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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9)] 유라시아 차원에서 본 중원·오랑캐 관계사 

내륙의 바다 사막에 광대한 그림자 문명 

농경문화 확장에 따라 남방의 형오·백월, 동방 동이족은 한족에 흡수
발전 느렸던 서북방은 유목 중심 문화 지속, 중화와 다른 정체성 유지


▎그리스 남부 아르고스 지방에 있는 티린스 궁전 유적. ‘후기 청동기 대붕괴’ 당시에 파괴됐다. / 사진:바츨라프 모라벡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多民族)국가’를 표방하지만 인구의 91.5%를 점하는 한족(漢族)의 국가에 55개 소수민족이 곁들여져 있는 모양새다. 두 개 이상의 공용어를 나란히 쓰는 일반 다민족국가와 달리 중국의 전국적 공용어는 한어(漢語) 하나뿐이고, 각 소수민족의 언어는 자치 구역 안에서만 공용어로 쓰인다.

그리고 ‘민족’의 의미도 고르지 않다. 서남방 산악지대에는 “골짜기 하나에 민족 하나씩” 있다고 할 정도로 작은 규모의 민족들이 구분되어 있는 반면, 회족(回族)·위구르족(維吾爾族)·만주족(满族) 등 구성이 복잡한 민족들도 있다. 민족 개념이 중국에 도입되던 20세기 초에 각지 주민들이 처해 있던 상황에 따라 민족이 획분되면서 그 역사적 배경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감이 있다.

무엇보다 ‘주체 민족’인 한족의 범주가 민족의 일반적 정의에 비해 대단히 포괄적이다. 전통시대의 ‘한인(漢人)’이 그대로 한족의 범위가 되었는데, 한인은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 ‘중화인(中華人)’의 뜻이었다. 중화체제에 포섭되어 한어를 쓰고 중국식 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혈통과 관계없이 한인으로 인식되었다.

19세기 끝날 무렵 중국의 민족주의 탄생


▎중국민족계통표. 역사에 나타난 16개 종족 계열로 나열됐다. / 사진:린후이샹 [중국민족사]
인구 1천여만 명으로 규모가 큰 편 소수민족인 만주족의 경우, 20세기 초가 아닌 21세기 초에 민족을 획정한다면 한족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만주족의 고유한 생활방식은 민속촌에나 남아 있고 만주어는 생활에 쓰이지 않게 되었다. 아직도 만주어를 쓰는 극소수 지역 중에 신장(新疆) 한 구석의 시버족(錫伯族) 자치 구역이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진다. 만주 지역에 있던 시버족 일부가 청(淸)나라의 실변(實邊)정책에 따라 이주했던 것이다.

황싱타오(黃興濤)의 [重塑中華(다시 만든 중화)](2017)는 근대 중국의 ‘중화민족’ 관념 형성 과정을 해명한 책이다. 민족의 개념을 19세기 중엽부터 서양 선교사들이 소개했지만 그 개념을 중국인 자신에게 적용시키려는 노력은 19세기가 끝날 무렵 변법(變法)운동 단계에 와서야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양 물질문명의 성과물만을 도입하려 하던 양무(洋務)운동 단계와 달리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를 인식하면서 중국의 ‘민족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초기의 중국 민족주의에는 배타적 성격이 강했다. 중국이 처한 곤경의 책임을 이민족 왕조에 떠넘기고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독립을 공화제 혁명의 한 목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이 1930년대에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워 동북지방을 점령할 때 국민당 정부의 반발이 강하지 않았던 데는 이런 경향도 작용했다.

공산당이 국민당에 비해 포용적인 민족정책을 취하게 된 데는 장정(長征, 1934~36)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인민을 위한 복무”라는 단순한 이념을 넘어 민족 간 협력이 국가의 성립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공산당 제1세대는 소수민족 지역을 전전하는 동안 투철한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공산당은 서양을 본받기에만 급급하던 국민당에 비해 중국의 역사적 경험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책장 한구석에 파묻혀 있던 책 하나를 꺼내 읽었다. 린후이샹(林惠祥, 1901~58)이 1936년에 낸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상·하). 중요한 주제라서 구해 놓았지만 방법론이 석연치 않아서 서문만 읽고 덮어뒀던 책이다.

