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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8)] ‘정몽주 암살의 밤’과 역사의 아이러니 

역사의 패자는 명예까지 살해당해 

이성계 문병 온 날 정몽주 기습 결정, 고려 왕조의 2인자 비참한 최후
암살에 가담한 이들은 입신출세… 이후 정치적 격변 속에 입지 달라져


▎정몽주가 비극적 최후를 맞았던 선죽교. 2007년 개성 관광이 허용됐을 때, 한국 국민도 방문할 수 있었다.
역성혁명의 마지막 결정을 내린 것은 이방원이었다. 그와 함께 이성계파를 이끈 것은 이방과·이화·이제 등 이른바 전주이씨 4인방이었다.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는 이성계의 사위였다. 행동대원은 이성계의 휘하무장 조영규·조영무·고여·이부였다.

고여(高呂, ?-1402)는 고려시대 사료에 딱 한 번 등장한다. 조영무처럼 거의 무명 인사였다. 고여의 본관은 제주이다. 할아버지는 개성윤 고호(高灝)이고, 아버지는 병마절제사 고영수(高永壽)이며, 어머니는 찬성사 권현(權鉉)의 딸이다. 고호의 성명과 관력, 그리고 고영수의 관력은 사료에 없다. 고부는 군호가 고성군(高城君)이니, 강원도 고성에서 출생했을 것이다. 고영수는 [고려사절요]에 한 번 나온다. 공양왕 2년(1390) 1월, 누군가 조준의 집에 익명서를 던졌는데, “고영수가 우인열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고영수의 형 고영손이 재산을 다투다 동생을 무고한 것이었다. 고영손은 무고죄로 처형됐다.

우인열은 이성계보다 두 살 아래로, 고려 말 대(對)왜구전에서 이름을 떨친 명장이다. 그는 1388년 11월,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김저 사건에 연루됐다. 이 사건으로 이성계의 잠재적 라이벌인 주요 무장들이 다수 숙청됐다. 처음에 우인열은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결국 유배됐다. 고영손의 익명서는 그런 배경 아래에서 작성되었으니, 개경의 정치 상황에 정통했다. 다만 무명의 고영수를 우인열과 연관시킨 것은 음모의 개연성이 떨어진다.

고여, 이성계의 마지막 호위무사

친가와 비교할 때, 고여의 외가는 대단한 명족이었다. 어머니는 권현의 딸로서, 명문 안동 권씨였다. 권현의 6촌 동생이 권근이다. 고여는 권근의 7촌 조카사위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충선왕의 총신이자 공민왕을 옹립하고자 노력한 권준이다. 권준의 부친은 권보로서, 안동 권씨를 명문으로 확립한 인물이었다. 권현의 사위 중 한 명은 조선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된 김균(金稛)으로서, 고여의 이모부다. 김균의 절친이 조준이었다. 김균은 1360년 성균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준과의 친분 덕에 위화도회군 뒤 전법판서로 승진했고, 조선 개국공신으로서 종2품 중추원 부사에 올랐다.

종합해 보면, 고여의 가문은 개경의 정치 상황에도 밝았고 상당한 재산을 가졌지만, 이름 있는 가문은 아니었다. 고여 자신도 과거나 음직으로 출사하지 않았고, 재산을 바쳐 서리로 입신한 것도 아니다. [태종실록](1401년 2년 10월 16일) 졸기에 따르면, “고여는 무재(武才)가 있어 태상왕께 지우(知遇)를 받아 인월(引月)의 역사에 공이 있었다”고 한다. 무장의 자질이 뛰어난 고여를 이성계가 발탁한 것이다. 그리고 황산대첩 때 전공을 세웠다. 황산대첩은 고려 말 대왜구전에서 가장 빛나는 승전이자 이성계를 국가적 인물로 만든 전투였다.

