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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18)]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악당, ‘검투사 황제’ 코모두스 

“난 헤라클레스의 현신”… 평화만능주의로 로마 기상 꺾어 

‘정복 군주’ 아버지와 차별화하려 이민족과 평화조약 남발
일상적 이벤트로 대중 유혹, 원로원 ‘패싱’ 하다가 암살 초래


▎코모두스(왼쪽, 호아킨 피닉스 扮) 시대 로마를 배경으로 다룬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고대 로마는 기원전 753년부터 시작된다. 한국의 개천절에 해당하는 4월 21일이 로마 건국기념일이다. 기념행사가 이탈리아 곳곳에서 벌어진다. 로마의 영광을 재현한 거리행진이 주된 이벤트다. 황제를 시작으로, 완전 군장 로마군인, 무장 검투사와 형형색색 무희(舞姬)도 만날 수 있다. 가톨릭 발상지답게 십자가를 진 예수도 행진에 나선다.

로마 건국의 주인공은 신화 속의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다. 왕의 질투와 시기로, 생후 곧바로 버려진다. 티베르(Tiber) 강을 따라 흘러가던 중 지금의 로마에 도착한다. 이후 성인이 된 쌍둥이 형제는 영토 문제로 서로 싸우게 된다. 최종 승리자는 동생을 죽이고 로마 전부를 차지한 형 로물루스다. 혈육을 제거하고 영토를 독식한 형의 승전 기념일이 로마 건국의 날이다.

로마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로물루스·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접했을 것이다. 보통 청동상으로 제작된, 늑대 젖을 물고 있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로마에 도착한 뒤, 늑대 젖을 통해 생존해가는 쌍둥이 형제의 형상이다. 한 번만 봐도 잊을 수 없는, ‘꽉 찬’ 뭔가가 느껴지는 로마의 이미지다. 살벌한 긴장감이 표류한다고나 할까?

이유는 늑대 젖을 빨고 있는 쌍둥이 형제의 모습과 몸짓에 있다. 특별히 주목해서 관찰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네 다리로 선 늑대와 얼굴을 위로 치켜든 쌍둥이의 모습이 핵심이다. 인간을 포함해 개나 포유류를 보면, 보통 눕거나 앉은 상태에서 젖을 물린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먹는, 모성애의 출발이자 평화의 상징이 젖에 관련된 이미지다.

로마 건국신화 속의 쌍둥이는 다르다. 일어서서 다른 곳으로 가려는 늑대를 도중에 불러 세워, 마치 쟁취하듯 힘껏 젖을 빨아들이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유아라고 하지만, 거의 일어서기 직전의 자세로 젖을 빤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건국 신화 속 쌍둥이처럼 젖을 빨아들이는 어린이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 로마 건국, 아니 쌍둥이 출생의 비밀이라고 할까?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가서 쟁취하는 삶이다. 쌍둥이 유아조차 이미 체득한 로마의 원칙, 아니 상식이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뒤에는, 젖을 준 늑대조차 잡아먹는 것이 로마에 던져진 운명이다.

늑대 젖을 문 쌍둥이, 로마의 DNA


▎이탈리아 로마의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전시된 로물루스·레무스 형제의 동상. 거의 일어난 상태로 늑대 젖을 문 형상이 인상적이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따라서 동생을 죽인 뒤 이뤄진 건국의 비극쯤은 너무도 당연한 일상에 불과하다. 로마가 자랑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는 피비린내 나는 로마의 비극을 감추려는 수식어일 수도 있다. 1세기 로마를 대표하는 시인 벌질(Virgil)이 남긴 라틴어 명언으로 ‘Possunt, quia posse videntur’란 말이 있다.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실현해낼 수 있다’라는 뜻이다. 로마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나라다. 할 수 있다고 믿고, 스스로 행동에 옮긴 결과를 만들어낸 대제국이 로마다. 거의 일어선 자세로, 늑대 젖을 쟁취하듯 빨아들인 쌍둥이 형제는 그런 로마를 창조해낸 출발점이다.

