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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6)] 경주 미남석불(美男石佛)이 관저 뒤뜰에 있는 까닭 

일제 총독이 탐낸 신라 보물, 관사 장식물로 100년 수난 

1912~1913년 일본인 재력가가 서울 남산 왜성대에 ‘상납’
총독 관사 이전 당시 옮겨, 1989년 신축 때 현재 자리에


▎석조여래좌상. 지금의 청와대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던 것을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 현재의 위치인 북악산 기슭으로 이전했다. / 사진:이성우
다케시마(takesima)와 나카이(Nakai), 그리고 우리 꽃.

필자가 청와대의 석조석가여래좌상을 설명하기 전 우리 꽃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는 이유는 우리 꽃 중에서도 경주에 있던 석가여래좌상이 제자리를 떠나 서울로, 그리고 청와대로 오기까지의 과정과 비슷한 연유로, 공통으로 관계됐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제3대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라는 사람이다.

반크(VANK, 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라는 단체가 있다. 반크는 전 세계 외국인들에게 인터넷상에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잘못된 사실들을 바로잡고 알리기 위해 1999년에 설립된 민간 사이버 외교사절 단체다.

반크가 2019년 1월 18일 ‘창씨개명 된 우리 꽃 알리기’라는 내용의 2분 40초짜리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렸다. 이 홍보영상은 대일 항쟁기 당시 일제가 왜곡해 지은 우리 꽃 이름의 진실을 SNS(사회관계망서비스)상에서 알리려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이어서 한국의 꽃 이름 역시 창씨개명이 된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이란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갖도록 강요한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이다.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학교 입학이 거부되거나, 일자리를 뺏기거나 식량 배급에서 제외한다거나 강제징용의 대상이 됐다.

우리 꽃들도 그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우리 풀꽃이나 나무 이름 중에는 섬초롱꽃·섬제비꽃·섬기린초처럼 앞에 ‘섬’이란 글자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꽃을 좋아하는 필자도 예전엔 단순히 ‘우리나라 어느 섬에서 나는 식물인가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섬초롱꽃의 학명(學名)은 ‘Campanula takesimana Nakai’이고, 섬제비꽃은 ‘Viola takesimana Nakai’, 섬기린초는 ‘Sedumtakesimana Nakai’라고 나온다. 학명을 살펴보니 뜻밖에 다케시마나 나카이 같은 일본계 단어들이 보인다. 세 종류의 꽃 모두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식물인데….

식물 이름은 학명·영명(英名)·국명(國名, 또는 지방명) 세 가지로 불린다. 섬초롱꽃이 우리나라에서 불리는 국명이라면 영문 이름은 Korean bellflower로 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백합과 다년초 초본식물인 부추가 국명이라면 정구지·부채·부초같이 부르는 것은 지방명이라 하겠다.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또 다르게 부를 것이다. 따라서 같은 식물이라도 국가나 지방에 따라서 다르게 부를 수 있는 게 국명이다.

그런데 학술 분야에서마저 국명을 사용한다면 한 종류의 식물을 두고 나라마다 서로 다르게 부르게 되는 혼란이 생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표준어를 제정할 필요성이 생겼으며, 이것을 학명이라고 한다.

학명이란 식물의 호적과 같은 것이다. 국제적인 약속이어서 특별한 사유가 생기지 않는 한 한번 정해지면 바꾸기 쉽지 않다. 학명은 라틴어 이탤릭체로 쓰며 대문자로 시작하는 앞 첫 단어가 속명(屬名)을, 소문자로 시작하는 다음 단어가 종소명(種小名)을 의미한다. 종소명 다음에는 명명자의 이름과 명명 연도를 표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속명이 캄파눌라(Campanula)이고, 종소명이 다케시마나(takesimana)인 꽃은 섬초롱꽃을 의미하는 국제적인 호적인 셈이다. 또 ‘비올라 다케시마나’는 섬제비꽃, ‘세덤 다케시마나’는 섬기린초를 의미하는 호적이다. 이 꽃들은 모두 울릉도에서 자생한다. 그런데 낯익은 단어인 ‘다케시마(竹島)라는 단어가 보인다. 울릉도에 자생하는 꽃들인데 일본인들이 독도를 부를 때 사용되는 다케시마라….

