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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6)] 세제 개혁 통해 세 마리 토끼 잡다 

백성 부담, 부패 줄이고 세수 확대한 공법(貢法)! 

17만 명 여론조사 통해 백성 의견 청취… 반대하는 신하 목소리도 귀 기울여
시범 운영 통해 점층적으로 전국 확대 실시… 54등급 세제 개편도 동반


▎조선 시대 임금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고자 궁궐 안 경작지에 모내기를 한 행사를 재현하는 모습.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세종은 조세의 공평성을 추구했다. 즉위 초 세종은 조세제도에서 심각한 결함을 발견했다. 그때는 아직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고려 말에 도입된 세제였다. 원칙적으로 경작지 1결(약 2000~4700평)마다 논에서는 현미(조미) 30두를 거두고 밭에서는 잡곡 30두를 받게 하였으나, 실제는 담당 관리가 현지 조사를 통해서 세금을 깎아 주는 방식이었다(실록, 세종 18년 10월 5일). 그런데 관리의 판단도 부정확하고 청렴하지도 못한 경우가 많아서 백성들의 불만이 컸다.

부왕 태종은 한 가지 대책을 세웠다. 우선 타도 출신으로 조사관(위관)을 삼아 객관성을 높였고, 그렇게 조사된 결과를 고을 수령이 다시 점검하게 했다. 마지막에는 조정에서 내려간 담당관(경차관)이 심사를 거쳐 세금을 확정하게 했다(태종 15년).

그래도 백성의 불만은 숙지지 않았다. 세종 즉위년(1418) 11월 29일, 강원도 관찰사 이종선은 백성들이 부당한 세금 때문에 조정을 원망한다고 알려왔다. 왕은 김종서를 보내 실태를 파악했다. 2년 뒤에는 평안도 관찰사 김점도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지적하고, 수확량의 조사 권한을 관찰사에게 위임하기를 요청했다(세종 2년 1월 12일, 세종 3년 7월 28일). 황해도 황주 목사 정효문도 당시 조세제도의 맹점을 하소연했다(세종 3년 8월 30일).

여러 해 동안 세금 문제로 고심한 세종은 세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짧은 조사 기간 내에 담당 지역의 수확량을 철저히 심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세금 감면을 노린 청탁과 비리가 난무했으며 ▷제도 운용이 그릇된 결과, 대지주의 세금은 가벼우나 가난한 백성의 부담은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점이었다. 세종은 이 사태를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다(세종 10년 7월 5일).

“백성이 나라의 근본”… 전국 민심 파악해


▎전국 규모의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는 내용이 담긴 세종실록.
가장 큰 폐단은 파견된 관리에게서 비롯되었기에 우선 그들의 비리를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한번은 경북 경주에 내려간 판관 금학이 실무조사원(서원) 박춘언과 공모해 풍작을 흉작이라 속이고 경작지를 묵밭이라 허위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왕은 그들을 엄벌해 일개 수군(水軍) 병사로 강등하는 조치를 취했다(세종 12년 12월 29일).

조세 문제의 해법을 찾고자 왕은 중국의 역사도 검토했다. 거기서 한 가지 해결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공법(貢法)’이었다. 한나라 때도 그러했고 당나라 이후에도 여러 왕조가 이 법을 따랐다. 명나라 역시 공법을 시행했다(세종 18년 10월 5일).

‘공법’이란 평균 수확량을 정확히 파악해 해마다 백성들이 일정한 곡물을 바치게 하는 제도였다. 누구나 자신이 부담할 세액을 미리 알아서 준비할 수 있어 편리했고, 국가도 재정수입이 안정돼 일석이조(一石二鳥)였다. 물론 해마다 수확량의 변화를 고려해 탄력적으로 운용했다(세종 18년 2월 22일).

세종은 이러한 공법이야말로 답험손실법을 대체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즉위 초부터 그는 줄곧 그런 견해를 가졌다(세종 21년 5월 4일, 왕의 회상). 하지만 세법을 함부로 바꾸었다가 백성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아니 될 일이라 생각했기에, 여러 해 동안 홀로 암중모색했다.

