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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6)] 황제도 열외 없는 ‘율령 제국’ 당나라의 탄생 

당 태종, 다문화 제국 질서를 통일하다 

서로 다른 제도·관습 통합·명문화, 농경·유목 아우르는 새 틀 마련
개국공신이 사고 치자 황제 자책 쇼, 특권층 군기 잡고 법치 의지 과시

오랑캐와 중원의 본질적 차이는 혈통보다 제도와 관습에 있었다. 유목사회나 농경사회나 애초에는 관습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당나라가 양쪽의 전통을 통합하여 양쪽 사회 모두에 익숙지 않은 체제를 빚어내는 과정에서 반대한 성문법 체계를 갖춘 ‘율령국가’가 태어났다. 화이(華夷) 간의 세력균형을 이루는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터전인 만주와 한반도 사이의 문화적 세력균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당 태종 입상(唐太宗立像) / 사진: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당태종(唐 太宗)이 즉위한 지 16년째 되는 642년에 광주(廣州) 도독 당인홍(黨仁弘)의 독직 사건이 불거졌다. 비리의 규모가 커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대리시(大理寺)의 판결이 황제에게 올라왔다.

이 사건이 주목을 받은 것은 당인홍이 개국공신이고 태종의 신뢰가 두터운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수(隋)나라 장군으로 있다가 당 고조(高祖)의 기병 직후에 휘하 군대를 끌고 귀의해서 당나라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 지방 장관으로 실적도 좋았다.

황제의 결정은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였다. 판결대로 처형하든지, 아니면 황제의 사면권을 발동하든지.

그런데 태종은 별난 반응을 보였다. 대리시의 상주문을 다섯 차례나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가져오라느니, 이제 밥 먹을 참이니까 그 뒤에 가져오라느니. 결국 받아보고는 이튿날 새벽 5품 이상 신하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법이란 하늘이 내려준 것인데 이제 내가 한차례 이를 어기고자 한다. 당인홍의 죄가 커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한데, 조정에 대한 그의 공로가 큰 것을 생각해서 파관(罷官)에 그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이에 나는 나 자신에게 벌을 내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고 사흘 동안 검소한 식사를 하루 한 차례씩 하며 근신하고자 한다.”

신하들이 꿇어 엎드려 황제가 그런 자책을 하지 말기 빌며, 그 뜻을 거두지 않으면 자기들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방현령(房玄齡)이 대표해서 아뢰었다. “자고로 인신의 생사는 어떤 사안을 막론하고 황제의 권한입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리면 그것이 곧 법률입니다. 황상께서 스스로에게 죄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법이 다스리는 정치’는 유토피아적 환상


▎실크로드의 일부였던 인더스 강의 모습. 5세기에서 8세기까지 이 길의 주인공은 소그드인이었다. / 사진:오메르 파루크
새벽부터 엎드린 신하들이 오후까지 버티자 결국 태종이 물러섰다. 물러서면서 자신의 세 가지 허물을 밝히는 조서를 발표했다. “첫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 둘째, 사사로운 정으로 법을 어지럽힌 것. 셋째, 상 주고 벌주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이 세 가지 잘못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전력을 다할 것이니 그대들은 간쟁(諫諍)을 삼가지 말라.”

결국 살리고 싶은 사람 살렸으니 한 차례 쇼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냉소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쇼에도 정치적 의미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한번 살펴보자.

첫째, 공신 집단에 보낸 경고. 천하 평정이 끝난 지 십여 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특권층으로서 공신 집단이 잘 나가고 있을 때였다. 황제가 사면권 자동발매기처럼 보였다가는 황제의 초법적 위상을 공신 집단이 공유하는 결과가 된다. 태종의 자책 쇼 앞에서 당인홍과 일체감을 가진 공신들은 깊은 고마움과 함께 두려움을 또한 느꼈을 것이다. 고마움과 두려움이 합쳐진 감정, 그것을 옛날 신하들은 ‘황송(惶悚)’이라고 표현했다.