고여는 그 이전에도 이성계의 휘하로서 종군했다. 우왕 11년(1385) 9월, 병선 150척 규모의 왜구가 함주 등, 동북면을 침입했다. 진포해전에서 왜구의 배 500척에 병력이 2만여 명이었으니, 1척 당 승선 인원은 대략 40명 정도였던 듯하다. 관음포 해전에서 왜구의 대선 1척에는 140여 명이 승선했다. 이를 보면 이때 왜구의 병세는 최소 6000명이 넘었다. 왜구의 발호로 동북면의 백성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 남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북면 상원수 심덕부를 비롯한 고려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역전의 명장 심덕부조차 창에 찔려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명덕에 대한 상반된 평가


▎충북 충주에 자리한 고여의 사당.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에 있다고 전해진다. / 사진:디지털충주문화대전
자신의 세력 거점인 동북면이 위험에 빠지자 이성계가 출병을 자원했다. 이때 이성계의 휘하로 종군한 무장 중에는 조영규, 그리고 산원 고여가 있었다. 산원은 중앙군 2군 6위의 정8품 무관직으로서, 1000명 단위의 부대 1령에 5인이 배치됐다. 산원은 200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중간 지휘관이다. 고여는 이성계가 직접 통솔하는 100명의 기병에 속했다. 이성계는 이 기병들을 거느리고 대담하게 왜구의 진영 한복판을 천천히 통과했다. 용맹을 과시한 것이다. 왜구들은 그 기세에 눌렸다. 이성계는 이두란, 고여, 조영규에게 적진에 접근해 적을 유인해 오라고 지시했다. 이들의 유인에 따라 왜구의 선봉 수백 명이 돌진해오자 전투가 시작됐다.([고려사] 열전 심덕부) 고여의 전투 능력이 이두란, 조영규급이었던 것이다.

1392년 4월 4일, 고여는 달아나는 정몽주를 추격해 직접 죽였다. 또한 그해 7월 16일 배극렴·조준·정도전 등 50인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됐다. 그 때의 관직이 전의감(典醫監)이다. 전의감은 궁중에 의약을 공급하고, 의학 교육, 의학 시험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그 장인 판전의감사는 정3품관이다. 정몽주를 격살할 때는 정5품 중랑장이었다. 고여는 제주 고씨 문충공파 고성군계(高城君系)의 시조가 됐다. 하지만 제주 고씨의 종문회 공식 홈페이지에는 그의 이름조차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인이 가장 추앙한 인물이 정몽주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여는 제1차의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을 때 이성계를 시종했다. 묘소도 함흥에 있다. 권력이 가면 사람도 간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조영무는 이성계를 버리고 이방원 편에 섰다. 고여는 마지막까지 이성계를 떠나지 않은, 이성계의 마지막 호위무사였던 셈이다.

이부(李敷, ?-1442)에 대한 기록도 소략하다. 고려의 사료에는 전혀 없고, [조선왕조실록]에만 단 9회 나온다. 이부는 조영규의 부하라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지만 그 이외의 사료에서 사실을 확인할 순 없다. 정몽주를 살해할 때, 이방원의 명령에 조영규가 앞장서고 다른 세 인물이 따랐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평민 출신인 조영규와 달리 이부는 평민은 아니었다. 이부의 본관은 공주이다. 공주이씨 세계도에 따르면 이부의 조부는 첨의정승 이사손(李思孫)이고, 아버지는 찬화공신 참지의정부사인 이서(李曙)다. 조부와 부친의 기록은 고려의 사료에 전혀 없다. 이부의 가문도 명문세족은 아니지만, 상당한 입지를 갖춘 가문으로 보인다.

조선개국 후 이서의 형, 즉 이부의 큰아버지 이엽(李曄)과 그 아들 6명이 모두 현달했다. 그 중 이엽의 아들, 즉 이부의 사촌형제인 이명덕(李明德)이 돋보였다. 그는 태조 5년(1396) 과거에 합격했는데, 태종이 이명덕을 신임했다. 태종 13년(1413) 이엽이 죽었을 때, 태종은 “이명덕은 충직하고 근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미두 20석과 종이 150권을 부의로 하사했다. 또 세종 즉위년에 정종과 태종이 잔치에서 술에 취해 손을 잡고 일어나 함께 춤을 췄는데, 기쁨에 찬 태종이 이명덕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곧 나의 지신사(知申事)”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덩달아 “이엽의 사람된 품이 순진하고 후하여, 경사를 쌓은 까닭으로 자손의 흥성함이 이에 이르렀다”라고 아버지까지 칭찬했다.

