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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7)] 역사 전면에 나선 이방원과 그 집행자들 

평민 출신 두 장수 ‘피의 쿠데타’ 앞장 

이방원 “손발 묶여 살육 당할 순 없다”… 주저하는 아버지 대신 반격 지휘


▎개성에 자리한 북한 국보 18호인 표충비에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의 석비가 두 개 세워져 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마침내 이방원이 결단을 내렸다.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않지만, 그러나 정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조선건국은 이방원의 이 결정 때문에 이뤄졌다.

이방원은 당시 26세 청년에 불과했다. 이 젊은이가 역전 노장인 아버지를 대신해 이성계 집단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이방원은 이성계 집단의 실질적 수장이 됐다. 그것은 또한 국가의 운명과 역사를 바꾼 결정이었다. 이로써 이방원은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했다. 이성계의 아들로부터 역사적 인물로 뛰어오른 것이다.

이방원은 휘하 인사인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말했다. “이씨가 왕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에게 나쁜 평판으로써 뒤집어씌울 것이다. 후세에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은 없는가?”

이성계의 정치적 순진함


▎1920년대 개성의 선죽교 풍경.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는 바로잡는 것(政者正也)이라고 한다. 노나라의 집권자 계강자가 묻자 공자가 한 대답이다. 이스톤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social values)이라고 정치를 정의한다. 두 주장은 정치를 퍼블릭 서비스(public service)로 보고 정치가와 국가의 역할을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적국과의 전쟁이나 정적 사이의 경쟁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념이나 도덕 이전에 우선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일이다. 이른바 진영논리로서,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설명이다. 1392년 4월 4일, 이방원에게 정치는 정확하게 슈미트의 정치였다. 이방원은 거사 명분으로 국가도 왕실도 아닌 이씨를 전면에 내세웠다. 왕후장상에 씨가 없다는 만적과 정탁의 인식과 같다.

이씨가 고려왕실에 공로가 있다는 말은 신돈의 후예인 우왕, 창왕을 제거하고 공양왕을 세운 것을 말한다. 이른바 비왕론이고 중흥론이다. 이성계가 왕씨가 아닌 가짜들을 제거하고, 왕씨의 혈통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소인의 모함이란 정몽주를 필두로 한 이색, 우현보 등 고려수호파의 반격을 말한다. 비왕론과 중흥론은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의 집권 명분이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우왕, 창왕이 아니라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사후 결과는 더 참혹하다. 조선이 건국되자 모든 왕씨들이 바다에 수장됐고, 고려왕조를 지지한 명문거족들과 수많은 정치가가 제거됐다.

하지만 낙마 후 이성계의 행동을 보면, 그는 진심으로 중흥론을 믿었는지 모른다. 왕조의 운명을 좌우할 막강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끝까지 무력이 아니라 하늘에 맡겼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왕이었지만, 왕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이 상황이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이성계는 정치적으로 순진한 인물이다. 이 상황은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인 것이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하늘 아래 두 명의 왕이 있을 순 없다. 중흥론은 마치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치장한 분칠 같은 것이다.

이 모순과 위선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에 빠졌는가? 공양왕이 가장 불쌍한 인물이었다. 중흥론의 이데올로그였던 정몽주는 처음 전제 개혁 때는 주저했고,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까지 그 신념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윤이·이초의 옥사에 이르러 마침내 그것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노선을 전향했다. 그것은 이성계와의 투쟁을 뜻했고, 1392년 4월 이제 그 투쟁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이성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울타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이성계를 대신해 이방원이 나선 것이다. 이방원의 주장은 더는 중흥론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몽주조차 이미 버린 명분이다. 지금 중흥론을 믿는 사람은 단 하나, 아버지 이성계뿐이었다.

이방원은 명분도, 역사도 아닌 오직 생존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버지를 넘어서야 했다. 이성계파에게 결여된 것은 ‘결단’ 하나뿐이었다. 이방원이 그것을 짊어졌다.

