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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3부)]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2) 김대건 신부 

450년 만의 해외 유학생, 조선 근대화 밀알이 되다 

서슬퍼런 쇄국의 장벽 뚫고, 마카오서 5년간 신학 공부
신부 서품 1년 만에 순교했지만, 서양 문화 정수 들여와


▎충남 당진군 함덕읍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의 동상.
이벽·이승훈·정약용 등 성호 좌파가 주도해 1784년(정조 8) 창립한 천주교 공동체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 결과 16년 만인 1800년(정조 24)에 조선의 천주교 공동체는 신자 1만 명을 헤아릴 정도로 팽창했다.

하지만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때 천주교 공동체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천주교 공동체의 주요 지도자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에 처했다. 이승훈·정약종 등 100여 명이 사형당했고 정약전·정약용 등 400여 명이 유배당했다. 이렇게 주요 지도자들이 일시에 처형됨으로써 천주교 공동체는 궤멸되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천주교 공동체 전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국가권력의 극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산간벽지나 바닷가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숨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들 대부분은 신유사옥 때 순교자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통역관·농민·상인 또는 어민 등 피지배층이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종의 둘째 아들 정하상이었다.

정하상은 1795년(정조 19) 태어났다.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때 정약종과 장남 정철상이 순교했는데, 당시 일곱살의 어린 나이로 모친과 함께 체포·수감됐다. 그러나 정하상은 미성년이고, 모친은 여성이기에 사형당하지 않고 석방됐다. 그렇지만 정하상의 모친은 살길이 막막했다. 사학(邪學) 죄인의 부인으로 낙인찍혔을 뿐만 아니라 재산을 몰수 당했기 때문이었다.

정하상의 모친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친척 집을 전전했지만 어느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정하상은 밤낮으로 기도와 선행에 열중했으며, 죽을 때까지 동정(童貞)을 지켰다. 그렇게 15년의 세월이 흘러 정하상은 20대 청년이 됐고,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도 많이 누그러졌다. 그즈음 천주교 신앙을 지키던 조선 신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존재는 신부(神父)님이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님으로부터 7성사(聖事)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7성사란 ‘신부님이 집행하는 7가지 행사’란 뜻으로 세례성사(洗禮聖事)·견진성사(堅振聖事)·성품성사(聖品聖事)·고해성사(告解聖事)·성체성사(聖體聖事)·혼인성사(婚姻聖事)·병자성사(病者聖事)를 의미한다. 세례성사는 천주교의 세례 의식이고, 견진성사는 성인(成人) 의식, 성품성사는 성직 수여 의식, 고해성사는 신자의 죄를 고백받고 용서하는 의식이다.

또한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빵을 나누는 의식, 혼인성사는 말 그대로 혼인 의식, 병자성사는 중환자를 치료하는 의식이다. 개신교에서는 7성사 중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폐지했지만 천주교에서는 7성사 모두를 신부님이 주관해 거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7성사는 인간의 생로병사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삶의 마디를 천주교 의례로 정비한 것으로서 유교의례와 비견될 수 있다. 예컨대 견진성사는 유교의 성인식인 관례, 혼인성사는 유교의 혼례, 병자성사는 상례, 고해성사는 제례에 비견될 수 있다. 아울러 세례성사는 유교의 목욕재계, 성체성사는 유교의 성묘(省墓) 그리고 성품성사는 유교의 오복(五服)에 비견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7성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천주교 신앙을 위해 유교를 버린 조선 신자들 입장에서 7성사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사람으로 살지도 못하고 사람으로 죽지도 못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래서 국가의 천주교 탄압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조선 신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7성사를 집행할 신부님을 간구했다.

그즈음 20대 청년이 된 정하상은 기도와 헌신으로 천주교 공동체의 지도자가 됐다. 조선 신자들의 간구를 잘 아는 정하상은 22세가 되던 1816년(순조 16) 북경으로 갔다. 그때 정하상은 조선정부에서 북경에 파견하는 통역관의 하인이자 상인 자격이었다.

