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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15)] ‘파시스트의 아버지’ 무솔리니 최후의 날 

돌팔매질한 그 손들이 파시즘 탄생의 주역 

1차 대전 예비역과 저임금 노동자가 무솔리니 최대 후원자
카리스마와 혁명이념 앞세운 통치, 위기 때 ‘모래성’ 드러나


▎이탈리아 밀라노 로레토 광장의 전경. 이탈리아 파시즘의 시작과 끝이 깃든 장소다. 지금은 이주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변모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서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진 두 개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먼저 터키다. 약 5년 전 터키 아시아 권역 에게 해에 인접한 보드룸(Bodrum)에 갔을 때의 경험이다. 현지에서 만난 터키인과 함께 이슬람 모스크 예배에 참여한 적이 있다. 종교도 다르고 계획에 없었지만, 터키인의 강력한 권유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쿠란(Quran)의 매력에 휩쓸려 얼떨결에 모스크에 들어섰다.

교회 목사에 해당하는 이맘(Imam)과 함께 메카를 향한 예(禮)와 쿠란 복창이 선행됐다. 이후 이맘의 설교가 이어지고, 무슬림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한 뒤 끝났다. 식사시간까지 전부 2시간 정도 걸린다. 모든 의식은 남녀 철저히 구별된 상태에서 이뤄졌다. 첫 경험에 말도 안 통하는 이방인 입장에서 모든 것이 서툴렀다. 그러나 터키인, 아니 모스크 안 모든 무슬림의 따뜻한 환대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모스크 체험을 통해 느낀 것은 한둘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탓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독교와 비교가 됐다. 가장 선명히 남은 것은 신자 개개인에게 던져지는 이슬람이란 종교의 절대적 권위다.

두 가지 측면에서 본 권위다. 알라를 찬양하는 쿠란은 이슬람의 권위를 지지하는 첫 번째 근거다. 기독교로 치자면 찬양·찬미에 해당하는, 음정과 리듬으로 표현되는 이슬람 경전의 파워다. 쿠란은 아랍어로 이뤄져 있다. 사실 터키인들은 아랍어를 전혀 모른다. 따라서 하루 5번씩 울려 퍼지는 쿠란 찬양을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알라는 위대하다(Allāhu Akbar)’ 같은 말이야 알겠지만, 구체적으로는 뭔지도 모른 채 그냥 듣는다. 그러나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뭔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슬람 모스크에서 개인은 없다


▎1945년 4월 29일 로레토 광장의 한 주유소 지붕에 매달린 무솔리니의 시신(왼쪽 둘째). 앞서 파시스트당에 의해 반(反)파시즘 운동가들이 처형된 곳이었다.
쿠란을 음정 리듬에 싣는 이맘을 통해 신에 대한 인간의 절규와 갈망이 충분히 느껴진다. 무슬림의 책임과 의무를 뼈끝까지 새기게 만드는 음(音)과 성(聲)이라고나 할까? 이교도인 필자조차 충분히 느껴지는 강렬하고도 본능적인 파워다. 식민지 당시, 애국가와 태극기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끓는 식의 느낌에 비교될 수 있다.

두 번째 권위의 근거는 무슬림 사이의 평등의식이다. 예배 방식은 무슬림 평등의식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모두 일렬로 늘어선 채 작은 공간 하나 남김없이 빽빽이 채워진, 직립 상태에서의 의식이다. 엎드리면 상대방의 발이 코앞에 있다. 유일신 알라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의미다. 빈부·권력·배경과 관계없이 모두 일렬로 늘어서 신을 찬미하는 수평조직이다. 예배를 주도하는 이맘조차 모스크 내에서 임의로 선정된 ‘예배 인도자’에 불과하다. 이슬람(수니파)은 로마 가톨릭과 달리 사제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이슬람 예배에선 개인주의를 불경스럽게 받아들이는 공동체 의식이 묻어난다. 모스크는 개인의 고통이 아닌, 무슬림 모두의 생각을 알라신에게 전하는 공간이다. 모스크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우리’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나를 생각할 틈이 없다. 이맘의 기도에 맞춰 메카를 향한 집단의식이 반복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로의 간격을 인정하면서 신과의 대화에 들어가는, 개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 의식과는 크게 다르다.

보통 서방권에서 이슬람이라고 하면 테러리스트를 먼저 떠올릴 듯하다. 중동 정세에 무심한 한국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천국에 가면 보상을 받는다는 감언이설에 속는 무지하고 가난한 무슬림’들이 자살폭탄 대열에 선다는 것이 서방의 분석이다.