이방원의 물음에 조영규가 감연히 앞으로 나섰다.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이방원은 조영규(趙英珪), 조영무(趙英茂), 고여(高呂), 이부(李敷) 등에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정몽주를 치게 하였다. 도당(都堂)으로 불린 도평의사사는 고려말 행정, 군사, 재정 등 국정을 총괄한 최고 정무기관이었다. 집권 뒤 이성계는 도당을 더욱 강화해 왕권을 실질적으로 대체했다. 이때는 정몽주가 도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방원은 정몽주를 도당에서 죽이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정몽주 1인이 아니라 국가 자체에 대한 공격, 즉 쿠데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몽주 암살은 쿠데타였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6호로 지정된 함양 하윤의 부조묘. 하윤은 태종대의 대표적인 정치가였다. /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행동대원으로 나선 인사들을 보자. 선두에 나선 조영규는 무장이었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고려사]에 3회, [조선왕조실록]에 6회 뿐이다. 하지만 정몽주의 살해자로서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 신창 조씨(新昌 趙氏)의 시조로서 평민 출신인 그는 이성계의 사병으로서 군공을 세워 입신했다. 1385년(우왕 11)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로서, 이성계의 휘하로 종군해 함주 일대에 침입한 왜구를 격멸했다. 판위위시사는 왕의 시위와 의장을 담당한 위위시의 3품 장관이다. 평민으로 출발해 이때 이미 고위직에 올랐다. 침입한 왜구는 병선 150여 척의 대군이었다. 당시 동북면상원수 심덕부가 홍원에서 싸웠으나 대패했다. 이에 이성계가 자원해 출전할 때 무장 13인을 대동했는데, 조영규는 상호군 이두란, 산원고여에 이어 세 번째로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왜구를 유인하는 위험한 작전을 수행한 사람도 이 3인이었다. 정몽주를 제거하려고 했을 때, 이방원이 처음 거사를 요청한 인물도 이두란에 이어 조영규, 고여였다. 이성계의 군사집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조영규는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될 때 추대자 명단에 올라 있다. 그런데 이 명단은 동년 8월 20일 개국공신 명단과 거의 동일하다. 즉, 명단은 무작위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이성계파 내 서열에 따라 작성된 것이다. 조영규는 배극렴, 조준, 정도전부터 시작해 22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성계와 사적 연고가 없는 순수 무인 중에는 서열 4위이다. 그는 개국공신 2등에 봉해졌다. 또한 정3품 예의전서에 올랐고, 1395년(태조 4)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는 정2품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추증됐다. 평민으로 시작해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니 입신양명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말 왜구 토벌전에서 세운 뛰어난 전공, 또한 정몽주를 죽이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공로 덕분이었을 것이다.

차원부의 억울한 죽음


▎의덕사(懿德祠). 연안 차씨 시조부터 일족 109인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 평택시 장안동 소재. / 사진:연안차씨종친회중앙회
그런데 조영규는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자 명문거족인 연안 차씨(延安 車氏) 차원부(車原頫, 1320~1398)와 그 일족을 몰살한 음모자 중 1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는 차원부의 동생 차견질(車堅質)의 첩녀이다. 연안 차씨의 시조는 차효전(車孝全)으로,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수레와 군량을 조달했다. 그 공으로 연안(延安)을 본관으로 받고, 대광백(大匡伯)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차씨는 고려 고위직을 배출한 명족거족이 되었다.

차원부의 아버지 차포온(車浦溫)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수종한 연저수종공신이었다. 차원부는 공민왕대에 급제해 간의대부에 이르렀으며 이색, 정몽주와도 교유가 깊었다. 위화도회군 뒤 정국이 혼란해지자 황해도 평산(平山) 수운동(水雲洞)에 은거했다. 차원부는 취향이 고상했다. 은거한 수운동 바위 위에는 매화를 심고, 못 가에는 천 떨기 국화를 심었다고 한다. 15세 연하의 이성계와도 교분이 깊었던 듯하다. 조선 개국 뒤 이성계는 “옛날 내가 서촌(西村)에 사는 그대를 찾아갔을 때 오후가 되어 매우 배가 고파 그대의 마당에 자란 파나물을 배불리 실컷 먹었다.”고 회고했다. 1388년 요동 정벌 논의가 일어나자, 이성계는 이방원과 함께 차원부를 찾아가 자문했다. 차원부가 요동정벌의 불가함을 극력 주장하자, 이성계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사실상 회군을 모의한 것이다. 조선 건국 뒤 이성계는 차원부를 공신에 책봉하고 정언, 판전농시사에 임명했다. 그러나 차원부는 “우리 가문이 대대로 고려를 섬긴 지 이미 500년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왼쪽 옆구리에 금 비늘이 달린 저 혼미한 임금이 여전히 살아있는데, 어떻게 감히 두 마음을 품어 우리 조상들의 충렬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거절했다.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한 뒤, 차원부를 옛 친구로서 불러 별궁에 묵게 했다. 하루에 다섯 번 왕명을 내리고 한 달에 3차례나 특사를 보내자, 차원부도 더 거절할 수 없어 한양에 왔다. 그때 비가 내리자 이성계는 차원부의 손을 잡고 동원(東苑)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매 속에서 파씨를 꺼내 뿌리면서, 예전 차원부 집에서 파나물 먹었던 추억을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손수 이 파를 심어 나의 친구가 머물러 먹게 하려고 하니, 이는 옛날의 뜻을 잊지 않은 것이다”고 말했다. 차원부의 마음을 돌리려는 이성계의 정성은 지극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성계 곁을 떠났다.([국조인물고])

