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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기획] 피날레 준비하는 프로야구 ‘원년둥이들’ 

아직은 야구도, 꿈도 끝나지 않았네! 

이대호·김태균·오승환·정근우·추신수 82년생들 출격 채비
전성기 지났지만 여전히 팀내 비중 큰 주춧돌로 주목받아


▎1982년생으로 올해 만 38세가 된 이대호·김태균·오승환· 정근우·추신수(왼쪽부터)가 명예로운 피날레를 준비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연합뉴스
김태균(한화 이글스)과 이대호(롯데 자이언츠)가 한국프로야구(KBO리그)에 데뷔한 2001년, 그들은 ‘원년둥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KBO리그가 출범한 1982년 출생한 이들이 만 19세가 돼 프로에 입단했다는 뉴스를 듣고 야구팬들은 깜짝 놀랐다. “강속구보다 시간이 더 빠르다”고들 했다.

추신수(텍사스 레인저스)는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품었다. 오승환(삼성 라이온즈)과 정근우(LG 트윈스)는 대학 진학을 선택해 4년 후 프로에 데뷔했다. 이들은 KBO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가진 동급생들이다. 한국과 일본·미국, 그리고 각종 국제대회에서 활약한 1982년생 선수들을 팬들은 ‘황금세대’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또 19년이 지났다. 만 38세, 불혹의 나이를 앞둔 이들에게 ‘원년둥이’, ‘황금세대’ 같은 별명은 더는 어울리지 않는다. ‘골든 보이’는 어느새 ‘올드 보이’가 됐지만 아직까지 후배들과 ‘힘 대 힘’으로 경쟁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2020년 야구 개막이 늦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이들은 혼신을 다해 야구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써 내려 가고 있다.

2000년 8월 캐나다 에드먼턴에서는 제19회 세계청소년 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전 세계 최고의 고교 선수들이 모인 대회에서 한국은 미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은 1981년 제1회 대회에서 선동열(전 국가대표팀 감독)을 앞세워 우승한 적이 있다. 1994년에는 이승엽(전 삼성)의 활약으로 두 번째 챔피언에 올랐다. 당시의 우승은 기적이었다. 세계 최강팀 미국이나 쿠바를 이기는 건 1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었다.

2000년 우승은 조금 달랐다. 어릴 때부터 프로야구를 보고 자란 이들은 세계 어느 나라 대표팀과 맞붙어도 주눅 들지 않았다. 기술은 물론 파워와 체격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예선전과 준결승전에서 힘을 뺀 한국과 미국은 결승에서 난타전을 벌였다. 한국은 선발투수 이동현(전 LG)이 흔들리자 아껴둔 ‘에이스’ 추신수를 1회부터 마운드에 올렸다. 몸이 덜 풀린 채로 추신수는 2이닝 동안 2실점했다. 1대 4로 지던 3회에는 이대호가 투수로 등판했다. 4번 타자 이대호는 마운드에서도 4와 3분의 1이닝 2실점으로 잘 던졌다.

연장전으로 이어진 승부. 중견수를 맡고 있던 추신수가 11회 마운드에 다시 올라 2와 3분의 2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완벽하게 막았다. 타선에서는 2번 타자 정근우, 3번 타자 김태균이 힘을 보탰다.

연장 13회 접전 끝에 한국이 9대 7로 이겼다. KBO리그가 출범한 해 태어난 소년들이 야구 종주국 미국을 꺾고 세계 챔피언에 오른 순간이었다. 에드먼턴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까까머리 고교생들은 고(故) 조성옥(1960~2009) 감독을 헹가래쳤다.

1982년생 선수들은 어려서부터 미국·쿠바·일본 등 세계 강호들과 맞선 경험을 쌓았다. 큰 꿈을 꾸었고,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고, 세계와 경쟁해 이긴 밀레니얼 세대다. 훗날 이대호와 정근우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으로 활약했다. 추신수·김태균·오승환은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멤버였다.

영화보다 극적인 ‘에드먼턴의 기적’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선수들이 김복수 코치를 헹가래치고 있다.
이들은 단지 나이만 같은 게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특별한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 1991년 야구 명문 부산 수영초로 전 학한 추신수는 덩치 큰 친구를 만났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믿기지 않는 친구에게 추신수는 “니, 야구 해볼래?”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추신수에게 이끌려 야구를 시작한 친구가 이대호다.

훗날 추신수는 부산고, 이대호는 경남고로 진학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둘은 부산 라이벌 고교의 4번 타자이자 에이스로 경쟁했다.

정근우는 추신수의 부산고 동창이다. 키가 작은 그는 친구들만큼 주목받지 못했지만 악바리 같은 플레이로 유명했다. 부산고의 주장이었으며, 에드먼턴 대회에서도 주장을 맡았다.

