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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51)] 조선 성리학 기초 다진 회재(晦齋) 이언적 

유학 본원 밝히고 이단의 사설(邪說) 물리치다 

직언하다 파직 뒤 경주 옥산계곡에 독락당 짓고 7년간 학문 탐구
화두 오래 삭이고 빅데이터 저술… 유학자 사유의 패러다임 바꿔


▎이지락 종손이 회재 종가인 무첨당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이듬해 3월 어머니를 뵙기 위해 귀향했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 이기(李芑)가 임금에게 아뢴다. ‘이모는 세자에게 아부하고 중종(中宗)을 배반했으며, 10조(條)의 서계(書啓)를 올려 임금의 수족을 꼼짝 못하게 묶었다. 또 유인숙과 교분을 맺어 역신(逆臣)을 변호하려 했다.’ 대사헌 윤원형 등이 부화뇌동하여 훈작을 삭탈했다. 얼마 뒤 부제학 정언각이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를 올리자 이기 등이 이를 이용해 인사들을 일망타진했다. 송인수·이약빙·노수신·정황·유희춘·김난상·권벌 등 한 시대의 정인(正人) 30여 명이 모두 화를 입었고, 선생 역시 화를 면치 못했다….”


이항복이 쓴 ‘회재이선생묘지(晦齋李先生墓誌)’의 일부다. 명종(明宗)이 즉위한 1545년 이후 있었던 일들이다. 의정부 좌찬성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56세부터 시련이 이어졌다. 이기가 당시 명종에게 아뢴 내용을 돌아보자. 이항복은 묘지명에서 ‘무고’로 표현한다. 인종에 이어 12세에 즉위한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고 있었다. 이모가 아부했다는 세자는 즉위 8개월 만에 승하한 인종(仁宗)이다. 왕권이 급작스레 교체되면서 정정은 불안해졌다. 명종의 외척 윤원형 중심의 소윤(小尹)은 인종의 외척인 윤임 중심의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평소 밉보던 사림(士林)까지 몰아낸다.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다. 권력 투쟁 중 조정 신하들은 망아지처럼 두려워해 감히 용기 있게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항복은 “좌찬성 회재 이언적과 우찬성 권벌 같은 분이 당시 대신(大臣)다운 말을 했다”고 적었다.

이기가 언급한 ‘10조의 서계’는 ‘제1조 자전(慈殿, 어머니 문정왕후)께서 성상의 자질을 잘 인도하여 보양해야 한다’ 등 수렴청정의 세부 지침이다. 이 일로 회재는 훈작을 빼앗기고, 이듬해 소윤파의 자작극으로 의심되는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돼 다시 화를 입는다. 회재와 이기는 악연이다. 1543년(중종 38) 회재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부터다. 도사(都事) 이천계가 사헌부 지평으로 부름을 받으면서 관찰사에게 묻는다. “듣기로 지금 정승을 천거 중인데 여론이 이기에게로 쏠린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재는 바로 답한다. “그는 사람이 음험해 재상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됩니다.” 얼마 뒤 이기가 재상으로 발탁됐으나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파직된다. 이기는 연유를 듣고 회재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번에 회재에게 미친 화는 유배형이다. 귀양지는 최북단 압록강 변 강계부(江界府). 그는 7년 뒤 유배지에서 병으로 별세한다.

회재는 선비들의 명예의 전당 격인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동방오현으로 추앙받는다. 동방오현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가리킨다. 조선 유림이 40년 공의를 거쳐 1610년 선정했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비교문화연구소장은 정몽주에서 시작된 도학(道學)이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계통이 이어졌다고 본다. 물론 사승(師承) 관계는 아니다. 이들은 도리를 중시하는 실천 유학자인 만큼 선비로서도 최고의 존경을 받아왔다.