둘째, 법치의 의지 확인. 당인홍 사건이 터진 것은 정관률(貞觀律)을 반포한 지 5년 되었을 때였다. 정관률에 앞서 수 문제(文帝)의 개황률(開皇律), 양제(煬帝)의 대업률(大業律), 그리고 당 고조(高祖)의 무덕률(武德律)이 있었다. 수-당 제국의 통일에서 영토 통합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가 보편적 질서의 확립이었고 그를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일이 법체계, 특히 형법체계의 정비였다. 당나라 제국 체제의 첫 번째 특징으로 율령(律令)제를 꼽는 학자들이 많다.

그래서 수 문제 이래 황제마다 법전을 반포했던 것인데, 태종의 정관률은 한 차례 법전의 완성으로 평가받는다. 고조의 무덕률까지는 기존 율령을 조금씩만 손보아 즉위 초에 서둘러 반포한 것이었는데 태종은 오래 갈 율령을 만들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에 즉위 후 10년을 들여 정관률을 만든 것이다. 태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더 세밀한 법전을 편찬하게 하여 자기가 죽은 후 당률소의(唐律疏議)가 나오도록 했다. 당률(唐律)은 여기서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치(法治)’를 이야기할 때, 법이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통치의 주체가 될 때, 즉 ‘법으로 다스리는’ 정치가 아니라 ‘법이 다스리는’ 정치가 진정한 법치라고 하는 논설을 종종 본다. 필자는 이런 관점을 하나의 유토피아적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인데, 사람 밖의 제도에 매달려 정치의 완벽한 해결을 바라는 풍조를 나는 일종의 물신주의(fetishism)로 본다.

현실 속에서 법은 황제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태종은 법을 하늘이 내리는 것이며 황제는 그것을 전하는 역할이고 황제 자신도 그를 어겨서는 안 된다는 자세를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현대 민주국가에서도 용인되는 국가원수의 사면권을 그토록 조심스럽게 다룬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법치의 구현이었다.

220년 한(漢)나라 멸망 후 589년 수나라 통일에 이르기까지 3세기 반의 시간이 흘렀다. ‘오랑캐(胡)’라 불리던 요소들이 중국에 통합된 것이 그 기간 동안의 많은 변화 중 제일 큰 것이었다. 5호16국(五胡十六國) 이래 오랑캐 왕조들이 북중국을 통치하는 동안 오랑캐의 중국화와 중국인의 오랑캐화는 나란히 진행되었다. 그 과정을 통해 빚어진 수-당(唐) 제국의 특성을 호-한(胡漢) 2중 체제로 설명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통합’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오랑캐와 중국의 차이는 혈통보다 제도와 관습에 본질이 있다. 지금 중국의 주류 민족인 한족(漢族)에는 긴 세월을 통해 많은 오랑캐의 혈통이 흡수되어 있는데, 그 흡수는 진 시황(秦 始皇)의 통일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목을 위주로 하는 오랑캐사회의 질서 원리가 농경을 위주로 하는 중국과 다르다는 것이 혈통보다 더 중요한 차이였다. 따라서 수-당 제국 통일의 의미는 영토의 통합, 혈통의 통합보다 질서 원리의 통합에 있었다.

당 태종, ‘황제’와 오랑캐의 호칭 ‘천가한’ 함께 사용


▎측천무후의 명으로 672~676년에 조성된 봉선사(奉先寺) 석굴. 측천무후는 관료제의 발전에 기여한 권력자로 평가받고 있다. / 사진:마이클 군터
통합 이전에는 유목사회는 물론 농경사회에서도 질서 원리의 대부분이 법령보다 관습의 형태로 존재했다. 통합이 진행되는 동안 농경사회는 농경사회대로, 유목사회는 유목사회대로, 따로따로 운영한 것이 호-한 2중 체제였다. 아직 두 사회의 접점이 그리 크지 않은 단계였다.

접점이 확대됨에 따라 양쪽 사회를 같은 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어느 단계에 이르면 두 사회를 포괄하는 전면적인 운영의 틀이 필요하게 된다. 이 새로운 틀에는 농경사회도 유목사회도 익숙지 않은 요소들이 적지 않게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익숙지 않은 제도에 사람들을 적응시키기 위해 예전에는 암묵적으로 통용되던 관습을 명문화할 필요가 일어났다. 지주와 경작자의 관계, 상품거래의 기준, 상속의 원칙, 비행(非行) 응징의 방법, 관(官)의 역할 등등 많은 정치-사회적 관계가 성문법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다.