김태균과 이대호는 같은 오른손 타자다. 타고난 장사인데다 정확성까지 갖춘 점도 닮았다. 이승엽이 일본 프로야구로 떠난 2004년 이후, 둘은 KBO리그 최강자타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한국 야구가 최고의 국제 경쟁력을 자랑한 시기의 주인공들이 1982년생이었다. 2013년에는 이들의 성장과 성공 스토리를 담은 영화 ‘에드먼턴 키즈(Edmonton Kids)’가 제작될 예정이었다. 여러 사정으로 끝내 영화화되지 못했지만, 이들이 한국 야구 역사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다.

추신수는 에드먼턴 대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수였다. 왼손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던 그는 최고 시속 150㎞가 넘는 빠른 공을 던졌다. 메이저리그(MLB) 스카우트들이 추신수를 가장 주목했다. 미국과의 결승전에서 호투한 덕분에 추신수는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추신수는 예상대로 미국에 진출했다. 시애틀 매리너스가 당시로는 파격적인 계약금(135만 달러, 현재 환율 약 16억원)을 추신수에게 제시했다. 시애틀은 예상외로 ‘투수 추신수’가 아니라 ‘타자 추신수’를 선택했다. 당시 국내외 스카우트들 대부분은 추신수가 프로에 가면 당연히 투수로 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시애틀은 야수로서 추신수의 재능을 더 높게 평가했다.

추신수는 마이너리그에서 7년 동안 ‘눈물 젖은 빵’을 씹었다. 친구들이 KBO리그에서 성공하고 억대 연봉 선수가 되는 동안, 그는 월 1000달러(약 120만원)를 벌었다. 언어와 환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누구보다 많이 노력했다. 누구보다 오래 고생했다.

19년이 흐른 2020년, 추신수는 MLB 30개 구단 전체에서 7번째 고령 선수가 됐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고생이 심했던 만큼 그는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이뤘다. 추신수는 2008년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됐고, 6년 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다. 텍사스와 7년 총액 1억3000만 달러(약 1610억원)에 맺은 추신수의 계약은 올해로 끝난다. 그가 내년 이후 MLB에서 뛸 수 있을지는 보장되지 않았다. 추신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난 항상 여기서 최선을 다한다. 그게 내 야구 철학”이라고 말했다.

‘추추트레인’의 꿈


▎2009년 WBC 대표팀에 발탁된 이대호(앞줄 오른쪽)와 김태균(앞줄 왼쪽)이 함께 전동 카트를 타고 있다.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추신수는 얼리 버드(Early-bird, 새벽 형 인간)로 유명했다. 캠프 기간에는 새벽 5시에 가장 먼저 출근한다. MLB 스타가 된 후에도 구장 관리인보다 일찍 출근하는 선수로 유명했다. 베테랑이 돼 루틴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추신수는 “여유를 부리는 게 어색하다. 늘 하던 대로 일찍 출근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성실성과 함께 추신수의 야구를 떠받드는 기둥은 근성이다. 추신수는 타석에 가까이 붙어서, 투구를 끝까지 보며 타격한다. 공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는 MLB 진출 후 사구(死球)를 150개나 맞았다. 현역 선수 중 최다 기록이다. 사구 7개를 더 맞으면, 추신수는 130년 MLB 역사에서 19번째(현재 23위)로 사구를 많이 맞은 선수로 기록된다.

악바리 추신수는 MLB 통산 타율 0.275를 기록 중이다. 아시아 선수로는 MLB 최다인 213홈런을 때렸다. 통산 도루도 150개다. 현대 야구가 가장 가치 있는 기록으로 인정하는 출루율은 통산 0.377에 이른다.

2016년 추신수가 부상에 시달리며 부진했을 때, 그와의 계약이 실패라는 비판이 미국에서 나왔다. 그러나 추신수는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20홈런 이상을 때렸고, 팀 내 최고 출루율을 기록했다.

추신수가 MLB에 등장했을 때 팬들은 그에게 ‘추추트레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의 성(姓)이 미국인들에게는 기적소리(Choo)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2008년 이 별명을 처음 얻었을 때 추신수는 “추~”라는 응원을 “우~”라는 야유라고 오해한 적도 있다.

육중하고 전진만 하는 기차처럼 그는 많은 위기와 비난을 뚫고 기차처럼 앞으로 달렸다. 그 결과 추신수는 한국 야구 선수로는 가장 많은 돈을 벌었고, 가장 뛰어난 기록을 남기고 있다.

