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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35)] 소음과 단절된 세상이 준 깨달음 

깊은 고요 속에서 내면의 공포를 마주하다 

사막은 완전한 무음(無音)의 세계… 고독 극복이 최대 시련
소리에 예민해질수록 내면의 집착 버리고 온전한 평화 누리게 돼


▎사막은 때때로 소리가 사라진 무음의 세상이 된다. 유일한 소음은 오로지 나 자신이 내뿜는 숨소리뿐이다.
내가 여행을 떠났을 즈음, 모하메드의 엄마가 나의 윈터캐슬 옆으로 그녀의 염소와 여타 가축들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 사막생활을 더 편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게르나스를 모하메드 엄마에게 맡길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홀가분했다. 나는 서울에서 두 달간(2014년 3월~4월) 열리는 사막전시의 테이프를 끊기 위해 서울을 가야만 했고, 또 새로운 ‘벌레 먹기’ 프로젝트를 위해 중국 벽지를 여행해야만 했다. 내가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근원적인 본향에 돌아온 듯한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나의 진짜 본향인 서울에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막 속의 나의 초라한 작은 캐슬이 실제적인 나의 고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게르나스가 거기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고, 마치 서러웠다는 듯이 이빨을 드러내며 낑낑거렸다. 내가 땅바닥에 앉자마자 게르나스는 자기 발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머리로 양반다리를 하는 내 허벅지를 밀쳐댔다. 더할 나위 없는 애정의 표시였다. 내가 돌아온 첫날부터 게르나스는 모하메드 엄마가 자기를 길러주었음에도 자기 진짜 주인은 나라고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없는 동안 게르나스는 매일 밤이면 모하메드 엄마의 캠프로부터 사라졌다. 그리고 반드시 나의 윈터 캐슬 문 앞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나는 내가 와디 럼을 떠날지라도, 게르나스의 나머지 생애 동안 그와 같이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나는 2014년 5월 한 달 내내 윈터 캐슬에서 게르나스와 함께 지냈다. 모하메드 엄마의 캠프에 있는 낙타와 염소, 그리고 야생의 여우, 고슴도치, 다양한 새들, 도마뱀, 벌레들과도 친구로 지냈다. 나의 윈터 캐슬 생활환경은 꿈이 실현된 것과도 같은 이상적인 것, 다시 말해서 근대문명의 안락함과 반문명적인 광야의 고적이 결합한 그 무엇이었지만, 실상 이 5월 한 달은 심리적으로 매우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막을 다른 광야와 구별 지우는 가장 으뜸가는 요소, 그것을 말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일런스’였다.

사막에서는, 때로는 정말 무음(無音) 상태이기 때문에, 오직 나 자신의 숨소리만 크게 확대되어 들린다. ‘사일런스(silence)’는 한국말로 번역하기도 어렵다. ‘고요함’이라고 번역되는 상태는 보통 조용하고, 안락하고, 평화롭다는 느낌과 직결될 것이다. 그러나 사막에서 느끼는 사일런스는 처음에는 괴롭기도 하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숨 쉬는 소리뿐인 사막의 고요


▎윈터 캐슬의 야경. 쏟아질 듯 밝은 별들이 밤하늘을 촘촘히 밝히고 있다.
내가 사막에 처음 왔을 때, 소리가 완벽하게 결여된 상태라고 하는 것은 정말 낯선 것이었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노래한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는 그 나름대로 의미를 던져주는 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사막의 무음은 그런 사일런스와도 성격이 다르다. 한국의 고승들이 암자에서 느끼는 침묵과도 다르다. 그 침묵에는 온갖 자연의 합창이 녹아 있다.

사막의 완벽한 무음에 적응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매우 큰 도전이었다. 만약 그대가 해변이 있는 산악지대에서 자라났다고 한다면, 그대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 새들의 지저귐, 파도의 밀리는 소리 등, 다양한 자연의 소리에 대해 친근감, 이완감, 휴식의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진짜 사막의 정적? 거기에는 나라는 존재의 생명, 그것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은 매우 공포스럽고, 신경을 갉아먹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때로 사막의 사일런스는 너무도 경험치 못했던 것이라서, 나는 모든 사유를 상실해버린다. 아주 작은 소음에도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내 신체가 만드는 소리를 포함하여. 소리의 결여에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사막에서 내가 감내해야만 하는 최대의 도전이었다. 그 사일런스야말로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붙들어두었던 사막의 힘이기도 했다.