로마 역사는 이탈리아 반도 내 서로마와 비잔틴제국으로 불리는 동로마로 나눠진다. 한국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의 대부분은 서로마를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다. ‘로마=이탈리아 반도’라 생각하기 쉽지만, 항상 비잔틴제국을 염두에 두면서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로마가 경시되는 이유는 현재의 위상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동로마는 15세기 오스만튀르크 이슬람권에 영입되면서 기독교 문화권에서 멀어져 간다. 이탈리아 가톨릭이 자신의 정통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이슬람권에 넘어간 동로마의 위상도 약해져 간 것이다.

그러나 로물루스 로마의 원형을 계승한 서로마는 476년 9월 4일 역사에서 사라진다. 1229년 동안 존속해온 대제국이 스러진 날이다. 게르만계 출신의 군인 오도아케르(Odoacer)가 황제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이탈리아 왕에 오르면서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마지막 황제의 이름은 신화 속 로마 건국 주인공 이름과 똑같다. 15살에 즉위했다가 1년 만에 제국의 멸망을 목격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황제다.

서로마의 황혼기를 연 황제로 코모두스(Commodus, 재위 기간 177~192년)가 꼽힌다. 직전의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로마 황제를 통틀어, 최고의 철인으로 통하던 인물이다.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이른바 5현제(賢帝) 시대의 마지막 주자다. 대제국 로마는 황제의 기마상이나 입상을 공공장소에 건립했다. 로마가 멸망하면서 대부분 파괴됐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만은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야외에 들어선 황제의 조각상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마상이다. 재위 19년 동안은 물론, 이후에도 사람들이 존경하던 인기 황제였다는 의미다.

폭죽이 아름다운 것은 허공 속에 배인 깊은 어둠 때문일 것이다. 아름답게 터지면서 사방으로 불꽃을 피우는 순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폭죽으로서의 철인 현제의 위업은 어둠으로서의 코모두스 등장과 함께 한순간 사라진다. 역사의 비극이지만, 로마 추락의 신호탄이 된 코모두스는 최고 절정기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직접 선택한 황제이기도 하다. 코모두스의 아버지가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대제국 몰락의 출발점이 왜 코모두스일까? 5현제 때에 비해 위축된 국력이 가장 큰 원인일 듯하다. 코모두스를 기점으로 내전이 격화된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다른 곳에 있다. 세상을 대하는 로마의 근본적인 자세에 관한 부분이다. 쟁취하듯 늑대 젖을 빨던 쌍둥이 형제의 기상이 코모두스를 기점으로 한순 간 사라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돌격’은 로마의 태생적 운명이다. 무적 로마군을 통해 국토를 넓히고, 취득한 영토 내 물건과 사람의 교류를 통해 무한성장해간 나라가 로마다. ‘전진·쟁취·확장’만이 로마의 DNA인 셈이다.

16세에 집정관에 오른 ‘금수저’


▎로마의 기상은 전쟁을 통한 팽창에 있다. 평화도 전쟁을 통해 지켜지는 약속이라 믿었다. 코모두스는 로마의 유전자를 근본적으로 바꾼 황제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코모두스는 ‘출생 때부터 보라색 옷을 입은(Born in the Purple)’ 인물로 평가되는 황제다. 그리스 로마 시대 당시 보라색 옷은 황제의 상징이다. 알렉산더 대왕과 카이사르 종신 황제는 보라색 옷을 입은 최고 권력의 모델이다.

주목할 부분은 보라색 옷에 대한 시민들의 평균 정서다. 보라색 옷은 출생과 무관한, 스스로 쟁취해나가는 후천적 전리품이란 인식이 강했다. 따라서 출생 때부터 보라색 옷을 입은 인물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금수저’에 대한 반감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변방의 전선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평생 무대다. 인생 최후의 날도 전쟁터이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처 빈도보나(Vindobona) 야전 막사에서 맞이했다.

그러나 아들 코모두스는 아버지와 정반대 길을 걸었다. 코모두스는 서기 161년 쌍둥이 형제의 동생으로 태어난다. 아버지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어릴 때부터 ‘황제 인턴’으로 키워진다. 코모두스 이전까지의 황제사를 보면, 아예 작정하고 제왕학으로 다져진 인물 자체가 없다. 황제의 직계가 아닌, 방계나 양자가 후계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제왕학으로 단련된 황제의 아들이 있다 해도 활용할 수가 없다. 후임 황제가 들어서는 순간 곧바로 처형되거나 사라진 것이 황제 자식들의 운명이다. 자식을 제왕학에 기초한 보라색 옷차림으로 키웠다는 것은, 자신의 피를 잇는 직계 황제로 만들겠다는 의지라 볼 수 있다.

