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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반도체산업의 미래] ‘메모리반도체 1등’ 삼성전자의 새로운 도전 

“시스템반도체 시장 진입해 인텔과 붙는다”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성공에 이어 시스템반도체 시설 확충
과감한 의사결정 능력, 우수한 제조 공정기술에다 글로벌 공급망 활용


▎이재용(오른쪽)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9년 4월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시스템반도체 비전을 선언했다. / 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1983년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가 반도체 강국으로 떠오르리라 예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반도체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첨단 제품이었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만 생산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겨우 앞서기 시작한 일본 기업들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성공 가능성을 제로에 가깝다고 봤다. 기술력이 부족하고 내수시장이 작으며 전후방산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의 반도체 생산업체인 도시바, NEC, 히타치, 미쓰비시 등은 가전에서부터 첨단 전자기기까지 다양한 전자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방산업에 해당하는 수요시장이 상당한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다수의 기업이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으므로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와 소재 기업의 참여 기회도 많아 후방산업도 함께 발달할 수 있었다. 일본 기업은 반도체 제조기술 발달로 고성능에 저가의 DRAM(Dynamic Random Access Memory)을 세계 시장에 공급했다.

이러한 배경이 없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진출 선언은 무모한 도전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983년 12월, 삼성전자는 64K D램을 자체 개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어 10년이 지나지 않은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기술 면에서 선진국을 추월했다. 그리고 2013년부터 세계 시장에서 우리나라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일본을 추월했고, 미국에 이은 2위가 됐다.

한국 반도체산업의 기원


2018년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액은 1267억 달러였다. 처음으로 수출 1000억 달러를 돌파했고,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9%를 기록했다. 반도체 호황이 끝나고 메모리반도체 단가가 급격히 하락한 2019년에도 반도체 수출은 939억 달러를 기록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7.3%로 여전히 높았다.

반도체가 이렇게 주목받게 된 건 수출 비중이 높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기술로 오랜 기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제품, 메모리반도체의 존재 때문이다. 메모리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능을 가진 전자부품이다. 대표적인 품목으로 D램과 낸드플래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메모리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다. 삼성전자는 D램과 낸드플래시 두 제품 모두 세계 매출 1위 기업이다. SK하이닉스는 D램은 2위, 낸드플래시는 4위로 상위권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매출을 합하면 D램은 72.4%, 낸드플래시는 49.5%다. 우리 기업이 세계에서 소비되고 있는 메모리반도체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1965년 미국의 코미가 설립한 고미전자산업에서 시작되었다. 코미는 저렴한 인건비에 견줘 양질의 노동력을 보유한 한국에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조립가공 공장을 합작회사 형태로 설립했다. 당시 반도체 조립 작업은 수공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미국의 반도체 생산 기업들은 효율 높은 원가구조를 갖추기 위해 핵심 기술이 필요한 전공정(웨이퍼를 가공하는 단계)은 미국에서 진행하고,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낮은 노동 집약형 조립 작업(후공정)은 인건비가 저렴한 아시아로 이전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모토로라, IBM 등의 기업들도 한국에 조립가공 공장을 설립했고 1980년대까지 한국은 미국 반도체 생산기업들의 조립가공 공장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 양성된 인력과 습득한 기술이 한국 반도체산업의 초석이 됐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이 본격적으로 자립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우리 기업들은 부가가치가 낮고 발주처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후공정에서 벗어나 반도체를 직접 제조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당시 메모리반도체는 일본이 미국을 능가하며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를 선택한 것은 거대한 시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메모리반도체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제품이 거의 공통규격이므로 대량생산이 용이하고 경쟁은 치열하지만, 시장 진입은 시스템반도체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후 우수한 인력을 바탕으로 제조공정 혁신을 지속하면서 미국, 일본, 유럽의 메모리반도체 기업들이 하나둘 시장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뒤를 SK하이닉스가 뒷받침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64K D램 개발 이후 우리나라가 메모리반도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자 미국과 일본 기업은 한국을 견제하면서 기술 이전을 기피했다.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하기 어려워지자 우리 기업의 성장에 제동이 걸리고, 자립적 기술력을 높여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반도체 생산 자립기술 개발에는 막대한 비용 투입이 필요하므로 기업 단독으로 감당하기에 위험부담이 매우 컸다. 따라서 1986년 5월, 주요 3사인 삼성반도체통신(삼성전자), 금성반도체, 현대전자가 ‘한국반도체연구조합’을 결성해 4M D램 공동개발사업을 시작했다. 우리 정부도 공동개발 사업에 참여하면서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메모리반도체 집중 육성으로 방향을 잡게 됐다.