이번에 ‘오랑캐의 역사’ 작업을 하면서 이 책이 생각났다. ‘중국민족’이란 주제의 최신 관점을 파악하려 애써 왔는데, 이 주제에 관한 1949년 이후의 서술은 ‘신(新)중국’ 민족정책에 묶여 있다. 신중국 건설 전에 나온 이 책에서 근대적 연구방법이 적용된 초기 성과의 비교적 객관적인 서술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 것이다.

한족, 동남쪽 오랑캐 대부분 흡수 ··· 예외는 한국·일본·유구

저자의 관점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표 하나가 있다. 상권 9쪽에 중국민족계통표가 나온다. 윗줄 ‘역사상의 민족’에는 역사에 나타난 16개 종족 계열이 계(系)라는 이름으로 나열되어 있다. (1) 화하계, (2) 동이계, (3) 형오계, (4) 백월계, (5) 동호계, (6) 숙신계, (7) 흉노계, (8) 돌궐계, (9) 몽고계, (10) 저강계, (11) 장계, (12) 묘요계, (13) 나면계, (14) 북탄계, (15) 백종, (16) 흑종이다.

아랫줄 ‘현대의 민족’에는 지금의 8개 민족이 족(族)이란 이름으로 표시되어 있다. (1) 한족, (2) 만주족, (3) 회족, (4) 몽고족, (5) 장족, (6) 묘요족, (7) 나면족, (8) 북탄족이다.

각 계와 각 족의 계승관계가 실선(주된 계승관계)과 점선(부분적 계승관계)으로 그려져 있다. 예컨대 한족은 16개 종족집단 모두를 계승했는데, 그 중 화하(華夏)·동이(東夷) 등 4개 계가 주축이다. (린후이샹이 말하는 ‘동이’는 산둥(山東)성 지역에 있던 고대의 동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족은 동호(東胡)·숙신(肅愼)을 주축으로, 그 밖의 3개 계를 부분 계승한 것이다.

이 책은 18개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서론부 2개 장 이후 16개 장에서 16개 종족계열을 각각 다뤘다. 중국사에 나타난 모든 종족집단을 16개 계열로 분류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호계를 다룬 제7장에는 “만주족의 첫 번째 내원”이란 부제가 붙어 있고, 오환·선비·유연·해·거란이 각 절에서 다뤄져 있다.

주변 민족에 관한 중국의 역사기록은 작성 시기 중국인의 인식에 국한되어 있어서 기록 대상에 대한 체계적 이해에 한계가 있다. 만주 지역의 종족으로 어느 시기에는 ‘숙신’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 시기에는 ‘말갈’ 이야기가 나오고 또 얼마 후에는 ‘여진’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이의 계승 관계는 무시되거나 아주 소략하게 언급될 뿐이다. 린후이샹은 그 빈틈을 채워 넣는 작업을 한 것이고, 거기에는 추측에 의지한 것도 많지만 주변 민족들의 시간적 흐름을 개관하는 데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위 도판에 보이는 한 가지 추세는 북방과 서방의 종족들이 부분적으로만 한족에 흡수되고 주류가 현대의 각 민족으로 이어진 데 반해 남방의 형오(荊吳)와 백월(百越), 그리고 동방의 동이는 한족에 완전히 흡수되었다는 점이다. 중국 농경문화의 확장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방과 서방에는 유목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문화가 지속되어 중화와 다른 정체성이 유지된 반면, 동방과 남방은 농경문화에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종족 정체성이 퇴화한 것이다.

애초에 ‘오랑캐의 역사’를 구상하면서 모든 방면을 균형 있게 다루고 싶었다. 그러나 역사가 균형 있게 전개되어 오지 않은 것을 어쩌나. 산둥(山東)에서 광둥(廣東)까지, 전국 시대에 오랑캐 지역이던 중국의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가 당송(唐宋) 시대에는 모두 중화에 편입되어 있었다. 동남 방면의 오랑캐라면 한반도와 일본, 유구(琉球),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물러나 있었다. 긴 시대에 걸쳐 중국과 얽힌 오랑캐의 역사가 긴박하게 진행된 곳은 역시 서북 방면이었다.