당시 권력자인 하윤, 정도전, 함부림, 그리고 조영규 등은 모두 차씨 가문의 서외손(庶外孫)이었다. 하윤의 외조모는 차포온의 서녀로서, 차원부와는 배다른 형제자매였다. 정도전의 외증조모는 차원부의 숙부 차공윤(車公胤)의 서녀이다. 차원부는 족보를 만들어 해주 신광사에 보관했는데, 그 족보에 적힌 4인의 이름 위에 서(庶) 자를 붙였다. 당연히 네 사람은 깊은 원한을 품었다. 1398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했다. 하윤은 이방원의 최측근이었다. 하윤의 원한을 잘 아는 차원부는 위험을 감지하고, 1398년 9월 15일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향했다. 이때 하윤은 이방원에게 차원부는 “역적 정몽주의 외종형이며,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이방석의 비와 증조부 벌이될 뿐 아니라 지금 역적 정몽주의 잔당과 음모를 꾸미니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몽주는 차원부의 대고모의 외손이다. 이방원의 허락을 얻은 하윤은 이방원의 가별초를 동원해 이성계와 작별하고 개성으로 돌아가는 차원부와 일족 81명을 살해했으며, 족보도 불살랐다.

차원부가 살해된 5일 뒤, 태종은 잘못을 깨닫고 하윤을 꾸짖으며 ‘나의 기(杞)와 재(梓)가 이제 무너졌구나’라고 탄식했다 한다. 기는 소태나무, 재는 가래나무로서 큰 나무를 뜻한다. 태종은 차원부에게 좌찬성을 추증했다. 그러나 차원부의 아들 차안경은 추증 교지를 거절하고 자살했다. 부인 평산 신씨도 거절하자 왕명 불복죄로 처형됐다. 손자 차상의만 달아났는데, 선조 대의 문장가 차천로가 그의 후손이다. 이를 보면 태종은 잘못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후환을 제거한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모든 국가의 건국 과정은 범죄로 이뤄져 있다. 조선건국은 역사적 의미가 크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의 피가 뿌려졌다. 조선건국을 위해서는 정몽주의 피가 필요했다. 이방원이 그 범죄의 기획자였고, 조영규는 그 첫 집행자였다.

조영무(趙英茂)는 조영규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본관이 다르다. 조영무는 한양 조씨로서, 조선 개국공신인 조인옥(趙仁沃)과 조온(趙溫)의 일족이다. 조영무와 조인옥의 고조부는 조지수(趙之壽)이다. 그리고 본관은 한양이지만 실제 태어나고 자란 곳은 이성계와 같은 동북면이다. 두 씨족은 결혼을 통해 인척이 됐다. 조인옥의 아버지는 조돈(趙暾), 큰형은 조인벽(趙仁璧)이다. 조인벽의 아들이 조온이니, 조인옥과 조온의 숙부다. 조인벽은 이성계의 누이 정화공주(貞和公主)와 결혼해 이성계의 자부가 되었으니, 이성계는 조온의 외삼촌이다.

