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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8)] 직속 연구기관에서 권력기관으로 

집현전 활용법의 청사진 

의식주 해결은 물론 휴가까지 챙기며 전폭 지원… 싱크탱크 역할 톡톡
국정 주도 세력이자 조선의 대표적 인재양성소로 기록돼


▎세종은 집현전을 정비해 자신의 국가경영 싱크탱크로 삼았다. 그림은 김학수 작 ‘집현전 학사도’. / 사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의 리더십을 이해하려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집현전이다. 역사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왕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탁월한 전문가 집단이 있어야 나라가 번영한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으로 왕은 집현전을 설립했고, 정성을 쏟아 숱한 인재를 길러냈다.

세종의 업적은 대부분 집현전과 관계가 깊었다. 한글·음악·의학·천문학 등 학문과 예술만이 아니었다.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집현전의 역할이 중요했다. 세종의 분신이었던 셈이다.

이 기관을 운영하면서 왕은 조금씩 시차를 두고 다음의 네 가지를 목표를 하나씩 좇았다. 첫째, 설립 초기에는 학사들에게 여러 가지 특전을 제공해 그들의 학술적 역량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았다. 둘째, 학사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 충실해지자 학사들이 국정의 크고 작은 일에 자문할 기회를 만들었다. 장차 유능한 실무관리로 성장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학사들의 개성과 소질을 존중해 그들이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발돋움하게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학사들 가운데서 훌륭한 전문가가 쏟아져 나왔다. 끝으로, 왕은 재위 후반이 되자 집현전에 정책심의권을 주었고, 학사들의 언론활동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로써 정치권력을 적절히 분산시키고, 유능한 학사 출신이 장차 국정을 주도하기를 바란 거였다.

집현전 이야기의 출발점에는 좌의정 박은이 있었다. “문신을 뽑아 집현전에 모으시고 문풍(文風)을 진흥하시기를 비옵니다.”(세종 1년 2월 16일) 왕은 수락했다. 궐내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젊고 능력 있는 학사들을 불러들였다. 왕립도 서관이자 고전연구소였던 셈이다.

집현전 학사였던 서거정은 이렇게 서술했다. “왕이 처음에는 10명의 젊은 문신을 뽑더니, 그 수를 점차 늘려 30명까지 집현전에 뒀다. 이후 다시 인원을 줄여 20명쯤으로 확정했다. 학사의 절반은 경연에 출석해 임금을 보필했고, 나머지 절반은 서연에 나아가 세자의 학업을 도왔다. 왕은 학사들에게 문필을 맡기고 고금의 사정을 조사하게 했다. 그들은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공부해 훌륭한 인재가 되었다.”(서거정, [필원잡기])

학사들의 근무처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인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집현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기술했다. 학사들은 다른 관청보다 일찍 출근해 늦게까지 근무했다고 한다. 그들은 아침은 물론 저녁 식사도 대궐에서 해결했는데, 늘 환관들이 융숭하게 대접했다. 선비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벼슬이 집현전 학사였다.

학사들은 몇 개의 조로 나뉘어 날마다 궐내에서 숙직했다.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다. 어느 날 밤, 세종은 환관을 보내 숙직 중인 학사가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그날 숙직은 신숙주였는데, 그는 촛불 아래서 밤새도록 글을 읽었다. 환관은 이를 세종에게 아뢰었다. “학사가 글만 읽다가 닭이 울 때야 잠깐 취침하였습니다.” 왕은 기특한 일이라고 여겨 자신의 담비 갖옷을 환관에게 주며 학사가 춥지 않게 잘 덮어주라 했다. 아침이 되자 당사자인 신숙주는 깜짝 놀랐다. 소식을 들은 다른 학사들도 깊이 감동해, 더욱더 학문에 힘을 쏟았다. (서거정, [필원잡기]) 이렇듯 왕은 집현전 학사들을 성심껏 보살폈고, 학사들은 실력으로 응답했다.