왕이 자신의 의지를 천명한 것은 세종 9년(1427) 3월 16일이었다. 그날 시행된 문과 중시(문과에 합격한 신하들이 치르는 시험)에서 세종은 “공법을 시행했을 때 일어나는 폐단을 최소화할 방법을 논하라”는 시험문제를 냈다. 중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이는 정인지였는데, 그는 공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세종은 공개적으로 공법의 도입을 논의했다. 세종 11년 11월 16일에는 호조에 명하여 공법 초안도 작성하게 했다.

세법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보인 세종의 정치적 행위는 놀라울 만큼 ‘현대적’이었다. 왕은 여론을 광범위하게 청취하고, 이를 다각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15세기 전반에 이미 전국 차원의 여론조사 또는 주민투표를 시행하였으니, 대단한 일이었다.

호조가 왕에게 제출한 공법 초안은 무척 단순했다. 논밭 구별 없이 경작지 1결에 벼 10말을 거두는 방식이었다. 세종은 이 법안을 가지고 백성들의 뜻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아직 여러모로 미흡한 새 법안을 무조건 시행하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긴 것이었다.

“육조는 물론 중앙의 모든 관청에 물어라. 도성에 거주하는 모든 전·현직 관리들, 그리고 각 도의 지방관들에게도 물어보라. 여염의 가난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에게 새 법의 가부를 어서 확인하라.”(세종 12년 3월 5일)

이후 5개월 동안 300명쯤의 관리가 호별 면접을 통해 여론을 빠짐없이 청취했다.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여론조사였다.

조사에 응한 이가 17만 명을 넘었다. 혹자는 [세종지리지]의 인구 총수가 69만 2477명이란 점을 이유로 25%가량이 참여한 주민투표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조사는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했으므로, 여론조사라고 보아야 옳겠다. 또, 그 시절의 인구조사는 부실하기 짝이 없어 실제 인구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왕이 세법 초안을 제시하고 그에 관한 여론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는 점은 획기적이었다.

앞선 찬성 여론에도 정교한 초안 위해 숙고 거듭


▎공법을 위해 세종 25년인 1443년 설치된 전제상정소에 대한 규칙과 토지세금 부과를 위한 제반규정들을 기록한 전제상정소준수조획 (田制詳定所遵守條劃).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그해(1430) 8월 10일, 호조가 왕에게 최종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날짜 실록에는 1만9000자에 달하는 장문의 보고서가 수록됐다. 총 17만2806명에게 물어본 결과, 9만8657명(57%)이 찬성했고 7만4149명(43%)이 반대했다. 찬성률이 높은 지역은 경기·전라·경상 등 세 지역이었다. 특별 구역인 개성에서도 찬성이 절대다수였다. 이들 지역에서는 찬성률이 90%를 훨씬 웃돌았다(경기도: 찬성 1만7106명, 반대 241명 / 전라도: 찬성 2만9547명, 반대 269명 / 경상도: 찬성 3만6317명, 반대 393명).

공법안에 반대표가 많이 나온 지역도 다섯이나 되었다. 충청도의 찬성률은 3분의 1쯤 되었고(찬성 6995명, 반대 1만4039명), 황해도는 그 비율이 20% 정도였다(찬성 4471명, 반대1만5618명). 강원도는 찬성률이 10% 정도에 머물렀고(찬성 944명, 반대 6898명), 평안도와 함길도는 반대가 대부분이었다(평안도: 찬성 1332명, 반대 2만8510명, 함길도: 찬성 78명, 반대 7401명).

관리들의 의견은 어떠했을까. 3품 이하 전·현직 관리들은 백성들과 비슷했다(찬성 702명, 반대 510명). 그러나 대신과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원들은 반대 의견이 찬성보다 네 배나 많았다(세종 12년 8월 15일).