철인 현제로 통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왜 피에 집착하는 ‘아들 바보’로 전락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코모두스 형의 병사(病死)가 배경에 있다. 쌍둥이 형의 죽음과 더불어 코모두스도 병이 든다. 남은 아들 하나조차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철인 아버지를 괴롭혔을 것이다. 상식적이지만, 밖에서 허점 하나 없이 움직이는 사람일수록 피에 집착한다. 피는 본능이다. 어딘가에서 풀어야 할 긴장과 애정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정신적 출구가 바로 피다. 부부관계도 아닌, 아버지와 아들과의 혈육 관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보험이다.

코모두스는 ‘아들 바보’ 황제의 절대적 지원을 바탕으로, 불과 16살 나이로 집정관(Consul)에 오른다. 로마 역사상 최연소 집정관이다. 곧바로 아버지와 더불어 공동 황제 자리에도 오른다. ‘아들 바보’ 아버지가 제공해준 ‘금수저’ 스펙은 서기 180년 막을 내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병사하면서 코모두스가 황제에 올라선다. 출생 이후 보라색 옷만 입고 자란, 19살 황제의 탄생이다.

로마 전역에 경기장 186개 신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사진)는 5현제의 마지막 인물이다.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코모두스를 포퓰리즘 황제로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큰 소나무 아래는 솔방울만 굴러다닐 뿐, 나무는 물론 풀조차 자라기 어렵다. ‘아들 바보’ 아버지의 덕분에 황제 자리까지는 안착했지만, 문제는 취임 이후 보여줘야 할 능력이다. 철인 현제에 대한 로마시민들의 존경 때문이었겠지만, 사사건건 아버지와 비교됐다. 상식적 수준이지만,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 경우 나타나는 행동 패턴이 있다. 아예 거꾸로 가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강조하는 식의 행동이다. 변방의 적과 싸우면서 전선에서 생활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전쟁을 멀리하고 적과의 평화조약에 매진한 황제가 코모두스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 한,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세는 당연히 평화다.

그러나 평화조약이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지는 않는다. 대 재앙으로 변할 수 있는 ‘불안한 평화’도 적지 않다. 2020년 한반도를 역사상 최고의 평화 상태라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엄청난 대재앙을 눈앞에 둔, 폭풍전야로 풀이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정은이 핵으로 장난을 치는 현실에 바탕을 둔 분석이다. 당장은 총성이 멎은 상태지만, 그 같은 상황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코모두스 당시의 로마도 마찬가지다. 코모두스는 반란을 일으키던 변방 대부분의 나라와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돈도 주고, 적의 포로를 전부 풀어주는 식의 선심협약이 대부분이다. 원로원이 보면 불평등 임시 평화조약이다. 그러나 코모두스는 원로원의 지적을 철저히 무시한다. 코모두스는 늑대 젖을 빨던 대제국 로마의 유전자를, 온순한 양으로 바꾼 황제로 평가된다. 평화조약이란 이름하에, 확대 정복해 나가던 로마의 유전자를 수동적 내성적으로 바꾼 인물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총성이 멎었다는 점만이 아닌, 구체적으로 연출되는 ‘평화스러운 풍경’을 필요로 한다. 100여 년에 걸친 혁명사를 거친 뒤 찾아온, 19세기 말 파리의 노천카페 같은 풍경이다. 코모두스 당시 로마에서 등장한 평화의 상징은 무엇일까? 글래디에이터(Gladiator), 즉 검투사다. 원래 로마 평화의 상징은 4마리 말로 이뤄진 경마(競馬)다. 길이 200m에 이르는 타원형 스타디움을 도는 경마가 로마 평화의 진수다.

그러나 2세기 대제국 팽창과 더불어, 초대형 아레나에서의 검투사 이벤트가 로마 평화의 일상적 풍경으로 정착된다. 점령지에서 데려온 노예들이 급증하면서 검투사 공급도 급증한다. 아프리카에서 잡은 고가의 맹수들도 고정출연자다. 기독교 신자는 맹수들에게 바쳐지는 먹이로 활용됐다. 2세기 로마 전역에는 콜로세움을 비롯해 무려 186개의 아레나가 들어섰다고 한다. 로마가 아닌, 비공식으로 만들어진 간이 아레나도 86개나 존재했다. 아레나 하나에 최소한 1만 명 정도가 들어갔다. 검투사 이벤트는 대제국 로마가 보여주는 파워의 증거이자, 로마 평화의 아이콘이다.