이명덕은 태종 18년 7월에 지신사가 됐다. 양녕대군의 폐세자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세종의 입장에서는 덕을 본 셈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명덕을 중용하지 않았다. 이명덕은 공조판서, 병조판서까지 올랐으나 정승이 되지는 못하고, 종2품 판중추원사로 관직을 마쳤다. 양녕대군을 배려해 세종이 조심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 7년(1425) 그가 대사헌일 때, 정월 초하루에 왕과 신하들의 축하 잔치를 열었다. 그런데 영돈녕 유정현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俯伏) 대궐에 올라갔다. 이명덕과 다른 신하들도 따라했다. 그러나 의례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다. 유정현이 지나치게 굴신한 것이다. 연회가 끝난 뒤 이명덕은 즉시 사헌부 관리를 소집해 유정현을 탄핵했다. 사헌부의 관리들은 “이것은 중대한 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요, 또 정월 초하루는 상하가 같이 즐기는 날인데, 하필이면 오늘 해야 되겠는가”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이명덕은 “대신이라고 두려워하는 것이냐”라고 공박했다. 문제는 이명덕도 유정현을 따라 부복했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불거지자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정월 초하루는 군신이 함께 즐기는 날이다. 정현 등의 실례는 매우 가벼운 것이니, 비록 뒷날을 기다려서 탄핵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고, 여러 정승이 술에 취하여 깨지도 않았거늘, 어찌 이다지 급급히 탄핵한단 말이냐. 또 자기 몸에 과실이 없어야 남을 책하는 법인데, 내가 들으니 사헌부에서도 또한 이러한 실례가 있었다 하니, 어찌 바르지 못한 자기로서 남의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하려 하는가?” 그리고 세종은 사헌부에 대해 “관직에 있는 자는 마땅히 사건의 동기를 잘 살피고 생각하여 중정(中正)을 잃지 않는 연후라야 사람들이 비난하거나 비웃지 않고 두려워하고 복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이명덕의 치명적 흠결이 드러났다.

변중량의 누설


▎조선 개국공신인 이제의 교서비. / 사진: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
이부는 정몽주를 살해하는 데 직접 참여하고, 이성계를 왕에 추대하는 데도 참여했다. 이로써 조선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됐는데, 순서가 고여보다 앞섰다. 이때 관직이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는 정3품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였다. 그리고 무관 최고위직인 상장군에 올랐다. 제1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 편에 섰다. 1400년에 사병이 혁파된 뒤 삼군부가 군권을 장악했는데, 이부도 그 일익을 담당했다. 태종 2년(1401) 총제 이부는 민무구, 한장수와 함께 외갑사를 분장했다. 내갑사는 도성의 경비를 담당한 갑사 중 궁중과 왕을 경호하는 특별부대이다. 여기에 태종 2년 지방에서 올라온 부병(府兵) 중 무재가 뛰어난 자를 선발해 외갑사로 삼았는데, 이부 등에게 지휘를 맡긴 것이다. 이는 이부가 태종 집권 초기에 왕권을 수호하는 최측근이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부의 역할은 여기에 그쳤고, 조영무와는 달리 정치 영역에서는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는 세종 4년(1422) 세상을 하직했는데, 그의 졸기는 아무 평가 없이 사망 사실만 기록했다.

이방원의 계획은 정몽주에게 사전에 누설됐다. 정몽주의 문인 변중량이 알린 것이다. 변중량은 이성계의 서형(庶兄) 이원계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원계는 이자춘의 장남으로서 이성계보다 다섯 살 위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 혹은 첩 내은장(內隱藏)이다. 그녀가 죽고 이자춘은 이성계의 생모인 영흥 최씨와 결혼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는 조선과 달리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었으므로, 이원계가 서자였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태조실록]에는 여종(婢)으로 기록돼 있다.

변중량은 이전에도 이성계파의 계획을 누설한 적이 있었다. 공양왕 3년(1391) 6월 26일, 대간이 우현보의 유배를 청하는 상소를 세 차례나 올렸다. 그런데 공양왕은 이에 불응했을 뿐 아니라, 뜻밖에도 이방원을 불러 이성계에게 대간의 탄핵을 중지시켜 달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이성계가 대간을 사주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성계 입장에서는, 장막 뒤에 숨어 음모를 꾸미는 소인배가 된 셈이다. 물론 공양왕의 외척 우현보를 제거하는 것은 당시 이성계파 중 역성혁명파의 절대 과제였다. 실제로 대간을 배후에서 움직인 것은 정도전이었다. 이성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양왕의 행위는 일종의 모욕이자 정면 도전이었다.