로마제국의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법체계를 드는 학자들이 많다. 비슷한 시기에 제국을 운영했던 로마와 한나라를 비교해 보면 로마 쪽이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더 많이 포괄했던 것 같다. 따라서 한나라에서는 로마만큼 성문법체계를 확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수-당 제국은 고대의 로마 못지않게 다양한 요소를 품고 복잡한 구조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율령체제가 당나라의 중요한 특징이 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북위에서 제정한 균전제(均田制)와 서위-북주에서 시행한 부병제(府兵制)가 당나라 제국체제의 뼈대가 되었다. 농경사회나 유목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제도들이 국가의 크고 강한 힘을 통해 대다수 인민의 생활과 활동 방식을 규정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제도들을 인민이 “하늘이 내린”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황제부터 법 어기기 어려워하는 시늉을 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중세사 연구자 박한제는 [대당제국과 그 유산](세창출판사, 2015)에서 “호월일가(胡越一家)”를 당나라 통합성의 표현으로 제시하며 태종이 ‘황제’와 ‘천가한(天可汗)’의 호칭을 함께 칭한 것을 그 뜻에 따른 것으로 보았다. 그 뜻을 밝힌 태종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자고로 모두 중화를 귀히 여기고 이와 적을 천하게 여겨왔으나, 짐은 홀로 그들을 사랑하기를 하나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 종락들이 모두 짐을 의지하기를 부모처럼 여겼다.” ([자치통감] 권 198, [대당제국과 그 유산] 248쪽에서 재인용)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The Perilous Frontier)](1989)에서 태종의 뛰어난 군사적 성공 역시 유목민의 전술을 잘 활용한 데 큰 이유가 있었다고 분석했다.(141~143쪽) 태종의 ‘천가한(天可汗)’ 역할이 호칭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오랑캐의 가치관을 제대로 실현한 것으로 본 것이다. 형제들을 죽이고 부친을 겁박해서 황제 자리에 오른 것부터 중국의 윤리관으로는 엽기적인 행위지만 당시 오랑캐의 윤리관으로는 달랐을 수도 있다. 수 양제(隋 煬帝)에 관한 이야기 중에도 오랑캐의 관점을 떠올릴 만한 점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북위-서위-북주-수-당의 지배집단에서는 호-한 2중성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

‘오랑캐 스타일’ 닮으려 했던 태종 장남의 비극


▎당 태종의 무덤을 지키던 사자상. 시안 베일린 박물관에 소재. / 사진:마이클 군터
황제와 천가한을 겸하던 태종의 2중성은 고종(高宗, 재위 649~683) 이후 재현되지 않았다. 바필드는 이 때문에 당 제국의 광영(光榮)이 감퇴한 것을 아쉬워하지만, 나는 이것이 태종 자신의 결단에 따른 것으로 본다. 태종이 후계자 문제에 임하는 태도에 이 결단의 과정이 보인다.

태종의 즉위 직후 8세의 장남 승건(承乾)을 태자로 책봉한 것은 자신이 겪었던 황위 계승의 투쟁이 되풀이되지 않기 바라는 뜻이었다. 그 후 10년간 태자 승건에 관한 기록은 찬양 일색으로 남아있다. 그러다가 638년경부터 태자의 ‘기행(奇行)’이 기록되기 시작하다가 643년 모반의 죄로 폐위되고, 태종이 사형만은 면제해 주었으나 1년 후에 죽었다.

638년에 승건의 한 살 아래 동생인 태(泰)가 방대한 지리서 [괄지지(括地誌)]를 완성한 일을 태종이 엄청나게 띄워주었다. 그로부터 태의 정치적 권위가 커지면서 태자 자리에 위협을 느낀 승건이 태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 그의 모반 내용이었다. 즉위 후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태종이 원하는 후계자의 스타일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승건과 태 사이의 긴장관계를 불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발레리 한센은 [열린 제국(The Open Empire)](2015)에서 태자 승건에 관해 이렇게 썼다.

