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8)] 스웨덴, 평등을 시장에 담은 나라 

“부자 없이 복지 없다” 

열악한 기후·환경을 노·사·정 합작으로 극복하고 복지국가 모델 완성
투명한 시스템에서 글로벌 대기업 출현… 난민 유입에 따른 극우화 부작용도


▎스톡홀름 전경. 스웨덴 왕궁과 의회, 국립박물관과 교회가 보인다. / 사진:위키피디아
스웨덴은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주민이 황량한 영토에서 근근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북유럽 동토(凍土)의 가난한 나라였다. 17세기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발트 지역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건 아니었다. 실제 19세기 말 인구 대비 이민 통계만 보더라도 스웨덴에서 신대륙으로 가는 이민자 숫자는 아일랜드 다음으로 많았는데, 이런 불행한 현실은 1930년 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2020년 현재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다. 1인당 국민소득은 5만 달러를 넘어섰고, UN의 인간개발지수(HDI)는 2018년 세계 8위로 최상급이다. 소득만 높은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이 정상급이라는 의미다. 스웨덴 하면 복지국가의 대명사로 떠올라 세계 진보세력의 이상향(理想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여성의 사회 진출과 같은 남녀평등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다. 의회에서 여성의 비율은 1994년 이후 계속 40%대를 유지하고 있다.

스웨덴 사회는 평등을 중시하면서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기업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케아(IKEA) 가구나 H&M 의류를 모르는 소비자는 드물다. 독특한 디자인과 성능을 자랑하는 볼보자동차나 음악 스트리밍으로 유명한 스포티파이(Spotify), 정보통신산업에서 유럽을 대표하는 에릭슨 등은 모두 인구 천만 명 남짓한 스웨덴의 다국적 기업들이다.

스웨덴은 인구 대비 억만장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인구 25만 명에 1명꼴로 10억 달러(한화 1조2000억원) 이상의 자산가들이 있다. 억만장자들의 재산을 합치면 연간 국내총생산의 1/4 수준이다. 또 스웨덴은 여·야 합의로 2005년 상속세를, 그리고 2007년 부유세를 철폐한 나라다. 세계 진보세력이 부러워하는 복지국가와 보수진영이 꿈꾸는 부자 천국을 동시에 실현한 신비한 나라인 셈이다. 스웨덴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어떻게 유럽 변방의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부국으로 발돋움했을까.

스웨덴이 국제사회의 시선을 끌게 된 본격적인 계기는 1936년 미국의 진보성향 기자 마커스 차일즈(Marquis Childs)의 저서 [중도의 스웨덴]을 통해서다. 대공황의 커다란 충격으로 자본주의 세계가 침체에 빠져있던 1930년대는 시장경제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는 방황의 시대였다. 좌파의 공산주의 계획경제나 우파의 파시즘은 모두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국가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우는 프로젝트를 모색했다. 러시아의 소비에트 체제와 독일의 나치즘이 모델로 등장한 상황에서 차일즈는 스웨덴을 ‘제3의 길’이라는 대안으로 제시하고 나섰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즘이 붕괴한 뒤에도 스웨덴은 여전히 중도(中道)를 대표할 수 있었다. 냉전의 시대에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공산주의 계획경제 사이에서 스웨덴은 균형 잡힌 길을 밝혀 나가는 모델이 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사이에 타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스웨덴 모델은 명백하게 보여줬던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타협이 가능하다

덴마크의 사회학자 에스핑 앤더슨은 [복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에서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모델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복지 자본주의에는 영미식의 ‘자유주의’ 세계,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 대륙식의 ‘보수주의’ 세계, 그리고 북유럽식의 ‘사회민주주의’ 세계가 모두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시장보다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복지 혜택을 제공하며 사회 평등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모델은 최소한의 복지 혜택만을 극빈층에 제공한다. 유럽 대륙의 보수주의 모델은 국민 다수가 혜택을 보기는 하지만,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재분배를 통해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남녀의 차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복지혜택을 국가가 베푸는 시혜라고 보지 않고, 국민의 당연한 권리라고 인식하는 문화가 바탕에 존재한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평등주의 문화 성향은 북유럽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연금제도를 수립한 것은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기 훨씬 전인 1913년 자본주의 부르주아 정당이다. 스웨덴에서 복지국가란 국민 모두를 끌어안는 ‘민중의 집(Folkhem)’이라는 개념이 강하다. 그만큼 사회의 계급적 분화나 대립이 약하고, 반대로 민족의 동질성이 높은 사회라는 의미다.