이성계파가 대간을 사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양왕에게 알린 것은 변중량이었다. 그 무렵 이성계는 반대파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태조의 휘하 인사가 그 소위에 분개하여, 글을 올려 그 무망함을 변명하고자 하여 글이 이루어졌으나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인사란 정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변중량이 “중간에 서서 변고를 관망하다가, 공양왕이 시기하여 싫어함이 이미 극도에 달한 것을 알고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평소부터 공양왕의 사위인 익천군(益川君) 왕집(王緝)과 동경계(同庚契)를 맺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휘하 인사가 만든 글로써 왕집에게 알려 훗날의 터전을 삼으려고 하였으니, 이 까닭으로 공양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변중량이 살아남고자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왕집은 현종의 후손으로서 공양왕의 장녀 숙녕궁주와 결혼했다. 동경계는 동갑계와 같은 뜻이다. 계원인 왕집을 통해 정도전의 상소문 초안을 유출한 것이다.

공양왕의 말에 분개한 이성계는 그날 즉시 사직상소를 올렸다. 상소 내용은 공손했지만, 요점은 역량은 없는데 자리만 지키니 사임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 열전에 따르면, 이성계가 정도전·남은·조인옥 등에게 “내가 경들과 함께 왕실에 힘을 다하였으나 참소하는 말이 자주 일어나니 우리가 용납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서 그들을 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니, 먼저 집안사람들을 시켜 빨리 길 떠날 채비를 하게 하라”고 말했다. 측근들이 간신히 이성계를 만류했다.

공양왕의 공포

이성계의 강경한 태도에 놀란 공양왕 역시 즉일로 좌대언 이첨을 이성계의 저택으로 보내 사직을 만류하게 했다. 그러나 이성계 역시 완강히 거절했다. 이 모두가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가 꺾인 공양왕은 이튿날 우현보를 유배시켰다. 그리고 다음 날 이성계의 입궐을 명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이방원 편에 다시 사직상소를 보냈다. 그 글에서 “이제 신에게 대간을 중지시키라 명하시니 이것은 신이 사주한 것이라 의심하는 것입니다. 신이 부족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큰 직임을 맡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현량한 이를 선발하여 대신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단단히 화가 난 이성계가 ‘그럼 나 없이 한번 잘 해보라’고 협박한 것이다. 위축된 공양왕은 “내가 능력도 없이 왕위에 있는 것은 시중이 추대한 힘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중을 아버지처럼 우러러보고 있는데, 시중은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는가?” 만약 시중이 사직한다면, 나도 어찌 감히 이 왕위에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당시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니 말뜻이 매우 간절하였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것이다. 공양왕은 말 한마디 잘못한 탓에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 처지가 참으로 가련했다. 이때 이미 왕과 신하의 처지가 바뀐 것이다. 이후 역성혁명까지 1년이나 소요된 것은 이성계가 단지 주저했던 때문이었다.

변중량의 고변을 듣고서도 정몽주는 오히려 이성계의 집에 병문안을 갔다. 실상은 변고를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 제갈량이 죽은 주유를 조문하러 간 것과 같다. 당시 정몽주는 정변에 대한 번민으로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성계가 정확히 무엇을 생각하는지 정황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호랑이 굴속에 스스로 걸어들어 갔으니, 정몽주는 대담한 사람이었다. 이성계가 자신을 위문 온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도 짐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화의 기습 제안