공법에 반대하는 관리 중에는 그 이유를 설명한 이도 상당수였다. 요약하면, 공법이 부자에게는 유리하지만 가난한 백성에게는 불리하다고 했다(세종 12년 8월 10일). 즉, 비옥한 경작지를 소유한 부자들에게 1결당 10두라는 세액은 무척 저렴한 것이었다. 관리들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찬성이 많이 나온 이유도 그들 지역의 농업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반면에, 토질이 바쁜 함길도 등지에서는 공법을 적용하면 세금이 도리어 올라가는 셈이라서 반대가 많다고 보았다. 만일 흉년에도 결당 10두씩을 거둔다면 북부지방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세종은 신하들의 다양한 의견을 꼼꼼히 검토했다. 그들의 견해는 대체로 세 가지였는데, 첫째는 답험손실법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영의정 황희 등). 그들은 제도적 보완을 위해 전문지식을 갖춘 평가전담관을 양성하자고 제안했다. 둘째는 지역 특성을 고려해 공법과 답험손실법 가운데서 편리한 제도를 골라 쓰면 된다는 선택론이었다(전 병조판서 조말생 등). 끝으로, 공법을 잘 다듬어서 개혁을 완성하자는 의견도 있었다(봉상시 주부 이호문 등). 토질의 차이는 물론 해마다 작황을 따져 차등과세를 하자는 주장이었는데, 특히 경기도와 전라도의 지방관 중에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이가 많았다.

세종은 내심 공법 개선안에 환호하면서도 영의정 황희 등의 의견을 수용했다. 왕은 반대 여론을 수용하여 공법 초안을 정교하게 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백성을 위해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인 만큼 함부로 서두를 일이 결코 아니었다.

구(舊)제도인 답험손실법이 다시 한동안 시행되었으나 그 폐단이 사라질 리 없었다. 세종 17년(1735), 충청도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다. 그해 농사는 풍작에 가까웠는데, 서울에서 내려간 관리들은 대부분의 경작지에서 마치 흉작이 발생한 것처럼 보고했다. 세제 개혁을 통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런 잘못이 언제 어디서든 재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됐다.

세종의 근심이 더욱 깊어지고 있을 때, 충청도 관찰사 정인지가 한 장의 상소를 올렸다(세종 18년 2월 22일). 그는 이제라도 공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알다시피 정인지는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왕이 기른 탁월한 인재였다.

시범 운영으로 대신들의 반대 돌파


▎훈민정음 반포 재현 행사’에서 집현전 학자 정인지가 창제자 대표로 세종에게 훈민정음을 올리고 있다. 세종과 정인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훗날 세종은 공법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경이 (중시) 책문(시험 답안지)에서도 그러했고,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도 공법을 추진하자고 상소했다. 그 덕분에 내가 결단을 내렸다.”(세종 28년 6월 18일)

정인지의 상소문에 고무된 세종은 그 이튿날 경연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공법은 좋은 제도인데 아직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1∼2년 동안만이라도 시험해 보았으면 한다.”(세종 18년 2월 23일)

그해 5월 중순, 왕의 성의에 감동한 의정부 대신들은 공법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세종은 이를 호기로 판단하고, 대신들을 모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했다(세종 18년 윤 6월 15일). 그해 10월, 의정부는 왕의 뜻을 따라 곧 공법을 시범 운영하자고 건의했다. 이렇게 해서 왕은 공법을 제대로 시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공법 시행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새 법의 시행령이 선포되었으나(세종 19년 7월 9일), 황해도 관찰사는 흉년을 이유로 법의 시행을 연기하자고 했다. 아직도 조정에는 반대 기류가 거세다는 점을 의식한 세종은 우선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제한된 지역에서만 공법을 시험하기로 했다(세종 19년 8월 7일). 그런데 이번에는 경상도 관찰사 역시 흉년을 구실 삼아 반대했다(세종 19년 8월 22일).

실망한 왕은 공법상정소에 대책을 물었다. 이번에도 대신들의 견해는 서로 엇갈렸다. 영의정 황희와 이조판서 하연은 답험손실법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의정부 찬성 신개와 중추부 판중추 안순은 공법을 유지하고, 흉작이 심한 지역만은 답험손실법을 적용하자고 했다. 왕은 의정부와 육조의 합석 회의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였는데, 회의 결과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공법을 중단하고 종전대로 손실법을 쓰겠다.”(세종 19년 8월 28일) 세종은 또다시 일보 후퇴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가 되자 세종은 공법의 불씨를 되살려냈다. “만약 경상도와 전라도 백성 가운데 2/3 이상이 공법의 시행을 바란다면 시범적으로 운영하겠다.”(세종 20년 7월 10일) 그는 대신들과 길고 긴 토론을 재개했다. 의견은 이번에도 여럿으로 쪼개졌다. 그 이튿날도 세종은 치열한 토론을 이어나갔고, 결국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시범 운영하기로 결론을 냈다.