검투사 이벤트는 코모두스 리더십의 정수다. 놀랍게도, 코모두스는 검투사로 나서 아레나에서 싸운 유일한 황제다. 로마 황제를 통틀어 유일한 검투사가 코모두스다. 2000년 개봉된 러셀 크로(Russell Crowe) 주연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도 등장하지만, 푸른 황제 옷을 입은 채 노예 검투사들과 혈전을 벌인 황제다. 재임 기간에 무려 735번에 걸쳐 검투사로 나섰다고 한다. 로마, 아니 인류 역사상 초유의 검투사 황제가 코모두스다.

시민을 원로원 의원 앞에 두다


▎코모두스 황제의 두상. 원로원에 의해 기억말살형에 처해졌음에도 조각상 등 관련 유물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왜 황제가 직접 검투사로 변신해 로마 시민들의 피를 끓게 했을까?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포퓰리즘 정치의 전형이라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로마 원로원은 코모두스를 금수저 어린아이 정도로 취급했다. 아버지보다 카리스마도 약하고, 그럴듯한 실적이나 능력을 보여준 적도 없는 무능한 황제로 평가했다. 코모두스라고 당할 수만은 없다. 이런저런 죄명으로 원로원 의원들을 체포하고 재산도 뺏는다. 군사비 충당을 위해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원로원 지지를 받는 인물에 의해 한 방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빠진다. 결국 시민에 호소하는 포퓰리즘 정치다. 로마 시민에게 인정받고 박수를 받는 한, 원로원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포퓰리즘에 매달린 코모두스는 로마의 원칙과 상식을 한순간에 바꾼다.

이탈리아 공공건물이나 광장에서 볼 수 있는 대제국 로마의 흔적 중 하나로 ‘SPQR’이란 라틴어가 있다. ‘SenātusPopulusque Rōmānus’의 약자로 ‘로마의 원로원 의원과 시민’이란 의미다. 로마의 주인이자 대표는 독재자가 아닌, 원로원과 시민이란 뜻이다. 공화정 로마의 이념을 표현한 말로, 황제 체제하의 제정 로마도 따르는 이념이자 원칙이다.

놀랍게도 코모두스는 ‘SPRQ’ 문양을 ‘PSQR’로 뜯어고친 인물이다. ‘로마의 시민과 원로원 의원’이란 의미로, 시민이 원로원 의원보다 우위에 서 있다고 강변한다. 시민들이야 손뼉을 치겠지만, 원로원의 불만은 극에 달한다. 로마는 황제가 축적한 전통에 기초한 나라다. 그 어떤 황제도 행한 적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원로원 결정에 따라 ‘공공의 적(HostisPublicus)’으로 규정될 수 있다. 검투사 코모두스는 로마 시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보여주기 쇼’에 매진한다.

헤라클레스 코스튬 플레이는 코모두스식 쇼의 극단적 본보기다. 코모두스는 평소에도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멀쩡한 정신으로, 자신이야말로 헤라클레스의 진짜 환생이라 말했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대리석 입상을 대량으로 만들어 로마 곳곳에 뿌리기도 했다.

검투사 코모두스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문제다. 황제가 아레나에서 싸우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코모두스는 실제로 검술에 능했다고 한다. 병약한 몸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전문 검투사를 통해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피가 튀는 아레나에서의 실전은 다르다.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도 저세상에 갈 수 있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꼼수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준비다. 코모두스는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보다 상대의 무력화에 집중했다. 상대 검투사의 무기를 무디게 만들어 쓸모없이 만드는 식이다. 아레나에 들어가기 전 검투사에게 약을 먹여 혼수상태 속에서 코모두스를 승리자로 만드는 식의 쇼도 자행한다. 따라서 황제의 대적 검투사는 무조건 지고 죽게 돼 있다.