▎태종의 총신이었던 이명성의 초상.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이성계의 성품은 호협해, 자기와 전투에서 싸운 인물도 포용했다. 정군 처명(處明)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공민왕 19년(1370) 11월,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 동녕부에 웅거한 기철의 아들 기사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를 공격할 때 이성계와 싸우다 항복했다. 처음에 이성계는 그의 효용한 무재를 아껴 항복을 권유했으나 불복했다. 이성계는 활로 그의 투구를 맞히고 다시 다리를 쏘았으며, 얼굴을 맞히려고 하자 비로소 항복했다. 그는 이성계의 은혜에 감사하여 화살의 상처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우왕 5년 황산대첩 때 이성계는 수차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처명은 이성계의 말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정몽주의 문안은 이성계가 낙마의 부상을 안고 개성에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난 뒤였다. 두 사람의 옛 관계를 생각하면, 정몽주는 4월 3일에 문안을 가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정적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정몽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하였다”고 한다. 불구대천의 적을 천연스럽게 방문하고, 또 그를 눈앞에 두고도 감정을 평상처럼 절제할 수 있었느니, 두 사람 모두 얼마나 정치적인가! 그때까지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이는 데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모종의 정치적 수습책을 논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기록은 없다. 정몽주 역시 인사만 하고 바로 이성계 집을 떠났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인사치레만 하고, 적정을 살핀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서제 이화(李和)가 이방원에게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라고 지적했다.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몽주의 예상을 벗어난 기습이었다. 정변에서는 신속성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연될수록 긴장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결속력이 이완되기 때문이다. 이화가 단순한 무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자춘의 세 번째 부인 김씨의 아들로서, 이성계보다 13세나 어렸다. 김씨의 본래 이름은 곰가(古音加)로서, [태조실록]에 천첩(賤妾)으로 기록돼 있다. 이성계가 젊을 때 그녀는 담 모퉁이에 앉은 까마귀 다섯 마리를 보고 활로 쏘기를 청했다. 이성계는 단 한 번 쏘아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를 모두 떨어뜨렸다. 이를 본 김씨는 “절대로 이 일을 누설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이성계의 재주가 비상한 것을 깨닫고, 그에게 화가 닥칠까 염려한 것이다. 이를 보면 김씨의 성품이 신중했으며, 이성계의 장래를 촉망했음을 알 수 있다. 이자춘이 죽자 이성계는 함흥에 있던 김씨를 개성으로 불러 모시고, “매양 나아가 뵈올 적엔 항상 섬돌 아래에 꿇어앉았다”고 한다. 그녀를 어머니로 모신 것이다. 이성계는 이원계, 이화와의 우애가 돈독했고, 항상 함께 거처했다. 또한 그들 어머니의 노비문서(賤案)를 불살라 없앴다.

이화도 어머니를 따라 개성에 온 듯하다. 이화는 공민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공민왕이 이성계를 존중해 이화를 총애하고, 궁궐에서 항상 시위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성계의 인맥으로 공민왕의 경호병이 된 것이다. 공민왕은 수차 잔치 자리를 마련해 이화에게 어머니를 모시게 하고, 기생의 음악 기관인 교방의 음악도 하사했다. 이런 특혜는 개인에게 극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화는 위화도회군에 참여했고, 또 이방원과 함께 역성혁명의 마지막 순간을 마무리했다. 조선건국 뒤 1·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지지했으며, 태종 7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성계의 형제로 태어나, 왕위를 제외하고는 인신의 최정상에 오른 것이다. 그는 태종 8년(1408) 죽었다. 졸기에 따르면, 이화는 “순박(淳樸)하고 씩씩하고 용감하여(壯勇) 젊어서부터 태조를 잠저에 모시어 좌우를 떠나지 않았으며, 매양 정토에 따라다녀 여러 번 전공을 나타내서 마침내 개국공신이 되고, 또 정사(定社)·좌명(佐命)공신의 열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순박한 무장이지만, 그의 일생을 보면 중요한 국면마다 최선의 선택을 했다. 운도 따랐겠지만, 판단력도 남달랐다.

책임 회피하지 않은 이방원


▎1392년에게 이화에게 부여된 개국공신 녹권. 국보 제322호다.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화의 의견에 따라, 원래 도평의사사를 찾아가 벌이려던 계획이 갑자기 바뀌었다. 본래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에서 공공연히 재상을 척살하는 것은 심히 무리한 일이었다. 왕조와 조정의 권위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도 없이 짓밟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무자비한 폭력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함으로써 반대자들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일도 방법이 부적절하면 일반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계획이 바뀌었지만, 이화가 다시 “공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라고 우려를 제기했다. 역시 이성계의 허락 없이 거사를 단행하는 심적 부담이 컸다.