중국과 주변 오랑캐의 관계사를 볼 때 중국이 상수(常數)처럼, 오랑캐가 변수(變數)처럼 느껴지기 쉽다. 중국은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오랑캐는 언제 어느 오랑캐가 나타나 어떤 짓을 할지 예측불허로 느껴지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중국 측에서 남긴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기록의 주체인 중국인들은 자기 위치와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한편, 객체화된 오랑캐는 자기네 눈에 비쳐진 모습으로만 기록에 남겼다. 20세기 이래 중국사 연구가 고고학과 인류학의 도움으로 문헌기록에 대한 압도적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이 편향성이 얼마간 보정되어 왔다.

‘내부 유라시아’의 포용성, 문명 발전 고비에 중요 역할


▎유럽 동북부에서 출토된 기원후 400년경의 사슴 모양 브로치(왼쪽)에 스키타이 예술의 특성이 남아 있다. 서아시아 지역에서 출토된 기원전 5세기의 벽걸이(오른쪽)와 어울리는 모양이다. / 사진:Daderot
또 하나의 이유는 중국의 막대한 규모와 장구한 지속성에 있다. 중국은 진 시황의 통일 이래 세계 인구의 20% 전후를 점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존재해 왔다. 제국이 일시적으로 와해될 때도 결속력이 강한 문명권으로서 존재는 계속되어 제국의 복원이 거듭거듭 이뤄졌다. 그래서 여러 종족이 명멸한 유목민 오랑캐들이 중국이라는 꺼지지 않는 등불 주변을 맴 돈 부나방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를 극복하기 위한 가설 하나가 인류학 쪽에서 나왔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이 [A History of Russia, Central Asia and Mongolia(러시아, 중앙아시아와 몽고의 역사)](1998, 2책)에서 제시한 ‘내부 유라시아(Inner Eurasia)’ 개념이다.

크리스천은 유라시아대륙을 내부 유라시아와 외부 유라시아(Outer Eurasia)로 쪼개서 본다. 외부 유라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태평양·인도양·지중해·대서양에 접하고 강우량이 넉넉한 온대·아열대 지역이다. 주요 문명들이 발생하고 발전한 지역이다.

외부 유라시아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면 강우량이 적어 농업 문명을 정착시키기 어려운 지역이 펼쳐진다. 동유럽에서 동북아시아에 이르는 이 광대한 건조지역에서는 어느 시기에도 선진 문명이 발달한 적이 없었고 서로 다른 언어와 풍속을 가진 많은 종족이 얽혀서 살아왔다.

유라시아대륙의 절반 가까운 면적의 이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볼 것을 크리스천은 제안하는 것이다. 가능한 일일까? 가장 큰 규모의 역사공동체로 여겨져 온 것이 ‘문명권’이다. 문명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통합시키는 힘을 가진 현상이다. 그래서 발전된 문명을 가졌을 때 대규모 정치조직도 성립되고 넓은 지역 많은 사람의 움직임을 묶어서 역사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외부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이 문명권으로 구분되어 인식되고 각 문명권의 특성이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에 비해 문명 수준이 낮았던 보다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보자는 제안이 일견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크리스천의 제안에는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그 제안의 주된 기준은 기후조건과 그에 따른 생태조건이다. 각 문명권의 특성이 그 기후조건에 좌우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농경의 확산이 어려울 만큼 강우량이 적다는 것은 강우량이 어느 계절에 어느 정도로 집중되느냐 하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확연한 기후조건이다. 그 조건을 공유하는 지역이라면 강우량이 넉넉한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경제적·문화적 특성을 공유할 개연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인류문명은 농경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자연을 길들여 식량 확보를 쉽게 만든 것이 문명의 핵심인데, 동물자원을 확보하는 목축보다 식물자원을 확보하는 농경에서 더 큰 성공이 이뤄졌다. (식물이 동물보다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있어서 대량 확보가 쉬웠다는 점을 앞에서 언급한 일이 있다) 농경을 통한 잉여생산이 빠르게 자라나 고등문명의 발판이 되었다. 강우량이 적은 내부 유라시아의 문명 발달이 늦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흉노제국을 한(漢) 제국의 ‘그림자 제국’으로 본 메타포를 연장해서 내부 유라시아에 하나의 ‘그림자 문명’을 설정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중원에서 농업생산의 발달로 하나의 제국이 이뤄졌을 때 그 힘이 이웃한 유목 사회에 투영되어 흉노제국이 성립된 것처럼, 외부 유라시아에서 발달한 문명의 힘이 내부 유라시아의 광대한 공간에 투영될 때, 원래의 문명권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특이한 피드백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외부 유라시아의 여러 문명권 사이에도 늘 얼마간의 접촉과 교섭이 있었다. 그 교섭의 범위는 각 문명의 기반구조(인프라)의 차이에 제한받았다. 불교사상이 중국에 전파될 때 현세를 중시하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중국 지식층의 반발이 있었고 다신교의 전통을 가진 로마에서는 유일신을 받드는 기독교가 박해받았다. 내부 유라시아의 여러 사회에서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는 이런 편협성이 훨씬 드물게 나타난다. 외부 문명과 길항하는 같은 층위의 기반구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空) 문명’의 성격을 가진 하나의 문명을 내부 유라시아 여러 사회가 공유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외부 유라시아 여러 문명권과 같은 층위의 기반구조를 갖지 않았다는 조건 때문에 내부 유라시아의 여러 사회는 상당 수준의 포용성을 나름대로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포용성이 인류문명 발전의 몇몇 고비에서 ‘그림자 문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으로 이해된다.