“(태자의) 빠른 선택이 꼭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 아들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아들의 궁중 악사와의 동성애 관계에 분노한 태종은 그 악사를 처형했다. 태자는 중국어 쓰는 것을 거부하고 돌궐(突厥)어와 돌궐 복장을 고집함으로써 당나라 황실의 중앙아시아 뿌리가 아직도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보여주었다.”(181쪽)

순진한 관찰이다. 승건이 폐위된 뒤에는 그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제를 승건의 개인적인 것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었다. 돌궐 풍속을 좋아한 승건의 ‘기행’은 그 앞 세대에서는 ‘기행’이 아니었다. ‘천가한’으로서 태종의 풍모는 위대한 오랑캐 족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즉위 초년의 태종이 후계자에게도 ‘천가한’의 풍모를 기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바필드가 [위태로운 변경]에서 “돌궐풍 태자인 승건이 황제가 되었다면 유목생활에 대한 그의 친근함과 애정을 바탕으로 중국에 두 번째 천가한이 나타났을 것”(146쪽)이라 한 말이 실상에 더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즉위 10년이 지나 정관률을 완성한 시점에서 태종은 대당 제국의 장래가 황제와 천가한을 겸하는 지도자의 개인플레이보다 체계적 제도에 의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차남 태의 [괄지지]는 이 방향에 영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태종의 각별한 상찬을 받았던 것이다. 태자가 이것을 보고 이 방향의 노력도 보완함으로써 두 측면을 겸비했다면 태종은 더 없이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아들은 각자의 스타일에 집착하며 ‘너 죽고 나 살기’의 각축을 벌였다.

공식적으로는 승건이 아우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으로 판결되었다. 그러나 638년과 643년 사이에 두 황자 간의 반목이 한 쪽만의 책임이었으리라고 볼 수는 없다. 동생 쪽의 도발과 획책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결국 승건을 폐위한 후 태종은 반목의 당사자였던 둘째 아들(황후 소생 중)에게 태자 자리를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셋째 아들 치(治)를 책봉하여 후에 고종(高宗, 재위 649-683)으로 즉위하게 된다.

진-한 제국의 ‘그림자 제국’으로 흉노가 있었다면 수-당 제국에게는 돌궐이 있었다. 남북조시대에 북방의 큰 세력으로 유연(柔然)이 있었지만 치밀한 조직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6세기 중엽 신흥세력 돌궐이 유연을 격파하고 유목제국을 세운 것은 중국의 재통일 국면에 호응하는 변화였다. 초기의 흉노제국이 한나라에 우위를 점했던 것처럼 돌궐제국도 수-당 교체기에 당나라 건국세력을 포함한 군웅을 압도했다. 당 고조 역시 뇌물을 바치고 많은 이득을 약속하며 돌궐의 지원을 얻고 칭신(稱臣)까지 한 일이 있다. 당나라의 중원 수습이 마무리될 무렵인 622년 돌궐의 내침을 막기 위해 파견된 당나라 사신은 힐리(頡利) 가한(可汗)을 이런 말로 설득했다고 한다.

수·당 시대 ‘그림자 제국’ 돌궐의 흥망


▎중세에 그려진 소그드인 상인들의 모습. / 사진:빌라노바 대학교
“중국과 돌궐은 풍속이 각기 달라 중국이 돌궐을 얻어도 신하로 삼을 수 없고, 돌궐이 중국을 얻는다고 한들 어디에 쓸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물자와 재물을 약탈하면 모두 장군과 병사들이 갖게 되니 카간(가한)께서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으십니다. 이것을 빨리 기병 부대를 거두어들이고 사신을 보내 화친을 하면 나라에서 반드시 많은 재물을 드리니 포목과 비단이 모두 카간에게 들어가 힘든 수고를 없애고 앉아서 이익을 얻는 것만 못합니다. 당나라가 이전에 천하를 차지할 즈음 카간과 형제가 되기를 약속해서 사람들이 서로 왕래한 것이 끊인 바가 없습니다. 카간께서 이제 선한 마음을 버리고 미워하는 것을 따르시면 많은 것을 버리고 적은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책부원구]660, 정재훈 [돌궐 유목제국사](사계절, 2016) 312-313쪽에서 재인용)