역성혁명은 전주 이씨와 한양 조씨의 합작품


▎경상남도 합천군에 위치한 삼현사. 차원부와 부친 차포온, 조카 차운혁을 모시는 사당이다. / 사진:연안차씨종친회중앙회
시조 조지수는 본래 중국에서 귀화해 함경도 용진(龍津)에서 살았다. 용진은 지금의 문천으로, 영흥 아래에 있다. 조지수의 아들이 악명 높은 조휘(趙暉)이다. 몽고 침입기인 1258년 그는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투항하고 땅을 바쳐 쌍성총관이 됐다. 이 지역은 1356년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단행할 때까지 99년간 몽고의 영토가 됐다. 당시 쌍성총관은 조소생으로 조돈의 조카였다. 조돈은 아들 조인벽, 조인옥과 함께 고려정부에 협력해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조돈은 종3품 예빈경에 임명됐고, 예의판서,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을 호종해 공신에도 책봉되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조인벽도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워 관직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이르렀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도 공민왕의 지시에 따라 쌍성총관부를 회복할 때 내응했기 때문에 종3품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에 임명되고, 1361년 동북면병마사가 됐다.

한양 조씨와 전주 이씨는 몽고 침입기에 친원파로 전향함으로써 동북면의 지배세력이 됐다. 그리고 100여년 뒤 원·명 교체기에 원을 버리고 다시 고려정부에 귀부함으로써 권력 이동기의 위기에 성공적으로 대처했다. 우왕 5년(1379), 조돈이 연로하여 고향인 용진(龍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조인옥이 따라가려고 했다. 조돈은 이를 극력 만류하면서 “우리 가문이 위태로운 시절을 만나 선조의 제사를 보전하는 것이 겨우 작은 터럭과 같았다. 현릉(玄陵, 공민왕)의 애정을 과분하게 입어 온 집안이 보전되었으며 지위도 군(君)에 봉해지게 되었다. 너희 형제의 관직도 모두 현달하였으나 조금도 보답한 것이 없었으니 너희들은 늙은 애비를 걱정하지 말고 왕실에 힘쓰는 것을 마치 내 곁에 있는 것과 같게 하라”고 말했다. 조돈과 이자춘의 관력을 보면 조돈이 앞섰고, 동북면 지역도 실은 100여 년간 한양 조씨의 세력권이었다. 그런데 조인옥의 귀향을 만류한 것을 보면, 조돈 가문은 중앙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조돈의 자평대로 그들의 노력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그 사이 전주 이씨는 1361년 이자춘이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고, 이자춘이 그해 죽으면서 이성계가 그 직위를 이어받았다. 그 후 이성계는 동북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성계의 친병 2000여 명은 여진족을 포함해 이 지역 출신이었다. 그리고 동북면을 거점으로 한양 조씨 세력과 연합해 역성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조영무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고려 왕조에서는 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대 정치가로 성장했다. 역사에 등장하는 그의 첫 기록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행적을 적은 [태조실록] 총서에 실려 있다. 그것이 정몽주를 살해하기 위한 행동대원 명단이다. 그리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의 왕위 추대자 명단에 들어있다. 조영규의 뒤로 15번째로서 명단의 거의 끝자락이다. 이로써 그는 개국공신 3등에 봉해졌다. 평민 조영규는 무용에 의해 이성계의 군사집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던 반면, 조영무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정몽주를 죽이고 이성계를 추대하는 두 가지 행동 때문에 명실공히 조선왕조의 지배집단의 일원이 됐다. 조영규는 1395년(태조 4)에 죽었지만, 조영무는 1414년(태종 14)까지 생존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꿨다.

조영무의 처음은 심히 미미했으나 그 끝은 장대했다. 이성계는 자기 덕분에 조영무가 겨우 입신했다고 생각했다. 정종 2년(1400) 7월, 상왕 이성계는 “조온은 자부(姊夫, 조인벽)의 아들이고, 조영무는 번상(番上)하는 군사인데, 내가 그 미천한 것을 불쌍히 여겨 혹은 의관도 주고, 혹은 관작도 제수하여, 재상으로서 출전할 때마다 따라다니지 않은 적이 없어 드디어 개국공신이 되고, 지위가 경상(卿相)에 이르렀으니, 모두 나의 덕이다”라고 말했다.([정종실록] 2년 7월 2일) 조영무는 조인옥과 멀지 않은 친족 간이었지만, 첫 출발은 조영규처럼 거의 평민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선 개국 뒤 조영무는 태조 3년 종2품 상의중추원사, 태조 6년 충청도 도절 제사를 역임했다. 이 직위들은 대체로 군대의 통제나 지휘를 담당한 직으로서, 왕조에 대한 충성이 확실해야 했다.

