 통해 아프리카 분할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확장일로 걷는 국력에 걸맞은 제국을 획득하기 위해 충돌도 불사하는 전략으로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독일이 역사적으로 가졌던 민족주의 콤플렉스, 영국과 프랑스보다 뒤처진 제국주의 경쟁, 그리고 강력한 산업 분야 성공과 인구 증가 등이 선사한 자신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의 여러 세력이 균형을 이루며 참혹한 전쟁을 수년간 지속했지만, 미국의 개입과 독일 내정의 혼란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 세력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871년 프로이센이 형성한 독일제국을 선포한 것은 베를린이 아니고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이었다. 또한 1919년 제1차 대전을 종결하는 평화조약 역시 베르사유에서 체결함으로써 프랑스·영국·미국 등 연합국은 독일의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았다. 반세기 전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획득했던 알자스와 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돌려줘야 했고 라인 강의 서쪽을 연합국이 점령하는 치욕적인 결과를 낳았다.

재앙으로 끝난 나치즘


▎1936년 나치 체제 선전에 활용되었던 베를린 올림픽 광경. / 사진 : 위키피디아
독일은 제1·2차 세계대전 발발의 책임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이런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전쟁 사이에 존재했던 독일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1920년대 독일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바이마르(Weimar) 공화국이 프로이센이 만들었던 독일제국을 대체한 상황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제국의 패배와 그로 인한 베르사유 조약의 불평등한 조건을 그대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민족주의 정통성에 있어서 태생적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바이마르 독일의 서쪽은 프랑스에, 그리고 동쪽은 신생 폴란드에 영토를 내줘야만 했다.

게다가 바이마르 공화국은 1921~23년 인류의 경제사상 그 어느 국가도 경험하지 못했던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겪었다. 일례로 1922년 160마르크 하던 빵 가격은 1년 만에 2000억 마르크까지 상승했다. 또 1923년 11월 1달러 미화의 환율은 4조 마르크를 넘어서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한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독일 국민은 이 모든 불행이 베르사유 체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중·후반 화폐 가치가 안정되고 경제도 정상화의 길을 걷는 듯했지만, 1929년 세계 경제를 강타한 대공황은 독일에 치명적이었다. 독일 경제 정상화에 크게 기여했던 미국의 자본이 급속하게 빠져나감으로써 경제가 급격히 마비되면서 추락했기 때문이다.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이어 독일은 금융 국제화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을 몸소 경험하는 운명에 처했다.

총체적 위기의 결과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세력의 집권으로 귀착됐다. 나치 독일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 하나의 지도자”(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라는 슬로건에 따라 역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나치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대량 실업을 초래하는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종결시키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경제활동을 조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소련이 좌파의 계획경제를 만들어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면, 나치 독일은 우파의 계획경제를 통해 자본주의의 대안을 보여준 셈이었다. 특히 노동력을 군인으로 동원하고 대량 무기 생산을 통해 산업 능력을 키움으로써 경제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나치 독일이 국수주의를 고취해 주변국을 침략하는 것은 이런 정치경제 모델 하에서 작동하는 자연스러운 원칙일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미국 등, 기존의 자본주의와 신생 좌파, 우파의 계획경제가 서로 부딪히는 충돌의 장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은 나치즘을 누르는 데 성공했고, 독일은 또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경험했다. 1914년 독일제국의 영토는 54만㎢에 달했지만 두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35만㎢로 줄어들었다. 그뿐 아니라 1938년 합병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다시 두 나라로 나뉘었으며, 독일 자체도 서방이 지배하는 서독과 소련이 점령한 동독으로 양분됐다. 통일 독일의 역사는 70년을 간신히 넘긴 뒤, 다시 분단의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부국굴기의 관점에서 독일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시기는 1949년부터 1989년까지 서독에서 일명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때다. 독일연방공화국이라 불리는 서부 지역은 사실 미국, 영국, 프랑스군이 점령한 영역이었다. 달리 말해 독일 국토는 강대국에 의해 찢어지고 군사적으로도 점령당한 정치적 비극의 시기에 가장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룩한 서독의 경제 모델은 몇 가지 특징을 드러낸다. 우선 과거 나치 시절의 국가 주도적 모델과 단절했다. 서독은 나치나 공산주의 방식의 국가 계획이나 적극적 개입을 거부하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을 따랐다. 어떤 측면에서는 연방 국가라는 사실이 이런 경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각 주 정부가 강한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앙의 연방 정부 역할은 헌정 질서상 제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독은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혼란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1920년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서독의 모델은 ‘질서 자유주의’라는 형식을 추구했다. 다른 이름으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자본의 이익뿐 아니라 노동 세력의 권리와 사회의 안정도 동시에 추구하는 모델이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자유 시장의 원칙에 의해 경제가 돌아가되, 노동의 권익을 보호하고 복지국가를 통해 불평등을 축소하는 노력을 동시에 경주한다는 뜻이다. 노조의 대표가 회사 이사회에 참가하는 법적 제도는 그 상징적 사례다.