이 무렵 당나라 조정에서는 돌궐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천도(遷都) 논의까지 있었다 한다. 태종 즉위 직후 돌궐이 장안까지 쳐들어왔을 때 태종이 시종들만 데리고 강가로 나가 강을 사이에 두고 힐리 가한을 꾸짖은 끝에 화의를 맺고 철군시킨 장면이 그의 담력을 돋보여주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돌궐의 군사력은 당시 당나라 제국체제에 최대의 위협이었고 돌궐과의 소통능력은 태종의 황제 노릇에 큰 밑천이었다. 태자 승건에게도 그 밑천을 키우도록 부추겼을 것 같다. 그러나 4년 후 힐리 가한을 생포하여 돌궐제국을 무너뜨린 뒤에는 돌궐 문제의 우선순위가 밀려남으로써 태자의 비극이 빚어진 것이 아닐지.

힐리 가한의 몰락에 관해 정재훈은 [돌궐 유목제국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릭(힐리) 카간이 이와 같은 상황을 초래한 것은 동돌궐 정권이 그동안 수조(隋朝)의 지배 아래서 지나치게 중국에 의존하다가 수말 당초의 결정적 계기에도 불구하고 북중국에 단순하게 간섭하며 ‘다자적 관계’를 유지하고 통제하는 데만 집착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 일릭 카간은 충분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당초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던 북중국 정권을 대체해 과거 북위 또는 이후의 이른바 ‘정복 왕조’처럼 보다 안정적으로 내지를 직접 지배하고 수취하는 체제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327쪽)

정재훈은 ‘정복 왕조’ 세우는 것을 유목민의 ‘성공’으로 보는 고정관념을 가진 것 같다. 나는 바필드의 ‘외경(外境) 전략’과 ‘내경(內境) 전략’ 개념을 더 그럴싸하게 본다. 유목민의 이해관계를 유목민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화제국의 외부에 세력을 이루고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이 외경 전략이고, 중화제국 내부에 들어가 통제를 받으며 역할을 맡는 것이 내경 전략이다. 정복 왕조는 제국이 쇠퇴할 때 외경이 아니라 내경 상태의 오랑캐가 체제를 넘겨받음으로써 세워지는 것이 통상적인 경로였다. 외경·내경·정복의 전략은 유목세력이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돌궐 제1제국은 (6세기 중엽의 발흥에서 630년까지를 제1제국, 687년의 부흥에서 745년의 멸망까지를 제2제국으로 통상 부른다.) 수-당 제국에 대해 외경 전략을 구사했다. 한나라에 대해 외경 전략을 구사하다가 한나라의 안정 이후 격파당한 흉노제국처럼 돌궐제국도 당나라 초기까지 유리한 입장에 있다가 당나라의 안정에 따라 격퇴된 것이다. 당나라가 상당 수준 ‘오랑캐화’된 체제였기 때문에 한나라보다 오랑캐 문제에 대한 대응이 더 빠르고 쉬웠으리라고 생각된다.

제1제국의 붕괴 후 돌궐은 당나라의 기미(覊縻)정책에 묶여 당나라의 정복사업에 군사력으로 활용되었다. 680년 대에 이르러 그 일부가 이탈해 북방의 초원으로 돌아가서 세력을 키우고 690년대 들어 당나라 변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외경 전략으로 돌아간 것이다.