모스크 예배를 단 한 번만 경험해 봐도, 얼마나 피상적인 판단인지 금세 알 수 있다. 쿠란의 파워와 집단 평등의식에 기초한 이슬람의 절대적인 권위가 배경에 있다. 집단에 기초한 무슬림의 정열과 순수함이 그 어떤 극단적인 행위도 불사하도록 만드는 근본적 동인(動因)이다. 개인주의에 기초한, 서방 기독교 관점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가난·무지만이 아니라, 경건한 무슬림일수록 죽음도 마다치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신종코로나의 원인은 중국 일당독재


▎신종코로나 환자의 소지품이 중국 우한시의 한 병원 관계자들에 의해 격리 병동으로 이송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터키에 이어 또 다른 이야기의 공간은 중국이다. 2020년 2월에 들어서기 무섭게 전 세계를 대재앙으로 몰아가는 기점(起點)이다. 서방은 이미 중국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이하 ‘신종코로나’)를 인재(人災)로 규정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서방 언론 대다수는 중국 지도부의 대처방식이 글로벌 재앙의 제1 원인이라 진단한다. 중국 우한(武汉) 시장 저우센왕(周先旺)은 1월 27일 관영 중앙(CC)TV 인터뷰에서 “지방 정부 관리로서 정보 접근과 권한에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베이징이 대응을 아예 안 했거나 감추거나 늦추는 과정에서 글로벌 대재앙으로 이어졌다는 자기 고백이다.

중국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나흘 후인 1월 31일 같은 매체에 출연한 마궈창(馬國强) 중국공산당 우한시위원회 서기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책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 당서기는 “더 일찍 결정하고 지금처럼 엄격한 관리 조처를 했다면 결과는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한국 정부는 어떨까? 신종코로나란 명칭 앞에 ‘중국발’이란 말조차 쓰길 꺼린다. 대통령은 “중국의 어려움이 바로 우리의 어려움으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에 자주 등장하던 순망치한(脣亡齒寒),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의 재판으로 들린다. ‘글로벌 박애주의’가 넘쳐난다.

정작 ‘신종코로나=인재’라는 인식은 찾기 어렵다. 대재앙의 근원이 중국공산당 독재정권과 그 중심인 시진핑(習近平) 주석이라는 분석은 미미하다. 원인을 알아야 치유가 가능하고, 재발을 막을 수 있다. 한국 청와대의 대응이나, 언론의 인정 어린 논조를 보면 유구무언(有口無言) 시진핑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신종코로나를 인재로 보는 판단은 감염자와 희생자가 쏟아진 뒤에야 나타날 듯하다.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뜨거운 맛을 본 뒤에야 우르르 몰려가는 식의 행동방식이다.

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체제는 신종코로나를 막지 못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일당독재란 그런 법이다. 당이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아버지 말 한마디로 움직이는 고집불통 가부장적 가정과 같다. 그나마 가정이야 아버지의 눈과 손이 전부 미치는 지극히 작은 영역이다. 그런데도 가부장적 독재 가정의 말로는 결코 순탄치 못하다.

하물며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은 어떨까? 우한 시장의 인터뷰가 증명하듯, 바이러스 문제 하나 다루는 데도 시진핑의 재가가 필요하다. 우한이 자체적으로 바이러스를 특별 전염병으로 지정해 대규모로 대처할 권한이 없다. 잘못했다간 불경죄 나아가 제국주의 스파이로 찍히게 된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된 뒤에야 시진핑이 등장해 ‘대약진 운동’식 캠페인을 전개한다. 2003년 창궐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으로 이미 전과자 신세인 중국이 또다시 글로벌 전염병을 확산시킨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터키와 중국 이야기는 한국 정치에서 발견되는 징후와 무관하지 않다. 전체주의의 징후다. 한국인에게는 유럽에서나 들을 수 있는, 다소 생소한 느낌의 정치체제가 전체주의다. 모른다는 것은 그냥 당하기 쉬운 환경이라 볼 수 있다. 당할 경우 이미 알았거나 몰랐거나 상관없다. 전체주의라는 족쇄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다시 물릴 수가 없다. 경험칙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추축국들처럼 타의에 의해 벗어나는 방법밖에는 없다. 현재의 한국 정치를 보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아가는 모양새다.

‘방역정국’에서 풍기는 전체주의의 징후


▎홍콩의 한 시민이 보도에 설치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을 밟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전체주의는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All for One, One for All)’라는 슬로건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는 ‘One for All’만 성립한다. ‘All for One’은 환상에 불과하다. 독재자 단 한 명이 주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파나 계급이 지배하기도 한다. 일단 전체주의 체제를 갖출 경우 국민 생활 전부가 통제 감시된다. 언론 통제와 어용 미디어에 의한 프로파간다, 계획경제, 대규모 감시체제, 국가폭력의 적극적인 도입은 전체주의의 공통점이다.

언뜻 보면 권위주의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전체주의는 이념이나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기초로 한다. 이에 반해 권위주의는 카리스마와 무관하다. 권력의 목적이 공적이며 부패가 적고 공식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것이 전체주의, 사적인 데다 부패가 많고 공식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권위주의다.