“신부 없어 교회 가르침 열매 맺지 못해”


▎2014년 8월 15일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를 방문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즉 중국과의 공무역에 종사하는 국제 상인으로 간 것인데, 돈도 벌고 또 북경 주교들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정하상은 북경 주교를 찾아 세례를 받고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이후 9년간 정하상은 거의 매년 북경으로 가서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북경의 천주교 역시 핍박을 받는 상황이라 신부 파견이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북경 주교는 직접 로마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 신부 파견을 요청하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정하상은 1825년(순조 25)에 통역관 유진길 등과 연명으로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로마 교황에게 보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교황 성하(聖下)님께. 저희는 떨리는 마음으로 성하님께 인사드리며 당신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박해로 인해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래 조선에서는 복음 전파가 봉쇄도 있습니다. 현재 1000여 명의 교우가 숨어 살고 있으며, 전도나 증언은 미미하게 이뤄질 수 있을 뿐입니다. 조선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진실 된 것이라 해도 만일 그 교회가 현재의 형태를 지속한다면, 진실은 소진될 것입니다. 저희의 머리가 아둔해 조선 교회의 가르침이 열매를 맺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은총 또한 가로막혀 있습니다. 노환이나 병으로 죽는 사람들은 종부성사(終傅聖事-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으며 비탄에 빠진 채 자신들의 무덤으로 옮겨집니다. 그들이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슬픔을 견디며 삶이 지쳐갑니다. 슬픔과 고통이 서서히 저희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러 차례 북경의 주교에게 저희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주교는 우리와 걱정을 같이 하며 죄에 빠진 영혼들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기 위해 사제들을 보내주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가 보내줄 사제는 아무도 없습니다. (…)”

이 편지는 북경·마카오를 거쳐 1827년(순조 27) 로마 교황청에 전달됐다. 로마 교황청의 도움 없이 조선 자체에서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참혹한 탄압 속에서도 조선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교황청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이에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을 독립 교구로 설정하고 주교 신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가 1831년(순조 31) 9월이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조선 교구를 프랑스 파리의 ‘외방전교회(外方傳敎會)’에 위임했다. 외방전교회는 1654년에 창립된 해외선교회로서 1540년에 창립된 ‘예수회’와 더불어 프랑스 천주교의 해외선교를 대표했다.

17세 조선 청년 세 명, 마카오 신학교 입학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체포돼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전통 인형을 통해 재현됐다.
이에 외방전교회 소속의 부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교구의 초대 주교에 임명됐다. 부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 밀입국하기 전에 보좌 신부인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1834년(순조 34) 조선으로 밀입국시켰다. 미리 조선으로 들어가 자신의 밀입국을 준비하라는 의미였다. 뒤이어 1835년(헌종 1) 겨울 부뤼기에르 신부는 조선으로 밀입국하기 위해 만주의 책문(柵門)까지 왔지만 병으로 급사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부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보좌 신부이던 모방 신부를 대리 주교로 임명해 조선 교구를 관장하게 했다. 모방 신부는 1835년 겨울에 밀입국했다. 그 뒤를 이어 1836년(헌종 2) 샤스탕 보좌 신부, 1837년(헌종 3) 조선 교구의 제2대 주교 앵배르 신부 등이 밀입국했다. 당시 유방제 신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을 밀입국 시키고, 한양에서 무사히 은신할 수 있도록 주선한 사람은 정하상이었다.

1835년(헌종 1) 밀입국한 모방 신부는 제2대 주교 앵배르 신부가 밀입국하는 1837년(헌종 3)년까지 2년 동안 대리 주교 자격으로 조선 교구를 관장했다. 당시 모방 신부는 그 무엇보다도 조선인 신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우선 모방 신부는 한국말이 서툴렀기에 고해성사 등을 제대로 거행하기 어려웠다.

또한 프랑스 사람이기에 전도 활동에도 아주 불리했다. 이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조선인 신부 양성이었다. 이에 모방 신부는 한양에 도착한 직후부터 조선 소년 중에서 신부 후보생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외방전교회 극동본부는 마카오에 있었고, 그 마카오에 외방전교회 소속의 신학교가 있었다.

그래서 모방 신부는 신부 후보생 3명을 선발해 마카오로 보내 신학을 공부하게 하려 했다. 그 결과 1836년(헌종 2) 2월에 최양업, 3월에 최방제 그리고 7월에 김대건이 선발됐는데 모두 16세의 소년이었다.

김대건은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솔뫼에서 1821년(순조 21) 8월 21일 출생했다.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으로 이사했는데, 16세 때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부 후보생으로 선발됐다. 한양으로 간 김대건은 모방 신부로부터 라틴어를 배웠다. 천주교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라틴어가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약 5개월 정도 라틴어를 배운 김대건은 1836년(헌종 2) 12월 3일 최양업·최방제 등과 함께 한양에서 출발해 마카오로 향했다. 중국인 신부 유방제가 그들을 인솔했다. 만주와 중국을 횡단한 김대건 등은 1837년(헌종 3)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해 신학교에 입학했다.

