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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49)] 겨레의 스승 율곡(栗谷) 이이 

“나라 위한 일로 병 심해진다 해도 운명” 

어머니 신사임당 잃고 1년간 금강산 입산… 23세에 퇴계 만나 道學으로 돌아가
아홉 차례 장원급제 뒤 출사·사직 반복, 학문과 세상 경륜 모두 큰 업적 남겨


▎율곡 선생의 15대 종손인 이천용(왼쪽) 옹이 이종산 관리소장과 함께 자운서원 자운문 앞에 섰다.
"선생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10년을 못 가 토붕(土崩)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미리 십만의 군사를 길러 도성(都城)에 2만, 각 도에 1만을 배치하여 그들의 조세를 덜고 무재(武才)를 훈련해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는 십만을 합쳐 파수하게 하여 위급할 때 방비를 삼으소서. 이처럼 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날 경우 시민(市民)을 몰아 전투하게 됨을 면치 못해 결국 대사가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류성용(柳成龍)공이 불가하다고 말하면서 아뢰기를 ‘아무 일이 없는데도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곧 화근을 기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경연 신하들이 모두 선생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고 해 끝내 시행하지 못했다. 선생은 물러 나와 류공에게 말하기를 ‘속유(俗儒)들이야 진실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거니와 공도 또한 그런 말을 하는가’ 하고 오랫동안 수심에 잠겨 있었다. 임진년 왜란이 일어나자 류공이 조당(朝堂)에서 탄식하기를 ‘이문성(李文成)은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1996년 펴낸 [국역 율곡전서] 7권 연보(年譜)에 나오는 내용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시호 문성 文成) 선생은 누구나 그 이름을 들었을 조선의 대표적인 대학자 관료다. 이 주장은 선생 48세인 1583년 4월 병조판서 당시에 나왔다. 유명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의 출처다. 그리고 9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2월 18일 선생의 흔적을 찾아 경기도 파주를 찾았다. 율곡은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파주와 서울에서 성장한다. 율곡(栗谷)이라는 호도 파주 율곡리에서 유래한다. 파주로 들어서면서 군부대가 자주 보였다. 휴전선이 가까운 이른바 전방이다. 먼저 들른 곳은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파주 이이 유적’(사적 제525호).

유적지 주차장에서 이천용(李天鏞·79) 옹을 만났다. 율곡 선생의 15대 종손이다. 뵙고 싶다는 요청에 인근 경기 일산에서 막 도착했다. 인사를 나눈 뒤 대구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종손은 2007년 안동 하회마을 방문 이야기를 꺼냈다. 그해 안동에선 서애 류성룡 서거 400주기를 맞아 ‘400년 만의 화해’라는 행사가 열렸다. 임진왜란 당사자인 조선과 일본, 명나라 장수 후손 등이 모여 손을 맞잡은 것이다. 그 행사에 이 옹은 십만양병설을 제기한 율곡의 후손 자격으로 초대를 받았다. 행사는 서애 종손인 고 류영하 옹이 주인이었다. 이 옹이 당시를 떠올렸다. 서애는 율곡보다 나이가 6년 아래다.

십만양병설 진위 논란


“하회마을을 방문한 것도 류씨를 만난 것도 그때가 처음입니다. 류씨가 제 손을 잡더니 ‘선조들 일로 그동안 불편한 게 있었는데…앞으로 잘 지내자’고 합디다… 서애 선생이 십만양병설을 반대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십만양병설은 율곡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먼저 떠올리는 업적이다. 정부는 국방 강화 정책을 ‘율곡사업’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국방은 그의 경세(經世, 세상을 다스림) 사상 중 핵심이다. 그럼에도 십만양병설은 진위를 놓고 지금도 논란이 이어진다.

율곡은 47세가 되던 12월 병조판서에 임명된다. 율곡은 문무(文武) 중임(重任)을 한 사람이 겸할 수 없으며. 또 병이 심해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한다. 하지만 선조 임금은 허락하지 않고 양병 계획을 세워오라는 비답을 내린다. 율곡은 선조가 자신의 평소 개혁 주장에 비로소 귀를 기울인 것에 주목하며 이듬해 2월 ‘육조계(六條啓)’를 올린다. 임금의 하교에 따른 상소문이다.