울릉도 우리 꽃에 자기 이름 붙인 나카이


▎석조여래상의 미남석불([매일신보] 1934년 3월 29일 자 7면). / 사진:이성우
우리나라에서 울릉도에 대한 지명은 신라 지증왕 13(512)년 우산국에 관한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일본은 17세기 이전부터 울릉도를 다케시마 또는 이소다케시마(磯竹島), 독도는 마쓰시마(松島)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독일계 네덜란드 의사인 지볼트가 7년 동안 동아시아 지역의 자연과 문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한 결과를 책자로 발간했을 때 울릉도를 마쓰시마,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르면서 섬의 이름에 혼란이 생겼다.

그 후 일본에서는 독도의 이름으로 마쓰시마·다케시마, 서양권에서 부르는 명칭인 리앙쿠르 락스(Liancourt Rocks) 등을 혼용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다케시마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원래 다케시마는 울릉도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20세기 이전의 일본 문서와 지도에는 울릉도가 다케시마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영향을 받아 명명자가 울릉도 자생종의 명칭에 다케시마를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울릉도의 우리 꽃에 이름을 붙인 나카이는 누구인가?

나카이는 일본의 저명한 식물분류학자인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이다. 그는 도쿄대를 졸업하고 26세 때인 1908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약 20년간 한반도 전역을 17번이나 탐사하면서 한반도 식물 조사와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한반도에 자생하는 식물 527종 중에서 327종의 학명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국제식물학회(IBC, International Botanical Congress)에 등재하기도 했다.

한반도 특산종으로 우리나라에만 딱 2종이 자생하고 있는 ‘금강초롱’이라는 식물이 있다. 흔히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흰색의 초롱꽃과 유사하지만 금강초롱은 연보랏빛을 띠고 있다. 금강산 유점사 인근에서 자생하고 있는 것을 1902년 우치야마 토미지로(內山富次郞)라는 도쿄대 식물원 직원이 발견했다. 금강초롱은 최근에는 설악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2018년 국가지정 보물로 지정


▎대일 항쟁기 석조여래좌상. 조선총독부,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제5책 1917년, 圖1920 전재(轉載). / 사진:이성우
섬초롱꽃에서 보듯 청강초롱·초롱꽃 등 다른 초롱꽃들의 속명은 모두 캄파눌라로 시작하는데 금강초롱만 유독 하나부사야(Hanabusaya)라는 속명을 가지고 있다. 학명은 ‘Hanabusayaasiatica Nakai (하나부사야아시아티카나카이)’다. 어쩌다 금강초롱이 이렇듯 일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을 갖게 됐을까?

하나부사는 일제의 초대 조선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지칭한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공사관이 불타면서 일본으로 피신했던 그 하나부사 공사다. 하나부사 공사는 조선에 머무르고 있을 당시 조선 침략의 토대를 굳히기 위한 전초 활동으로 조선의 식물상을 조사했고, 그 자신도 수많은 표본을 수집해 일본으로 보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도쿄대에서는 조선의 식물 채집을 위해 연구원들을 대거 파견했다.

나카이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하나부사는 나카이를 조선총독부 임업과 촉탁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줬다. 또 하나부사는 연구·출판·강연 등 30여 년간 총독부가 집중 지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줬고, 그 덕분에 나카이는 식물 분류학자로 대성할 수 있었다. 이를 감사히 여긴 나카이가 하나부사의 공적을 기려서 그의 한문식 이름을 딴 화방초(花房草)를 금강초롱의 속명으로 정했다고 한다.