'대학'에 치밀한 관심을 보이다

4월 22일 회재의 면모를 찾아 선생이 태어나고 사유한 터전인 경북 경주 일대를 찾았다. 먼저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들렀다. 코로나19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져 마을은 한적했다. 마을 가운데 종가인 무첨당(無忝堂)에서 이지락(53)씨를 만났다. 회재의 17대 종손으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고전을 국역하고 있다. 선생의 호(號)는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다가 스스로 회재(晦齋)라 했다. 주희에 대한 흠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이름은 본래 적(迪)이었으나 신하들 가운데 같은 이름이 있어 31세 때 중종이 언(彦)자를 더해 언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종손은 “한훤당이 [소학] 중심 사유 활동을 했다면 선조는 [대학]에 치밀한 관심을 보였다”며 “특히 학자로서 빅데이터라 할 수 있는 백과사전식 저술 활동을 시도했다”고 소개했다. 사유는 관직에 있는 동안은 질문을 붙들고 독락당에서 머문 7년 동안 곰삭게 한 뒤 만년에 풀어내는 방식이었다. 유배지에서 쓴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구인록(求仁錄)] 등을 사례로 꼽았다. 유학자의 사유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빅데이터 저술은 후대에 성호 이익 등이 잇는다.

이야기는 리더십으로 옮겨갔다. 회재는 40세에 사간원 사간이 된다. 당시 김안로가 오랫동안 유배돼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를 다시 등용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사간원 정언 채무택이 주장하고 사헌부 대사헌 심언광이 동조하며 조정이 그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회재는 “절대 불가”를 주장한다. 그로 인해 정언이 바뀌고 회재도 사예로 좌천됐다. 그 뒤 심언광이 묻는다. “사예는 김안로가 소인이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러자 회재는 “김안로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마음가짐과 일 처리가 소인임을 익히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뜻을 이루면 필시 나라를 그르치고 말 것”이라고 응수했다. 또 심언경이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도 그에게 어찌 막중한 권력을 위임하겠소” 하자 회재는 재차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들어오면 오래지 않아 권력을 잡고 날뛸 것이니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심언광은 그 말에 성을 내며 나가 버렸다. 조정에는 “이모가 있으면 김안로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나왔고 회재는 결국 파직이 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40대 관료 이언적은 이렇게 강직했다. 이후 김안로는 조정으로 돌아온다.

어머니 문정왕후 수렴청정이 이치에 맞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회재 선생이 모셔진 경주 옥산서원.
회재는 그러나 50대엔 달라진다. 자세가 부드러워졌다. 벼슬길도 순탄한 편이었다. 50세엔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을 맡았으며 뒤에는 한성판윤, 이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등 요직을 두루 맡는다. 55세에 의정부 좌찬성으로 있을 때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이 논의됐다.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영의정 윤인경이 “어느 전(殿)이 청정(聽政)해야 하겠소?”라고 묻자 모두 침묵했다. 회재가 “예전에 송(宋)나라 철종 때 태황태후가 청정했으니 고례(古例)가 있으므로 의문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또 어찌 형수와 시동생이 함께 대전(大殿)에 임어(臨御)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수렴청정의 의제(儀制)만 정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조정은 다른 논의가 사라졌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게 ‘옳다’는 의견이었다.

무첨당을 나왔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무첨당이 아닌 외가인 양동마을 안 서백당이다. 아버지 이번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마을로 이주했고, 점차 번성해져 양동은 이후 손·이 양 가문의 집성촌이 된다. 회재는 어려서 외숙이자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인 손중돈에게서 배웠다. 양동마을을 나와 11㎞ 떨어진 옥산서원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내려 옥산천(또는 자계천)을 따라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서원까지 흙길을 걸었다. 옥산서원도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9개 서원 중 한 곳이다. 유네스코 측은 심사 당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서원 진입로 공간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쓴 ‘玉山書院’(옥산서원) 투박한 글씨가 인상적이다. 이곳 사당에는 회재 선생 위패만 모셔져 있다. 종손은 그러나 “종가도 서원도 공식 제사가 아니면 사당은 절대 열지 않는다”고 했다. 강당 구인당(求仁堂) 앞에 서니 저만치 자옥산이 보였다. 서원을 감싼 앞뒤 산이 자연의 울림을 만드는 공간이다. 옥산천 너럭바위에는 퇴계 이황의 필적‘洗心臺’(세심대) 가 새겨져 있다. 서원을 둘러본 뒤 이지락 종손과 헤어졌다.