“우리나라가 오래도록 승평을 누려 태만함이 날로 더해 안팎이 텅 비고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여…. 신은 원래 썩어빠진 선비로서 외람되이 병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애태우며 생각한 나머지 감히 한 가지 계책을 올립니다. 조목을 말씀드리면 첫째 현능(賢能)을 임용할 것, 둘째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셋째 재용(財用)을 풍족하게 만들 것, 넷째 변방을 튼튼하게 할 것, 다섯째 전마(戰馬)를 갖출 것, 여섯째 교화(敎化)를 밝힐 것 등입니다.”

여기에 십만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김장생·박세채 등 후학이 정리한 연보와 공식 상소문의 차이다. 율곡은 4월 다시 ‘진시사소(陳時事疏)’ 상소에서 “서얼과 공천(公賤, 관노)·사천(私賤) 중 무재가 있는 자를 모집하여…” 등의 양병 방안을 제시한다.

그해 6월 율곡은 탄핵을 받고 율곡리로 돌아간다. 병조판서가 말을 바치는 자의 북방 방어를 면제해 준 것 등을 문제 삼았다. 장숙필 전주대 연구교수는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서인의 부회억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지나친 듯하다”며 “십만이란 군병의 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또 지나치게 많은 군병을 기르려 한다는 반대나 비판이 있었던 것에서도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황해도 해주에서 월남한 종손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율곡촌 뒷산에 세워진 화석정. 정자 뒤로 임진강이 보인다.
오후 들어 파주 이이 유적 답사에 나섰다. 자운산 자락 7만여 평에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의 묘소, 선생을 기리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이 자리한 곳이다. 파주문화원에 소속돼 21년째 이곳에서 일한다는 이종산 관리소장이 안내했다. 유적 입구에 율곡과 어머니 신사임당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서울 사직공원 동상이 사직단을 복원하며 2015년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그 옆에 율곡기념관이 있었다. 전시 자료 등은 빈약했다. 눈길을 끈 것은 북녘 황해도에 있는 소현서원(紹賢書院) 디오라마였다. 종손 이 옹이 반가운 듯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1947년 월남한 사연이 있었다. 6세 무렵이다. 아버지(이재능)는 당시 황해도 해주 석담(정확히는 벽성군 고산면 석담리) 종가에 모셔온 율곡의 신주(神主)를 안고 가족과 함께 몰래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원 앞 저 개울이 석담입니다. 고산구곡의 5곡과 4곡 사이에 종택이 있었어요. 개울에 빠진 적도 있고….” 그러면서 이 옹은 하회마을을 가보니 규모며 분위기가 어렸을 적 석담과 비슷했다고 회고했다. 또 마을은 구조가 서울 비원을 닮았다고 했다.

석담은 41세 율곡이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을 추스르고 제자를 기르며 학문에 몰두한 해주시대 본산이다. 율곡은 파주 율곡촌에서 처가가 있던 해주로 이주하기 위해 청계당을 지었다. 이어 사당과 안채를 세우자 율곡은 홀로 된 형수 곽씨를 자녀와 함께 해주로 불렀다. 그는 살림을 도맡은 형수를 부모 모시듯 공경한다. 식솔은 100여 명 대가족이었다. 율곡은 집안 화목 지침서인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지어 실천했다.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인데, 부모가 이미 작고했으니 다시 효도할 곳은 없고 다만 제사 지내는 일 한 가지가 남아 있을 뿐…’ 등이다. 한편으로 율곡은 일찍이 해보고 싶었던 교육 활동도 해주에서 펼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격몽요결(擊夢要訣)] [학교모범(學敎模範)]을 저술하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교화에도 나섰다. 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워 강학하며 후진을 양성한다.

기념관을 나와 눈 덮인 잔디밭을 건너 자운서원으로 들어갔다. 자운문을 지나자 동재·서재가 보이고 뒤로 강당인 강인당(講仁堂)이 있었다. 가장 높은 위치에 사당인 문성사(文成祠)가 있다. 관리소장의 안내로 율곡 선생을 알묘했다. 영정 앞에 놓인 위패에는 ‘栗谷李先生位’(율곡이선생위)라 쓰여 있었다. 또 율곡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김장생, 왼쪽에는 박세채가 종향돼 있다. 향사는 10월 이곳에서 열리는 율곡문화제에 맞춰 거행된다.

