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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5)] 청상과부가 된 ‘왕비 자매’의 아찔한 사랑 

삼촌과 통정해 낳은 사생아, 왕이 되다 

태조 왕건의 손녀, 사촌오빠 경종과 결혼했으나 젊은 나이에 사별
출궁 후 문란한 사생활… ‘몰래 사랑’의 결실 현종 고려 전성기 열어


▎고려 초기 왕실을 소재로 한 KBS 사극 [제국의 아침]. 왕실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이 몸은 불행히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조모님 품에서 양육됐지만 마치 부모의 슬하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맛난 음식은 남겨뒀다가 저를 먹여주셨으며, 이 외로운 몸에 부드럽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 정성스러운 양육 덕분에 이 몸이 잘 자라 다행히 가문의 위업을 이어받고 외람되이 왕위에 오르게 됐습니다. 이제 손자의 효성을 바치려던 차에 이처럼 별세하실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삼가 시호를 올려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라 하나이다.”([고려사] 열전 ‘신정왕태후 황보씨’)

고려 성종 2년(983년) 7월 태조의 제4비 황보씨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큰 슬픔에 빠졌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자신을 금이야 옥이야 키워준 할머니였다. 성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殯殿)으로 나아가 ‘신정왕태후’라는 시호를 올렸다. 태후는 일찍이 패서(황해도)의 강성한 호족, 황주 황보씨를 대표해 태조 왕건의 왕비가 됐다. 태조 사후에도 40년이나 더 살며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궁중 대소사를 관장했다. 특히 얄궂고 정략적인 혼사, 근친혼과 자매혼을 주도해 고려의 운명을 바꿔놓은 장본인이다.

고려 초기 왕실 사업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왕건 자손들 간의 짝짓기, 근친혼(近親婚)이었다.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에게서 34명의 자녀를 뒀다.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는 각기 호족 세력을 뒷배로 삼고 있었다. 왕건은 결혼동맹으로 피를 섞은 외척들이 고려 왕실의 혈맹이 돼주기를 바랐다.

새 나라가 국초의 난관을 극복하고 하루속히 안정을 이루려면 굳건한 권력 기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려 왕실의 근친혼은 바로 이들 호족 외척의 지위를 배타적으로 대물림하는 묘수였다. 근친혼은 성씨와 맞물려 돌아갔다. 왕건의 아들들은 아버지 성을 받았지만, 딸들은 어머니 가문의 성씨를 썼다. 배다른 아들과 딸의 근친혼을 통해 외척 가문들은 대를 이어 특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다음 대도 마찬가지였다. 왕건의 손자들은 왕씨 성을 썼다. 손녀들은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 가문의 성씨를 받았다. 애초 태조와 결혼동맹을 맺고 창업을 도운 가문들에게 반영구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근친혼을 거듭하며 그들은 고려 왕실의 진정한 혈맹이자 운명 공동체로 거듭났다.

왕건의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의 결혼은 호족 세력이 손잡고 왕과 왕비를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세력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왕위 계승 판도를 바꾸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그 어려운 일을 신정왕태후는 성공적으로 해냈다. 태후는 아들 왕욱과 딸 황보씨를 왕건의 또 다른 자식들과 결혼시켜 그 배후의 외척 가문들과 교분을 쌓았다. ‘황주원(黃州院)’의 여주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간 것이다.

친손녀 2명 외손자 경종에게 시집 보내


▎KBS 사극 [제국의 아침]에서 왕실의 강력한 외척 세력으로 등장하는 평주 가문의 주요 인물들.
신정왕태후의 딸 황보씨는 고려 4대 왕 광종에게 시집가서 대목왕후가 됐다. 광종이 태조의 제3비 신명순성왕태후 소생이니 충주 유씨(劉氏)와 긴밀해진 것이다. 여기서 태어난 외손자가 고려 5대 왕 경종이다. 아들 왕욱은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소생인 유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왕건의 제1비 신혜왕후와 정덕왕후를 배출한 정주 유씨(柳氏)를 포섭한 것이다. 친손자 개령군 왕치와 친손녀 황보씨 자매는 태후가 직접 키웠다. 황주원의 아이들은 유력한 가문들의 협조 속에 고려 왕실의 기린아로 성장했다.