스키타이문화, 몽골 제국도 그림자 문명의 결과


▎스키타이 궁기병(弓騎兵) 청동상(기원전 5세기 초). / 사진:메트로폴리탄미술관
‘스키타이인(Scythians)’은 기원전 8세기경에서 3세기경까지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활동하며 상당 규모의 정치조직을 발전시켰던 종족이다. 한편 ‘스키타이문화(Scythian Cultures)’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내부 유라시아의 광범한 지역에 나타난 문화적 특성이었다. ‘스키타이문화’보다 ‘청동기시대 북방문화’라는 이름이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스키타이인이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등장함으로써 유럽인에게 잘 알려진 덕분에 이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까지 흔적을 남길 만큼 넓은 지역에 나타났다는 점에서 ‘스키타이문명’으로 생각하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문화’ 차원의 관점이 보통이다. 지역에 따라 그 문화적 특성이 나타난 시기에 상당한 편차가 있고 하나의 ‘문명권’을 대표할 만한 규모의 정치조직도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키타이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동물의 형상이 고도로 양식화된 장식품이다. 농경보다 수렵과 목축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 농경문화가 인류문명 발전의 주축이 된 상황에서 수렵·목축문화가 이처럼 긴 기간에 넓은 지역에 걸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이 특이한 현상도 ‘그림자 문명’의 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농경 지역에서 일어난 큰 변화의 파장이 비(非)농경 지역에 밀어닥친 결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서 여러 지역에서 철기 문명이 시작되었다. 철기 사용에 따른 생산성 향상은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농업이 더욱 집약적인 형태로 발전하고 잉여생산의 증대에 따라 도시가 자라나고 정치조직이 확장·강화되었다. 기원전 12세기 전반 많은 기존 문명중심지가 거의 동시에 파괴된 ‘후기 청동기 대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의 원인으로 철기의 출현을 꼽는 학자들은 국가 성격의 변화를 생각한다. 농업에 기반을 둔 전형적 고대국가가 일반화되는 단계로 보는 것이다.

목축은 신석기시대에 농경과 나란히 나타난 생산양식인데, 철기시대에 이르러 농경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이르자 상대적 열세에 빠지게 되었다. 농경이 가능한 기후·생태 조건을 가진 지역의 주민들은 농경으로 전환하거나 주변의 척박한 지역으로 밀려났다. 종래처럼 농경과 목축을 병행할 수 없는 척박한 지역에서는 목축을 전문으로 하게 되었고, 넓은 초지를 활용하기 위해 유목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내부 유라시아 일대에 스키타이문화가 나타난 시기가 바로 유목 활동의 확산기였다. 안장과 등자(鐙子) 등 기마술의 발달도 이 시기에 유목 활동을 통해 이뤄졌다.