회재가 젊은 시절 공부한 서원 인근 정혜사로 가다가 먼저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에 들렀다. 그는 41세에 김안로 직언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왔다. 당시 손씨 터전이나 다름없는 양동을 벗어나 아버지가 지은 계정(溪亭)이 있던 옥산에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자옥산 아래 독락당이다. 그는 아름다운 자옥산과 계곡, 맑은 시내와 못을 사랑했다. 마음을 붙든 다섯 곳엔 세심대·관어대(觀魚臺) 등 이름을 붙였다. 회재는 42세에 옥산천 계곡에 수십 칸집을 짓기 시작한다. 그러나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하고 독락당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독락당 앞뒤로 소나무와 대나무, 꽃을 심고 그 속에서 시를 읊고 낚시하며 세상일을 잊었다. 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사색을 즐겼다. 전원생활은 15수의 시(林居十五詠)로 남아 있다.

무리 떠나 홀로 사니 누구와 함께 시를 읊나/ 산새와 물고기가 내 얼굴을 잘 안다오/ 그 가운데 특별히 아름다운 정경은/ 두견새 울음 속에 달이 산을 엿볼 때지

그 중 ‘독락(獨樂)’이라는 시다. 자연을 받아들인 한 인간의 희열이다. 그동안 듣고도 깊이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비로소 환해졌다. 여기서 7년간 머물며 학문은 훌쩍 깊어졌다.

독락당에 남은 보물만 146점


▎자연을 끌어들인 설계가 돋보이는 경주 독락당의 계정.
독락당에는 마침 이해철(71) 주손이 뜰에 있었다. 초췌한 모습이다. 그는 항암 치료 중이라고 했다. 회재는 정실인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양자(응인)를 들였다. 측실인 석씨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전인)이 있었다. 26세 때 이전인이 태어났지만 출생 사실을 모르다가 만년에 유배지로 찾아와 알게 된다. 주손은 서자(庶子) 잠계 이전인의 후손이다. 회재 관련 서책이 빼곡한 응접실에서 주손은 집안에 있어 온 적서 차별을 언급했다. 유배 생활 7년 내내 곁을 지킨 아들 잠계가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쏟은 노력들도 강조했다.

그러다가 주손은 몸을 일으켜 독락당 뒤쪽에 마련된 회재 유물관의 문을 열었다. [대학장구보유] 등 전적과 고문서, 경상도 관찰사 시절 유서통 등 각종 유물, 그리고 퇴계가 쓴 원조오잠(元朝五箴), 사산오대(四山五臺) 유묵 등이 진열돼 있었다. 보물만 146점이다. 회재 연구에 빠져서는 안 될 자료들이다. 잠계 이래 옥산문중은 시대의 신분적 벽을 넘어 자료를 지키고 회재를 높이는 일에 매달려 왔다. 문중은 2007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독락당에 내려온 자료 일체를 제공해 전문 연구의 길을 열었다. 그 첫 결실이 [바위틈에 핀 들꽃]이란 도록의 출간이다.

퇴계는 회재의 신원 회복과 문묘 배향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퇴계는 회재보다 나이가 10년 아래다. 퇴계는 회재의 행장(行狀)을 썼다. 퇴계는 일생 6편의 행장만을 썼다. 회재와 퇴계는 생전에 교분이 두터운 사이가 아니었다. 행장에는 그 관계가 “나(퇴계)는 본디 선생(회재)을 찾아가서 뵌 적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탓에 깊게 질문한 적이 없다”고 적혀 있다. 그때까지는 관료로 아는 정도였던 것 같다.

행장을 쓴 것은 아들의 효성이 계기였다. 행장에는 “몇 년 전 선생의 서자 전인이 와서 선생이 찬술한 여러 책을 보여줬다. 근래 전인이 또 그 아들 준 편에 수집한 선생의 시문과 지명(誌銘) 및 거쳐 간 관직의 시말, 언행과 사실을 거듭 보내줬다”고 적혀 있다. 이전인은 아버지 사후 10여 차례 도산을 찾아 부친의 저술을 알리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거듭된 요청에 퇴계는 회재의 자료를 검토한다. 그리고는 회재를 새로이 인식한다. “선생이 도학에 대해 이렇게 절실히 추구하고 힘을 다해 행하고 이렇게 바름을 얻어 선생의 출처(出處) 대절(大節)과 충효 일치가 모두 근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도통 체계에서 16세기 중엽까지 그 계승자로 주목 받은 사람은 모재 김안국”이었다고 말한다. ‘모재문묘종사론’까지 발론 됐을 정도다. 그 모재를 회재로 물줄기를 바꾼 사람이 바로 당대의 유종(儒宗)인 퇴계였다는 것이다.