최초로 내가 경험했어야만 했던 몇 달의 강렬한 도전 후에, 나는 내 신체의 소음이나 신경의 고조에서 오는 불편감에서 점차 해방되어갔다. 그러자 나는 사일런스야말로 나의 존재의 모든 경계를 지워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처한 환경 전체와 친밀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막의 광활한 파노라마는 무한정으로 개방된 공간과 친숙한 삶의 공간이 하나로 융합되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곧 또 하나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내가 사일런스의 광막한 개방성에 홀로 존재하는 고독의 안락을 향유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 이후로는 소음이 상존하는 어떠한 곳에도 거하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소리에 매우 민감해져서, 내가 사막에 익숙하기 이전에는 그토록 쾌적하게 느꼈던 해변이나 산장을 싫어하게 되었다. 존재 밖에서 진입하는 여하한 소리도 다 억압적이었다.

도시에서 내 삶을 우울하게 만들고 불건강하게 만드는 소음공해를 증오하게 되었다. 유럽이나 아시아의 문명화된 평범한 공간 속으로 여행하면서, 완벽한 사일런스와 존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개방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은 사막밖에 없다는 것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빨리 사막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때로는 죽을 때까지 사막에서 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4년 5월, 바로 그달, 윈터 캐슬에서 삶의 궤도가 다시 정착되어가고 있을 그즈음에 사일런스 속에서 사는 나에게 좀 이상한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주변 환경은 쾌적했고, 이웃과도 친하게 지냈지만, 온종일 홀로 산다는 것이 오히려 나를 외물(外物) 집착에 복속시켰다. 예를 들면 게르나스에게 감정적으로 과도하게 집착한다든가, 살림살이를 위하여 필요한 물건을 구해다 주는 모하메드 살라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모하메드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세속의 모든 집착을 벗어던지기 위해 사막으로 왔는데, 사막의 사일런스는 실제로 나에게 그 정반대의 결과를 부과하는 것이다. 사막에 있게 되면 선적(禪的)이 되어야 할 내가 오히려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고 집착적이 되는 것이다. 그 반대로 내가 사막을 떠나 도시로 나가면 처음에는 도시의 소음조차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요즈음은 사막을 벗어나 어디를 가도 우울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사막의 사일런스도 나를 옥죄고, 사막 밖 문명 세계의 소음도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기야말로 나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다. 내가 모하메드나 다른 베두인 사람들과 모종의 긴장감을 유지하거나, 지난날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서운하게 헤어진 것을 생각하면, 사막에서 홀로 있을 때면 그런 상념들이 머릿속을 돌고 또 돌아 사일런스를 참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사막의 사일런스 속에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보다 명료하게 듣는다. 그리고 그것은 반복된다. 그러니까 사실 화가 났을 때 사막에서 혼자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외부 소음이 사라진 뒤 겪게 된 고통


▎야외 서재에서 바라본 사막의 해넘이.
이런 방식으로 사막에서 사고의 덫에 걸리면, 사막 밖에서도 소음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막 안에서도 내면의 부질없는 소용돌이 때문에 행복이나 안정을 찾지 못한다.

어느 날, 나는 이러한 상태가 고조되면서 멘탈의 붕괴현상이 일어났다. 나는 심한 오뇌(懊惱) 속에서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큰 바윗돌을 절벽 아래로 던졌다. 물론 그 아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그런 짓을 하기를 멈추었을 때, 엄청 큰, 고음의 신음 같은 것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것은 사막에서 울려 퍼지는 초자연적인 힘의 방출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거대한 소리에 충격을 받고 산꼭대기에서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냥 멍하게, 혼란 속에서 석양의 파노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충격을 받은 내 뇌가 특별한 소리를 내는 것으로 귀에서 들리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소리는 환각이 아닌 리얼한 것이었고, 내 생애에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다시 체험해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외부 소리가 없이 내부에서 음을 감지하는 현상에 대하여 ‘티니터스(tinnitus)’라는 의학 용어까지 있다고는 하지만, ‘이명(耳鳴)’이라는 단순한 말로 해석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옛 시절의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티니터스를 신성에 대한 감수성, 즉 접신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현상에 현혹되다 보면 종교를 새로 세울 수준의 미스틱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교회나 계룡산보다는 일반상식의 삶의 자리를 더 사랑한다.