17세의 김대건·최양업·최방제가 마카오의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 자체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국 역사상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해외유학이 활발했다. 고구려·백제·신라를 비롯해 발해·통일신라 때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냈고, 고려 역시 원나라에 유학생을 보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해외 유학은 사라졌다.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해외 유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선 역시 유학생을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김대건 등이 마카오에 유학하기까지 약 450년 동안 조선에서는 해외 유학생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김대건 등에 의해 깨지게 된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김대건 등의 마카오 유학은 삼국시대 이래의 해외 유학 전통을 부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적 열정으로 마카오까지 유학했다는 점에서 김대건 등의 해외 유학은 통일신라 시대 스님 혜초에 비견된다고 할 수 있다. 혜초 스님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인도까지 갔고, 김대건 등은 천주교를 공부하기 위해 마카오까지 갔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비견할 수 있다.

프랑스 원정군 군함 타고 귀국길 올라


▎영화 [아편전쟁]의 한 장면. 전쟁 후 체결된 남경조약에 따라 중국은 영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홍콩도 내줘야 했다.
다만 김대건 등의 마카오 유학에서 아쉬운 점은 해외 유학 전통의 부활이 공식적이지 않고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이때 김대건 등이 국가의 공식적인 허락 하에 마카오에 유학했다면 조선의 근대화와 서구화는 훨씬 순탄하게 이뤄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조선 양반들이 너무 폐쇄적이었고 국제 현실에도 무지했다. 1837년 신학교에 입학한 김대건 등은 1842년(헌종 8)까지 5년간 공부했다.

김대건의 선생님은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책임자인 르그레주아 신부와 부책임자인 리브아 신부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 등이었다. 김대건 등은 천주교 신학을 비롯해 서양 학문, 프랑스어·라틴어 등 서양 문화의 정수를 배웠다.

이렇게 김대건 등이 배운 서양 문화의 정수가 공식적으로 조선에 전해지고 확산했다면, 그래서 조선과 근대 서양의 만남이 순탄했다면 비극적인 한국의 근대사는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사는 그렇지 못했다. 조선 양반들은 김대건 등이 배운 서양 문화의 정수를 사학(邪學) 즉 ‘서양 오랑캐의 사악한 학문’이라며 일축했다.

김대건 등이 마카오에서 공부하던 중에 비극적인 사건이 많았다. 우선 함께 공부하던 최방제가 1838년(헌종 4) 11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비극은 조선에서도 있었다. 1839년(헌종 5)에 조선에서는 이른바 기해사옥(己亥邪獄)이 발생해 정하상·유진길, 앵배르·모방·샤스탕 신부 등이 처형됐다. 김대건의 아버지는 물론 최양업의 부모도 그때 처형당했다. 하지만 마카오의 김대건이나 최양업은 이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기해사옥에 뒤이어 1840년(헌종 6)에는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이른바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아편전쟁은 동북아 국제 정세를 격변시켰을 뿐만 아니라 김대건의 삶도 격변시켰다. 아편전쟁의 여파가 프랑스 정부에까지 미쳤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는 영국과 경쟁 관계를 이어왔다. 그것은 근대 식민지 쟁탈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과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프랑스는 아시아에서도 영국과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아편전쟁 이전 프랑스는 인도를 놓고 영국과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다 패배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아편전쟁에서까지 승리해 중국을 식민지화 할 경우, 동아시아 전체가 영국 영향권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프랑스 정부는 영국의 동아시아 독점을 저지하고자 군함 2척을 파견했다. 프랑스 원정군은 임무 수행을 위해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첫째는 일본 남쪽의 섬 중에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을 점령해 전술적·상업적 근거지로 이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영국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원정함대는 1841년(헌종 7) 9월 7일(양력) 마카오에 입항했다. 그곳에서 원정군 사령관은 조선어 가능자를 물색했다. 장차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으려면 조선어 가능자가 필요해서였다. 당시 마카오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김대건과 최양업은 아직 학업 과정이 끝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 군함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김대건과 최양업은 원정함대의 통역관에 지원했다. 그때 마카오 신학교의 프랑스 신부 2명도 조선에서 선교하겠다며 동행했다.

“조선은 목자 없는 양떼처럼 탄식하며 방황”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거행된 천주교 신앙대회.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프랑스 신부 2명은 1842년(헌종 8) 2월 프랑스 원정함대와 함께 마카오를 출발했고 마닐라를 거쳐 8월 상해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하고 며칠 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남경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광동·하문·복주·영파·상해 5개항을 영국에 개항했다.

그러자 프랑스 함대사령관은 굳이 상해 북쪽으로 항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편전쟁의 결과가 이미 명확해진 상황에서 겨우 군함 2척만으로는 뭘 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이에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프랑스 신부 2명은 조선으로 잠입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상해를 떠난 그들은 북경을 거쳐 산동반도, 요동반도를 거쳐 만주의 책문(柵門)으로 갔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먼저 김대건만 의주로 잠입했는데, 그때가 1842년(헌종 8) 12월 29일이었다. 당시 김대건의 나이 22세였고, 한양을 떠난 지 6년 만이었다.