초기에는 학사들의 연구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세종은 양서를 모으는 데 정성을 다했다. 왕은 충주사고에 관리를 보내 자신이 직접 고른 여러 권의 서적을 가져오게 했다(세종 3년 1월 7일). 민간에 소장된 귀중본도 사들였다. 책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본인의 희망대로 포상금을 주거나 관직으로 보상했다(세종 3년 3월 26일). 그 밖에도 중국에서 값비싼 책을 수입하기도 하고, 국내에서 간행된 서적은 우선 집현전에 비치했다. 언젠가 강원도 감사가 새로 찍은 [사서대전] 50질을 바치자, 왕은 그 가운데 3질을 집현전에 하사했다(세종 11년 4월 22일).

떡잎 보이면 집중 투자로 소질 키워


▎집현전이 있었던 경복궁의 수정전.
하루는 경연에서 왕이 [좌전]과 [사기] 등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물었는데 제대로 답하는 신하가 없었다. 이를 계기로 왕은 집현전 학사 가운데서 역사에 소질이 있는 이를 선발해 그 방면의 전문가로 키우려 했다(세종 7년 11월 29일). 정인지, 설순 및 김빈이 선발됐는데, 그때 김빈은 지방관으로 재임 중이었다. 왕은 그를 집현전으로 발령을 냈다. 이후 세 사람은 역사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한 예가 보인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임을 표방했으나 경전에 정통한 선비가 별로 없었다. [성리대전서]가 간행됐을 때의 일인데 이 책도 깊이 이해하는 이가 없었다. 세종은 철학에 소양이 있는 집현전 학사 김돈을 불러서 관련 분야를 전공하게 했다(세종 10년 3월 2일). 이렇듯 왕은 분야마다 소질 있는 학사를 발굴해 후원했다.

학사들이 연구에 전념하도록 세종은 특별휴가제도를 창안했다. 말하자면 연구년 제도였다. 세종 8년(1426) 왕은 집현전 부교리 권채, 저작랑 신석견 및 정자 남수문 등 3인에게 처음으로 특별휴가를 줬다. “그대들이 독서에 전념할 시간이 없어서 유감으로 여긴다. 이제부터는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책만 읽어라. 부디 큰 성과를 내어 내 뜻에 부합하라.”(세종 8년 12월 11일)

서거정의 회고에 따르면, 특별휴가 중인 학사들도 이따금 대궐에서 숙직했다. 때로 그들은 조용한 산사에 올라가 독서삼매를 즐기기도 했다. 모든 비용은 왕이 부담했다. 이런 세월이 쌓이자 다수의 학사가 유교 경전과 역사에 정통하게 됐고, 제자백가와 천문지리 및 의약에도 박식해졌다. 15세기 말, 이 특별휴가는 ‘독서당’ 또는 ‘호당’으로 제도화됐다.

인재 양성에는 장기간의 투자가 필수적이었다. 왕은 일찌감치 그 점을 고려해, 집현전 학사를 다른 관청으로 옮기지 못하게 막았다. 세종 27년(1445년) 가을, 집현전 학사 정창손이 사헌부 집의로 인사 이동됐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왕은, 정창손을 즉각 집현전으로 복귀시키려 했다. 그런데 대사헌 강석덕이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복귀 명령은 일단 취소됐다(세종 27년 8월 3일).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왕은 다시 정창손을 집현전으로 불러들였다. 학사를 오랫동안 집현전에 붙들어두려는 왕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실생활에 밀접한 사안 연구시켜 실용학문 발달 유도


▎서거정은 집현전 관련 일화가 담긴 [필원잡기]를 저술했다.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서거정의 묘.
학사들의 실력이 향상되자 왕은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 세종 12년(1430년) 5월 28일, 왕은 술로써 나라를 망치는 일이 없도록 술을 경계하는 글(주계, 酒戒)을 짓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관련 사실을 역사책에서 찾아보라고 집현전에 영을 내렸다.