분단 이후 시작된 라인 강의 기적


▎라인 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폭스바겐의 볼프스부르크 공장. / 사진 : 위키피디아
서독은 또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악몽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 화폐가치의 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독일 연방은행(Bundesbank)이 발행하고 관리하는 도이칠란트 마르크는 20세기 내내 가장 안정적 가치를 유지하는 화폐로 명성을 날렸다. 그 결과 서독의 물가는 안정적 경향을 나타냈고 여기에 더해 상품의 경쟁력을 통해 수출에 성공하는 선순환의 경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서독이 축소된 영토, 줄어든 인구, 그리고 분단된 시장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프랑스와 화해를 통해 유럽 단위의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는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1951년 유럽 석탄철강공동체는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독일과 프랑스 양국 간 화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100년 가까이 지속한 알자스와 로렌을 둘러싼 악연이나 유럽 주도권의 경쟁을 종결시키고 공동의 미래를 개척하자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1958년 출범한 유럽경제공동체는 민족의 범위를 초월하는 대륙적 시장 형성을 선포했다. 유럽통합은 서독이 정치적 우위를 프랑스에 내주면서도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서독의 경제적 성공이 정치적 결실을 본 것은 1990년 독일의 신속한 통일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낮은 가치의 동독 마르크를 고가치의 서독 마르크로 1대1로 환전해 주는 선물을 통해 동독 주민의 민심을 샀다. 또 독일이 통일하더라도 유럽의 틀 속에 남아 주변국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특히 독일의 마르크화를 포기하고 단일화폐인 유로로 통합하는 안을 수용함으로써 이런 의지가 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진정성 있는 정책 방향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콜 총리는 포기해야 얻을 수 있다는 지혜를 발휘한 지도자였다.

기술 강국의 인구 고민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 그리고 국가가 다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미래지향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독일의 자본은 노동세력을 불순한 집단으로 보지 않고, 기업을 운영하는 공동의 파트너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협력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또한 무책임한 요구나 파업을 일삼기보다는 기업이라는 공동의 운명을 함께 일궈나간다는 의식을 갖고 통제와 자제력을 발휘하곤 한다.

국가 즉 정치세력 역시 자본이나 노동의 한쪽 편에 서기보다 국가 경제가 필요로 하는 개혁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2000년대 초반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노동세력을 대변하는 정당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 자유화 정책을 밀어붙여 유럽 내에서 독일의 경쟁력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바 있다. 2005년 11%까지 올라갔던 독일의 실업률은 2019년 현재 3.1%까지 하락했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으로 인해 지금도 여전히 8.5% 수준의 높은 실업률을 보여주는 이웃 나라 프랑스보다 독일은 정치권과 노조, 기업의 상호 협조하에 획기적으로 실업률을 낮출 수 있었다.