그때 조정에는 왕의 판단을 믿고 힘껏 지지하는 신하도 있었다. 좌찬성 신개였다. 그의 ‘졸기(사망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인데, 그는 공법을 비롯해 왕이 추진하는 많은 정책을 힘써 뒷받침했다. “그런 그를 당시의 여론이 비판하였다”며 실록의 편찬자들은 그를 질책했다(세종 28년 1월 5일, 졸기). 그러나 신개야말로 세종의 본의를 깊이 이해한 충직한 신하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세종 20년 10월 12일,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큰 홍수 피해를 입었다. 신개는 전라도 옥야와 경상도 낙동강 일대가 물에 잠겨 실농했으므로 면세 혜택을 주자고 건의했다. 세종은 그 말을 받아들여 변효문과 민공을 현지에 보내 진상조사를 했다. 결과적으로 경상도 1800여 결과 전라도 1570여 결이 면세 혜택을 입었다(세종 20년 11월 20일). 이처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홍수 피해를 처리했기 때문에 공법에 대한 비판이 수그러들었다.

공법이 시범 운영되자 조세 수입이 증가했다. 그러자 공법 때문에 백성의 부담이 늘어났다며 새 법을 비판하는 대신들이 있었다. 우의정 신개는 이로 인해 공법에 대한 저항이 커질까 봐 걱정했다. 그때 전라도에서는 세입이 50% 이상 늘어났고 경상도에서는 70% 이상 증가했다(세종 23년 7월 5일).

하지만 오래전부터 세종은 그 문제를 예의 주시했다. 세제 개혁의 근본 목적은 민생을 살리는 데 있었기 때문에, 왕은 공법으로 인해 백성의 실질적인 부담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폈다. 과거에는 수확량을 평가하는 관리를 접대하느라 백성의 지출이 컸으나, 이제 공법 덕분에 불필요한 비용이 사라졌다. 세금을 전보다 조금 더 징수해도 백성의 부담은 오히려 줄었다. 왕은 자신의 판단을 확신했다. “그동안 백성들이 억울하게 지출한 비용 일부가 국가 세입으로 흡수된 것이다.”(세종 21년 5월 4일)

제도적 결함 보완 위해 54등급 과세 기준표 신설


▎세종의 공법 시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정인지의 초상화.
처음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제도적 결함이 시범 운영 과정에서 하나씩 발견됐다. 취지가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정성껏 다듬은 뒤라야 민생에 유익하다. 세종은 그런 신념으로 대신들과 토론을 거듭하며 공법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시범 운영을 시작한 지 3년이 되자(1440) 세종은 세율의 차등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더욱더 절감했다. 왕은 의정부에 개선책 마련을 지시했다. 대신들은 우선 고을 단위로 경작지의 등급을 3개로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 이듬해, 우의정 신개는 중북부 지방에 토질이 나쁜 하등전이 많은 점을 상기하며, 하등전을 다시 세분하여 3등급으로 쪼개자고 제안했다(세종 23년 7월 5일). 그해 7월 7일, 공법은 충청도까지 확대 시행됐으나 임금과 신하들이 수긍할 만한 합리적인 과세지표는 아직 작성되지 못했다.

세종 23년 11월 2일, 왕은 호조에 지시해 과세지표의 완성을 당면 과제로 제시했다. 그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는데, 토질에 따라 경작지를 9등급으로 나누자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세종 25년(1443) 9월까지도 이 문제는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설왕설래를 거듭했다. 세종은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면서 관련자들을 독려했다. 두 달 뒤 수확량에 따라 해마다 9등급(연분 9등)의 과세지표를 만들면 좋겠다는 주장이 일어나 많은 지지를 얻었다. 토질을 기준으로 5등급(전분 5등)으로 나누자는 견해도 관심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왕은 정확한 토지대장(양안) 작성이 공법 시행의 필수조건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이를 위해 그해 11월 13일에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라는 임시 특설기구를 두었다. 왕자들 가운데서 행정에 가장 뛰어난 진양대군(나중에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바꾼 훗날의 세조) 이유를 이 기관의 우두머리(도제조)로 삼고, 의정부 좌찬성 하연, 호조 판서 박종우, 지중추원사 정인지를 최고위원(제조)으로 임명해 전국의 토지대장을 다시 정리하게 했다. 이처럼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해 세제 개혁이 속도를 내지 못하면, 직접 논의에 뛰어들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드디어 많은 토론 끝에 세종 26년(1444) 11월 13일, 전제 상정소는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전국의 경작지를 토질에 따라 6등급(전분 6등)으로 나누고, 수확량을 기준으로 해마다 9등급(연분 9등)의 차등 세율을 정했다. 요컨대, 총 54등급으로 차별화된 과세기준표가 완성된 것이다.