이렇게 고뇌에 빠져있을 때, 우연히 나는 나의 모교인 매사추세츠 앤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오는 6월 모교 방문의 리유니언 파티에 나의 모험의 여정을 소개하는 연사로서 초청하겠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고독의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였기에, 나는 이 초청을 내가 온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때가 되었다는 한 표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년 반이나 비워둔 뉴욕의 집으로 가보고 싶은 향수를 느꼈다.

사막의 슬럼프에서 구원해준 초청장


▎이스트 리버를 가로지르는 맨해튼 브리지와 도시의 야경. 고요한 사막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도시에 대한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나는 바위산 꼭대기로 올라가 3G 이동 통신 서비스를 통해서 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왕복 비행기 표를 무난히 살 수 있었다. 2014년 6월부터 8월까지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게르나스를 모하메드의 엄마에게 일단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맨해튼의 한복판에 다시 있게 된 며칠간은 모든 것이 초현실주의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보스턴 근교로 올라가 졸업 후 15년 만에 나의 모교를 방문했다. 나의 동급생 친구들은 이미 풀타임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어 있었고, 부양해야 할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사막에서 감행하는 모험들을 경외감과 찬탄 속에서 경청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매우 수줍은, 한국에서 온 국제 학생일 뿐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미국 학생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눈에 띄었다 해도 그냥 조용한 공부벌레 정도였다. 나는 평상시에도 영어 단어를 항상 외우고 다니느라 단어장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그토록 멋있어 보이던 인기 만점의 학생들이 삶의 루틴에서 지루함을 못견디는 눈초리로, 나를 신나는 모험으로 가득 찬 특별한 삶을 영위하는 탁월한 개인으로 바라보게 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삶의 현실에서 보자면 하나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랄까, 나는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사랑하는 파트너를 가진 안정된 삶, 자식들, 웃음이 넘치는 단란한 가정, 이런 것들을 가지지 못한 데서 지금 나의 현재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면의 갈등세계와 싸우고 있는 실험적 삶의 방식이 그들에게 그토록 신선한 영감 같은 것을 던져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하나의 신선한 시선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애초에 왜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하고자 했는지에 관한 평범한 이유를 새삼 상기시켰다. 내가 자라나면서 타 위대한 예술가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듯이, 내가 얻은 영감을 내가 사는 세계에 다시 돌려주어야겠다는 의도가 내게는 분명히 있었다. 내가 사막에 처음 갔을 때 안정적으로 집필할 수 있는 책상을 셋업 하느라 그토록 고생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막의 생활을 기록하지 않고 그저 사막의 먼지로 풍화되어 사라져버린다면, 나의 체험의 전모는 예술가의 영감으로 역사의 지평에 남지는 않을 것이다.

그해 여름 뉴욕에서 두 달을 보내고 나니, 나의 심리상태가 사막에 대해 상당한 거리 감각 같은 것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옛 친구들과 다시 연락하고 아름다운 날씨와 도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벤트들을 향유하면서 나는 내가 옛날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도시적 삶의 가치에 대해 충만한 느낌이 들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스카이프 인터넷 화상 전화로 모하메드 살라와 이따금 연락을 취했다. 게르나스가 잘 지내고 있는지, 내 윈터 캐슬이 안전한지 등을 체크했다. 그러나 모하메드는 내가 맨해튼의 도시 삶에 다시 적응되어 가고 사막으로부터 점차 멀어져가고 있다고 느끼자, 부러움과 동시에 원망 같은 것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모하메드가 나에게 어떤 집착 같은 것을 느낀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정상적인 것이다. 나는 그들의 단조로운 지루한 삶의 환경에서 보자면 특별한 사람이다. 게다가 나는 결코 늙었거나 매력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여자이다. 그가 어리지만 나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점차 느끼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만했다.

어느 날, 드디어 비디오 채팅을 통해 모하메드는 아주 심각한 얼굴을 곤두세우며, 내 개를 내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게르나스를 아주 먼 빌리지로 데려가서 그곳에 그냥 버리고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큰 충격과 불신 속에서 그에게 소리쳤다. “어떻게 네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니? 게르나스는 내가 사랑하는 개잖아. 내 거란 말야.” 그는 대답했다. “그놈은 개일 뿐이야. 나는 개를 원치 않는단 말야!” 내가 훌쩍이며 원망을 표현했을 때, 모하메드는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이야! 개는 여기 있어. 그런데 나는 이 개가 싫단 말야!”