게다가 독일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강국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20세기를 지배한 자동차 산업에서 독일은 단연 유럽을 대표하는 선두주자의 입지를 굳혔다. 독일의 ‘대중 차’라는 명칭을 가진 폭스바겐(Volkswagen)은 생산량이 가장 많은 유럽 최대 자동차 기업이다. 미국의 GM이나 일본의 도요타와 어깨를 견준다. 또 독일은 벤츠와 BMW로 대표되는 세계 고급 차 시장도 지배하고 있다. 고급 차종 부문에서도 포르셰라는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자동차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에서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독일 기술력의 원천은 훌륭한 기술교육체제와 산업과 교육을 연결하는 유기적 관계에 있다. 한국에서도 마이스터 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도입한 이 시스템이야말로 독일 경제 발전의 숨은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프랑스가 훌륭한 엔지니어로 명성을 날린다면, 독일은 치밀한 기술자의 나라다. 생산 시스템의 꼼꼼한 기술자 부대가 독일의 성공을 쌓았다는 의미다.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의 고민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 위험성에 있다. 과거 프랑스가 인구 문제로 경쟁에서 뒤처졌던 것처럼 독일 역시 1970년대 출산율이 1.5 이하로 떨어진 뒤 1995년에는 1.25 수준으로까지 하락했다. 1990년의 통일은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그렇다고 출산율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결국 독일은 1990년대부터 게르만 순혈주의를 포기하고 국적법을 개정해 이민자들의 귀화를 가능케 했다. 2015년에는 시리아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기도 했다. 덕분에 2016년 독일의 출산율은 1.5명 수준까지 높아질 수 있었다.

1990년 독일 통일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한가운데 있는 게르만 민족의 나라를 명실상부한 유럽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했다. 당시 서독의 인구는 6200만 명 정도로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 독일의 인구는 갑자기 8000만 명 수준으로 늘어났고 유럽연합의 월등한 핵심 국가로 솟아올랐다.

2000만 명에 가까운 동독 시민을 사회적으로 통합시키는 일은 분명 난제였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갑작스럽게 자본주의 사회에 투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콜 총리가 선사했던 현금 선물의 효과는 일시적이었고 동독 출신의 독일인들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올해로 통일이 된 지 30주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회가 하나로 통합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런 불평등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통일과 유럽의 중심

그럼에도 통일 독일의 위상은 확고해졌다. 독일은 통일함으로써 나라의 규모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시너지의 효과를 충분히 발휘했다. 1990년 통일 당시 서독과 프랑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서독 2만2219달러, 프랑스 2만1690달러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2017년이 되면 통일 독일은 4만4469달러, 프랑스는 3만8476달러 수준으로 격차가 벌어진다. 동독의 시민들을 흡수하고, 다수의 난민까지 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보다 높은 국민소득을 달성하며 격차를 벌린 셈이다.

이런 경제 통계의 양적 변화 이외에도 프랑스와 독일이 함께 이끌던 유럽통합의 마차는 이제 독일의 주도적인 리더십으로 넘어왔다. 특히 독일은 장기간 집권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유럽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여제로 군림하게 되면서 확고한 유럽연합의 기관차로 부상했다. 1970년대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유럽의 문제는 제대로 된 리더가 없다는 점이라고 불평하곤 했다. 이제 21세기 국제무대에서는 독일의 총리가 유럽에서 가장 강한 리더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독일은 분열된 후진적 국가라는 콤플렉스를 가진 채, 민족주의를 내세워 기존의 질서에 도전했을 때 큰 실패를 경험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그들이 경제발전을 통해 쌓은 양적 기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중심으로 우뚝 서려는 시도였다. 무력을 통해 주변과 세계를 발아래 놓으려는 접근이었다. 이런 시도는 필연적으로 다른 세력의 연합과 반격을 초래한다. 베르사유 조약이나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분단은 이런 무리한 시도가 초래한 결과였다.

반대로 독일이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점진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했을 때에는 성공 신화를 만들며 도약할 수 있었다. 서독은 미국, 영국, 프랑스의 군사점령을 수용하면서 라인 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또 프랑스가 강요하는 도이칠란트 마르크의 포기와 유로라는 단일화폐로의 통합을 받아들임으로써 통일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통일 독일은 프랑스 경제를 추월할 수 있었다. 독일의 지도자들은 세계대전이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빈번하게 무릎을 꿇는다. 그 덕분에 독일은 국제무대에서 도덕적 리더십을 인정받고 있다. 그 덕분에 주변국을 안심시키면서 지역적 헤게모니를 얻은 것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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