퇴계가 발견한 회재의 도학자적 면모


▎독락당 회재유물관에 전시된 [대학장구보유].
회재유물관을 나와 독락당과 계정을 둘러봤다. 독락당은 담을 활용해 외부에는 폐쇄적이지만 계곡 쪽으로는 열려 있다. 담장 가운데 살창으로 떡갈나무의 초록 잎이 보이고 옥산천 물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유년에 수학했다는 계정에 오르니 난간 아래가 바로 계곡이다. 정자의 반은 집 안쪽에 반은 계곡 쪽에 세워져 자연과 하나가 됐다.

만년의 터전은 춥고 험한 유배지 강계였다. 선생이 유배지에 도착한 이듬해 어머니가 별세한다. 그는 한질(寒疾)을 앓고 있었지만, 어머니 옷으로 신위(神位)를 만들어 아침저녁 통곡하며 3년상을 치렀다. 회재는 유배지에서 책을 쓰며 학문에 정진했다. 그 옆에는 늘 경계하는 글이 있었다. ‘하늘을 섬기는데 미진하지 않았는가. 임금과 부모를 위하는데 정성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마음가짐에 바르지 못한 점이 있지는 않았는가.’ 유배지의 대표 저작이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구인록]이다. 퇴계는 “선생의 학문은 이 세 책을 통해 볼 수 있다”며 “우리 유학의 본원을 밝히고 이단의 사설(邪說)을 물리쳤다”고 평가했다.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회재는 주자의 주리론에 입각해 조한보 등과 유명한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553년(명종 8) 11월 선생은 유배지에서 삶을 마쳤다.

[박스기사] 어머니 임종 못 지킨 애틋함 사모곡에 담아

“자식 노릇을 못했으니 천지간에 죄를 지었다”

회재 이언적은 58세에 유배지 강계에서 어머니 별세 소식을 듣는다. 죄인으로 임종할 수 없었던 맏아들 회재는 제문을 지어 조카 편에 슬픔을 전하는 길뿐이었다. 그는 8개월 뒤 어머니의 비석에 새길 묘갈명을 짓는다. [회재집]에 애틋한 사모곡(思母曲)이 실려 있다. 주요 부분을 간추린다.

선부인(先夫人, 어머니)은 아름다운 성품을 타고나 단아하고 정성스럽고 엄정했으며, 오직 덕을 행하였다. 부부간에는 화목하고 서로 공경하기를 빈객과 같이했다. 그러다가 선부인이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자녀들은 모두 어렸고 생계를 꾸려 갈 방책이 없었다. 항상 자식들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기를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있는 것은 너희들 때문”이라 했다. 아비 여읜 자식들을 기르면서 사랑이 각별했지만 가르침을 중단하지 않고 스승을 찾아 객지로 가서 배우도록 허락했다. 나 언적이 어려서 바른 가르침을 입은 덕분에 대략 문구를 깨달아 과거에 합격했다. 세 임금을 차례로 섬기며 분에 넘치는 은총을 입고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선부인은 은혜 베풀기를 좋아했다. 형제 8명이 모두 선부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선부인은 매번 형제의 기일이 되면 그리움과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고기를 들지 않았다. 요절하여 후사가 없는 형제에겐 반드시 술과 음식을 마련해 직접 술을 따라 올렸다. 과부로 40년을 지냈지만 고아를 가르치고 길러 조상을 현양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향리와 나라 사람들이 칭송했다. 무신년(1548) 6월 18일 작고하니 향년 80이다. 선부인이 병석에 계실 때 아들딸과 며느리가 모두 시중을 들었다. 나 언적은 뜻하지 않은 재앙을 만나 조정의 견책을 받고 관작이 삭탈된 채 먼 곳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를 넘기도록 혼정신성(昏定晨省,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고 아침에는 문안하다)하지 못하다가 영원히 사별하고 말았다. 세상일을 알 수 없음이 이와 같구나! 빈렴(殯斂)할 때 널에 기대 통곡하지 못하고 하관할 때 광혈(壙穴)에 나아가지도 못했다. 자식 노릇을 못했으니 천지간에 죄를 지었다. 애통한 마음으로 하늘 끝을 바라보다 혼절한 뒤 깨어났다. 피눈물을 흘리며 명(銘)을 지어 목숨이 다하도록 사무칠 슬픔을 부친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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