선생의 위패를 대하면서 종손 이 옹이 들려준 신주 이야기가 떠올랐다. 70년 전 해주에서 어렵게 모시고 온 선생의 신주는 지금 종손이 거처하는 일산의 아파트 감실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남쪽에 별도의 종택은 없었다. 2008년 종손은 선생 내외의 신주를 손질하다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정경부인 노씨 할머니의 이름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신주의 뒷면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보는 할머니 함자가 있었어요.” 거기에는 ‘卒 貞敬夫人盧氏諱雇工神主’(졸 정경부인노씨휘고공신주)라 적혀 있었다. 종손은 동시에 선생의 신주에 한 줄로 쓰인 깨알 같은 작은 글씨도 촬영 뒤 500% 확대해 처음으로 확인했다. 지낸 관직이 많아 자그마치 91자였다고 한다.

사당 앞에 송시열이 쓴 묘정비(廟庭碑)와 서원 창건(1615년) 때 심은 느티나무가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자운서원도 비껴가지 않았다. 이후 유림은 훼철된 서원 터에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국전쟁은 다시 서원을 완전히 파괴했고 빈터에 묘정비만 홀로 남았다. 서원은 1970년 복원됐다. 이종산 소장은 안동 도산서원을 가보지 못했다며 두 곳을 비교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율곡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퇴계(이황)와 비교한다.

청년 율곡, 퇴계와 시로 교유하다


▎율곡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파주 자운서원 전경. 서원 오른쪽 계곡에 율곡과 신사임당의 묘소가 있다.
율곡은 1557년 9월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한다. 직후 율곡은 병약한 부인과 함께 경상도 성주에서 그해 겨울을 보낸다. 이듬해 봄 성주에서 강릉으로 가는 도중 율곡은 안동의 퇴계를 찾아갔다. 당시 퇴계는 쉰여덟의 대학자였고 율곡은 스물셋 청년이었다. 율곡은 더욱이 알아주지 않는 존재였고 4년 전 금강산 마하연에 들어가 불교에 입문했던 일로 구설에 오르고 있었다. 율곡은 먼저 대스승인 퇴계에게 인사하고 존경을 담아 시 한 수를 지었다.

시냇물은 수사(洙泗)에서 갈라져 흐르고/봉우리는 무이산처럼 드높습니다/살림이라곤 경서가 천 권이고/몸 둘 집은 몇 칸뿐이지만/가슴에 품으신 뜻은 환히 갠 하늘의 달과 같고/웃으며 하시는 이야기는 미친 물결조차 잠들게 하십니다/제가 찾아온 것은 도를 듣고자 함이니/반나절을 헛되이 보낸다 생각지 마십시오

퇴계도 시로 화답했다. 시에는 퇴계가 이미 율곡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언행에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 담겨 있다. 율곡은 도산에 사흘간 머무른다. 퇴계는 율곡이 강릉으로 떠난 뒤 그를 격려하며 분발할 것을 당부하는 편지와 시를 보냈다.

예부터 학문은 세상을 경이롭게 보고 의문을 품는 것/이익을 위해 경서 읽는다면 도에서 더욱 멀어지리/고마워라! 그대만이 홀로 깊이 뜻 이룰 수 있어/사람들 그대 말 듣고 새로운 앎 얻으리

율곡은 후일 퇴계와의 만남을 “내가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사나운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가시밭길의 거친 들에 있다가 방향을 고쳐 옛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퇴계 선생의 격려에 힘입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첫 만남이 있은 지 12년 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율곡은 스승에 대한 예로 위패를 만들어 곡을 했으며 외실에 거처했다.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는 두 사람을 이렇게 비교한다. “퇴계가 이룬 업적은 경세 사상도 적지 않지만 분량이나 열의를 쏟은 비중은 성리학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후대의 영향 역시 그의 경세 사상은 성리 사상에 비견되지 못한다. 그러나 율곡은 그렇지 않다. 율곡의 경세 사상은 분량이나 후대에 끼친 영향이 그의 성리학만 못하다고 할 수 없다.” 퇴계가 성리학자라면 율곡은 경세가이면서 동시에 성리학자였다는 것이다.