세월이 흘러 왕실의 큰어른이 된 신정왕태후는 더욱 파격적인 근친혼을 들고 나왔다. 친손녀 황보씨 자매를 외손자 경종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소녀들은 이따금 외가에 찾아와 자신들과 놀아주던 사촌오빠를 남편으로 맞았다. 이 왕비 자매가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다.

그중 언니 헌애왕후가 아들 왕송을 낳았다(980년). 적장자였기에 조금만 크면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경종이 27세로 요절하는 바람에 그르쳤다. 두 살배기 왕자는 너무 어렸다. 왕은 죽기 전에 다른 후계자를 지명했다.

“이제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근심을 풀까 하노라. 개령군 왕치는 나라의 어진 종친이고 내가 아끼는 사람이니 반드시 조종(祖宗)의 대업을 받들고 국가의 기틀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너희 공경(公卿)과 재신(宰臣)들은 나의 큰동생을 받들고 보필하여 길이 나라를 편안케 하라.”([고려사] 세가 ‘경종 6년’)

경종은 왕치에게 보위를 넘기고 죽었다. 학식이 뛰어나고 인품이 어질다는 이유였다. 왕조의 후계자는 자질만으로 뽑지 않는다. 뒤탈이 없게 하려면 왕위 계승 자격을 갖춰야 한다. 왕치의 자격은 부인에게서 나온다.

문덕왕후 유씨(劉氏)는 광종과 대목왕후의 딸이었다. 신정왕태후는 외손녀이자 공주인 유씨를 친손자 왕치에게 시집보내 광종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유씨는 원래 홍덕원군의 부인이었으나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재가했다. 그 바람에 왕치의 본부인 김씨도 둘째 부인으로 밀려났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략결혼이었다.

그리하여 개령군 왕치가 즉위하니 고려 6대 왕 성종이다(981년). 그는 궁궐에 들어가 경종의 유산을 정리했다. 정리 대상에는 여동생들도 포함돼 있었다.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자매는 출궁해야 했다. 단, 헌애왕후 소생인 왕송은 남겨졌다. 선왕의 유일한 핏줄을 성종은 궁에서 훌륭하게 키우고자 했다. 그것이 임금 자리를 넘겨준 경종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거처를 옮기는 헌애왕후의 입장은 달랐다. 홀로된 삶이 외롭고 막막한 데다 젖먹이 자식 걱정에 사로잡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채택해 중국식 유교정치를 펼쳐나갔다. 창업기를 지나 수성기에 접어든 고려다. 이제 유교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사회질서를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왕은 신라계 관료와 유학자들을 등용했고, 2성 6부로 중앙 관제를 정비했으며, 12목을 설치해 지방 행정을 재편했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누름)’ 정책도 강력하게 추진했다. 팔관회·연등회 등 국가적인 불교 행사를 전면 금지한 것이다. 성종은 그렇게 유학자 임금의 길을 걸었다.

오빠가 불철주야 나랏일에 매달리는 동안 출궁한 여동생을 둘러싸고 망측한 소문이 들려왔다. 전 왕비 헌애왕후가 김치양이라는 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 자는 동주(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왕후의 외가 친척이었다. 그는 어린 자식과 생이별한 엄마에게 달콤한 위안을 건넸다. 꽃다운 나이의 젊은 과부는 마음을 허락했고, 김치양은 승려를 가장해 전 왕비의 거처에 드나들었다. 남의 연애사에 큰 관심을 갖는 게 세상인심이다. 하물며 전 왕비의 열애였으니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고려사절요] ‘목종 6년’).

