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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책과 사람’(5)] 미래대학 ‘미지행’ 만드는 문학평론가 함돈균 

세상에 없던 교육 실험, 시위 문화도 디자인한다 

스탠퍼드대 폴 김 부총장 등과 [교육의 미래, 컬처 엔지니어링] 펴내
사회의 아름다운 변화 이끄는 교육, 안상수 디자인 학교와 협력 모색


▎문학의 좁은 울타리를 뛰쳐나와 시민적 품성을 기르는 미래 대학 ‘미지행’ 설립을 추진하는 평론가 함돈균씨. 기존 대학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이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 사진 : 임안나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영화감독 봉준호만큼이나 창의성 반짝거리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가 우리에게는 많다. 1973년생 문학평론가 함돈균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가 펴낸 [사물의 철학](2015년) 같은 책이 여운을 남겼다. 인터넷·넥타이 등 주변 어디에나 널린 ‘물건’들을, 쓸모가 사라지면 폐기처분되는 단순 도구의 운명에서 구해내 인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목록의 일부로 격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대 HK 연구 교수 등을 지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학자이자 평론가에게 주어진 일반 경로를 따르는 줄 알았다. 근황을 알 수 있는 페이스북(페북은 문학 기자가 따끈한 문단 소식을 건질 수 있는 주요 소스다)에 시민행성·미지행, 알쏭달쏭한 이런 표현들을 올리는가 싶더니 한국의 교육 개혁을 부르짖는 책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를 2018년 펴냈다. 미국 스탠퍼드대 교육대학원 부학장이자 최고경영자인 폴 김과 함께다. 함씨가 묻고 폴 김이 답하는 형식의 이 책 서문(‘두 개의 모험-나는 왜 이런 대화를 기획하게 되었나’)에서 함씨는 이런 얘기를 했다. 2012년 대선에서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어 둘로 쪼개진 투표 결과를 보고 ‘사고 자동화’, ‘생각하지 않는’ 사회의 징후를 읽었다고. 그런 현실을 바꾸려다 보니 결국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 개혁을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이다. 이런 함씨의 노력을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에 다시 빗대 영화의 유명 대사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참으로 시의적절하다”를 이렇게 비틀어보면 어떨까. “함돈균씨, 당신은 생각이 다 있군요”, “이런 일에 시의적절이란 있을 수 없지요(언제 논의를 시작해도 늦은 일이라는 뜻이다)”.

그런 함씨가 지난 1월 다시 폴 김과 호흡을 맞춰 [교육의 미래, 컬처 엔지니어링]을 출간했다. [티칭코칭]의 후속편인데 아시아개발은행에서 저소득 국가를 지원하는 일을 해온 전·현직 김길홍·나성섭씨가 가세했다. 특별히 ‘엔지니어링’이라는 공학 냄새 물씬한 표현을 써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는 인재 교육의 세계적 현장, 트렌드를 살펴보고 한국이 해야 할 일을 짚어보자는 취지다.

2012년 대선에서 둘로 갈린 민심 보고 교육 개혁에 관심


▎왼쪽부터 함돈균씨가 펴낸 [얼굴 없는 노래](2009년) [예외들](2012년) [사물의 철학](2015년)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2018년) [교육의 미래, 컬처 엔지니어링](2020년).
그런데 교육 관련 책 출간은 문학 울타리를 벗어난 함씨 실험의 일부일 뿐이다. 시민행성·미지행 모두 실은 교육자, 학부모, 우리 사회 전체가 근본적인 해결에 손 놓다시피 하고 있는 교육 문제를 직접 건드리자는 취지다. 사회를 바꾸는 기획력 있는 사람들을 제도 교육에만 맡기지 말고 내 손으로 배출하자는 거다. 특히 미지행은 단순 운동 차원에서 벗어나 4년제 혹은 5년제의 대학교 형태를 추구한다. 교육부인가 시스템 안에 포함될 가능성은 없지만 실제로 설립될 경우 기존 대학과 같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 2월 8일 서울 종로구 옥인길, 인왕산 자락에 있는 함씨의 아지트 살롱인텔리겐차를 찾았다. 110년 전쯤 지어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건물을 개조한 곳이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들이 직사각형 실내의 한쪽 벽면을 이루는 특이한 공간이다. 포크 가수 고(故) 조동진의 여동생인 가수 조동희씨 등이 함께 사용한다. 그래서 살롱인텔리겐차.

화강암 반대편 벽면에 ‘인문고전강의시리즈 Ⅱ’라는 제목의 수강생 모집 포스터가 붙어 있다. ‘오늘의 눈으로 서양문학·현대성의 기원, 그리스비극을 읽다 2’가 부제. 물론 함씨가 강사다.

함씨가 세우려는 대안 대학 미지행은 어떤 모습일까. 말 많고 탈 많은 한국 사회에서 과연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을까.

