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 정신의 미학(53)] 기호·영남학파 아우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조선 예학 경계를 넓힌 ‘춘풍좌상(봄바람 같은 스승)’ 

송시열과 평생 학문·정치 함께하며 효종의 북벌대계 참여
남인과 예송논쟁 이끈 서인 이론가… 계파 떠나 퇴계 존중


▎후손 송윤진 씨가 종택의 별당인 동춘당 앞에 섰다.
"... 이 무렵 북벌대계(北伐大計, 청나라를 정벌하는 계획)는 은밀히 추진됐으나 김자점 잔당이 우리나라 동향을 밀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효종이 등극한 후 북벌을 도모하여 배청(排淸) 정책을 쓰고 있으며 심지어 청나라 연호조차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 등을 낱낱이 보고한 것이다. 진노한 청 황제는 즉시 군사를 국경에 배치하고 조문사를 일곱차례 보내 위협했다. 조야는 크게 동요했고 큰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도성을 벗어나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효종의 현명한 대처로 일단 수습할 수 있었다. 신명을 바쳐 효종을 도와 북벌의 큰 뜻을 펼치고자 했던 송준길은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너무 원통하였으나 더 이상 조정에 머물 수도 없어 낙향했다….”

6월 19일 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생의 종가를 찾았을 때 후손이 건네준 자료에 소개된 내용이다. 은진송씨 동춘당 문정공(文正公) 종중이 펴낸 ‘동춘당 송준길 행장’이라는 30쪽짜리 소책자다. 인용한 부분은 1649년 인조를 이어 효종(봉림대군)이 즉위한 이후 상황이다. 당시 북벌 정책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효종은 병자호란 등으로 대군 시절부터 강한 복수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는 청에 인질로 끌려가 8년을 보냈다. 또 자신이 그곳의 지리·정세 등에 밝아 즉위와 함께 북벌 의지를 실천으로 옮기려 했다. 방법의 하나가 송준길 등 재야 산림(山林, 학덕을 겸비한 큰 선비) 등용이었다.

북벌을 훼방한 김자점은 누구인가. 그는 인조반정 주역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뒤 송준길이 앞장선 탄핵으로 파직당한다. 앙심을 품은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을 시켜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은 장릉(長陵) 지문(誌文)에 청 대신 명 연호를 쓴 사실을 제보한 것이다.

당시 송준길이 돌아왔을 동춘당을 먼저 둘러보았다. 동춘당은 송준길의 호이자 그가 후학을 양성한 서재의 이름이기도 하다. 동춘당이 상징인 종택은 주변에 시민 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도로 이름은 동춘당로며, 지명은 송촌동(宋村洞)이다. 지금은 개발로 종택 주변이 아파트 숲을 이루지만 일대는 본래 은진 송씨들이 사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종택 오른쪽으로 송촌이란 이름이 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나란히 보였다.

종가는 땅을 파는 굴착기 소리로 요란했다. 문화재청이 행랑채 자리를 발굴 중이다. 사랑채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동춘당 14대 종손(송성진) 대신 동생 송윤진(59)씨를 만났다. 체격이 건장했다. 공주고 시절 야구선수 1루수였다고 한다. 동춘당으로 갔다.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멀찍이 동춘당(보물 제209호)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편액 ‘同春堂’이 눈길을 끈다. 송준길 사후 송시열이 직접 썼다고 한다. ‘봄 같다’는 동춘은 ‘인(仁)을 구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동춘당은 본래 송준길의 아버지인 송이창이 세웠으며, 당의 일부가 허물어지자 송준길이 44세 되던 해 중건한 별당이다. 닫힌 문을 열었다. 나지막한 왼쪽 2칸 온돌방에 오른쪽 4칸이 마루인 선비의 소박한 공간이다. 송시열·김수항·김창흡 등이 쓴 기문이 보였다. 송준길은 여기서 사람을 만나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삶을 마쳤다. 일부에선 ‘노론의 텃밭’으로 부르기도 한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어떤 관계일까. 송준길이 나이가 한 살 많고 같은 은진 송씨로 항렬도 하나 높다. 13촌 숙질 사이다. 옥천 출신 송시열은 8세 무렵 송준길 집에서 함께 수학했고 26세 이후 회덕(대전)으로 옮겨 송준길과 평생 정치와 학문을 함께 했다. 둘 다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율곡 이이를 정점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정맥을 이었다. 성균관 문묘의 동국(東國) 18현(賢)이라는 명예의 전당에도 함께 올랐다. 세상은 이들을 ‘양송(兩宋)’으로 불렀다. 황의동 충남대 교수는 [기호유학 연구]에서 그러나 “동춘당의 위상은 사실 우암에 가려 그의 학문과 정신이 온전하게 파악되지 못한 면이 없지 않다”고 정리한다.