성종, 여동생의 연인 잡아다 곤장치고 귀양

유학자 임금 성종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유학은 여성의 정절을 중시한다. 여자들이 행실을 잃으면 사회 풍속이 문란해지고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고 유학자들은 믿었다. 그런데 임금의 여동생이, 그것도 전 왕비가 ‘추잡한 소문’에 휩싸였으니 용납할 수 없었다. 성종은 헌애왕후를 불러 호되게 꾸짖고 김치양과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에서 과부의 사랑은 무죄였다. ‘금지된 사랑’은 오히려 거세게 타올랐다. 고지식한 성종은 엄한 조치를 취했다. 여동생의 연인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고 멀리 유배 보낸 것이다.

전 왕비의 행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성종의 또 다른 여동생 헌정왕후가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무려 종친 왕욱이었다. 왕욱이 누구인가? 태조 왕건과 제5비 신성왕태후 사이에서 난 왕자로 성종의 숙부였다. 그것은 왕실 족보를 꼬이게 만든 위험한 사랑이었다. 헌정왕후는 출궁한 후 개경 왕륜사 남쪽에 있는 거처에 머물렀다. 마침 왕욱의 집이 그 근처여서 서로 왕래하다가 삼촌과 조카가 정을 통한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쉬쉬하기 바빴다. 헌정왕후가 임신해 배가 부르고 있었지만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마침내 왕후가 만삭에 이르자 뒷감당을 염려한 집안사람들이 궁에 알리기로 했다. 그렇다고 직접 기별하기는 곤란했다. 그들은 전 왕비가 숙부의 집에서 자고 있는 사이 뜰에 장작을 쌓고 불을 질렀다. 유력한 왕자의 자택에서 불길이 치솟자 궁궐에서는 난리가 났다. 백관들은 허겁지겁 불을 끄러 달려왔고 예의 바른 성종도 급히 와서 안부를 물었다. 거기서 만삭의 여동생을 발견한 오빠는 깜짝 놀랐다.

성종은 고심 끝에 숙부 왕욱을 유배 보냈다. 신분이 다르다고 해도 김치양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학자 임금답게 그는 원칙에 충실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집안일을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헌정왕후로서는 모질고 가슴 아픈 처사였다. 만삭의 처지인데 곁을 지켜줄 낭군을 오빠가 잡아가 버린 것이다. 마치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세상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왕욱이 유배를 떠나던 날, 배웅 나간 헌정왕후는 목 놓아 울부짖다가 산기를 느꼈다. 왕후는 서둘러 귀가했으나 미처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대문 앞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부여잡고 해산했다. 다행히도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지만 전 왕비는 기력이 다해 한스러운 생을 마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종은 가슴이 찢어졌다. 그는 유모를 택해 여동생이 남긴 아들 왕순을 궁에서 기르게 했다([고려사] 열전 ‘헌정왕후 황보씨’).

성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은 경종의 아들 왕송이었다. 성종이 선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의리를 지킨 것이다. 왕송, 곧 고려 7대 왕 목종이 즉위하자 헌애왕후는 태후가 돼 섭정(攝政)에 나섰다. 섭정은 국왕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보통 임금이 미성년일 때 이뤄지는데, 당시 목종은 성년에 가까운 18세였다. 그럼에도 태후가 통치권을 행사한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가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하며 섭정했으므로 세상에서는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 불렀다([고려사] 열전 ‘헌애왕태후황보씨’).

사실상 여성 통치자의 등장이었다. 천추태후의 권력 기반이 탄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고려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었다. 7대 왕 목종의 어머니요, 6대 왕 성종의 동생이요, 5대 왕 경종의 아내요, 태조 왕건의 손녀가 아닌가. 성종 때 신라계 관료와 유학자들에게 밀린 호족 세력이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엄격한 유교정치에 답답해하던 백성들도 뭔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다.