국문학 전공인데 그리스 고전 비극 강의를 한다. 일종의 대안 대학을 세우겠다는 건 더 큰 모험인데.

“한동안 문학 아닌 엉뚱한 걸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평론 활동을 잘 안 하니까 문학권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 같다. (웃음) 나는 첫 번째 문학평론집 [얼굴 없는 노래](2009년)를 문학과지성사에서, 두 번째 평론집 [예외들](2012년)을 창비에서 냈다. 요즘이야 시집·소설책이 이념적으로 상반된 문지나 창비 가운데 어디에서 나왔느냐를 따지는 관행이 사실상 사라졌지만 자기 의견을 주관적으로 개진하는 문학평론에서는 아직까지 구분선이 존재한다. 더구나 내가 두 평론집을 낼 때만 하더라도 두 출판사에서 하나씩 내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게 가능했던 게, 한국 문학에서는 미학적 전위와 정치적 전위가 서로 같은 편이 아니라고 여기고 갈등하고 싸우는데 나는 그 둘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문학 안에서 그걸 해보고 싶었고 문학 바깥세상에서도 그런 걸 개진해보고 싶었다. 내가 사회디자인 학교라고 부르는 미지행은 그 사회적 버전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표현 형식이 아름답지 않거나 우아하지 못한 사례가 한국 사회에 많은데 내용과 형식 모두 진화된 버전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런 관점에서 작가 이상(1910~1937)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모더니스트 이상의 낯선 말들이 정치적으로 전위성도 갖는다고 봤다.”

미학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진보적 문예물들이 떠오르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들 수 있나?

“특정 작품이나 작가를 거론하기는 좀 그렇지 않나. 어쨌든 그런 표현물이 많이 쌓이면 그것이 하나의 문화, 컬처가 될 텐데 그런 상황이 우리 사회가 진화하는 데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냐. 나는 아니라고 봤다. 진보적인 내용과 아름다운 형식, 둘을 결합시키려는 지향 같은 게 필요하다. 그런 목표점을 단순히 미(美)라고 하면 잘 안 와닿는다. ‘멋있다’는 표현이 괜찮은 것 같다. 멋있다는 표현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대상이 아름답다는 뜻도 되지만 현재의 통속성을 넘어서는 어떤 가치를 지향한다는 얘기도 되는 것 같아서다.”

미학적 전위는 정치적 전위와 연결될 수 있어


▎함돈균씨는 “대학은 학문 세계와 삶의 현장 사이를 잇는 실용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 사진: 임안나
미지행은 구체적으로 어떤 걸 가르치나?

“기존 대학들은 그저 현재의 사회 형태들을 단순 재생산하는 기제일 뿐이다. 가르치는 사람도 들어오는 사람도 현실에 적응하는 산업예비군 양성에만 관심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사회를 바꾸는 아름다운 생각들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런 생각이 있어도 현실 속에서 구현해내지 못한다. 미지행은 우리 사회가 진화하는 데 필요한 제안 같은 거다. 사회기획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양성하는 대학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대안 대학이겠다.

“대안 대학이라기보다는 미래 대학이다. 사회학과·정치학과, 이런 식으로 구분된 현행 대학 시스템은 관료 체계와 다를 게 없다. 관료적으로 분권화되어 있고 기능 중심으로,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교수들이나 학생들의 사고방식도 물화(物化, reification)돼 있달까. 시스템에 끌려 자동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현실을 고치기보다 규모가 작더라도 새로운 대학 모델을 만들자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쉽지는 않은데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솔직히 돈이 없어서다. 기존 대학들 운영방식을 보면 물적·인적 토대가 정말 엄청난데, 웬만한 프로젝트 하나에 투입하는 비용이면 내가 생각하는 학교 3년은 굴릴 수 있다. 그런데 대학에 있는 사람들은 대학을 바꾸는 방법을 모른다. 나는 알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직접 실천에 옮기는 건 또 다른 일인데.

“한국의 대학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안 그래도 많은데, 나는 그런 비판적인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공허하게 느껴진다. 요즘 기업은 뜻 맞는 몇 명이 작더라도 반짝거리는 소셜 벤처를 하나 만들면 아이디어의 내용에 따라 얼마든지 확산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려면 새로운 실험이 자꾸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 문화 풍토에서 그런 실험이 쉽지는 않겠지만 작은 성공 케이스라도 하나 만들고 싶은 거다.“