나카이는 우리나라 식물을 서양식 분류법으로 정리한 최초의 학자였던 만큼 학명에 대거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고 그동안 우리나라 식물들의 이름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식물의 호적이 되는 학명 체계가 18세기 중반 서양에서 비롯됐고, 메이지 유신으로 일찍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식물 분류 체계에서도 서양식 학명을 따르다 보니 아쉽지만 우리나라는 대일 항쟁기까지도 서양식 학명 체계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이런 결과가 빚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경우로 사내초(寺內草)를 들 수 있다. 이름도 낯선 사내초는 백합 계통의 지모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인 지모(知母)의 일종이다. 이 식물은 1911년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사인 이마이 한지로(今井半次郞)가 채집해서 나카이에게 보낸 것이다. 지모는 ‘AnemarrhenaasphodeloidesBunge (아네마레나아스포델로이드 번지)’라는 학명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카이는 이 식물이 백합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기존 지모 대비 꽃의 모양과 구조 등이 일부 다르다는 것을 근거로 학계 미발표 종이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학명을 붙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백합과 지모속이 아닌 백합과 사내초속을 신설하고, 사내초에 ‘Terauchiaanemarrhenaefolia Nakai (데라우치아아네마레네포리아나카이)’라는 학명을 붙였다.

우리에게 사내초는 낯설어도 데라우치는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데라우치는 이토 히로부미, 소네 아라스케에 이어 제3대 조선 통감이자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를 의미한다. 나카이는 조선의 식물을 지속적·집중적으로 조사·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데라우치 총독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이 식물을 바친다며 학명에까지 데라우치의 이름을 넣었던 것이다.

매우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식물의 학명은 먼저 발견된 식물과 같은 종이 확인되면, 우선 원칙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데라우치 꽃은 그 후 식물학자들의 검토 결과 지모와 구별되는 조선의 특산종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지금은 단순히 지모의 이명(異名)으로 처리하고 있다. 데라우치 꽃의 데라우치는 경주의 불상이 오늘날 청와대에 있게 한 장본인이다.

대통령 관저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불상 한 점이 있다. 이름하여 ‘미남석불’.

이 불상은 1974년 1월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 관리돼 왔다. 그러나 2017년 6월부터 불상의 학술적·예술적 가치 등을 심의해온 전문가들의 결과를 토대로 2018년 4월 20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77호로 지정됐다. 공식 명칭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慶州 方形臺座 石造如來坐像)’이다. 일단 불상의 출처는 경주라는 의미가 된다.

불상은 그 상(像)의 성격과 의미에 따라 여러 형태의 손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수인(手印) 혹은 인상(印相)이라 하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이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에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지신(地神)에게 부처가 마군(魔軍)을 물리쳤음을 증명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깨달음의 순간을 상징하는 의미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있어 석가여래좌상으로 볼 수 있다.

8세기 후반~9세기쯤 만들어진 듯


▎1913년 2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서울 남산 총독부 관저 근처에 안치된 불상에 절하고 있다. / 사진:정인성
눈꼬리는 약간 올라갔으나 아래를 보고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었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현재 하대석과 중대석은 확인되지 않으며 상대석만 남은 상태다. 팔과 어깨·등허리 부분에 파손된 부위가 있었으나 2007년에 보존, 처리했다.

이 불상은 8세기 중엽에 만든 석굴암 본존불로 대표되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불상은 다소 경직된 신체, 옷 주름, 사각형 대좌의 형태 등으로 볼 때 8세기 후반~9세기쯤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이하 불상으로 약칭함)에게 ‘미남석불’이라는 애칭을 지은 것은 [매일신보]다.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이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관저 대수하(大樹下)에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경주의 보물, 박물관에서 수연만장(垂涎萬丈: 침을 만 길이나 흘림, 제 소유로 만들고 싶어서 몹시 탐낸다는 뜻)’이라는 긴 제목의 기사가 게재돼 있다.