음악에 관한 자료를 요구할 때도 있었다. 집현전 출신 음악전문가 박연이 조회에서 사용할 음악에 관해 아뢰었을 때도 왕은 학사들에게 일렀다. “중국 고대의 음악 제도를 검토해 관련 사례를 보고하라.”(세종 12년 9월 27일) 한국의 옛 사회관습도 연구대상이었다. 고려 때는 왕실 및 귀족 사회에 동성혼이 널리 유행했는데, 그 말을 들은 왕은 실상을 알고 싶었다. 그는 곧 집현전에 명하여 결혼제도의 역사적 변천을 알아보게 했다. (세종 12년 12월 18일)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왕이었기에 질문도 다양했다. 왕은 통치에 관한 실용적인 지식이라면 무엇이든 정확히 알고 싶어 했다. 다년간 연구조사 활동을 통해 집현전이 실용학문의 중심지로 우뚝 서기를 세종은 바랐다. 후세가 아는 것처럼 결과는 큰 성공이었다. 세종 25년(1443년) 겨울, 왕은 학사 출신 이순지와 김담 덕분에 경작지의 재평가 작업이 손쉽게 마감됐다며 기뻐했다. 두 사람은 당대 제일의 수학자로 당대 최고의 천문학 서적 [칠정산 외편]을 편찬한 인재였다. 그들의 활약에 고무된 왕은 집현전에서 수학교육의 역사도 연구하도록 했다(세종 25년 11월 17일).

왕은 학사들에게 명령해 역대 왕조에서는 감옥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알아보게 했다. 세종 30년(1448년) 여름, 날씨가 무척 더웠고 왕은 폭염으로 죄수들이 옥사할까 봐 염려했다. 궁리 끝에 집현전에 지시해 하절기 죄수들의 건강에 보탬이 될 만한 방법을 역사기록에서 찾아보게 한 것이었다.(세종 30년 7월 2일)

이처럼 국정에 관계되는 연구과제가 학사들에게 주어졌다. 과제를 수행하는 가운데 자연히 그들은 실용학문에 눈을 떴다. 학사들이 저마다의 소질에 적합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학사들의 전문성이 입증되자 그들에게 각종 편찬 사업도 맡겼다. 성리학적 윤리 도덕이든 역사 및 의학 서적이든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세종 초기에는 유교 도덕이 조선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가령 경남 진주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했다. 이런 일은 전국 어디서든지 일어나고 있어, 부모를 폭행하거나 학대하는 패륜이 흔했다. 왕은 이러한 사회현실에 통탄한 나머지 백성의 교화를 위해 [효행록]의 증보 간행을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이 편찬 사업의 주체로 집현전을 선택했다. 이에 학사들은 고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효자들의 행적을 발굴해 실감 나는 문체로 기술했다. (세종 10년 10월 3일)

왕은 국정 참고자료로 역사책을 선호했다. 송나라 때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이 중시됐는데, 문제는 거기에 언급된 각종 제도와 인물 및 사건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상세하고 정확한 주석서가 필요했다. 왕은 40여 명의 찬집관(편찬위원)을 선정했고, 정인지·설순·권채·남수문·김돈·안지·안완경·김빈 등이 포함됐다. 대다수가 전·현직 학사들이었다. 세종 17년(1435), 마침내 [통감훈의(通鑑訓義)]가 완성됐다. (세종 17년 6월 8일)이 책은 [자치통감]에 관한 최고의 주석서라는 호평을 받았다.

왕이 화두 던지고 학사들은 법적 근거 제공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의학 백과사전 [의방유취] 본문 중 일부.
백성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보건위생도 개선돼야 했으나, 조선에는 내놓을 만한 의학 서적이 없었다. 세종은 본격적인 의학사전을 만들기로 했다. 이 사업도 왕은 집현전에 맡겼다. 먼저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과 저작랑 유성원에게 명해 가능한 많은 중국 의학서를 참조해 전문지식을 항목별로 정리하게 했다. 이어서 집현전 직제학 김문과신석조, 부교리 이예 등에게 당대의 의원들과 함께 그 원고를 검토하라고 했다. 마지막에는 의학에 조예가 깊은 안평대군 이용과 전직 집현전 학사 이사철 및 의관 노중례에게 최종감수를 맡겼다. 그리하여 3년이라는 단기간에 무려 365권이라는 방대한 의학 백과사전 [의방유취(醫方類聚)]가 완성됐다(세종 27년 10월 27일). 요컨대 세종 10년(1428년) 이후 국가가 벌인 편찬 및 학술사업의 주체는 집현전이었다.