우리 정부와 기업이 메모리반도체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첫째 성공 요인은 과감한 의사결정 능력에 있다. D램 시장에서 미국, 일본 등 선도국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시장 진입을 결정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반도체 경기가 불황으로 적자를 기록할 때도 과감한 의사결정을 통해 연구개발 투자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경쟁기업보다 빠르게 반도체 성능 향상이 가능했고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둘째 성공 요인은 우수한 제조 공정기술 능력이다. 메모리반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수율 향상과 미세화 전환은 제조 공정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메모리반도체 생산기업이 직접 제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제조 장비를 사용해서 반도체를 생산하더라도 최종 제품에 차이가 나는 것도 제조 공정기술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메모리반도체 생산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므로 진입장벽이 높아 신규 사업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만, 중국 기업이 수년째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의 메모리반도체 상용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을 보면 자금보다는 제조 공정기술을 따라잡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성공 비결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약점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후방산업의 부진이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조립가공을 시작으로 기술을 습득했으므로 반도체 제조 장비와 소재 산업이 발달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도 반도체 생산이 가능했던 것은 반도체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 등에서 제조 장비와 소재를 조달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도체 생산 후발주자로 선도국의 기술을 도입하는 단계에서는 제조 장비와 소재를 직접 개발하는 데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메모리반도체는 제품 특성상 미세화가 진행되면서 제품의 성능이 개선되고 수익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경쟁기업에 비해 빠른 속도로 미세화를 진행하는 것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며, 메모리반도체 생산기업의 최대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제조 장비와 소재도 함께 빠른 속도로 개발돼야 하는데 우리 기업들은 시작 단계부터 참여하지 못해 기술 습득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반도체 생산기업의 제조 장비 및 소재의 해외 의존도는 낮아질 수 없었다.

수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 경영의 입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글로벌 공급망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업 관점에서 제조 장비 및 소재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것은 반도체산업 생태계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반도체 제조 장비와 소재에 대한 국산화 비율을 높여야 할 필요성이 지속해서 제기됐다. 지난해 7월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로 인해 불화수소산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반도체 생산기업들은 비상사태에 직면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기업의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제조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율을 높여야 하는 필요성이 재확인됐다. 또 국내 생산이 어려워 해외에서 조달하는 경우라도 공급처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

메모리반도체는 제조공정이 경쟁력의 핵심이다. 기업들은 설계부터 제조, 마케팅까지 모든 공정을 수행하고 있다. 1980년대 일본 기업에 밀려 메모리반도체에서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반도체)로 사업 영역을 전환한 인텔은 자사가 보유한 시스템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지하고 있으나 새롭게 등장하는 기업들은 회로 설계와 생산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제조공정이 복잡해지고 첨단 장비 도입이 필요해지면서 반도체 제조 공장을 건설하는 데 대규모 자본이 필요하게 됐다.

자본력은 부족하지만 우수한 반도체 회로 설계기술을 보유한 기업(팹리스)들이 설계만 전문적으로 하고, 제품 생산은 제조 전문업체(파운드리)에 위탁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전자기기의 휴대성이 중시되면서 시스템반도체도 미세화 공정이 중요시됐지만 본디 시스템반도체는 미세화 공정이 메모리반도체보다 늦게 진행됐다. 왜냐하면 시스템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보다 복잡한 구조로 돼 있으며, 성능을 좌우하는 요소는 미세화가 아니라 반도체가 수행하는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모리반도체와 같이 빠른 속도로 제조 장비를 교체하지 않아도 되는 파운드리는 거대한 자금을 투입해 생산설비를 구축해도 이를 회수할 시간이 충분한 것이다. 팹리스는 제조 공장 설립에 대한 부담이 없고, 파운드리는 회로 설계를 위한 고급인력 확보 등의 부담이 없어서 각자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며 발전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파도를 넘기 위해


▎최태원(오른쪽) SK그룹 회장이 SK하이닉스 충북 청주공장을 방문해 낸드플래시 생산라인을 살펴보고 있다. / 사진:SK그룹
그러나 우리 기업은 메모리반도체에 모든 자원이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에 편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메모리반도체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시스템반도체도 육성하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시스템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보다 가격 변동 폭이 작고 수익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시스템반도체에는 중소 반도체 기업이 참여할 수 있다. 시스템반도체 개별 시장은 규모가 작아서 대기업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어렵다. 대기업과 충돌 없이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시장이다.

메모리반도체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시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데는 PC 보급의 영향이 가장 크다. 최근 PC 보급이 포화상태로 수요가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PC는 메모리반도체 수요에서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메모리반도체 수요를 견인한 것은 스마트폰이다.

최근 메모리반도체 수요를 견인하고 있는 것은 기업용 데이터센터다. 기업용 데이터센터는 실시간 자료 검색과 데이터 활용을 위한 서버용 D램을 사용하고, 장기간 데이터 보관을 위해 사용하는 저장장치는 물리적 공간 확보 등을 이유로 낸드플래시를 이용한 SSD로 대체하고 있다. 즉, D램과 낸드플래시를 대량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 메모리반도체 수요를 견인하고 있는 주요 산업은 PC, 스마트폰, 데이터센터지만 향후 새로운 산업이 늘어날 것이다. 이에 따라 메모리반도체의 종류도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개발 중인 AI(인공지능)는 데이터센터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향후 어떤 방향으로 개발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데이터센터에 보관하는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하나의 AI 칩 속에 탑재돼 네트워크망에 접속할 필요가 없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이런 신제품에 사용되는 것은 지금까지 언급한 메모리반도체와는 다른 제품일 것이다. 우리 기업은 새로운 메모리반도체의 등장에도 대비해야 한다.

- 김양팽 한국산업연구원 신산업연구실 전문연구원 ypkim@kiet.re.kr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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