유목은 넓은 초지를 활용하고 생산 품목을 특화함으로써 종래의 목축보다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었다. 이런 생산양식이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생산물을 교환할 상대로서 농경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목 사회는 식량과 생활용품 대부분을 자체 내에서 생산한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유목 사회 연구의 개척자 오언 래티모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순수한 유목민이란 곧 가난한 유목민이다.(It is the poor nomad who is the pure nomad.)”(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54쪽에서 재인용) 크리스천은 내부 유라시아의 유목 활동이 농경 지역과의 경계지역(borderlands)에서 시작된 사실을 지적한다.(1권 17쪽) 배후지역에 비해 인구가 조밀한 경계지역에서 변화가 먼저 일어나고, 배후지역은 경계지역에 노예와 물자를 공급하는 창고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농경 발달이 가져온 유목의 확장


▎19세기 말 시버족(錫伯族)을 그린 그림. 시버족은 만주어를 사용하며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살고 있다. / 사진:구글북스
여기서 노예의 공급이라는 현상이 눈길을 끈다. 농경사회와의 교류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조직력을 강화한 경계지역의 유목민이 채집경제에 머물러 있던 배후지역 주민을 포획해서 노예로 사역한 것은 유목 활동의 확장을 뜻하는 것 아니겠는가. 농경사회가 유목 사회를 공격해서 노예를 획득하는 데도 농경 활동의 확장이라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스키타이문화는 채집경제 단계에 있던 내부 유라시아 전역으로 유목 활동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기술력과 조직력이 뒤진 원주민의 저항이 미약했기 때문에 정복자들의 문화적 특성이 큰 굴절 없이 광대한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강물이 흘러가는 길이 지형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문명의 전파 과정에도 지리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다. 외부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선진 문명의 흐름이 내부 유라시아로 흘러들 때 광대한 초원이 하나의 유수지와 같은 역할을 맡는 대목들이 있었다. 문명 선진 지역 사이에서는 서로 접촉이 있더라도 기존 문명체계의 저항 때문에 다른 문명의 수용이 억제되는데, 문명 수준이 낮은 내부 유라시아에서는 그런 저항이 약해서 짧은 시간 내에 넓은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초원이 문명의 전파 유수지 역할


▎7~11세기 스리위자야 제국이 건설한 보로부두르 사원. 스리위자야 제국은 온대·아열대 유라시아의 해상 교류 과정에서 탄생했다. / 사진:Dudva
농경문명 발전의 한고비에서 파생된 유목 활동은 스키타이 문화를 타고 내부 유라시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접촉면이 큰 광대한 지역의 활발한 변화는 다양한 피드백 현상을 일으켰다. 후세에 나타날 ‘유목제국’에서도 문명 확산의 특정한 단계에서 내부 유라시아의 지리적·생태적 측면이 특이한 역할을 맡는 측면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3세기에 인구 수십만 명에 불과한 몽골족이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일으키는 상황도 이 측면을 읽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바다의 역할은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바다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고 농업을 중심으로 한 초기 문명에서는 역할이 아주 작았다. 문명 발달에 따라 지역 간 분업 관계가 형성되면서 상업의 발생과 함께 운송의 필요가 커질 때 수상 운송은 육상 운송에 비해 대량 화물의 장거리 이동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이 단계부터 바닷가와 큰 강변에 도시가 많이 자라나게 되었다.

학생 시절 몽골제국의 역참(驛站)제도를 알게 되면서 사막도 바다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면서 빠른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양자의 공통점이다. 전근대 세계에서 운송의 효율성은 매체의 성능만이 아니라 통과 지역의 정치적 조건에도 걸려 있었다. 통과하는 여러 지역의 세력들이 통과를 가로막거나 많은 통과세를 요구한다면 아무리 매체의 성능이 좋더라도 운송의 비용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바다와 사막처럼 정주(定住) 세력이 없는 공간이 운송에 유리한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경철의 [문명과 바다](산처럼, 2009) 130~137쪽에도 ‘사막의 배’와 ‘바다의 배’를 비교한 대목이 있다.)