언니 천추태후, 왕권 이으려 혼외 늦둥이 낳아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며 왕궁 터로 잡은 개성 만월대.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불탄 후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고 있다.
천추태후는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유학 대신 불교를 장려했다. 진관사·숭교사·시왕사 등 사찰들을 창건하는 한편 성종이 금지한 연등회를 부활시켰다. 고려 불교는 민간 신앙과 결합해 백성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불교 장려책으로 민심을 얻은 것이다. 그녀는 또 태조의 유훈을 받들어 북진 정책을 추진했다. 태후는 아들 목종에게 서경(평양)에 자주 행차하고 머무르도록 했다. 서경의 명칭도 ‘호경(鎬京)’으로 고치는데 고대 중국 주(周)나라의 도읍과 같았다 (998년). 이곳을 개경만큼 중시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연인 김치양을 불러들여 총애하면서 천추태후의 통치에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300칸의 호화저택에서 밤낮으로 희롱했다. 목종은 김치양을 미워했지만 어머니가 속상해할까 봐 감히 쫓아내지 못했다([고려사] 열전 ‘김치양’).

‘태후의 남자’는 우복야 겸 삼사사에 올라 인사권을 휘둘렀다. 백관에게 벼슬을 주고 빼앗는 일이 이 자의 손에서 이뤄졌다. 덕분에 패서의 호족과 외척들이 다시 득세했는데 이는 집권당을 구축하려는 천추태후의 뜻이었다.

신라계 관료와 유학자들은 눈칫밥 먹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야당으로 전락한 그들은 호시탐탐 천추태후 정권을 무너뜨릴 구실을 찾았다. 약점은 목종에게 있었다. 그는 왕비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남색에 빠져 합문사인 유행간 등과 관계를 맺은 것이다. 임금이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태후로서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녀의 권력은 아들의 국왕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목종이 후사 없이 죽으면 정권도 끝장이었다.

천추태후는 임금에게 여자들을 보내도 아무 소용이 없자 과감하게 발상을 전환했다. 자신이 김치양의 아이를 가져 목종의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애 아빠의 혈통은 중요하지 않았다. 태조 왕건의 손녀인 자기 핏줄만 이으면 정통성이 있다고 믿었다.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태후는 임신의 집념을 불태웠고 마침내 40세의 나이로 아들을 낳았다([고려사절요] ‘목종 6년’). 하지만 민심은 천추태후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태후의 핏줄이어도 김치양의 자식을 후계자로 세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특히 신라계 관료와 유학자들이 반발했다. 그들은 임금감으로 대량원군 왕순을 점 찍었다. 아버지 왕욱이 신성왕태후 소생이니 사실상 ‘신라계 대권주자’였다. 어머니 헌정왕후가 생전에 꿨다는 예지몽 이야기도 나돌았다. 왕후가 곡령(鵠嶺)에 올라 소변을 누었더니 온 나라에 흘러 넘쳐 은빛 바다로 변했다는 꿈이다([고려사] 열전 ‘헌정왕후 황보씨’). 그녀의 아들이 왕이 돼 나라를 가질 것이라는 해몽이 나왔다. 자격은 충분했다. 실제로 왕순은 고려 왕실에서 서열이 높았다. 태조와의 관계만 놓고 보면 태후와 맞먹었다.

대량원군 왕순이 대권주자로 급부상하자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견제에 들어갔다. 태후는 12세 소년 왕순을 억지로 출가시켜 삼각산 신혈사의 승려로 만들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신혈소군(神穴小君)’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천추태후는 여러 차례 어린 조카를 암살하려 했다. 하루는 나인을 시켜 독약이 든 술과 떡을 보냈는데, 절의 노승이 소군을 땅굴 속에 숨기고 모른 척했다. 나인이 돌아간 뒤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주워 먹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고려사] 열전 ‘헌애왕태후황보씨’).