또 입법·사법·행정 간 분권을 뜻하는 입헌적 다원주의와 관련해서도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는 결이 다르다. 입헌적 다원주의가 사라진 상태에서의 법을 통한 합법적 통치가 전체주의, 입헌적 다원주의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법을 무시한 통치체제가 권위주의다. 한국 정치사에서 권위주의는 박정희 시대를 통해 나타났다. 다른 나라에서의 권위주의와 달리 부패가 적었다는 점이 특별하지만, 나머지는 기존의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비슷하다.

현재 한국 정부의 이념적 출발점은 소위 ‘촛불혁명 정신’이다. ‘적폐청산’ ‘검찰개혁’ 같은 정치 프로그램을 앞세워 삼권분립을 무시한다. 공무원 휴대폰 검사와 같은, 공(公)을 앞세운 개인 통제도 실시된다. 정책 프로세스에서도 현장이나 주무부서보다 최고 지도자를 앞세운다.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부동산 대책 등에서 매번 청와대의 이념을 앞세우다 예기치 못한 부작용에 부딪히고 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시스템을 뭉개는 일도 적잖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신종코로나 대응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월 27일 언론은 “청와대가 (신종코로나 대응의) 전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발언을 전했다. 이틀 뒤 보건복지부는 “질병관리본부(이하 질본)가 중앙방역대책본부로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한다”고 청와대와의 입장과 엇갈린 보도자료를 내놨다. “달라진 방역 체계에 따라 질본이 컨트롤타워인 점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MERS)이 유행할 당시 질본을 제치고 청와대가 나섰다가 방역에 실패한 이후 처음부터 끝까지 질본이 중앙방역대책본부를 책임지도록 바뀐 터였다. 현 정부의 잠재의식이 지향하는 정치체제가 무엇인지 확인 시켜준 본보기다.

터키에서 본 이슬람의 권위와 신종코로나를 통해 본 중국 공산당 일당독재의 전횡은 전체주의를 이해하도록 돕는 바탕이다. 굳이 찾아낸다면 이슬람과 공산 일당독재로부터도 긍정적인 면모가 없지 않다. 그러나 혼란한 중동정세와 신종코로나를 맞아 우왕좌왕하는 중국에서 보듯, 위기 때는 자포자기·수직추락으로 질주한다. 모스크에서는 평등한 ‘우리로서의’ 무슬림이 될 수 있지만, 일상생활로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만의 자유와 평화가 가장 먼저다. 한 세대가까이 유럽을 풍미한 전체주의가 한순간 사라진 것은 좋은 역사적 교훈이다.

올해 1월 이탈리아 밀라노에 2주일 정도 머물렀다.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흔적을 좇기 위해서였다. 무솔리니는 전체주의로 표현되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체제를 처음으로 구축한 독재자다. 무솔리니의 전체주의는 특히 ‘파시즘(Fascism)’이라는 말로 불렸다. ‘묶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기원한 말이다. 무솔리니에 앞서 당시 이탈리아 사회주의 정당들이 단결을 뜻하는 구호로 사용했다.

악취미라 말할지 모르지만, 역사적 인물들이 남긴 최후의 장소를 즐겨 찾는다. 특히 잔인하고 살벌한 방식으로 끝난 역사적 인물의 흔적이 관심사다. 최고 절정기가 아닌, 마지막 무대에 주목한다. 이미 다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 최후의 무대인 파리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 현장 같은 곳이 본보기다.

광장 한복판에서 이뤄진 ‘부관참시’


▎1936년 10월 28일 무솔리니(앞줄 왼쪽 둘째)와 나치 독일 관계자들이 이탈리아 파시즘 탄생 14주년을 맞아 특유의 경례 자세를 취하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무솔리니의 최후의 모습은 ‘18세 이하 불가’라는 조건을 달만큼 잔인하다. 1945년 4월, 이미 전황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나치의 괴뢰로 전락한 무솔리니는 자신의 신변도 보호하지 못할 만큼 추락한다. 4월 27일, 파시스트에 반대한 공산당계 투사들이 밀라노 북쪽으로 도망치던 무솔리니를 체포한다. 하루 뒤인 4월 28일 무솔리니와 애인 클라라 패타치(Clara Petacci)를 비롯한 파시스트 수뇌부 수십 명이 총살된다. 이후 밀라노로 옮겨져 거꾸로 매달린 채 이탈리아인 모두에게 전시된다. 매달려 있던 중에도 갖가지 린치에 시달리다가 불에 태워진 독재자가 무솔리니다.