스웨덴이 평등을 지향하는 복지국가를 완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1930년대부터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덕분이다. 스웨덴의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요소들은 명확한데, 농업을 제외한다면 전통적으로 철광석과 임업이 경제의 중심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 안에서 특화된 경제 체제를 운영해 왔던 것이다. 특히 철강 산업과 목재, 펄프 및 제지 산업은 스웨덴의 중요한 수출 산업으로 성장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스웨덴은 중립국이었음에도 나치 독일로 지속적인 철강을 수출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그만큼 독일 군수 산업에 스웨덴 철강은 결정적인 요소였다. 전후 경제에서도 스웨덴은 수출지향국가로 경제 도약의 발판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성장 가도를 달렸던 1950~70년 대에 스웨덴의 수출은 국내총생산 대비 20~25%에 달하는 높은 수준이었다.

노사 협력의 쌀트쉐바덴 모델


▎루터의 성경을 기초로 번역한 1541년 스웨덴 구스타프 1세 성경. 스웨덴어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것은 물론 스웨덴 루터교 전통의 출발점이 되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스웨덴식 산업 발전의 특징은 노사정 협력이다. 1938년 체결된 노동과 자본의 쌀트쉐바덴(Saltsjöbaden) 협약은 장기적으로 노동-자본 관계를 평화롭고 협력적으로 이끌었고, 이는 경제발전의 기본 조건이 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정부는 노동과 자본이 상호 협조하지 않을 경우 강제적인 입법으로 나갈 것이라고 ‘협박’했고, 이에 노동계와 자본 세력은 협의를 통해 노사관계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길을 선택했다. 노사정 협력의 가장 대표적인 기구로는 노동시장위원회를 들 수 있다. 임금이나 노동조건 등 노동과 자본이 합의를 도출해 내고, 그 대가로 파업과 같은 충돌을 피함으로써 노동시장위원회는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노동과 자본은 모두 평등한 임금 체계를 구성하자는 목표에 합의했고 삶의 조건을 향상한다는 점에서 동의했다. 1965년 스웨덴의 노동과 자본은 100만 주택을 건설하자는 계획을 세워 노동자의 주택 복지를 실현하는 데 앞장섰다.

물론 한 세기 가까이 지속한 스웨덴의 경제 굴기 과정에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1970년대 석유 위기로 스웨덴은 한 차례 홍역을 앓았고, 1990년대 초반 다시 마이너스 성장의 늪에 빠지기도 했다. 1991년부터 93년까지 스웨덴은 매년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고 그 결과 실업률은 9% 이상으로 치솟았다. 당시 독일이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자율이 높아지자 자금이 급속히 빠져나가면서 부동산 버블까지 심했던 스웨덴에 외환 위기와 금융 충격을 안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스웨덴은 기존의 노사정 체제나 복지 정책에 일련의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 도입부에서 언급한 부자 천국 스웨덴의 요소들은 대개 이 시기 이후에 수립된 정책의 결과다. 스웨덴의 높은 세금을 피해 스위스나 영국으로 도주했던 스웨덴 자본가들이 상속세와 부유세 철폐 정책에 호응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고, 에릭슨과 같은 기업들은 새로 부상하는 정보통신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복지국가나 경제발전에서 나타난 화합의 문화는 정치에도 그대로 투영돼 모습을 드러낸다. 스웨덴의 복지국가 형식이 사회민주주의의 세계를 대표한다면, 정치는 합의 민주주의 모형에 가깝다. 네덜란드의 정치학자 아렌트 레이파트는 영국·미국·프랑스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다수(majoritarian) 민주주의와 네덜란드·스위스 등으로 대표되는 합의(consociational) 민주주의를 구분한 바 있다.