나지막하고 소박한 공간, 동춘당


종중이 엮은 동춘당 행장에는 북벌 이야기가 이어진다. 김자점의 밀고로 조성된 양국 간 긴장이 수습되자 효종은 낙향한 송준길을 다시 진선(進善)으로 임명한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뜻을 같이하며 효종을 도와 은밀한 계획을 추진한다. 경연과 상소를 통해서다. 10만의 소총부대를 양성할 것, 양반의 자녀도 군에 복무토록 하고, 궁중부터 절약하여 국비를 최대한 절약하며 등이다. 자료에는 그가 창안했다는 이불호청 이야기도 나온다. 이불 호청을 가가호호 청홍색으로 물들이도록 권장했다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이불 호청을 뜯어 손쉽게 군복을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군복은 청색과 홍색이었다고 한다. 북벌은 일단 10년 계획이 마련되고 정세에 따라 2~3년 연장으로 밀약 돼 하나씩 진행됐다고 정리돼 있다. 1659년(효종 10) 송준길은 병조판서에 임명된다. 그러나 효종은 직후 갑자기 승하한다. 자료는 이렇게 덧붙였다. “북벌의 대업은 효종의 죽음으로 좌절됐으며 송준길의 분하고 원통한 심중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송준길·송시열의 북벌은 명분에 그쳤나


▎동춘당의 4칸 마루에서 내다본 풍경.
행장은 송준길을 송시열과 함께 대표적인 북벌론자이자 효종의 충신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1657년 송시열은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효종 즉위 이후 8년 북벌 준비에 브레이크를 건다. “주자(朱子)가 처음에는 효종(남송의 효종)에게 금나라를 쳐서 북벌하는 의리를 극진히 말했으나 20년 뒤에는 다시 북벌에 관해 말하지 않고….” 역사학자 이덕일(59)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송시열은 효종에게 북벌을 포기하고 군주는 성리학적 수양에만 힘쓰면 된다는 말을 했다고 강조한다. “송시열은 북벌을 담당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효종의 북벌계획을 발목 잡았을 뿐이다.” 효종은 재위 10년 되던 해 송시열에게 북벌을 다시 촉구한다. 이때 효종은 송시열에게 “내 소견에 송준길은 (북벌을) 담당할 의사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덕일은 “송준길과 송시열의 북벌은 명분이었을 뿐 효종이 북벌을 단행하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려 하면 양민이 중요하다는 논리를 펴며 집요하게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기범 한남대 명예교수는 “송준길은 북벌을 국시로 삼되 당장의 북벌 시행은 불가하며, 민생의 안정을 이룬 후 큰 뜻을 펼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국정 안정에 부심했다”라고 분석한다.

동춘당 뒤로 불천위 송준길을 모신 사당 ‘송씨별묘(宋氏別廟)’가 있었다. 알묘했다. 배위(配位) 신주에는 ‘증정경부인진주정씨’로 적혀 있다. 송준길은 대제학을 지낸 영남학파 정경세의 사위였다. 일제강점기 유학자 하겸진은 [기호의 유학자들]에서 “정경세는 송준길을 한 번 만나보고 그 사람됨을 기특하게 여겨 딸을 시집보냈다”고 적고 있다. 송준길은 당시 김장생에게 수학하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장인 문하도 드나든다. 학맥으로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정치적으로는 서인과 남인의 통혼이다. 동춘당은 그렇게 열려 있었다. 동춘당을 안내한 송윤진 씨는 “지금도 불천위 제사는 밤 12시 반 종가 안채 마루에서 종친회와 함께 올린다”고 말했다. 종가 한쪽에는 가양주 ‘동춘당 국화주’를 빚는 공간이 보였다. 송준길은 기호학파 여러 학자와 교류했다. 또 산림의 영수로 영남의 장현광·정온 등을 방문했다. 동춘당은 특히 학맥을 떠나 퇴계 이황을 매우 존숭했다. 그는 퇴계의 학문적 장점이 정상신밀(精詳愼密)에 있다며 퇴계를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동춘당은 세상을 떠나던 해 꿈속에서 퇴계를 뵙고 ‘기몽(記夢)’이란 시를 남긴다.