고교 졸업 후 1년간 숨 돌리는 갭이어 도입


▎사진 : 임안나
미지행은 미래디자인 행성의 줄임말이다. 생전 함씨를 아꼈던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이 제안한 이름이라고 한다. 디자인이 뭔가 짓는 일이니까 이를 한국말로 살짝 바꿔 미지행이라고 최종 결정했다. 함씨가 동지라고 부르는, 건축가·IT 디자이너·컨설턴트·커뮤니티 디자이너 등 10여 명이 교수진이다. 학교의 정식 출범 일정은 정해진 게 없지만 지난해 여름 슬며시 시험 가동했다. 수업료 180만원을 내는 3개월 코스였다. 과정이 무척 타이트했다고 한다. 일반 대학에서 1년 동안 배울 내용을 3개월 안에 구겨 넣다 보니 20명 등록 학생들 사이에 “스무 살 넘어 이렇게 빡센 경험은 처음”이라는 비명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일반 대학의 단과대학에 해당되는 유닛이라는 단위로 학문의 성격 영역을 구분해 모든 학생이 같은 수업을 듣는 단일 코스다. 가령 인문·사회과학 영역은 생각 유닛, 건축·도시 관련은 공간 유닛, 기술 영역은 도구 유닛에서 가르치는 식이다. 억압되기 쉬운 인간의 신체를 자유롭게 하자는 취지의 몸 유닛은 무용가 안은미씨가 디렉터를 맡았다.

함씨는 “우리 프로그램 안에는 시위디자인도 있다”고 했다. 청와대 앞 같은 곳에 찾아가 1년 내내 자기주장만 목청껏 해대는 게 우리 시위 문화인데, 시위도 일종의 사회적 대화로 보고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효과적인 대화 전략, 그러니까 시위 전략을 짜보자는 거다.

정식 출범하는 대학의 학제를 1+3년제나 1+4년제로 구상 중인데, 이 역시 미지행의 노림수다. 여기서 ‘1’은, 고교 졸업과 대학 진학 사이에 끼어 있는 선진국들의 1년 단위 갭이어(gap year)에 해당된다. 학생 스스로 장차 뭘 하고 싶은지 자신의 욕망을 읽어내지 못하고 점수 맞춰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다 보니 인생 자체가 마구 흘러가버리는 우리의 딱한 현실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일종의 삶의 시간, 여유, 개방성 같은 걸 도입하자는 취지다.

뭔가 다양하게 배운다는 건 알겠는데 졸업생들이 학교 바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기술 발달 속도가 빨라질수록 신기술이 야기하는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새 기술이 등장하면 종래 기술 체제 안에 살던 노동자들이 무척 당황하게 되는데 그런 갈등을 해결할 방안이 신기술 개발과 동시에 디자인되지 않으면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나도 사회가 절대 진화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는 기술 도입에 따른 갈등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불거진 다음 행정가들이 그에 대해 임기응변식으로 접근한다. 우버나 타다 같은 차량 공유 사업이 그런 경우 아닌가. 일종의 문제 해결 원칙이나 매뉴얼 같은 게 있어야 하고 그 매뉴얼의 바탕에는 철학적인 근거나 인문학적 소양에서 나오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 학문이 하는 일이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실은 그런 실천과 학문 체계 사이에 너무나 큰 단절이 있는 상태다. 학술 논문이 사회적 담론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본다. 산학협력 시스템 같은 게 그런 형식인데 아직까지는 미약한 것 같다. 현장과 학문의 세계를 연결하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그럴 수 있도록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학교를 만드는 게 내가 하려는 일이다.“

한국은 수십만 명의 관료 조직이 행정을 집행하는 인구 5000만의 나라다. 미지행이 실제로 유능한 인재를 배출한다 해도 전체 사회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지 않을까?

“한 학년에 50명씩, 4개 학년 합쳐 200명 정도 되는 단과대 규모를 생각하고 있다. 미미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세상에 실질적으로 어떤 임팩트를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걸 고려한다면 실행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미지행은 우리 삶의 세부, 여러 가지 삶의 형태가 이뤄지는 현장들에서 지금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 제안하는 역할이 목표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함씨의 문제의식은 결국 우리에게 여전히 시민의식이 부족하다, 그래서 시민적 품성을 기르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런 생각은 그의 새 책 [교육의 미래, 컬처 디자이너]에 충분히 소개돼 있다.

책의 내용 가운데 한국 사회를 “두려움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해한다”고 한 폴 김의 발언이 특히 가슴에 와닿는다. (233쪽) 사회안전망이 충분치 못하니 각자 살길을 마련하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 그러다 보니 평균적인 인간상, 획일적인 삶의 패턴을 따라가지 못해 안달인 사회가 됐다는 얘기다. 의문을 품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학생을 배출하는 우리 교육 현실은 그런 문화의 최종 산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지행의 행로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함씨는 인터뷰에서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씨가 설립한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파티)와 미지행의 제휴 가능성을 비쳤다. 파티의 도움을 받아 미지행을 출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성격, 추구하는 방향에서 파티와 미지행은 공통 요소가 많다고 했다. 새로운 교육 실험이 조만간 현실화되는 모양새다.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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