사회민주당의 장기집권 동력


▎1938년 쌀트쉐바덴 협약이 맺어진 쌀트쉐바덴 호텔. 이 호텔은 스웨덴 최대 재벌 발렌베리 가문의 소유다. / 사진:위키피디아
정치세력들이 선거를 통해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 번갈아가면서 집권하는 다수 민주주의와는 달리 합의 민주주의는 주요 정치세력이 함께 권력을 공유하며 집권하는 모델을 말한다. 스웨덴은 이런 합의 민주주의의 전형은 아니지만, 비례대표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사회민주당이 1930년대 이후 장기 집권해 왔다는 점에서 합의 민주주의와 유사한 특징들을 가진다. 우선 1933년 사민당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농민을 대표하는 세력과 연합해 일명 적녹(赤綠, Red-Green) 동맹을 형성한 바 있다. 노동자 세력만을 대변하기보다는 농민과 노동자의 연합으로 집권에 성공했다는 의미다. 게다가 블루칼라 정당임에도 화이트칼라를 대변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적 지지를 동원했다. 사민당은 이후 1976년 선거에서 패배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스웨덴의 집권당으로 노동과 자본의 상호관계를 조정하면서 평화로운 경제발전을 주도했다.

스웨덴 사민당은 이후의 시기에도 1976~1982년, 1991~1994년, 2006~2014년 등 세 차례를 제외하곤 계속 집권당으로 군림했다. 야당으로 전락했던 위의 세 시기에도 사민당은 스웨덴 국회에서 의석수가 가장 많은 정당이었다. 다만 다른 정당들의 연정구성에서 제외됐던 것이다. 자연 사민당은 야당일 때도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고, 덕분에 스웨덴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변화에도 복지국가의 기본 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민당은 지속적으로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단독 세력이 아닌 연정의 형식으로 집권했다. 처음에는 농민세력의 도움을 받았고 이후 공산당이나 녹색당 등의 지지를 받았으며, 최근에는 중도의 중앙당이나 자유당과 연합도 꾸리고 있다. 사민당이 단독으로 의회 과반수를 차지한 것은 1940년과 1968년 선거 등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이처럼 국내정치에서 합의와 타협을 중시하고 평등을 추구하는 스웨덴의 정치적 성향은 국제무대에서도 중립주의와 인도주의로 발현됐다. 유엔(UN) 설립 초기에 노르웨이 출신 트리그브 할브란 리 초대 사무총장에 이어 스웨덴의 다그 하마르셸드가 1953~1961년의 기간에 제2대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국제 분쟁의 해결을 위한 평화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했다. 스웨덴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개발도상국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국익을 넘어 평화·개발·협력을 추진하는 ‘규범 사업가’(Norm entrepreneur)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이상적으로 보이는 스웨덴 사회 모델의 비결은 무엇일까. 국가가 나서서 시민들의 삶의 질을 보장하고, 노동과 자본은 정부 주도 하에 서로 협력해 국가 경제 발전을 추진하며, 정치도 대립과 투쟁보다는 화합과 연대와 타협을 중시하는 스웨덴의 비결은 역사와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복지국가, 경제발전, 화합정치 모두 공동의 뿌리와 줄기가 없다면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사회와 경제와 정치, 이 세 분야를 지배하는 원칙은 강한 국가다. 특히 복지국가를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시민들의 삶을 세세한 부분까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득만큼 세금을 거둘 수 있고, 필요한 사람에게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스웨덴 사회와 문화 전통은 특수하다.

역사학자 헨릭 스테니우스는 스웨덴의 가정은 “거실부터 부엌, 곳간, 아이 방과 침실 등 모든 문이 열려있고 단순히 열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가 들어와 간섭하며 때로는 폭력적으로 참견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사회의 투명성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다는 의미인데 시민들이 국가와 정부에 대해 신뢰를 가질 때만 가능한 현상이다. 이런 역사적 전통은 21세기 최첨단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스웨덴은 인터넷만 접속하면 공인은 물론 이웃의 소득까지 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전 국민의 세금 납부 내역을 공개하는 제도를 택하고 있다.

