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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SKY 캐슬'에서 '부부의 세계'까지 JTBC 드라마의 괴력 

여성성의 진화, 시대의 감수성을 읽다 

‘한국적’으로 각색한 [부부의 세계] 비지상파 최고 시청률… 김희애의 힘
[미스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 여성의 분투기로 시청자 공감 확보


▎[SKY 캐슬]을 넘어 JTBC 드라마의 최고 히트작으로 올라선 [부부의 세계]. / 사진:JTBC
부부란 무엇일까. 그리고 결혼이란 무엇일까. 5월 16일 종영한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남긴 질문이다. 일찌감치 지난해 JTBC [SKY 캐슬]이 세운 비지상파 드라마 최고 시청률(닐슨코리아 유료 가구 기준 23.8%)을 넘어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구사한 [부부의 세계]는 방영 내내 굿데이터코퍼레이션 화제성 조사 결과 1위를 차지했다. 포털사이트에 소개된 20명에 달하는 주요 등장인물이 촘촘하게 얽히고설켜 다양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진 덕분이다. 단순히 불륜 드라마로 치부하기엔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모든 관계가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복잡하고 심오한 세계다.

영국판 원작에서 진화하다

얄미운 시어머니부터 배 아픈 이웃의 등장은 영국 BBC에서 방영된 원작 [닥터 포스터]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각각 5부작으로 구성된 시즌 1(2015)과 시즌 2(2017)는 온전히 여주인공 젬마 포스터(슈란느 존스)의 이야기다. 통상 불륜 드라마가 외도 사실을 인지하고 그 상대를 찾아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과 달리 첫 회에 그 모든 과정을 담아내는 속도감 있는 전개는 같지만,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여주인공에게 초점이 맞춰진 원작과 달리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부부를 다룬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지 못한 깊은 부분까지 치고 들어갈 것”이라는 모완일 PD의 말처럼 각기 다른 형태의 부부 혹은 커플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한 각색이 더해졌다.

영국판에서 젬마가 자신이 처한 문제 상황을 곱씹으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골몰한다면, 한국판의 지선우(김희애)는 그럴 틈이 없다. 남편 이태오(박해준)의 외도를 인정하고, 자신을 들여다볼 틈도 없이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는 학교에서도 겉돌며 친구들의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본인도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아온 시어머니가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바늘 끝 하나 안 들어가는 너랑 사느라 내 아들도 고단했다”며 몰아세우는 등 안팎으로 시달리는 탓이다. 여기에 지선우의 부모님 역시 불륜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설정이 추가되면서 그야말로 비극의 연속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선우의 유일한 심복이었던 민현서(심은우)와 그의 남자친구인 박인규(이학주)의 데이트 폭력 문제에 끼어들었던 대가도 혹독하다. 박인규는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것도 불사한다. 지선우가 연고 없는 고산으로 시집와 애써 이룬 모든 것을 흔든다.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 역시 지선우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된다. 전남편이자 아이 아빠를 전과자로 만들 수 없는 탓이다. 여다경(한소희)의 부모인 여병규(이경영) 회장과 엄효정(김선경)이 자식 문제에 전전긍긍하는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불륜녀 딱지를 붙이고 가정을 꾸리게 된 딸이 행여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는 이들은 결국 지선우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 작용한다.

엄효정이 딸을 위해 꾸린 여우회도 불난 집에 부채질을 더한다. 지선우의 계산된 외도로 부부관계에 금이 간 고예림(박선영)은 직접적인 피해자요, 잘난 친구에 밀려 부원장 자리를 쳐다보기만 하던 설명숙(채국희)은 간접적 피해자라 할 수 있지만,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도 그의 불행을 은근히 반긴다. 고산에서 성공하려면 지역 유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모두 그의 반대편인 여 회장의 편에 선다. 결국 혈연·학연·지연으로 얽힌 한국식 가부장제에서 파생된 모든 관계가 갈등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각색된 셈이다.