“석가여래상으로 경주 남산에 있던 미남석불이 그만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지난 27일에야 왜성대 총독관저에 있다는 말을 듣고 비목(榧木) 촉탁이 급히 달려가 보니 경관힐소(警官詰所: 경비초소) 뒤 언덕 큰 나무 아래 천연덕스럽게 좌정은 하고 있으나 아마 제1회 재등(齋藤) 총독 시대에 어떤 우연한 일로 관저로 올라온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경주의 같은 골짜기에 안치돼 있던 것인데. (…)”

불상의 최초 위치가 경주 어디였는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청와대의 안내표지판에도 ‘경주에 있던 불상이 1913년경 서울 남산의 왜성대 총독관저에 놓였다가 1930년대 총독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졌다’라고만 설명하고 있다.

불상의 최초 위치에 대해서는 경주 남산이라는 설과 경주 도지리(道只里) 이거사터(移車社趾)였다는 설로 나뉘어져 있다. 이 불상에 대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제5책 71쪽 圖1920, 1917년)에서는 당시 소장처를 서울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인 왜성대라고 밝히고 있다. 1934년 3월 29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서도 불상의 소재지는 경주 남산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4월 불상의 원 소재지가 경주 도지리 이거사터라는 내용이 담긴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라는 문건이 발견됐다. ‘신라사적고’ 도지리 이거사터 항목에 의하면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대정 2(1913)년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후광(장식)이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신라사적고’의 저자는 초대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했던 모로가 히사오(諸鹿央雄)로, 그는 이 책을 대정 5(1916)년 출판했다. 현재 이거사 터에 대한 정밀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니 그 결과를 보면 불상의 원소재지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어쨌든 이 불상이 경주를 떠나 왜성대를 거쳐 청와대까지 오게 된 연유에는 1912년 데라우치 총독의 경주 방문과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1911년 11월에도 데라우치 총독은 일본을 다녀왔는데 그 당시에는 경유지 없이 부산역에 곧장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1912년의 일본 방문 시에는 경주를 경유하는 일정이 포함됐다.

특히 1852년생인 데라우치 총독에게 1912년은 환갑이 되는 해이므로 남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일본 출장을 가는 길이기에 모름지기 환갑 기념으로 경주를 경유하는 계획을 포함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 1000년 문화에 홀린 데라우치 총독


▎서울 남산 총독부 관저에 안치된 석조여래좌상. / 사진:정인성
이 과정에서 불상이 경주 지역 관계자에 의해 총독에게 진상(進上)된 것으로 전해지는 내용이 일반적이다. 위 기사 내용 중 재등 총독은 데라우치 총독을 잘못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재등 총독은 제3대 총독인 사이토 총독을 말한다.

데라우치 총독 일행은 1912년 11월 15일 일본 무주천월(武州川越)에서 열리는 육군특별대연습에 참관하기 위해 11월 6일 밤 11시 남대문역을 출발했다. 7일 아침 대구역에 도착한 데라우치 총독은 환영 나온 주요 인사들과 휴식 겸조찬을 한 후 자동차로 출발해 오후 2시 30분 경주에 도착했다. 2박 3일간 경주 일대의 유적과 유물을 둘러본 후 9일 오후 5시 영일만에 대기 중이던 광제호(光濟號)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로 건너가서 일본 일정을 소화한 후 11월 30일 오후 경성으로 귀임하는 일정이었다.

[매일신보] 1912년 11월 10일 자 기사는 11월 7일의 데라우치의 경주 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총독은 경주 입구의 태종무열왕릉을 돌아보고 봉덕사의 대범종을 본 후 그 소리도 들어봤는데 조선 제일의 종이라고 극찬했다. 이후 환영 나온 학생 생도와 이들을 인솔한 교원에게 안부를 물어보고는 군청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중요한 일본인·조선인을 접견하고 훈시한 다음 재판소·경주지청·경찰서·농산물 진열장 등을 순시했다.”