이런 대화를 나누는 순간, 이미 나는 세심한 탈출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게르나스와 더불어 안전하게 빠져나와야 한다!

홀로 동떨어진 게르나스 구출 계획


▎사막의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홀로 남게 된 게르나스를 암만의 동물 보호소에 맡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하메드가 그토록 끔찍한 농담을 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엄마가 병환이 깊어져 사막에서 다시 빌리지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이사를 하면서 가축을 모두 데려갔는데 가축을 지키는 라방(Laban)이라는 하얀 똥개와 함께 게르나스도 같이 가야만 했다. 그러니 빌리지의 폐쇄된 공간에 두 마리의 큰 개가 같이 있으니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베두인들은 개똥을 치우는 법이 없다. 그리고 게르나스는 집 밖을 홀로 나가게 되면 항상 다칠 우려가 있었다. 빌리지 사람들은 개를 보기만 하면 못살게 군다. 나는 게르나스를 그러한 환경에서 가급적이면 빨리 탈출시킬 필요가 있었다.

뉴욕에서 와디 럼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게르나스를 사막으로부터 암만에 있는 동물보호센터로 이송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센터는 영국인 할머니가 운영하는 시설이었는데 개의 호텔시설이 있었다. 나는 픽업트럭을 구해 개를 태우고 내가 직접 암만까지 4시간을 같이 가기로 했다.

이 계획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나는 뉴욕에서 전화로 모하메드에게 게르나스를 딴 사람에게 양도하기로 했으니 개에 관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가 게르나스에게 나쁜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와디 럼 사막에 혼자 있을 것이라고 모하메드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와디 럼으로 돌아왔을 때, 게르나스가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마음이 놓였다. 나는 곧 픽업트럭을 불렀다. 그 전날 밤, 나는 모하메드의 아버지 살라에게 나의 계획을 말했더니, 살라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기네 개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기의 부인이 염소 지킴이로서 게르나스를 필요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살라에게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게르나스와 헤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이 개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암만의 안전한 시설에 맡겨두었다가 미국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단지 모하메드에게 내가 떠난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개를 데려간 후에 모하메드에게 직접 전후 사정을 다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드님에게 비밀로 해주십시오.”

내 말을 듣고 살라는 금세 태도를 바꾸어 게르나스를 데려가도 좋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게르나스와 함께 스트레스가 많은 여행을 해야만 했다. 트럭에 갇혀 고속도로로 먼 길을 가는 것도, 도시의 빌딩 밀림을 보는 것도 그에게는 처음 겪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동물클리닉의 냄새를 맡는 것도 그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떠오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르나스는 진정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나는 그를 그 센터에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전문가들에게 맡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게르나스는 그 보호시설에 4달을 머물렀다. 나는 크로아티아에서 전시회를 했고 또 이탈리아에서도 여러 모임을 가져야 했기 때문에 두 달 동안 유럽여행을 했다. 그리고 나의 사막생활을 종결짓기 위해 나는 혼자서 윈터 캐슬에 두 달 동안 머물렀다.

윈터 캐슬에서 혼자 지낸 마지막 두 달이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데드라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내 모든 노력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 게르나스가 없기 때문에 진정한 고존(孤存)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알 바 없지만, 나는 개념들의 협박에 시달리지 않고 완벽한 평온 속에서 사일런스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정의 말미에 받아들인 사막의 침묵


▎칠흑 같은 어둠과 적막만 감도는 야외 서재는 모든 감각을 일깨워 집필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그리고 나의 감관이 매우 건강하게 섬세해졌다. 신체적으로도 아주 건강해졌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보다 확실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어학 공부, 자연관찰, 그리고 집필 작업이 놀랍게 진척되었다. 사막생활 초기의 흐트러진 의식상태와 달리, 서재 동굴에 앉아 있기만 하면 문장이 머릿속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때로는 석양의 해가 가라앉은 후에도 작은 장작불을 지펴가며 태양광 발전으로 충전한 랩톱의 자판을 맹렬하게 두드렸다. 맨해튼 아파트에서 집필하는 것보다도 효율이 높았다.