학사들이 전문 지식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자 세종은 그들과 함께 국가를 혁신했다. 이는 과거시험과 세법(공법) 개정 및 국방정책의 수립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랜 토론 끝에 세종은 과거시험 제도를 바꿔 1차 시험에 강경법(경전 시험)을 도입하였다. 처음에는 다수의 신하가 반대했으나 결국은 이 법을 시행해 많은 학자를 키웠다(7월호 참조). 알고 보면 법 개정 이면에는 집현전 학사들의 노력이 있었다.

세종 10년(1428년) 판부사 변계량이 강경법을 강력히 비판하며 논란의 불씨를 키웠을 때였다. 집현전 교리 권채와 수찬 이선제 등 15인이 강경시험의 정당성을 끝까지 주장했다. 세종은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었고, 여러 해가 지난 다음 최종 결단을 내리는 데 참고했다,

그 시절에는 세법 개정도 국정 현안이었다. 수년 동안 조정에서 찬반 양측이 지루한 공방전을 벌였다. 즉위 초부터 왕은 세제의 혁신을 소망했으나 반대 여론이 워낙 강해서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세종 12년 가을, 왕은 모든 신하에게 세법에 관한 의견을 서면으로 제출하게 했다(6월호 참조). 그때 집현전 학사들은 세 가지 방안을 제출했다(세종 12년 8월 10일).

그들의 주장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들이야말로 세제 개혁에 이정표를 세웠다고도 볼 수 있다. 첫째, 직제학 유효통은 하등전을 둘로 나눠 등급마다 면적에 일정한 차이를 두자고 주장했다. 이 제안이 훗날 ‘전분(田分) 6등’을 만드는 뼈대가 되었다. 둘째, 집현전 부제학 박서생 등은 토지대장(양안)에 기록된 토지 등급이 실지와 일치하지 않는다며 재평가를 요청했다. 세종은 그들의 상소로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했고, 기회를 보다가 그보다 몇 년 뒤 전국 차원에서 경작지의 등급을 조정했다. 끝으로,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는 세법을 바꾸기에 앞서 경기도에 시범지구를 운영하자고 했다. 또, 직전 안지도 같은 취지로 전국에 수십 개의 시범지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세종은 그들의 제안을 잊지 않았다. 새로운 세제가 도입 단계에 이르자 왕은 전국 6곳의 시범지구를 정했다. 이로써 미처 예상하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돼 세법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

심의기구를 넘어 권력기구로 진화해


▎세종 31년(1449년)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 [월인천강지곡] 상권. 집현전 학사들은 불교를 놓고 왕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국방문제도 잠시 짚어보면, 때는 왕의 재위 말년이었다(세종 32년 1월 15일). 평소 집현전 부교리 양성지는 외교·국방의 문제를 깊이 연구하면서 10가지의 새로운 전략을 제안했다. 요약하자면 ▷북쪽 국경에 함부로 성을 쌓지 말고 남쪽의 일본과는 외교 관계를 더욱 개선하자는 것 ▷군대를 정예병 위주로 재편성하고 공격과 수비에 유용한 장비를 많이 만들자는 것 ▷내부 사회기강 확립 및 중국과의 관계 강화 등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훗날 세조는 양성지의 이런 제안을 수용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확고히 다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세종은 집현전에 더더욱 큰 권한을 줬다. 학사들이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게 허락한 것이었다. 왕은 그들을 언관(言官)으로 대우해, 대간(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조정의 잘잘못을 따지게 했다. 집현전이 학술기관이자 권력기관으로 위상이 격상되는 계기였다.

왕은 정치권력을 여러 기관이 나눠 갖기를 바랐고, 그들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다분히 성리학적 발상이었다. 그 결과 학사들은 언관으로서 왕의 잘못도 지적하고 대신의 월권과 독주를 막는 것에 힘썼다.