그래서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동요가 커졌다.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다시 이방원이었다. 그는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방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결정에 과감했다는 것이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처음 정몽주를 죽이는 일을 놓고 이지란조차 거사를 거부했을 때, 이방원은 “그 책임은 마땅히 내가 지겠다”(我當任其咎)고 천명했다. 마지막 실행을 앞두고 휘하 인사들이 다시 주저하자, 또다시 책임질 것을 약속한 것이다. 조선 개국 뒤 태조 6년(1397)의 사례도 있다. 당시 경상·전라 도안무사 박자안이 왜구를 사로잡을 기회를 놓치자, 이성계는 비밀리 순군천호를 파견해 참형에 처하도록 했다. 아들 박실이 이를 알고 이방원의 집에 찾아가 통곡하며 목숨을 빌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이방원이 종친들로 하여금 이성계에게 간청하도록 했다. 문제는 밀명을 이들이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었다. 종친들이 그 점을 두려워하자, 이방원은 “그 책임은 마땅히 내가 지겠다”고 보증했다. 용맹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결정과 책임 앞에서는 주저한다. 왕처럼 국가를 책임진 사람이 그러면 나라가 망한다. 그런 점에서 이방원은 타고난 왕자였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노상에서 죽이도록 지시했다. 개경 숭인문 쪽 이성계의 집에서 정몽주의 집으로 가려면 배천이 흐르는 선죽교를 건너 서남쪽으로 조금 더 가야 한다. 조선 시대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세운 숭양서원의 자리가 정몽주의 옛 집터이다. 조영규 등은 그 노상에서 정몽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방과의 집이 이성계와 정몽주의 집 사이에 있었다. 이방원은 조영규에게 이방과에 집에 가서 칼을 가지고, 정몽주의 동네 어귀에서 정몽주를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고여와 이부 등, 2~3인을 뒤따르도록 했다.

정몽주의 운명은 죽음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에서 머물지 않고 바로 나왔다. 그래서 조영규 등이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방원은 직접 현장에 가서 지휘하기로 결심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도중 이방과의 집에 이르자 정몽주가 지났는지 물었다. 아직 지나지 않았다고 하자, 조영규 등에게 대책을 지시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정몽주가 지체한 것은 4월 2일 죽은 전 판개성부사 유원(柳源) 집에 들러 조문을 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벽란도에서 돌아온 4월 2일, 공교롭게도 유원과 전 판삼사사 왕안덕이 동시에 죽었다. 왕안덕은 왕족으로서 공민왕 사후 이인임의 뜻에 따라 우왕을 옹립했다. 대왜구전에서 활약했고, 위화도회군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389년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김저사건에 연루돼 유배됐다가 이날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정몽주가 문상 때문에 지체하자, 그 틈을 타 조영규 등이 무기를 준비하고 정몽주의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다. 정몽주가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조영규가 말을 달려 정몽주를 쳤으나 맞히지 못했다. 정몽주는 조영규를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해 달아났다. 그러나 조영규가 추격하여 말머리를 치자 말이 넘어졌다. 정몽주는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 급히 달아났다. 그러나 고여 등이 쫓아가 정몽주를 살해했다. 그 자리가 선죽교였다.

백주에 노상에서 한 왕조의 최고위 재상이 살해됐다. 피살 당시 정몽주의 관위는 종1품 문하수시중으로서, 문하시중에 이어 정부 내 서열 2위였다. 더욱이 정몽주는 당시 고려 정계에서 절대적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이성계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이성계는 두 살 아래인 정몽주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정몽주는 학문에도 뛰어났지만, 무장만큼 담력도 컸다. 고려 말을 수놓은 걸출한 인물 중 문신을 꼽으라면 정몽주가 가장 빛나는 인물일 것이다. 인재를 애호하는 이성계는 젊을 때부터 정몽주에 주목했다. 그래서 “평소에 그 그릇을 중히 여겨 전쟁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함께 갔고, 여러 번 천거 발탁하여 같이 재상까지 올랐다”고 한다. 사실 이성계가 마지막까지 주저한 것은 정몽주에 대한 인간적 애틋함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1391년 7월 이래 정몽주가 명백히 고려수호파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이성계는 정몽주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부단히 모색해 왔다. 정몽주의 노선은 역성혁명이 아닌 고려의 중흥이었다. 1391년 7월 이후 이성계도 그 입장을 택해 역성혁명파인 정도전·조준·남은 등이 죽을 지경이 됐어도 수수방관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낙마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성계파는 정몽주와의 공존에서 제거로 입장을 선회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여전히 공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병석에 누워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이방원이 이성계파의 통솔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성계조차 경중(敬重)했던 정몽주가 무자비하게 살해됐다. 정몽주의 머리는 효수되어 저잣거리에 걸렸다. 그리고 정몽주가 “거짓된 일을 꾸미고, 대간을 꾀어 대신을 해치려 하였고, 국가를 어지럽혔다”는 방이 내걸렸다. 진실은 그 반대로 이성계파야말로 그 원흉이었다. 이것은 더럽고 야비한 범죄다. 하지만 이것이 정치 세계의 논리이다. 패자는 단지 죽을 뿐 아니라, 명예까지 살해당한다. 이제 누가 감히 이성계파에게 저항하겠는가?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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