유리천장 뚫고 스릴러 더한 치정 멜로의 등장


▎김희선(왼쪽), 김선아 여성 배우를 투톱으로 세운 [품위있는 그녀]는 흥행에 성공했다. / 사진:JTBC
이 같은 변화를 찬찬히 뜯어보면, 몇 편의 드라마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JTBC [미스티](2018)다. 비단 모완일 PD의 전작이어서만은 아니다.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앵커 고혜란(김남주)과 그녀의 변호인이 된 남편 강태욱(지진희)이라는 주요 인물 설정과 이들을 둘러싼 사건의 양상은 다르지만, 그 속에 내재된 욕망이 같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와 권력을 동시에 손에 넣고 싶어 했던 고혜란은 자신의 과거를 봉인한 상태에서 꿈을 좇는다. 제때 매듭짓지 못한 문제가 삶에서 가장 완벽해 보이는 순간에 등장해 발목을 잡는 고혜란이 놓인 상황은 [부부의 세계]의 지선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찌 보면 더 열악할 수도 있다. 가정사로 다소 분주하긴 해도 의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지선우와 달리 고혜란은 여러 차례 유리천장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배 불러오는 앵커를 받아줄 리 만무하기”에 앵커 자리를 얻기 위해 낙태를 선택한 그는 배란 주기에 맞춰 한약을 지어오는 시어머니의 압박을 견디는 동시에 “그런 걸로 유명했지, 쌔끈하게 주고”라고 성희롱하는 동료 기자들을 향해 “실력으로 주고, 인정받고”라고 받아치기에 바쁘다. 남편을 잃은 지선우가 끝내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이라면, 고혜란은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일을 택한 것이다. 자신이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테니 말이다.

두 작품 모두 창작집단 글라인 소속 작가가 썼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미스티]는 라디오 구성작가 출신인 제인 작가의 드라마 데뷔작이고, [부부의 세계]는 증권사에서 근무했던 주현 작가가 JTBC [욱씨남정기](2016), tvN [변혁의 사랑](2017)에 이어 세 번째로 쓴 작품이다. 얼핏 보면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은 강은경 작가를 통해 만났고, 강 작가가 작품 크리에이터로 참여하면서 치정 멜로 혹은 심리 스릴러 같은 새로운 톤 앤 매너를 갖게 된 셈이다. 강은경 작가는 1998년 SBS [백야 3.98]로 데뷔해 올 초 [낭만닥터 김사부 2]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숱한 히트작을 남긴 베테랑이다.

KBS2 [제빵왕 김탁구](2010)와 [가족끼리 왜 이래](2014~2015)로 각각 49.3%, 43.3%라는 기록적인 시청률을 남긴 그가 두 사람을 연이어 발굴한 게 우연이었을까. 시대극과 가족극 등 휴머니즘이 강조된 장르에 강점을 지닌 그로서는 요즘 시대의 문법에 맞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작가가 필요했을 터다. 옛날 같았으면 공동 작가, 보조 작가 같은 이름으로 시작했겠지만, 강 작가는 과감하게 새로운 방식의 협업을 택했다. 각자 강점이 있는 분야에 집중하되 전문성을 보완함으로써 리스크를 줄여나간 결과 서로 윈윈할 수 있었다.

삶의 공포심 자극하는 여성 서사의 진화

여성 서사를 앞세운 멀티 장르는 이제 하나의 공식이 됐다. 로맨틱 코미디, 액션 스릴러 등 기존에 하나의 장르처럼 묶인 분류로는 빠른 속도로 TV 앞을 떠나는 시청자를 붙잡을 수 없게 된 탓이다. 16부작 드라마도 유튜브에서 5분이면 ‘요약정리’해서 볼 수 있는 시대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는 ‘본방 사수’를 위한 필수 조건으로 거듭났다. 휴먼 멜로에 스릴러를 얹은 KBS2 [동백꽃 필 무렵](2019)이나 조선시대 사극과 좀비물을 결합한 넷플릭스 [킹덤](2019, 2020)처럼 색다른 조합엔 열띤 지지를 보내지만, 지난 4월 지상파 미니시리즈 최초로 0%대 시청률을 기록한 KBS2 [어서와]처럼 뻔한 로맨스물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폭발력 있는 것은 지금 내 삶과 맞닿아 있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소재와의 결합이었다. 지금의 JTBC 드라마가 갖게 된 위상은 이를 잘 활용한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토드라마 시간대를 밤 11시로 옮긴 [힘쎈여자 도봉순](2017, 9.7%)을 시작으로 [품위있는 그녀](2017, 12.1%) 등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 작품마다 ‘새로움으로 무장한 그녀’ 덕을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2015년 데뷔작 [사랑하는 은동아]가 1.8%라는 저조한 시청률로 종영한 아픔을 딛고 백미경 작가가 “이래도 안 볼 수 있을까”라며 칼을 갈고 쓴 작품이다.