주변 세계에 대한 부질없는 공포가 사라졌고 소음도 나를 더는 괴롭히지 않았다. 가끔 불현듯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놀람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의 청각은 더욱 민감해졌지만, 그것에 의해 혼란스러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소리를 더욱 흠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참새나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나의 귀를 두드리면 그것은 고귀한 생명의 합창으로서 나를 위로해주었다.

소리에 민감해지면서 나는 까마귀의 지능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먼 거리에서 서로를 부르는 소리를 최소한 열 종류는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매우 복잡한 그들의 언어상징체계였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심해서 나가보았는데, 까마귀가 집단으로 여우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냥 재미로 괴롭히는 것이다. 타종을 재미로 괴롭히는 동물은 대체로 머리가 비상하다.


▎사막 생활이 끝나갈 무렵,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홀로 사막의 바위산을 등반했다.
나는 신체적으로도 최고의 건강을 유지했다. 어느 날 나는 커다란 백팩에 물과 음식을 가득 싣고 3일 동안 트레킹을 떠나기로 했다. 오프라인 구글 위성지도를 유일한 가이드로 삼았다. 그러나 사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혼자 트레킹을 하다가 그만 바윗길에서 굴러떨어져 무릎을 다치고 말았다. 늦은 오후였다. 내 주변에 영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치는 차가 있을 수도 없는 곳이었다.

새로운 자아를 품고 도시로 돌아오다

그제야 나는 사막을 혼자 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깨달았다. 특히 응급상황에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5시간을 걸어서 윈터 캐슬에 캄캄한 밤중에 도착했다. 그날 나는 무거운 큰 배낭을 걸머지고 15시간을 걸었다. 모래 위를 걷는 것은 맨땅을 걷는 것보다 두 배는 더 힘들다.

전화와 인터넷 동글에 시그널을 받기 위해 매일 바위산을 올라가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자, 나는 인스타그램에 글과 사진을 올리기로 했다. 이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 사는 친구들이 내가 매일 무엇을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나는 ‘콜미 누라(Call Me Noora)’라는 블로그를 만들고 거기에 나의 글을 올렸다. 나의 새로운 체험에 하나의 타이틀을 부여하고, 일종의 퍼포먼스 아트 프로젝트로서 콘텍스트를 프레임 하는 작업은, 곧 나의 세계와 재결합을 시도하고, 나의 정상적 멘탈리티를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베두인들은 나를 사막에서 ‘누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누라는 아랍말로 ‘빛’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내가 도시의 삶으로 되돌아왔을 때 또 하나의 자아(alter-ego)를 형성하게 했다. 나는 사막생활을 청산하고 떠나면서, 이와 같은 글을 블로그에 남겼다.


▎휴대전화 신호를 포착하기 위해 바위산 꼭대기 이곳저곳을 서성이고 있는 필자.
2014년 11월 말, 누라는 그녀의 컴퓨터와 몇 개의 아이템만을 가볍게 배낭에 싣고 떠났다. 그냥 떠났다. 그녀의 모든 것과 창조물을 그대로 두고 떠났다. 그녀가 있던 곳에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흔적과 추억만 사막의 모래 위에 뒹굴고 있을 것이다.

콜 미 누라는 책으로 구체화할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장르를 뒤섞는 창조적 시도가 될 것이다. 예술과 삶의 경계를 없애고, 포스트 모더니티를 원시 세계로 가져가고, 또 원시 세계를 탈현대 속으로 융합시키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나는 사막의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떠났다. 나의 체재의 마지막 두 달 동안에 나는 나의 감정의 집착으로 인한 모든 내면의 몸부림을 깨끗이 극복했다. 나의 존재, 그 전체가 사막의 신령한 기운으로 휘감겨졌다. 나는 더 완숙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내가 어디 있든지 침착할 수 있고, 만족할 줄 알게 되었다. 나의 밖의 세계가 아무리 요동치더라도 나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평화는 해탈이 없이 획득될 수 없다. 평화는 삶의 모든 비극을 포섭한다. 평화는 인간의 모든 편협함을 파괴한다. 평화는 영구성에 대한 직관이다. 모든 비극은 삶의 이상을 드러낸다. 삶의 비극은 절대 무용하지 않다. 비극의 효용은 평화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비극을 체험할 때만이 감정은 정화된다. 감정을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청춘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내가 사막을 떠난 지 수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나는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윈터 캐슬로 돌아간다. 게르나스는 지금도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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