유목민, 중국 정복보다 간접적 착취 더 선호


▎1. 박한제 저 [대당제국과 그 유산] 표지 / 2. 김기협 저 [밖에서 본 한국사] 표지 / 3. 정재훈 저 [돌궐 유목제국사] 표지
돌궐의 이탈과 부흥은 당나라 조정의 문민화(文民化)의 결과로 보인다. 태자 승건의 폐위는 황제의 군사적 역할이 줄어드는 신호였다. 형들의 각축 중에 어부지리로 태자가 되고 황제가 된 고종은 모든 기록에 온순한 성품으로 그려진 인물이다. 그는 황후인 무후(武后)에게도 대단히 온순해서 그의 재위 중반 이후에는 무후의 통치가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측천무후(624~705, 재위 690~705)의 통치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업적 하나가 관료제의 발전이다. 귀족 중심의 무력(武力)국가에서 관료 중심의 재정(財政)국가로의 전환을 당나라 때 중화제국의 중요한 변화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제국 내부의 착취체제를 발전시키면서 외부에 대해서는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을 기조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후가 659년 황후에 오른 후 오랫동안 조정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가 과감한 정복보다 치밀한 관리를 필요로 하는 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630년 제1제국의 붕괴 이후 돌궐은 당나라 군사력의 주축이 되었다. 당 제국의 팽창 과정에 핵심 역할을 맡으면서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660년대 고구려 정벌을 끝으로 당나라의 정복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그 군사적 역할이 줄어들었다. 680년대 돌궐제국의 부활은 내경 전략에서 외경 전략으로의 복귀였으며, 당나라에서 내경 전략의 수익성이 떨어진 결과였다.

돌궐 제2제국은 제1제국만큼 큰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 당나라 안에서 돌궐 외에도 많은 오랑캐 세력이 내경 전략을 펼치고 있어서 돌궐의 외경 전략이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궐 제2제국이 745년 내분으로 멸망한 후 유목사회의 패권을 장악한 위구르(回纥)가 외경 전략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에서 평가한다.

“전통적 역사에서는 유목민을 중국 정복의 야욕을 가진 위험한 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유목민이 중국에 대해 위험한 존재이기는 했지만 간접적 착취를 더 좋아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당나라에 대한 위구르의 정책이 이 현상의 가장 좋은 사례일 것이다. 위구르는 처음부터 약해지고 있는 당나라를 내란과 침략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입장을 취했고, 그 대가로 엄청난 분량의 비단을 받아 초원지역에서 역사상 가장 부유한 유목민이 되었다. (…) 중국 왕조에 대한 위협은 간접적으로 유목국가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유목 군주는 어떤 변화보다도 수지맞는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중국 왕조가 내란이나 침략으로 무너지면 그만큼 자기네를 우대해 주지 않는 세력이 권력을 쥘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위구르는 당 왕조의 보존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840년에 위구르 제국이 무너지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멸망을 기다리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150-151쪽)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당 조정이 통제력을 잃었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신흥세력 위구르였다. 위구르는 작은 군대를 보냈지만 몇 차례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가져왔다. 757년과 762년 반란군이 점령했던 수도 낙양을 되찾았을 때 위구르 군대가 며칠 동안 마음껏 약탈하도록 허용한 사실을 보더라도 그 역할이 얼마나 중시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실크로드의 ‘소프트웨어’ 역할했던 소그드인

당나라의 전반기에는 돌궐, 후반기에는 위구르가 최강의 초원세력으로 부각되었는데, 그 그늘에서 눈길을 끄는 존재가 있다. 소그드인(Sogdian)이다. 소그드는 한 무제 때 장건(張騫)의 보고에 ‘강거(康居)’로 나타났고 당나라 기록에는 ‘강국(康國)’으로 나오며, 지금의 사마르칸드 지역이 그 본거지였다. 그런데 소그드인은 일찍부터 상업 활동에 매진해서 중국으로부터 동로마제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상품과 문화의 교류에 앞장섰다. 돌궐과 위구르 제국에서 소그드인이 행정을 많이 담당하고 당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에도 많이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 부족의 상업 활동을 배경으로 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소그드는 별개의 국가로서 국세를 떨친 일이 없기 때문에 기록이 많지 않은데, 실크로드의 ‘소프트웨어’ 역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백 년 후 몽골의 세계정복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소그드인의 활동방식에서 어떤 열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숙제로 남겨둔다.

630년 돌궐 제1제국이 무너진 후 돌궐 군사력의 대부분은 ‘천가한’ 당 태종의 휘하에 들어왔다. 태종은 이 군사력을 이용해서 당 제국의 강역을 크게 넓혔는데, 중요한 정복 대상 하나가 고구려였다. 태종이 시작한 고구려 정벌은 고종이 이어받아 668년에 완결되었다.