물론 정부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때로는 강압적인 정책으로 시민을 불행에 빠뜨리기도 한다. 스웨덴 국민은 국가가 전문성을 가지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국가 정책이나 계획을 따르는 성향이 강하다. 대표적인 정책으로 인구 부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유인하는 전략을 들 수 있다. 덕분에 남녀평등과 여성 지위 향상에는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모든 문이 열려 있는’ 투명사회


▎스웨덴의 의류 분야 초국적기업 H&M의 홍콩 아시아 플래그십 스토어. / 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사회를 정책적으로 조작하려는 사회적 엔지니어링의 시도는 ‘우수한 국민’을 만들겠다는 우생주의 정책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68년까지 간질환자의 결혼 자체를 금지했다. 또 1935년부터 1975년 사이 특수 질병을 가진 일부 시민들에게 6만여 건의 불임시술을 실시했다. 스웨덴 정부는 강제가 아닌 설득을 통해서였다고 강변했지만, 이런 정책의 인권 유린은 상황은 심각한 수준이다. 강한 정부가 길을 잘못 들 경우에는 재앙이 닥치기 마련이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의존은 국가와 종교의 긴밀한 협력에서 찾을 수 있다. 스웨덴은 16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을 신속하게 받아들여 루터파 스웨덴 교회를 형성한 바 있다. 루터교회의 영향력은 스웨덴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누구나 성경을 스스로 읽어야 한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원리에 따라 스웨덴은 1842년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시행했다. 루터교의 영향으로 이미 이웃 나라 덴마크는 1814년, 노르웨이도 1827년 초등교육을 의무화했다. 여기에 스웨덴이 가세하면서 스칸디나비아는 세계 최초로 국민 교육 의무화의 길을 열었다. 19세기에 이미 스칸디나비아는 국민이 모두 글을 읽을 수 있는 문화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스웨덴을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정부가 루터교 교구(parish)를 활용해 사회에 침투하고 통제하는 형식을 취했다. 종교와 정치의 긴밀한 융합이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뢰나 개방성, 투명성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루터교의 영향에서 볼 수 있듯이 북유럽 국가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근대로 오면서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됐지만 중세만 하더라도 이 지역은 칼마 연합(Kalmar Union)의 형식으로 하나의 정치 단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16세기 초 이 연합은 스웨덴과 덴마크로 분열돼 양국이 경쟁하는 관계를 갖게 됐다. 노르웨이는 처음에 덴마크에 속해 있다가 19세기는 스웨덴으로 병합됐고, 1905년 돼서야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어 핀란드가 1917년 러시아로부터 독립에 성공했다.

유럽 역사를 비교적 관점에서 보면 스칸디나비아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지 못한 것은 독일의 프러시아나 이탈리아의 피에몽처럼 통일을 주도할만한 세력도, 비스마르크나 카부르 같은 통일 지도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스칸디나비아는 종교적으로 루터교의 영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적으로도 북 게르만 계통에 속하며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이 3개국 언어는 서로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유사하다. 우랄 알타이어 계통의 핀란드만 예외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로는 유사하다. 일찍이 국민 교육을 의무화한 정책부터 20세기 강한 복지국가를 만든 정책까지 이들은 무척 비슷한 정치경제를 형성했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개인의 정보를 사회가 공유하는 투명성의 사회, 노동과 자본이 협력하고 정당들의 타협하는 공존의 문화 등 모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인구 규모를 보면 스웨덴이 1000만 명 수준으로 스칸디나비아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주변의 노르웨이·덴마크·핀란드는 각각 500만 명 정도이고 아이슬란드는 34만 명 수준의 아주 작은 나라다. 스칸디나비아 5국을 다 합쳐도 인구는 3000만에 미치지 못하며 영토가 훨씬 작은 베네룩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의 인구와 비슷한 수준이다. 베네룩스가 1948년부터 일찍이 지역통합을 추진했듯이 스칸디나비아도 오랜 통합의 역사를 갖고 있다.

북유럽 모델의 특수성


▎2012년 준공된 스톡홀름에 있는 에릭슨 본사. / 사진:위키피디아
예를 들어 19세기 스칸디나비아는 독일 촐퍼라인(Zollverein) 관세동맹의 영향을 받아 북유럽 동맹을 만들려고 노력한 바 있다. 보다 본격적으로 20세기 중반에는 북유럽 노동시장을 만들어 자유롭게 시민들이 일자리를 찾아다니도록 했다. 이때부터 노르딕 모델(Nordic Model)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스칸디나비아라는 표현을 대신하는 경향이 생겼다. 강한 복지국가의 정치경제뿐 아니라 안보 공동체에 있어서도 노르딕 모델은 하나의 지향점을 형성했다. 미국의 지역통합 이론가 칼 도이치는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전쟁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긴밀한 공동체로 스칸디나비아를 들며 안보 공동체의 개념을 제시했다.