국가재정은 충실해지고 후대는 칭송을


▎공법의 우수성을 확신한 세조는 조선법전 ‘경국대전’에 공법을 수록했다.
왜, 하필 전분 6등이고 연분 9등인가. 이것은 왕과 대신들이 모여서 함부로 결정한 수치가 아니었다. 실로 오랜 토론 결과를 집약한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세종은 최종 결정이 내려지기 몇 달 전에 시범 운영지구인 충청도 청안현에 예조판서 김종서와 우참찬 이숙치 및 대제학 정인지를 파견했다(세종 26년 8월 1일). 거기서 그들은 벼의 수확량을 자세히 조사했다.

그때 남부지방에는 국가가 특별히 관리하는 시범 운영지구가 모두 6곳에 달했다. 충청도의 청안과 비인, 경상도의 함안과 고령, 그리고 전라도의 고산과 광양이었다. 왕은 전제 상정소에 명하여 이들 지역의 토지대장(양안)부터 바로 잡았고, 각 등급의 수확량도 파악했다(세종 26년 8월 24일). 이처럼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전분 6등과 연분 9등이란 과세지표가 탄생한 것이었다.

6개 시범지역의 수확량을 조사한 결과, 세종이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사실 하나가 저절로 밝혀졌다. 세종은 정인지에게 보낸 비밀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에는 관리들이 현지에서 손실을 판정할 때 지나치게 소홀했다. 수확량의 수십 분의 1만을 세금으로 징수하였구나. 이런 풍습이 굳어진 결과, 오늘날 공법은 그 세율이 선왕들이 이상적으로 여긴 10분의 1세 정도이건마는 백성들이 좋은 줄도 모르게 되었다.”(세종 26년 8월 24일)

15세기의 백성 가운데는 공법의 이점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조정의 신하 중에서도 세제 개혁을 끝끝내 반대하는 이가 있었다. 세종 28년 5월 3일,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은 상소를 올려 공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수확이 없는데도 세금을 내야 하다니, 어찌 이런 법이 있습니까?”라며 흥분했다. 성균 주부 이보흠도 공법이 시행된 지 8년이 되었으나 원망하는 사람이 많다며 공법 폐지를 주장했다(세종 28년 7월 2일). 그는 공법의 맹점으로 10결의 경작지가 모두 큰 피해를 보아야 손실을 인정하는 나쁜 폐단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쏟아지는 비판 때문에 마음이 무척 불편했을 테지만, 세종은 참고 견디며 그들의 의견 가운데서 참작할 점이 있는지 열심히 점검했다.

왕자 시절 전제상정소를 이끈 세조는 공법의 우수성을 확신, 이를 [경국대전]에 수록했다(세조 6년, 1460). 이후 공법은 더욱 확대 시행됐다. 성종 2년(1471)에는 황해도로, 4년 뒤(1475)에는 강원도로 뻗어 나갔다, 성종 17년(1486)에는 평안도까지 포함됐고, 성종 20년(1489)에는 함경도까지도 시행돼 명실상부한 조선의 세제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시간이 흐르자 공법에 대한 평가도 호전됐다. “공법은 영원토록 바꾸지 말고 시행해야 할 법입니다.”(성종 5년 7월 24일) 대신 조석문의 주장이었다. 공법에 힘입어 국가 재정도 충실해졌다. 명종 7년(1551) 7월 4일, 영의정 이기는 이 법 덕분에 성종 때 국가의 창고에 쌀이 가득 찼다며 옛일을 회상했다. 세종은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공법을 관철했다. 그로부터 30~40년 만에 후손이 마음껏 혜택을 누렸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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