사실, 눈치 빠른 로마 시민들은 코모두스의 꼼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다. 피가 뿌려진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검투사 코모두스는 상대를 살해한 뒤, 승리 기념 공짜선물을 아레나 곳곳에 뿌렸다. 콜로세움과 아레나는 ‘코모두스 용비어천가’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코모두스는 서기 192년 12월 31일 암살 당한다. 목이 졸린 시체로 목욕탕에서 발견된다. 주목할 대목은 새해 하루 전날 살해됐다는 점이다. 코모두스는 암살되기 한 달 전, “황제와 검투사로서 신년에 더더욱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라고 공언한다. 원로원은 헤라클레스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코모두스를 미친 황제로 간주했다.

‘5년간 5번 교체’ 정치군인 시대 개막


▎로마 검투사의 묘비.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무덤을 준비하는 것이 검투사의 운명이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황제와 원로원 사이의 긴장이 더해가던 시기에 작은 문서 하나가 유출된다. 코모두스가 자신의 경비대장에게 지시한 ‘원로원 암살 리스트’다. 신년에 들어서는 순간 실행될 살생부다. 경비대장이 상대하던 남창(男娼)을 통해 원로원에 전달된다. 원로원 중진은 자신이 살해되기 전, 황제를 먼저 암살하기로 결의한다. 12월 31일, 독을 넣은 와인을 넣어 살해하려 하지만, 검술로 단련된 체력으로 인해 곧바로 죽지는 않는다.

비틀거리는 황제를 교살한 주범은 코모두스의 검술 지도사다. 원로원의 매수로 범행에 가담한다. 독에 취한 몸으로 대항은 하지만, 검투사의 두 손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31세 나이로, 황제에 오른 지 12년째 되던 해다. 황제의 죽음이 확인된 순간, 원로원은 코모두스를 ‘기억 말살형(DamnatioMemoriae)’ 인물로 지정한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조각상,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코모두스가 숭배한 신전이 전부가 파괴됐다. 흥미로운 것은 파괴 명령에도 불구하고, 코모두스 조각이나 유물이 다른 황제에 비해 ‘결코’ 적지 않게 남아있다는 점이다. 재임 당시 워낙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야생 늑대를 좁은 우리 안에 가둬둘 경우 얼마 못 가서 죽게 된다.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맹수의 대부분은 우리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실상 야성 본능을 잃은 애완동물이다. 진짜 야생동물은 결코 우리 안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코모두스가 구축한 평화조약을 통해 로마 변방의 전쟁은 ‘당분간’ 사라진다. 문제는 내부의 전쟁이다. 밖으로 팽창하던 야생동물의 기상이 정지되는 순간, 내부의 불화가 밀려든다. 싸우지 않는 군인은 정치군인으로 변해간다.

코모두스가 암살된 이후 5년간은 ‘5 황제의 시대(Year of the Five Emperors)’라 불린다. 변방의 장군 5명이 돌아가면서 황제 자리를 차지한다. 코모두스의 평화는 로마군을 사병(私兵)화하는 계기가 된다. 유력 장군들은 대제국 로마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 데 주력한다. 코모두스가 암살된 순간, 변방의 장군들은 사병이나 다름없는 로마군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코모두스 사후의 5 황제는 모두 그런 배경 아래에서 나온 인물들이다. 무력한 원로원은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장군들을 황제로 임명했다. 임시변통 평화 만능주의가 낳은 비극이 코모두스 암살 후 한꺼번에 밀려든 것이다.

로마 황제사는 인류 문명사에 응용할 수 있는 최적의 유산이자 교훈이다. 피렌체의 정치 공학 전문가 마키아벨리는 코모두스를 두고 최악의 로마 황제라고 평가했다. 헤라클레스 코스튬 플레이에다 꼼수 검투사란 점도 있겠지만, 늑대 젖에 매달린 로물루스의 기상을 꺾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듯하다. ‘한순간의 평화’를 위해 로마의 DNA를 말살한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믿지만,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약한 로마’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코모두스다. 약할수록, 몰릴수록 일회성 퍼포먼스에 매달리게 된다. 한층 더 자극적인 이벤트와 쇼가 필요해진다.

전염병 덕분이겠지만, 단발성 정치 이벤트가 한국 신문·방송의 고정 메뉴로 정착한 지 오래다. 자화자찬 코로나19 홍보를 듣고 있으면 전 세계가 한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미국·일본을 훈계하는 정치인도 나온다. 꼼수로 검투사를 살해한 뒤 뿌리는, ‘코모두스 스타일’ 공짜선물도 넘친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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