무솔리니 최후의 날에는 이탈리아인 모두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피의 역사가 스며있다. 독일 나치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무솔리니 총살 이틀 뒤인 4월 30일 독일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한다. 무솔리니가 어떤 식으로 최후를 맞이했는지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동반 자살한 것이다.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전체주의 독재자 두 명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구상에서 추방된 셈이다.

무솔리니 최후의 장소로 들른 곳은 밀라노 로레토 광장(Piazzale Loreto)이다. 밀라노 중앙역에서 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중앙역에 모여든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의도적으로 로레토에 매달았다고 볼 수 있다. 역사 교과서에 따르면 무솔리니가 총살된 지 하루 뒤 로레토 광장 내 주유소에 전시됐다고 한다.

로레토 역에 내려 바깥으로 나가자 곧바로 넓은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초대형 로터리를 중심으로 12개의 도로가 복잡하게 연결된 곳이다. 밀라노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황량한 분위기의 공간이다. 무솔리니를 매달았다는 주유소는 도시개발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다. 행인과 도로변 가게에 들러 어디가 주유소 자리이지 물어봤지만, 로레토가 ‘무솔리니 최후의 장소’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로레토 지역은 이민자들의 집단 거주지다. 이탈리아 역사와 무관하고 무심한 사람들이 무솔리니 최후의 무대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무솔리니가 밀라노 주유소에서 부관참시 된 것은 무솔리니만이 아닌, 이탈리아 전체주의와 밀라노라는 도시의 비극이기도 하다. 밀라노는 현재는 물론, 당시에도 전 유럽에서 손꼽히는 산업도시였다. 북부 유럽으로 연결되는, 돈·인재·지식·정보의 집산지 역할을 했다.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깊었다. 산업도시 밀라노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예비역 베테랑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곳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무솔리니는 이곳 밀라노에서 파시즘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 200여 명으로 이뤄진 ‘전투 파쇼’(일 파르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가 그 시작이다. 이들은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을 대상으로 한 정치 테러를 공공연히 벌이게 된다. 공산주의 혁명을 두려워한 정부도 이런 폭력을 수수방관한다. 그러는 새 전체주의를 통해 모두 평등하게 하나로 나아가자는 무솔리니의 슬로건에 많은 이들이 넘어가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본 전체주의의 비용


▎초기 파시스트 당사로 활용된 밀라노의 건물. 1970년대까지 활용된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 (현 서울시 의회 본관)과 닮았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결국 불과 3년 뒤인 1922년 10월 31일, 무솔리니는 역대 최연소 이탈리아 수상에 오른다. 10월 28일부터 양일간에 걸쳐 무솔리니의 파쇼 친위대인 ‘검은 셔츠단’이 로마로 진군했지만, 누구도 그들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영광스러운 로마’의 복원을 내세운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에게 2차 세계대전은 ‘혁명’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밀라노 중심부에 위치한 아카데미아 암브로시아(AccademiaAmbrosiana)는 필수 관광코스로 정평이 난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과 자작 노트가 보관된 곳이기 때문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사(黨舍)로 쓰인 건물이 암브로시아 바로 뒤에 들어서 있다. 현재는 국립경찰서 밀라노 지부로 쓰이고 있다. 무솔리니를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고,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출발지였던 밀라노가 무솔리니 최후의 무대로 돌변한 셈이다. 무솔리니를 구국의 영웅으로 받들었던 밀라노 노동자는 무솔리니 시신을 몇 번이나 참살한 주역으로 변한다.

이 당사 건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울 태평로 시청 맞은편 서울시의회 건물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부민관’으로 불린 서울시의회 건물은 1970년 대까지 대한민국 국회 건물로 쓰인 곳이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의 추측이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일제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사를 베껴서 만든 건물이 아닐까 싶다. 이미 철거된 구(舊) 중앙청 건물에서 보듯, 일본의 이탈리아 건축물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1910년대 중앙청 건립에 쓰인 대리석 등 많은 재료가 이탈리아에서 직수입된 것이다. 건축 양식과 기법의 상당 부분도 이탈리아에서 들여왔다. 이탈리아와 일본과의 정치적 관계도 깊어가던 상태에서, 파시스트 당사를 모델로 한 건물이 서울에 세워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슬람의 절대적 권위, 공산 일당독재의 찬란한 이데올로기와 잔인한 무력행사, 언론통제와 삼권분립을 무시한 절대 독재자 무솔리니. 현재 진행 중이거나 이미 끝난, 어쩌면 가까운 시일에 한국에서도 직면할 수 있는 반민주·반역사·반국민적 체제다. 전체주의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피하려는 시대착오 이념론자들의 몸부림이 한층 더 거세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결국 언젠가는 주유소에 매달릴 무솔리니 운명이다. 거기까지 가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가 관건이다. 길어지는 만큼 국가적 국민적 고통이 깊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한국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 선택이 바로 눈앞에 드리워져 있다. 결론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아니 스스로 주장할 주권이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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