헌정왕후의 아들, 사생아였지만 왕건의 적통


▎KBS 사극 [천추태후]에서 천추태후로 분한 배우 채시라(왼쪽 둘째)가 열연하고 있다.
천추태후의 늦둥이 아들이냐 태조 왕건의 적통 후손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후계자를 놓고 갈등과 분열이 극심해지며 나라가 완전히 둘로 쪼개졌다. 하지만 목종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내전이라도 일어날 분위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궁궐에 불길이 치솟았다. 임금이 상정전에서 연등행사를 관람하고 있는데 기름 창고에 화재가 일어나 번진 불이 천추전을 태웠다([고려사] 세가 ‘목종 12년’).

궁전과 창고가 잿더미로 변하자 목종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왕은 병을 핑계로 내전에 틀어박혔다. 측근 유행간과 유충정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임금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재상들이 나랏일을 염려한 나머지 문병을 청했으나 이 또한 허락받지 못했다. 두려움에 감금된 상태로 목종은 압박을 받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의 안개를 걷어내고 어느 쪽이든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다.

왕은 은밀히 중추원사 최항, 급사중 채충순 등을 불러 후사를 의논했다. 재상들의 의견은 명분상 우위에 있는 대량원군 왕순으로 모아졌다. 목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헌정왕후를 잃고 궁에 들어온 어린 동생이 어느덧 자신의 후계자가 된다니 감개무량했다. 임금은 헌정왕후와 천추태후의 친족인 황보유의에게 명을 내려 신혈사에 있는 왕순을 데려오게 했다([고려사] 세가 ‘목종 12년’).

목종은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했다. 대량원군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김치양에게 알려지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왕은 서경도순검사 강조에게 호위병력을 요청했다. 서경은 북방을 겨누는 고려의 창이자 외적의 침입을 막는 든든한 방패였다. 고려 최강의 정예부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목종은 서경을 개경과 동급으로 격상시키고 여러 차례 행차해 머물렀다. 서경의 지휘관과 병력이라면 믿고 쓸 수 있었다.

임금의 밀명에 강조는 약간의 병력과 함께 개경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서경의 군사 동향을 예의주시해온 천추태후 측에 노출되고 말았다. 태후는 즉각 사람을 보내 자비령을 봉쇄하고 개경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추태후 정권에 불만을 품은 위종정·최창 등이 강조를 찾아갔다. 그들은 김치양의 반란으로 목종이 죽었다며 무장봉기를 촉구했다. 격분한 강조는 서경에 돌아가 군사를 일으켰다. 5000명의 정예군이 물밀 듯이 개경으로 쳐들어갔다([고려사] 열전 ‘강조’).

서경군은 평주(황해도 평산)에 이르러서야 임금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과적으로 강조가 거짓 정보를 믿고 정변을 일으킨 꼴이 됐다. 그렇다고 군대를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수가 칼을 뽑았다가 무위에 그치면 반역자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들은 김치양의 반란을 핑계로 목종과 천추태후를 폐위시키고 대량원군 왕순을 옹립하기로 했다. 경솔하게 군사 행동을 해놓고 뒤늦게 명분을 짜맞춘 것이다.

이윽고 서경 병사들이 개경 궁궐에 난입하자 천추태후와 목종은 통곡하면서 궁문을 나섰다. 후계자로 왕순을 데려온 재상 최항과 채충순은 강조가 딴 마음을 먹을까 봐 서둘러 즉위식을 올렸다. 고려 8대왕 현종이 우여곡절 끝에 보위에 오르는 순간이었다(1009년). 일약 권신이 된 강조는 의기양양하게 칼을 휘둘렀다.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태후의 친척과 측근 30여 명을 섬으로 유배 보냈다([고려사] 세가 ‘목종 12년’).

목종은 천추태후와 함께 시골에서 늙고 싶다는 본인의 뜻에 따라 충주로 향했다. 쫓겨나는 길이었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태후가 음식을 먹고자 하면 왕이 직접 소반과 사발을 받들었고, 태후가 말을 타고자 하면 왕이 친히 말고삐를 잡았다. 유능한 임금은 아니었지만 심성이 어진 효자였다. 하지만 그는 소망대로 시골에서 늙지 못했다.