마카오에서 출발한 김대건은 틈틈이 편지를 써서 마카오의 르그레주아 신부와 리브아 신부에게 보냈다. 첫 번째 편지는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냈는데 1842년(헌종 8) 2월 28일 마닐라에서 썼다. 그 편지 중에 “우리는 마카오를 떠난 후 하느님의 보호로 순조롭게 항해해 마닐라에 입항했고 여기에서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장만해 2월 말쯤 출발할 예정입니다”는 내용으로 항해에 필요한 물건들을 장만하기 위해 마닐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여섯 번째 편지는 만주 책문에서 조선으로 밀입국하는 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1843년 1월 15일 썼다. 그 편지 중에 “저는 계획한 대로 1842년 12월 23일 백가점(白家店-요동반도 남단의 대련 부근)을 떠난 나흘 후에 아무런 장애 없이 책문에 도착했습니다. 책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다가 길에서 굉장히 큰 무리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선 임금님의 사신 일행을 만났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김대건이 12월 27일 책문에 도착해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났음을 보고한 것이다.

그 동지사 일행 중 김 프란치스코라는 신자와 접선한 김대건은 기해사옥 때 자신의 부친을 비롯해 최양업의 부모 그리고 프랑스 신부 등이 처형됐음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소감을 김대건은 편지에서 “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뒀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다 삼켜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요새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고는 있지만은 신부님들이 안 계시어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답니다”고 적었다.

이 편지에 쓰인 대로 기해사옥 소식을 듣고 김대건이 느낀 감정은 무엇보다도 ‘안타까움’과 ‘괘씸함’이었다. 김대건의 ‘안타까움’과 ‘괘씸함’은 신부님들을 모두 잃고 방황하는 조선 천주교 공동체에 대한 ‘안타까움’과 ‘쓰라림’으로서, 그런 감정은 자신이 앞장서서 조선 천주교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김대건은 아직 신부 서품을 받기 전이라 7성사를 거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천주교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주교 신부와 보좌 신부를 맞이해 오는 일이었다.

조선 교구 소식 전할 항로 개척하려다 체포돼 순교

조선 교구의 제2대 주교 앵배르 신부가 순교했다는 보고를 받은 교황청에서는 제3대 주교로 페레올 신부를 임명했다. 이에 따라 조선으로 돌아온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를 조선으로 밀입국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안전한 밀입국 육로를 확보하기 위해 김대건은 요동·만주 등을 직접 찾아 몇 차례 답사했지만 모두 위험했다.

결국 김대건은 해로(海路)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1845년(헌종 11) 3월 24일 김대건은 11명의 신자들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제물포를 출항해 상해로 향했다. 당시 페레올 신부는 상해에 있었다. 그때 김대건과 신자들이 탄 나룻배는 도저히 황해를 건널 수 있는 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김대건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거친 황해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김대건 등은 5월 말 상해에 도착했다. 김대건은 상해 근처 금가항(金家港)에서 8월 17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신부에 서품(敍品)됐다. 이로써 김대건은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됐다. 이어서 8월 31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항해 10월 중순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조선의 천주교 공동체는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다불뤼 신부를 중심으로 급속히 재건됐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 교구의 소식을 마카오의 외방전교회 대표부에 안전하게 전할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김대건 신부는 1846년(헌종 12) 6월 백령도에 갔다가 체포됐다. 혹심한 고문을 당한 뒤에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나이 26세였다.

김대건 신부는 수감 중 몇 통의 편지를 썼다. 그중 마지막 편지는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것으로 순교 직전인 1846년 8월 말에 썼다. 김대건 신부의 유언에 해당하는 이 편지는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는 오래지 아니해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으로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 누리기를 바란다. 잘 있거라”로 끝을 맺었다. 이 편지의 마지막 당부 그대로 천주의 사랑과 천주의 나라를 조선에 선포하다가 순교한 조선인 최초의 신부님이 바로 김대건이었다.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는 조선 건국 이후 금지됐던 해외 유학을 통해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됐으며, 천주교 신부로서 서양 문화의 정수를 조선에 들여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김대건 신부는 기독교를 통한 조선 근대화 또는 서구화의 선구자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함으로써 살아생전 조선의 근대화 또는 서구화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흐름이 서구화라는 사실에서 천주교를 통한 조선 서구화를 선도한 그의 삶은 헛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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