자운서원은 자그마했다. 해주 소현서원이 율곡 학문의 본향인 때문일 것이다. 독일 베를린자유대 역사문화학부 이은정 교수는 2018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과 교류협력 양해각서를 교환하느라 소현서원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이 교수는 [중앙SUNDAY]에 기고한 글에 “석담리 이정표를 지나 한참 가니 율곡 선생이 고산구곡을 노래한 석담계곡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며 “은병정사는 퇴계가 지은 도산서당과 달리 크고 우아하다”고 적었다. 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건물 단청은 신사임당이 그린 식물 그림을 연상시키는 등 원형이 잘 보존돼 있었다고 한다.

또 종손은 1994년 재미교포를 통해 고향을 찍은 동영상에서 유년시절 뛰놀던 종가를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종가의 솟을대문, 종가 앞으로 흐르는 고산구곡의 냇가 위 징검다리까지 70년 전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런데 거기 등장하는 북한 안내원이 종가를 가리켜 “김일성 장군이 예전에 공부하던 곳”이라고 하더라며 기막혀했다. 해주 석담 종가에 있던 서책 수만 권은 김일성대학에 옮겨 보관돼 있다는 것이다.

율곡의 후진 양성 흔적은 북한 해주에 남아


▎자운서원 사당인 문성사에 모셔진 선생의 영정과 위패.
서원을 나와 오른쪽 야트막한 능선에 자리한 묘소를 찾았다. 돌계단을 올라가자 율곡의 가족묘 4기가 위로 나란히 보인다. 맨 아래가 맏아들 이경림, 다음이 부모, 그 위가 맏형 부부, 맨 위가 율곡의 묘다. 올라가 선생 묘소에 참배했다. 문인석과 묘비에 크지 않은 봉분이 전부인 소박한 묘역이다. 그래서 더 경외감이 들었다. 부인 곡산 노씨의 묘는 합장이 아닌 선생의 묘소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아픔이 숨어 있다. 노씨 부인은 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을 단념한 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몸종과 함께 선생의 묘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왜군을 맞닥뜨린다. 부인은 신주를 안은 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침범하느냐”고 꾸짖었고 결국 변을 당했다. 두 사람의 시신은 엉킨 채 한참 뒤 발견돼 구분이 어려웠다, 선생과 합장하지 못한 이유라고 한다. 이후 조정은 정려를 내렸다. 묘소 아래 이항복이 쓴 신도비가 있었다.

유적을 뒤로하고 8.7㎞ 떨어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화석정(花石亭)으로 향했다. 율곡의 고향이다. 율곡촌 뒷산에 할아버지가 단장한 정자가 화석정이다. 화석정에 올랐다. 가장 높은 위치다. 북쪽을 바라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강은 하류여서 폭이 넓고 넉넉했다. 강저 너머가 북녘이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후 복원됐다는 화석정에는 율곡이 8세에 지은 화석정 시판이 걸려 있었다. 정자 편액은 박정희 대통령 글씨다. 종손 이 옹은 “지금도 선생의 맏형 쪽 후손들이 몇 집 살고 있다”고 말했다.

율곡은 1536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그는 3세에 글을 읽고 10세에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을 만큼 일찍부터 영특했다. 16세 사춘기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고 그 충격으로 불교에 빠져든다. 20세에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마음을 다잡는다. 1564년 그는 생원시 장원을 시작으로 아홉 차례 시험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렸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별세 직전까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며 내·외직의 중요한 직책을 거쳤다. 율곡은 시대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개선하려는 치열한 열정과 정신으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비롯한 수많은 상소와 [성학집요(聖學輯要)]등의 저술을 남겼다. 경세가로 유교적 정치 이념을 제시하면서 국가의 개혁을 역설한 것이다. 그와 함께 영남학파를 형성한 퇴계와 쌍벽을 이루며 기호학파를 주도해 성리학 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다. 또 율곡은 그의 시대 골이 파인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화해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율곡 사상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율곡연구원(원장 박원재)은 그래서 “율곡이 사후 자신이 서인·노론의 영수로 추존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죽어서도 결단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타계 이틀 전 변방 강화책 ‘육조방략’ 구술