어느 공동체나 그렇듯이 북유럽 안에서도 서로 대조적인 이미지 만들기는 존재한다. 특히 스웨덴과 덴마크는 상호 경쟁적이고 대립적이다. 스웨덴은 추운 날씨처럼 사람들도 냉정하고 술의 소비를 죄악시하는 등 사회적 행동에 제약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덴마크는 상대적으로 기후도 온화하고 사람들도 따듯하며 대륙과 비슷해 자유분방한 것으로 인식된다. 다른 한편 노르웨이는 북유럽에서도 변방에 속했지만, 북해의 석유 개발로 슈퍼 부국으로 떠올랐고, 핀란드도 낙후된 정치경제의 콤플렉스를 가졌었지만, 유로를 채택할 정도로 유럽통합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새로운 기운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의 북쪽에 위치한 스코틀랜드가 독립해서 노르딕 그룹에 가입하면 더 풍요로운 경제를 누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스웨덴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은 유럽통합의 운동에서 국외자 성격을 갖고 있다. 1951년 파리조약을 통해 유럽통합의 깃발을 올린 6개국 외무장관은 전원 기독교민주주의 세력 출신이다. 기독교민주주의란 기본으로 가톨릭의 정치사상으로 출발했으며 세상을 민족에 따라 나누기보다는 하나로 통합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반면 영국의 성공회(Church of England)나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볼 수 있듯이 개신교는 민족과 결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 등은 모두 루터교지만 각각 국가 차원의 루터교회로 조직돼 있다.

유럽통합과 다양성의 도전

북유럽 국가 가운데 유럽통합에 제일 먼저 동참한 것은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덴마크다. 스웨덴이 철강이나 통신 등의 산업으로 특화된 경제를 갖고 있다면, 덴마크는 농산물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였고, 그만큼 유럽대륙의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가 냉전이 종결된 이후 1995년 유럽통합에 동참했다. 이때 핀란드가 스웨덴과 함께 EU에 가입했고, 노르웨이도 가입을 추진했으나 국민투표에서 다수가 반대해 가입에 실패했다.

2020년 현재 덴마크·스웨덴·핀란드는 EU 회원국이고,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는 비회원국이다. 회원국 가운데 핀란드만이 유로화를 채택하고 있다. 이처럼 북유럽 국가들은 유럽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보기는 어렵고 사안에 따라 취사선택(取捨選擇)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각 작은 규모의 나라로서 거대한 유럽 안에서 자국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유럽통합과 함께 스칸디나비아 사회에 도전을 제기한 변화는 이민과 난민의 유입이다. 제2차 대전 이후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노동력이 부족해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성을 가정에서 일터로 나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남유럽의 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그리스 등지에서 이민자들이 유입됐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새 사회에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의 이민은 같은 유럽보다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오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유의 난민이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특히 2015년 시리아 난민 위기의 해에는 스웨덴만 16만 명 이상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앞에서 봤듯이 스웨덴의 복지국가나 정치경제 제도는 동질성을 가진 민족 공동체의 문화적 배경이 선제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거 사회에 들어오자 이에 대한 배타적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6년 덴마크 언론의 무함마드 만평 사건은 기존 스칸디나비아 사회가 가지는 언론의 자유라는 개념과 이민자들의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는 화합과 타협을 강조하는 스칸디나비아에서도 최근 들어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정당들이 부상하는 배경과 맞물린다. 대표적으로 극우의 스웨덴민주당은 2018년 총선에서 17.5%를 득표하는 제3당으로 부상했고 62석을 차지했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어려운 자연환경을 딛고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높은 교육수준과 국민의식은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고 타협의 정치, 화합의 사회, 그리고 연대의 복지는 노르딕 모델을 규정하는 이상적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제 북유럽은 색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민·난민의 문제로 위기를 맞은 셈이다. 스웨덴이 보여줬던 독창적 중도 노선이 앞으로 문화적 다양성의 도전도 극복할 수 있을지 관심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006호 (2020.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