조준·권근과 어깨 나란히 한 조영무


▎경기도 광주 퇴촌에 소재한 조영무 사당.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조영무의 삶은 이성계를 만나 한번 바뀌어, 일반 평민에서 무인이 됐다. 그리고 이방원과 만나 단순한 무장에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1392년 4월 4일, 정몽주를 죽이는 일에 자원함으로써 조영무는 이방원과의 만남을 운명으로 만들었다. 이지란조차 나서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1392년 8월, 이성계가 이방석을 후계자로 정했을 때 대부분의 측근이 이방원을 떠났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했다.

1398년(태조 7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석이 세자로 확정되자 정도전, 남은 등은 이방원을 제거하고자 했다. 황희의 회고에 따르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방원이 “단기(單騎)로서 동북 방면으로 피해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조영무가 태종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면서 만류하였다”([세종실록] 20년 9월 25일 )고 한다. 당시 이성계가 중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자, 친이방석파는 이방원 등을 제거하고자 왕명으로 입궐하게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궁궐에서 빠져나와 본저가 있던 준수방 동리 입구의 군영 앞길에 멈춰 휘하 인사들을 불렀다. 준수방은 지금 종로구 통인동, 옥인동 지역으로, 경복궁 서쪽 영추문 밖이다. 이때 나선 인사는 이숙번과 장사 2명, 이성계의 3남 익안군 이방의 부자, 이성계의 맏사위 상당군 이백경 부자, 이성계의 4남 회안군 이방간 부자, 그리고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서익, 문빈, 심귀령 등이었다. 실록은 이거이 등 6인을 “정안군에게 진심으로 붙좇는 사람”(歸心靖安者)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이방원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 그리고 노복 10여명이 모였다. 이 중 기병은 10여 명, 보졸은 9명뿐이었다. 병기도 이방원의 가노 소근만 칼을 쥐고 노복들은 막대기뿐이었다. 그런데 이방석과 정도전 측은 궁궐을 지키는 금군, 그리고 이방번의 시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방원의 이 무모한 정변이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태종이 집권하자 조영무는 하윤과 더불어 태종의 핵심 중신으로 성장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조영무는 정사 1등 공신에 봉해졌다. 또한 태종 1년 7월, 왕명의 출납과 군사 기무를 담당한 승추부 장관이자 종1품직인 판승추부사에 임명돼 4년간 복무했다. 판승추부사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한다. 그러나 군사적 업무까지 관장했으므로 정치적 비중은 훨씬 컸다. 이처럼 조영무는 태종 치세 초기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태종 4년 2월, 태종은 판승추부사 조영무의 좌차(坐次)를 정1품 영승추부사와 같게 정했다. 모든 면에서 재상의 반열에 올라야 했지만, 승추부의 기무를 맡길 적임자가 없으니 서열만 최고로 올리고 직책은 그대로 담당하게 한 것이다. 조영무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임금에게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태종 5년 1월, 조영무는 마침내 하윤과 더불어 의정부 우정승에 올랐다. 조준이 영의정이었고, 권근은 의정부 찬성사였다. 개국1등공신 남재는 병조판서였다. 조영무는 눈부시게 약진했다. 고려 말에 조영무가 권근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을까? 권근의 가문은 권보 이래 고려 최고의 명족이었다. 더욱이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였던 권근의 학문적 명성도 극히 높았다. 조영무는 조준과도 감히 동렬에 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회군 이후 국가적 개혁은 모두 조준에 의해 추진됐고, 조선 건국 후 왕조의 초석을 닦은 것도 조준이었다. 그에 비해 조영무의 가문이나 학문, 정치적 기량은 참으로 빈약했다.