▎황해도 해주에 남은 소현서원 은병정사의 2018년 모습. / 사진:베를린자유대 이은정 교수
1584년 정월 순무어사(巡撫御史) 서익(徐益)이 북쪽 변방으로 떠나면서 병조판서를 지낸 율곡을 찾는다. 가족과 제자들은 건강을 걱정해 만남을 만류했다. 그러나 율곡은 “내 몸은 단지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일로 병이 더 심해진다 해도 운명이 아니겠는가”라며 일어나 앉아 동생 우에게 자신의 말을 받아쓰게 했다. 율곡이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육조방략’이다. 이틀 뒤 율곡은 숨을 거두었다. 당시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 임금은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애통해했다고 한다.

화석정을 나와 문산역으로 이동했다. 도로 표지판에 ‘임진각’ ‘판문점’ ‘제3땅굴’ 등이 나타났다. 남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 지척이다. 율곡은 양병을 주창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변방 강화책을 강조하는 등 누구보다 국가 안위를 걱정한 겨레의 스승이다. 그러나 선생의 흔적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종손은 이산가족이 돼 버렸다. 선생이 남긴 숱한 상소와 저술에서 민족 통일을 향한 계책과 정신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종손이 들려준 마지막 소원이 귓전을 맴돈다. “통일되면 고향 석담을 한달음에 가려고 가까운 일산에 살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그런 날이 오려나….”

[박스기사] 성혼, 대학자 율곡이 평생 의지한 벗 - 애제자 김장생은 기호학파 형성해

율곡 이이는 도의(道義)에서 의지한 벗이 있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이다. 우계는 율곡이 입신출세하는 것을 만류했다. 대신 율곡으로 하여금 평생 정치와 학문을 병행하도록 권유했다. 우계가 없었다면 율곡은 경세가로 성장했을 뿐 공맹(孔孟)의 바른 맥을 잇지 못했을 수 있었다. 율곡은 우계의 아버지 성수침을 평소 존경했다.

성수침이 조광조의 직계 제자로 기묘사화를 당하자 율곡은 행장을 짓고 절규했다. 두 사람은 사후에도 지척에 있다. 성혼 묘소와 기념관이 율곡 유적과 가깝다. 성리학의 논변을 주고받은 구봉 송익필도 율곡의 가까운 벗이었다. 또 동갑내기 송강 정철은 율곡을 “맑은 물에 피어난 연꽃”으로 예찬했다.

율곡의 제자는[율곡전서]문인록에 85명의 이름이 나온다. 한영우 전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펴낸[율곡 이이]에 따르면 “이들은 율곡이 서울이나 파주에서 기른 문인들, 또는 해주 석담에서 가르친 문인들”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문인은 먼저 자운서원 묘우에 종향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다. 사계는 과거 대신 추천으로 참봉을 거쳐 임진왜란 시기 현감과 호조정랑을 지냈다. 인목대비 폐비 논의가 일어나자 낙향해 예학(禮學)을 연구했다. 또 제자를 길러 아들 김집을 비롯해 송시열·송준길 등을 배출한다. 이들은 서인과 노론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조헌(趙憲, 1544∼1592)은 선조 시기 공주 제독관을 지내다가 동인들이 율곡을 추죄(追罪, 일이 끝난 뒤 죄를 다스림)하자 극력 반대하다가 길주로 유배 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문묘에 배향됐다. 정엽은 참찬을 지냈으며[근사석의][주역석의]등을 남겼다. 또 이귀는 김유와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좌찬성에 올랐다. 이귀는 인조 시기 해주에서[성학집요]를 간행해 임금에게 읽어 보기를 권하기도 했다. 이 밖에 인조 시기 영의정에 오른 윤두수의 아들 윤방 등이 대표적인 제자이다. 율곡의 문인 상당수는 성혼과 송익필의 제자이기도 하다. 율곡과 성혼, 송익필이 제자를 공유하는 학단을 형성한 것이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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