2009년 WBC를 앞두고 이순철 대표팀 타격코치는 고민에 빠졌다. 이대호와 김태균 중 누구를 4번 타자로 쓸지 결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4번 타자’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에 팀을 구성하는 동시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특수했다. 이대호와 김태균 모두 힘과 기술을 갖춘 오른손 타자다. 유형뿐 아니라 기량도 비슷했다.

결국 두 선수는 4·5번 타순에 번갈아 배치했다. 이 코치는 “둘이 친구인 동시에 라이벌 의식도 대단하다. 매일 타순을 바꾸다가 실전 경기에서는 컨디션 좋은 선수를 4번 타자로 기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김태균이 4번 타자로 낙점받아 대회 홈런 공동 1위(3개), 타점 1위(11개)에 올랐다.

천안북일고 출신 김태균은 2001년 1차 지명을 받고 한화에 입단했다. 19세 나이에 88경기만 뛰면서도 20홈런을 때려내며 신인왕에 올랐다. ‘2년 차 징크스’에 빠진 2002년을 빼고는 평균 타율 3할과 20홈런을 꾸준하게 기록했다. 2008년에는 홈런왕(31개)을 차지했다.

김태균은 2009년 WBC를 계기로 이듬해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지바 롯데 마린스가 2년 7억엔(78억원)을 투자했다. 김태균은 2010년 21홈런을 기록, 이승엽 이후 일본에서 한 시즌 20홈런을 돌파한 두 번째 타자가 됐다.

2012년 한화로 복귀한 김태균은 타격왕(0.363)에 올랐다. 장타자 이미지가 강했던 김태균이 리그에서 가장 높은 정확도를 보인 것이다. 홈런왕과 타격왕을 모두 가져본 타자는 KBO리그 역사상 이만수(1984년 삼성)와 이대호(2006, 2010년 롯데), 그리고 김태균뿐이다.

살아있는 전설, 이대호·김태균


▎2009년 WBC 1라운드 대만과의 경기에 앞서 손뼉을 마주치고 있는 이대호·김태균·추신수· 정근우(왼쪽부터).
김태균은 이대호와 함께 KBO리그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은 선수 중 하나다. 2012년부터 4년 동안 매년 연봉 15억원을 받았다. 2016년 다시 FA가 돼 4년 총액 86억원의 계약에 성공했다. KBO리그에서만 150억원 이상을 번 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김태균의 많은 연봉을 두고 팬들 사이에서는 ‘오버페이’ 논란도 있었다.

최근 파괴력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김태균은 KBO리그 역사에 남을 오른손 타자임이 틀림없다. 친구 추신수처럼 김태균은 높은 출루율(통산 0.424)을 기반으로 한 타격을 자랑한다. KBO리그 통산 홈런 11위(309개), 안타 4위(2161개), 타점 3위(1329개)에 올라 있다. 안타와 타점 부문에서는 역대 오른손 타자 중에서는 단연 1위다.

선수의 능력을 종합적으로 측정하는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를 보면 그의 가치가 잘 드러난다. 통산 WAR에서 김태균은 KBO리그 역사상 5위(70.33, 통계사이트 스탯티즈 기준)다. 17년을 뛰며 평균적인 선수보다 팀에 70.33승을 더 안겨줬다는 의미다. 1위 선동열(107.07), 2위 양준혁(87.22), 공동 3위 이승엽·송진우(87.22) 다음이 김태균이다.

이대호는 롯데에 투수로 입단했다. 몇 달 만에 타자로 전향한 그는 친구 김태균이 신인왕을 받았던 2001년에는 거의 활약하지 못했다.

이대호는 2004년 20홈런을 터뜨리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타율(0.336), 홈런(26개), 타점(88개) 타이틀을 따냈다. 김태균이 일본으로 떠난 2010년에는 도루를 제외한 타격 7관왕에 오르며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다.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이승엽과 함께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이대호는 2012년 2년 7억엔을 받고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에 입단했다. 2년 전 김태균과 같은 조건이었다. 이대호는 일본 첫 시즌 퍼시픽리그 타점 1위(91개), 홈런 2위(24개)에 올랐다. 2014~15년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6년 MLB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뛰면서도 훌륭한 성적을 냈다. 일본 4년 동안 98홈런, MLB 1년 동안 14홈런을 날렸다.

이대호는 2017년 롯데로 복귀, KBO리그 역사상 최고액인 4년 150억원 계약에 성공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이미 150억원 이상을 벌었던 그도 ‘야구 재벌’이다.

이대호는 데뷔 후 주전을 차지하기까지 3년이 걸렸고, 해외에서 5년이나 뛰었던 까닭에 KBO리그 누적 기록은 김태균에 미치지 못한다. 통산 홈런(312개, 9위) 정도만 앞서 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그리고 해외 성적까지 포함하면 이대호는 KBO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오른손 타자로 평가받는다.