한반도는 중국의 주변 지역 중 중국 중심부와 가장 비슷한 기후조건을 가진 곳이다. 따라서 중국문명의 본질인 농업문명이 전파되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는 당시의 농업기술을 적용하기 어려운 만주 지역이 있었다. 고대의 역사에서 만주 지역과 반도 지역 사이의 관계를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2008)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금속기 문명이 대륙으로부터 처음 전파되던 시절에는 대륙에 가까운 위치의 만주가 당연히 한반도보다 선진지역이었다. 고조선 수도의 남하, 부여에서 고구려의 파생, 고구려에서 백제의 파생이 모두 선진 문명의 남진 현상을 보여주는 상황들이다. (···) 그런데 기원전 3세기 이후 중국 방면으로부터 철기를 바탕으로 한 집약적 농업 문명이 본격적으로 전파되면서 문명의 북고남저(北高南低) 상황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온난한 기후의 한반도가 그 단계 농업 문명의 정착에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7세기 신라 통일 무렵에는 저울추가 남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10세기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서서는 만주에 대한 한반도의 문화적 우위가 확연해져 있었다.” (34쪽)

중국 문명의 한반도 전파는 역사를 통해 꾸준히 이뤄져 온 일이거니와, 중국에 강력한 제국이 세워져 동쪽을 침공할 때 전파 속도가 획기적으로 상승한 일이 몇 차례 있었다. 그 인과관계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명-기술의 전파가 빨라졌기 때문에 침공의 이유가 생긴 측면이 있고, 침공 때문에 전파가 더욱 빨라진 측면도 있는 것이다.

기원전 2세기 말 한 4군(漢 四郡) 설치가 첫 번째 계기였고, 7세기 초-중엽 수-당 제국의 고구려 정벌이 두 번째 계기였다. 그 후에는 13세기에 몽골의 침공이 있었다.

만주-한반도 문명의 ‘북고남저’ 농업 발달하자 역전

한 4군은 문명 전파의 송유관 노릇을 한 것으로 필자는 본다.

“낙랑 등 군현을 설치한 것은 변방 내지 역외를 중국의 의지대로 통제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원이 제대로 지속되지 못해 자립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이런 뜻은 관철될 수 없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주변 세력에게 봉사하며 그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기술 전파 측면도 그렇다. 조선을 평정한 후 그 지도층을 사민(徙民)시킨 데는 기술 보유 집단을 현지에서 제거함으로써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지원 끊긴 낙랑군이 자립 생존을 위해 팔아먹을 것이 기술 말고 무엇이 있었겠는가. 기술이란 원래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을 가진 것인데, 낙랑이라는 통로가 있음으로 해서 그 과정이 더욱 촉진되었을 것이다.” (같은 책 79쪽)

만주와 한반도 사이의 ‘북고남저’ 상황은 고구려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농업 발달과 인구 증가에 따라 고구려의 중심도 한반도로 남하하고 백제와 신라가 국력을 키움으로써 한반도의 ‘삼국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삼국시대라 하여 3국의 대등한 병립(竝立)을 떠올리는 것은 후세의 관점이고 신라의 관점이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이었고 백제와 신라는 그 뒤에 붙어 있던 작은 나라들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한 갈래로 출발한 나라였고 신라는 고구려의 비호 아래 백제-가야-왜의 압력을 견뎌내고 일어선 나라였다. 당나라가 정벌의 필요를 느낀 대상은 고구려였고, 신라와의 ‘동맹’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술책일 뿐이었다.

고구려 격파 무렵 당 제국이 공격적 대외정책을 거두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 한반도의 독립 유지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정벌 당시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적극적 경영의 의지를 보였으나 결국 느슨한 기미 정책으로 물러선 이유는 신라 측의 견결한 저항에도 있었겠지만 당나라 조정의 문민화가 그 배경조건이 되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상당 규모의 농경사회도 품고 있었으나 만주 지역의 다른 세력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성격의 사회를 포괄하는 복합국가였다. 고구려가 사라진 자리에서 신라와 발해가 당나라의 기미정책 아래 발전해 나갔는데, 그중 신라가 고려로 이어지며 소중화(小中華)의 길로 향하게 되는 것은 농경에 적합한 기후조건 때문이었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7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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