세종 28년(1446년) 겨울,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 등은 사소한 일로 궁지에 몰린 대간을 두둔했다. 집현전 학사 10여 명이 집단으로 상소하기를, 대간의 처사가 비록 잘못됐을지라도 엄벌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로가 막히면 나중에 더욱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세종 28년 10월 10일). 왕은 이런 의견을 수용해 대간을 너그러이 대하였다.

돌이켜보면 재위 10년쯤부터 세종은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혁의 후유증과 부작용을 심각하게 염려했다. 재위 말기가 되면서 왕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됐다. 이제 왕은 집현전에 정책을 심의할 권한까지 주어, 새로운 제도와 정책의 문제점을 엄격히 분석 검토하게 했다.

왕의 태도 변화로 인해 집현전의 역할도 바뀌었다. 학사들이 제도 개혁을 반대하는 사례가 더욱더 많아졌다. 의정부가 사창법(춘궁기 빈민에게 곡식을 대여하는 법)을 세우려 했을 때도 그들은 강력히 반대했다(세종 26년 7월 14일). 그 당시 의정부는 소금전매법(염법)을 추진했고, 왕 역시 그 문제에는 호의적이었지만 집현전은 단호히 거부했다. 국가에서 소금을 제조·판매하면 백성의 생계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때도 왕은 집현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소금전매법을 중도 폐기했다(세종 27년 8월 27일). 이 밖에도, 왕이 오랫동안 추진한 종이돈(저화)의 부활도 집현전의 반대로 중단됐다(세종 27년 10월 11일). 이처럼 집현전의 기능과 역할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재위 말년에는 세종이 집현전과 대립하는듯한 모습도 관찰된다. 세종 28년(1446년) 봄, 왕은 작고한 왕비의 넋을 달래려고 불경을 간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집현전은 대간과 함께 반발했다. 불교의 해독을 잘 아는 왕이 왜 불경을 간행하느냐며 저항했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의지대로 불경 간행을 추진했다. (세종 28년 3월 28일)

2년 뒤에는 더더욱 심각한 충돌이 일어난다. 세종이 대궐안에 불당을 설치할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자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 등이 거세게 반대했다. 대신과 대간은 물론 승정원까지 합세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정치적으로 큰 소용돌이가 일어났는데도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세종 30년 7월 23일)

재위 말년에는 왕과 대립각 세우기도


▎세종은 집현전에서 밤새 책을 읽다 잠든 신숙주에게 자신의 담비 갖옷을 하사했다. 그림은 중국 화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신숙주 초상(보물 613호).
이 문제는 과연 어떻게 해결됐을까. 개혁 정치가 조광조는 중종의 어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종은 정승 황희를 불러 이 문제를 상의하였습니다. 그러자 황희가 말하였습니다. ‘신이 그들을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학사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직무에 복귀하기를 종용하였습니다.”(중종 13년 2월 2일)

만약 세종 임금도 아니고 황희 정승도 아니었다면 어떠했을까. 왕은 자신이 아끼던 신하들이 배신했다고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요, 정승도 허리를 굽혀 학사들의 복귀를 간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시(國是)가 성리학이었던 만큼 신하들의 반대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으로서는 왕실의 오랜 전통이자 자신의 신앙이기도 했을 불교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세종이 불교를 신앙한다고 수긍한 적은 없으나, 불교 관련 행사를 여러 번 개최한 것으로 보아 불교에 경도된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그때는 황희라는 정승이 있어 정치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2년 뒤 세종은 세상을 등졌으나 이후 30여 년 동안 나라를 이끈 것은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다. 이름난 정승도 정인지를 비롯해 정창손·신숙주·최항과 이사철 등 여럿이었다. 유명한 사육신도 무관 유응부를 제외하면 모두 학사들이었다. 박팽년·하위지·성삼문·이개·유성원을 그 사건으로 처벌한 다음, 세조는 집현전을 영구히 폐지했다. 시간이 흘러 인재 육성 목소리가 커지자 성종 때 홍문관이 설치됐으나, 집현전처럼 많은 인재를 기르지는 못했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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