정변을 일으킨 강조는 후환을 남겨두지 않았다. 일행이 적성현(파주)에 이르렀을 때 궁궐에서 사람이 나와 독약을 올렸다. 목종이 마시기를 거부하자 시해한 뒤 자살했다고 보고했다. 시신은 문짝을 뜯어 만든 관에 넣어 객관에다 임시로 안치했다([고려사] 열전 ‘강조’). 일국의 군주였던 목종에게는 초라하고 불쌍한 죽음이었다. 천추태후의 치세는 그렇게 비극적인 종착역으로 치달았다. 자식들을 가슴에 묻은 여인은 황주원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승자의 역사, 왕위 찬탈을 하늘의 뜻으로 찬양

“천추태후가 방탕하고 음란하게 굴면서 몰래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목종은 백성들의 기대를 알아차리고 태후의 악한 무리를 물리쳤다. 그리고 멀리 사자를 보내 현종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나라의 기반을 굳혔으니 이른바 ‘하늘이 흥기시키려 한다면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어찌 믿지 않으리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강왕과 한나라의 문제·경제에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고려사] 세가 ‘현종 사평’)

고려 전기의 명재상이자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이름 높은 최충의 사평(史評)이다. 그는 목종 8년(1005년)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때 지공거(知貢擧, 과거시험 집행관)가 최항이었다. 당시에는 과거급제자가 지공거의 문하생이 되어 사제 관계를 맺었다. 이후 최항은 천추태후에 맞서 현종을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현종이 최항을 은사(恩師)로 대우하면서 최충도 탄탄대로를 걸었다. 덕분에 사관이 된 그는 천추태후를 깎아내리고 현종을 찬양하는 사평을 작성한 것이다.

최충은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인용해 “하늘이 흥기시키려 한다면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天將興之誰能廢之)?”라고 평했다. [춘추좌전]은 공자가 편수하고 좌구명이 주석을 단 역사서로, 이 구절은 진(晉)나라 공자 중이가 강력한 진(秦)의 군대를 끌어들여 조카 회공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하는 대목에 나온다. 국권을 찬탈한 사건을 하늘의 뜻이라고 옹호한 것이다. 중이가 춘추오패의 일원인 진문공(晉文公)이니 ‘승자의 역사’를 공인해준 셈이다.

여기에는 강조의 정변과 현종 즉위에 대한 최충의 해석이 투영돼 있다. 왕위 찬탈이지만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반대편에 선 천추태후를 깎아내려야 한다. 그의 사평을 길잡이 삼아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유학자들은 태후를 ‘음란한 반역자’로 매도했다. ‘남존여비(男尊女卑)’를 신봉하고 여인의 정절을 중시한 유학자들에게 여성 통치자이자 사랑꾼이었던 천추태후는 폄훼의 대상이었다. 반면 동생 헌정왕후는 귀한 아들 덕분에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로 추존되고 역사의 꽃가마를 탔다([고려사] 열전 ‘헌정왕후’).

‘몰래 사랑’의 결실인 현종은 고려의 전성기를 열며 제2의 창업자로 평가받았다. 그의 재위기에 거란을 물리치고 북방을 안정시킨 고려는 달콤한 평화 속에 문벌 귀족 사회로 접어들었다. 옛 신라계 가문의 관료와 유학자들은 개경의 잘나가는 문벌 귀족으로 거듭났다.

또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패서 호족의 후예들은 서경을 중심으로 야심을 키웠다. 현종의 아버지가 신라계 왕자 왕욱이고, 어머니가 패서의 왕녀 황보씨이므로 임금의 부계와 모계가 고려의 양대 축을 이룬 것이다. 이 두 세력은 100년 넘게 나라를 지탱하며 경쟁하다가 1135년 묘청의 난으로 정면 충돌하게 된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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