빈 공간이 운송에 유리한 점도 있지만 이를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 조건이 있다. 바다의 경우 항해술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육지를 바라보며 배를 몰다가 어두워지면 항구에 들어가 쉬어야 하는 연안 항해 수준으로는 빈 공간의 이점을 활용할 수 없다. 항구마다 정주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육지가 보이지 않는 난바다에서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고 해가 저문 뒤에도 별을 보며 항로를 찾을 수 있어야 바닷길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인도양은 여러 문명권·문화권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마주 보는 곳이기 때문에 해상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한 바다였다. 13세기 이전 인도양의 교통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몽골제국 흥기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지난 달 몇 권 책을 주문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때문인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책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 바다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되, 먼저 눈에 띈 스리위자야(Srivijaya) 이야기부터 꺼내둔다.

앞 회에서 이야기한 의정(義淨, 635~713)이 671년에서 695년까지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체류하고 돌아온 후 남긴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内法傳)]에 ‘불서(佛逝)’라는 나라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이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에 수도를 둔 스리위자야였다. 송(宋)나라 기록에는 ‘삼불제(三佛齊)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7~10세기 동남아 바다 지배했던 스리위자야 왕국

스리위자야는 7세기 후반에 세워져 10세기까지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의 대부분, 그리고 자바섬의 서부를 지배한, 이 지역의 역사상 최대 국가였다. 스리위자야가 멸망한 후 그 역사도 전승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학자 조르주 세데스(George Coedès, 1886~1969)의 손으로 발굴되었다. 그 후 스리위자야의 역사는 중국 기록과 현지에서 발굴된 금석문의 대조를 통해 밝혀져 왔고,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중요한 근거로 자리 잡았다.

의정은 671년 광저우에서 파사(波斯) 상선을 타고 20일간 항해로 팔렘방에 도착해서 6개월간 체류한 뒤에 인도로 건너갔다. 687년 인도를 떠나 귀국하는 길에도 팔렘방에 들러 695년까지 체류했다. 가는 길의 체류는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는 등 준비를 위한 것이었고, 오는 길의 체류 동안에는 수집해 온 경전을 번역했다.

689년에 잠깐 광저우에 건너가 필묵과 조수를 구해 왔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광저우와 팔렘방 사이의 항해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왕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번역 작업을 여러 해 동안 팔렘방에서 수행한 것을 보면 그곳이 작업에 유리한 조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 왕국이던 스리위자야에서 경전 내용을 토론할 상대가 많았으리라는 점도 생각되지만, 장기 체류가 크게 불편하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스리위자야가 지배한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는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의 말라카해협을 끼고 있는 곳이다. 의정이 귀국을 서두르지 않고 8년간이나 체류할 만큼 안정된 조건을 제공하는 정권이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인근 해상활동의 주도권도 그 정권이 쥐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의정이 여행을 시작할 때 탔다는 ‘파사’ 상선도 페르시아 배가 아니라 말레이반도의 한 지역에 속한 배가 아니었을까 앞 회에서 추측한 것도 그 까닭이다. 말라카해협 일대에 강력한 지역 정권이 존재했다면 페르시아 지역과 중국 사이의 교역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계무역의 형태를 취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오늘 도착한 책 핀들레이와 오루어크의 [Power and Plenty(권력과 풍요)](2007)를 펼치자마자 눈에 띈 한 대목을 옮겨놓는다. (67쪽) 앞으로 인도양과 남중국해의 교역 상황을 살펴보는 데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대목이다.

“중국과 중동 지역 사이의 해로가 동남아시아 지역을 통과한다는 사실은 한쪽은 당나라와 송나라, 또 한쪽은 아바시드 왕조와 파티미드 왕조가 같은 시기에 번영하던 두 지역 사이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양쪽 방향으로 중계와 수출 교역이 번성할 조건이 되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인도차이나의 푸난(Funan) 왕국이 일어나고 크라지협(말레이반도의 북부를 가로지르는 지협)의 교역이 활발했던 것도 이 사실 때문이고, 후에는 말라카해협과 순다해협을 장악한 수마트라의 상업제국 스리위자야로 그 역할이 넘어갔다. 그러나 이 교역은 이익이 너무 커서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운 자바섬뿐 아니라 육지의 캄보디아·타이·버마, 그리고 실론섬의 세력들이 경쟁에 나섰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7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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