[힘쎈여자 도봉순]에선 반전의 미학이 통했다. 행주대첩에서 돌을 날라 적군을 물리친 박개분 여사 이후 모계 유전된 도봉순의 괴력은 자그마한 체구의 박보영과 만나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여주인공보다 훨씬 여성스러운 남 주인공을 지켜주는 모습은 대리만족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반면 [품위있는 그녀]의 박복자(김선아)는 우아진(김희선)처럼 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재벌가 간병인으로 들어가 사모님 자리를 꿰찬 그가 온 집안을 쥐고 흔들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막장 가족극과 추리물이 만났을 때 지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다룬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2018)나 성형미인으로서의 삶을 그린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2018)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가장 폭발력을 지닌 드라마는 역시 [SKY 캐슬]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부와 권력을 자녀 세대에도 물려주기 위해 교육에 목숨 거는 엄마들의 모습이 현재 한국사회가 지닌 욕망을 다층적으로 보여준 덕분이다. 상류층에 진입하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깡그리 지워낸 한서진(염정아)부터 이들의 욕망을 담보 삼아 부를 축적하고 복수를 꿈꾸는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김서형)까지 그간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쎈 언니’ 캐릭터가 대거 등장했다.

이렇게 재발견된 중년 여배우는 한국 드라마의 토양을 다양화하는 밑거름이 되어주기도 했다. SBS [아내의 유혹](2008~2009) 이후 10년 만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김서형은 올 상반기 [아무도 모른다]로 미스터리 감성 추적극이라는 신기원을 열었고, 푼수끼와 러블리함을 겸비한 연기로 눈도장을 찍은 오나라는 지난 연말 KBS2 [99억의 여자]부터 오는 7월 선보일 MBC 월화극 [십시일반]까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임팩트 있는 연기로 [SKY 캐슬] 초반 흥행에 불을 붙인 김정난은 KBS2 [닥터 프리즈너](2019)의 감방 사모님부터 tvN [사랑의 불시착](2019~2020)의 북한 사모님까지 겹치는 캐릭터 없이 활약 중이다.

시대별 욕망 읽기는 성공, 그에 못 미치는 감수성은 숙제


▎JTBC 드라마는 [SKY 캐슬]에서 드러났듯, 시대의 욕망을 관통하고 있다. / 사진:JTBC
[부부의 세계]는 이처럼 변화하는 시대의 욕망을 읽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김희애의 ‘불륜 4부작’이라 불리는 작품 속 캐릭터를 보면 그 변천사가 한눈에 보인다. SBS [내 남자의 여자](2007)의 이화영이 이성보다는 감정을 좇으며 여자도 얼마든지 욕망 앞에서 솔직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면, JTBC [아내의 자격](2012)의 윤서래는 자녀 교육을 위해 입성한 대치동에서 같은 처지의 치과의사를 만나 내조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성공을 위해 재벌가의 궂은일을 도맡아 시녀처럼 살았던 JTBC [밀회](2014)의 오혜원은 열정과 재능으로 가득 찬 젊은 피아니스트를 만나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삶에 대한 동경과 아쉬움을 풀어낸다.

“그 시대에는 제법 파격적인 인물이었다”는 김희애의 말처럼 그는 쉽게 드러내지 못할 욕망을 짚어내고, 이를 해소해주는 방식으로 시대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부부의 세계]의 지선우가 김희애가 아니었다면 이만한 파급력을 갖긴 힘들었을 것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도 정신을 다잡고 아이에게 달려가는 엄마의 모습과, 이제는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된 전남편과 하룻밤을 보내는 대담한 여성으로서의 모습은, 쉽게 공존하기 힘든 얼굴인 탓이다. 불행이 거듭되는 캐릭터지만, 그녀가 입고 나온 착장이 매회 화제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변화하는 시대의 감수성을 읽는 데는 실패했다. 8회 지선우 집에 침입한 괴한의 시점에서 VR 기법을 활용한 폭행 장면은 연출 기법상 신선했을지언정 시청자에게 불편함을 안겼다. 초반 1~6회처럼 남은 9~16회도 19세 시청 등급으로 상향 조정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잠재적 불안 요소로 남았다. 지선우에게 지나치게 폭력적인 전개가 계속되면서 ‘시청 하차 선언’이 잇따른 것이다. 통상 후반부로 갈수록 결말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청률이 상승하는 것과 달리 불편함을 호소하는 시청자도 함께 늘어나는 기현상을 보였다.

젠더 감수성을 비롯한 정치적 올바름은 이제 드라마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인이 됐다. SBS 금토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는 김은숙 작가의 기대작이었지만, 백마 탄 왕자와 가난한 캔디의 러브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여성 서사를 기능적으로 활용한 SBS 월화드라마 [굿캐스팅]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남자여도 무방할 법한 이야기의 성별을 여자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가 통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번에 불거진 논란을 반면교사 삼지 않는다면 또 다른 문제작의 탄생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 민경원 중앙일보 기자 storymin@joongang.co.kr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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