이대호의 4년 계약은 올해 끝난다. 그도 김태균처럼 몸값 논란에 시달린다. 특히 지난해 16홈런에 그치자 팬들의 실망감이 커졌다. 최근 KBO리그 구단들이 적극적으로 비용 절감을 시작하고 있어, 이대호의 내년 계약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올 시즌을 시작하면서 이대호는 “내 기량은 아직 자신 있다. 지금까지 계약을 생각하고 야구를 한 적은 없다.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4년 계약이 끝난 김태균은 찬바람을 미리 맞았다. 홈런포는 예전 같지 않지만 그는 지난해 한화에서 유일하게 3할 타율을 때린 타자였다. 한화와 2년 계약을 논의하던 김태균은 자신이 먼저 1년(총액 10억원) 계약을 제안했다. 은퇴를 앞둔 선수는 계약 기간을 늘리려고 애쓰지만 김태균의 셈법은 달랐다. 그는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각오다. 1년 뒤 재평가를 받겠다”고 말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무리 투수인 오승환은 청소년 대표 멤버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대표팀 경력은 독보적이다. 2006년 WBC를 통해 친구들보다 먼저 성인 대표팀에 데뷔했다. 친구들이 대표팀을 떠난 뒤에도 2017년 WBC까지 태극마크를 달았다.

경기고와 단국대를 졸업하고 2005년 삼성에 입단한 오승환은 신인이라고 믿기 어려운 성적을 거뒀다. 구원 투수로 10승 11홀드 16세이브, 평균자책점 1.18. 선동열·임창용 이후 가장 강력한 마무리 투수의 등장이었다.

오승환은 2006년 KBO리그 사상 한 시즌 최다 세이브(47개)를 기록했다. 팬들은 무표정한 얼굴의 그를 ‘돌부처’, 그가 던지는 강력한 공을 ‘돌직구’라고 불렀다.

부상 말고는 오승환의 적수가 없었다. 2014년 일본 한신 타이거즈에 입단한 그는 2년 연속 센트럴리그 구원왕에 오른 뒤, 2016년 MLB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유니폼을 입었다.

다시 도전하는 오승환과 정근우


▎데뷔 시즌이던 2005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에서 팀 우승을 이끌며 MVP에 선정된 오승환이 동료에게 샴페인 세례를 받고 있다.
오승환의 ‘돌직구’는 MLB에서도 통했다. 빅리그 첫해 19세이브 14홀드, 평균자책점 1.92를 올렸다. 2017년에는 20세이브를 기록했으나 후반기에 부진했다. 2018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콜로라도 로키스를 거쳐 지난해 삼성으로 돌아왔다. 오승환은 31세 젊은 나이에 이미 KBO리그 통산 세이브 1위(277개)에 올랐다.

오승환은 한·미·일 통산 400세이브까지 단 1세이브만을 남겨 두고 있다. 지난해 8월 수술받은 오른 팔꿈치가 잘 회복된다면 그는 여전히 유력한 구원왕 후보다. 7년 만에 KBO리그에 돌아온 오승환은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를 수술과 재활훈련으로 잘 이겨냈다. 올해는 과거보다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정근우는 해외에서 뛰지 않았지만 10년 이상 KBO리그를 대표한 선수다. 베이징올림픽과 WBC에서 빠르고 정교한 한국식 야구를 주도했다. 화려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근성 있는 플레이를 펼친다. 대표팀에서도 개성 강한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해냈다.

부산고-고려대 졸업한 정근우는 SK와이번스에 입단해 2007·2008·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2014년에는 김태균이 뛰고 있는 한화와 4년 총액 70억원에 계약했다. KBO리그 역대 2루수 중 가장 빛나는 커리어를 가진 그는 2018년 외야수로 이동했다. 30대 중반을 넘어서자 순발력이 떨어져 수비 범위가 좁아진 탓이다.

정근우는 2020년을 다시 2루에서 시작한다. 지난겨울 류중일 LG 감독이 정근우를 아직 2루수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 데려온 것이다. 정근우는 “다시 2루수에 도전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열정이 다시 꽃피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빛났던 ‘황금 세대’는 어느새 야구 인생의 황혼을 맞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그들도 30대 후반이 되자 에이징커브(Aging Curve, 나이가 들어 신체 능력이 저하되는 현상)를 피해 가지 못했다.

과거 같지 않더라도 이들의 현재는 충분히 빛난다. 추신수·이대호·김태균 모두 팀 내에서 그들을 능가할 후배들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오승환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정근우는 새 팀으로 이적해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정근우는 “지금까지 1982년생 친구들이 한국 야구의 핵심이었다. 모두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그들의 야구, 그들이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김식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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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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