11월 8일은 불국사와 석굴암·반월성·안압지·첨성대·분황사·왕릉 등 경주의 여러 유적을 돌아보고 숙박하는 일정이었다. 조선의 유적과 유물에 관심이 매우 컸던 데라우치 총독은 특히 석굴암을 방문하면서 ‘1000년 전에 이런 신작(神作)이 존재했음에 경이로움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50원(圓)을 기부하면서 사승(寺僧)에 관리를 잘할 것을 당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0년대 당시 괜찮은 기와집 1채 값이 1000원 정도였다고 하는데 50원이면 지금 가치로는 약 5000만원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 거금이다. 데라우치 총독의 경주 일정은 2박 3일의 일정이었기에 7일 또는 8일 저녁에는 주요 인사들과 만찬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경주의 이곳저곳을 순시하던 데라우치에게 아주 잘생긴 불상이 눈에 띄었고 이 불상을 한동안 눈여겨봤다고 한다. 물론 이 불상을 순시 도중 본 것인지 아니면 7일 또는 8일의 만찬 장소에서 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각에서 얘기하는 당시 경주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집이 만찬 장소 중 한 곳이었을 수도 있었기에 거기에 불상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당시의 금융조합은 탁지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각 지방 금융조합 이사 충원을 위해서 일본에서 30여 명이 직접 건너왔다는 1907년 9월 20일 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사만 봐도 비록 지방의 금융조합 이사이지만, 지위나 재력 면에서 절대 만만치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설령 만찬 장소가 고다이라의 집이었다 할지라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어찌됐거나 데라우치의 관심을 받았던 그 불상은 1912년 11월~12월 또는 1913년 초쯤 경주를 떠나 서울 남산의 총독관사인 왜성대로 옮겨졌다. 이에 관여한 자가 바로 경주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성대로 옮겨진 불상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불상의 위치와 관련해 2017년 3월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일본 도쿄대 박물관 소장 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불상의 1913년 2월 옛 개안식 사진 2점을 발견했다며 언론에 공개한 사진들을 살펴보자.

사진의 뒤쪽으로 경사진 절개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수평을 맞추기 위해 불상의 상대석 하단으로 돌과 흙을 채워 넣었다. 또한 불상 앞쪽으로는 배례를 드리기 위한 어느 정도의 공간을 뒀고 불상과 절개지 사이에도 약간의 공간이 있다. 현재 통감관저 터 부근의 지형은 조금 변동이 있기는 하지만 현장을 살펴본 결과 사진과 유사한 지형의 흔적은 남아 있다.

총독 떠나자 방치, 26년간 비바람에 시달려


▎총독부 관저 경관힐소(경비초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 남산의 모습. 사진 화살표 방향이 경비초소. / 사진:이성우
다시 1934년 [매일신보] 기사로 되돌아가 보자. 기사 내용 중에는 ‘비목 촉탁이 급히 달려가 보니 경관힐소 뒤 언덕 큰 나무 아래 천연덕스럽게 좌정은 하고 있으나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경관힐소는 어디였으며, 언덕 큰 나무는 어느 나무일까? 오른쪽 사진을 참조해 보면 어렴풋이 추정할 단서가 보인다. 경관힐소는 경비초소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경비초소 위치는 통감관저 쪽으로 오는 사람들을 미리 확인해야 하니 도로 쪽으로 더 내려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른쪽 연결된 두 장의 사진 중 위 사진 하단부에 살짝 보이는 건물 정도가 경관힐소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경관힐소 뒤 언덕은 조금의 변동은 있지만 현재와 거의 유사한 상태이다. 또한 큰 나무는 언덕 뒤로 보이는 수령 470여 년의 느티나무로 추정되므로 불상 위치는 느티나무 부근의 뒤쪽 공간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 같다.

1916년 데라우치 총독은 내각 총리대신으로 영전해 일본으로 떠났다. 그 후 데라우치 총독이 관심을 가져서 왜성대까지 오게 된 경주의 불상은 차츰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로 비바람에 시달리며 26년간 자리를 지키다가 1939년 총독관저를 경무대로 옮기면서 같이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청와대에서도 50년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면서 정들었던 자리를 양보하고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전해 묵묵히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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