조영무는 자신을 정승 적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 가뭄이 들자 겨우 4개월 만에 우정승을 사직했다. “신은 오직 외로운 충성[孤忠]만 가졌을 뿐 모든 직사(職事)에 어두운데, 세 임금 동안 장신(將臣)이 되어 오랫동안 추부(樞府)의 중한 임무를 오로지 하였습니다. … 정승으로 삼을 것을 어찌 생각했습니까?” 조영무가 꼽은 자신의 유일한 장점은 외로운 충성(孤忠)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경은 장수의 지략이 크고 깊으며(將略雄深), 조정의 계책이 굳세고 과단하니(廟謀剛果), 몸이 사직의 중함이 되어 이미 안위를 맡았다” 고 높이 평가했다.([태종실록] 태종 5년 5월 11일) 무략이 크고 깊으며, 국정 처리에 과단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무겸전으로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조영무에게는 국정을 폭넓게 이해하는 능력이 없었다. 태종 3년에 개성에 송충이가 창궐해 태종은 1만여 명을 동원해 잡게 했다. 며칠 뒤 태종은 조영무에게 책임 부서인 승추부가 미리 조처를 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이에 조영무는 “신이 재기(材器)가 없어서, 인부가 나올 곳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송충이 잡는 것도 반드시 재기가 있어야 하냐고 반문했다. 이런 단순 업무도 잘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또 태종 11년 장모가 80세로 병사하자 조영무는 태종에게 3일장을 청했다. 조선의 상례에서 대부와 선비의 상기는 3개월이었다. 그런데 장모상을 3일장으로 하지 않으면, 1년간 길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상례가 국가의 중요한 풍속인 점을 들어 불허했다. 그리고 “그가 배우지 못한 까닭에 이러한 청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태종실록] 11년 6월 12일) 태종도 조영무가 재상직을 감당할 학문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영무 역시 그해 윤12월 사직을 청하면서 “신이 배우지 못하여 학술이 없어 대체(大體)에 어두운데, 특히 오래 복사(服事)하여 은혜를 입은 것이 이에 이르렀습니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사사건건 좌정승 하윤과 대립하여 국정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사헌부는 한 사람씩 나와서 정무를 처리해줄 것을 청했다.([태종실록] 7년 6월 1일)

하지만 조영무에게는 큰 장점이 있었다. 첫째, 두려움이 없었다. 1400년(정종 2) 4월, 해주에서 왜구와 싸울 때 그는 “너희가 만일 싸우고자 하거든 속히 싸우고, 그렇지 않거든 빨리 항복하라”고 위협했다. 왜구는 사기가 죽어 모두 항복했다. 무인으로서 사고가 간단명료하고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국정을 판단할 때 과감했다는 평가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둘째, 사고가 실용적이고 사심이 없었다. 1411년(태종 11) 태종은 저화의 통용을 위해 모든 형벌을 저화로 속죄하는 법률을 제정하고자 했다. 또한 호패법도 시행해 그 위반자 역시 저화로 속죄토록 하고자 했다. 화폐 경제학으로 보면, 아무리 강제력을 동원해도 가치가 보장되지 않은 종잇조각이 유통될 리 없다. 신하들도 무리라고 생각했으나 태종의 뜻이 워낙 강경해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정승 조영무는 “저화의 법령도 아직 유행되지 않는데, 또 호패법을 세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명료하게 반박했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인식하고, 태종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생각한 대로 말한 것이다. 현실감각과 직언의 용기는 모두 갖추기 어려운 자질이다. 졸기를 보면, 조영무는 “질실(質實)하고, 바른 소리를 좋아하고, 정사에 임하여 사정(私情)이 없었으므로 임금에게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태종실록] 14년 7월 28일)고 한다.

셋째, 자신만의 가치관이 확고했다. 1412년 12월, 태종은 부평 들에서 사냥하고 귀로에 노량진에서 누선을 탔다. 배 위에서 풍악을 울리고 술을 마시며 즐거움이 고조되자, 태종은 조영무를 돌아보며 말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위무(威武)로서도 굴복시킬 수 없고, 빈천(貧賤)으로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는데, 달래더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위엄으로도 굴복시키지 못할 자는 오직 경뿐이오.”([태종실록] 13년 9월 18일)

이야말로 태종을 가장 사로잡은 자질일 것이다. 건국의 험난한 가시밭길을 밟아 온 태종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바위같이 굳센 충성심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조영무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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