평생토록 퇴계 선생 공경해 우러르니/세상 떠나셨어도 그 정신 감통했네/오늘 밤 꿈속에서 가르침 받았는데/깨어 보니 달빛만 창가에 가득하네

동춘당은 조선 성리학이 도학(道學)으로 일반화된 것은 조광조 이후며 주자학을 조선 성리학의 근간으로 세운 것은 이황과 이이로 이해했다. [국역 동춘당집]의 해제를 쓴 이봉규 인하대 교수는 “그는 학문적으로 이황을 가장 존중했지만 이기(理氣) 등 주요 학설은 이이 입장에 섰다”고 분석한다.

송준길은 정치적으로는 김상헌과 그의 자손들 그리고 민유중을 비롯한 여흥 민씨 집안 학자들과 밀접하게 교류해 노론(老論) 세력을 형성한다. 여기서 17세기 당쟁의 한 원인이 된 예송(禮訟)을 들여다보자. 예송이란 왕실 의례 적용을 둘러싼 정파적 논란이다. 예제(禮制)는 성리학 이념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장치였다. 예제 수립은 성리학자의 주요 과제로 받아들여졌다. 송준길은 예송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노론 입장으로 일관한다. 그는 허목·윤휴·윤선도 등 남인(南人) 세력의 비판을 방어하는 이론가 역할을 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상사를 주관한다. 효종의 산릉(山陵)을 수원으로 정하려는 움직임에 군사 전략지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결국 건원릉으로 정한다. 상복(喪服)과 관련해선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장렬왕후(인조 계비)가 1년짜리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선도 등 남인은 3년복으로 맞섰다. 왕통을 계승한 아들을 위해 모후(母后)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의 논쟁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복제 문제가 아니라 효종의 종법적 위상을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의 문제였다. 즉 효종의 정통성과 직결돼 있었다. 조정은 결국 [경국대전]을 근거로 기년복을 받아들였다. 논쟁은 1년 뒤 소상을 전후해 본격 예송으로 발전한다. 이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승자는 송준길이었다. 남인들은 이를 두고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15년 뒤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전세는 역전된다. 동춘당이 세상을 떠난 뒤다. 노론은 실각하고 송시열은 이후 사약을 받는 사태로 이어진다.

동춘당의 학문과 사상이 형성되는 데는 7대조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쌍청당은 일찍이 벼슬에 나갔다가 신덕왕후를 태묘(太廟)에 모시지 않는 것은 의리에 어긋난다며 사퇴한 뒤 회덕 백달촌에 은거한 유학자다. 이 정신이 동춘당의 예학사상으로 피어났다는 것이다. 동춘당 종가를 나와 1㎞ 떨어진 쌍청당에 들렀다. 은진 송씨 대종가다. 건물 입구에 송유와 비슷한 시기를 산 사육신 박팽년이 쌍청당 기문(記文)을 쓴 내력을 적은 안내판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 지어진 쌍청당은 주택 건축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단청이 일품이다. 주변은 절의를 상징하는 배롱나무와 소나무, 대나무 등으로 조경돼 있었다.

1차 예송(禮訟)의 승자가 된 이론가


▎드론으로 촬영한 동춘당 종택. 주변은 아파트가 숲을 이룬다.
쌍청당의 기상을 이어받은 동춘당의 인품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 송시열은 동춘당 ‘유사(遺事)’에서 “사람을 대함에 온화하였다”고 표현했다. 남궁원이 쓴 [동춘당언행록]에는 “선생은 안색이 온화하고 말씀이 즐거우며, 인품이 옥 같고 용모가 마음 같으니 세상이 모두 춘풍좌상(春風座上)이라 했다”고 적혀 있다. 또 카리스마적인 송시열과 달리 동춘당은 “초상화를 남기지 말라”고 했을 만큼 겸손했다. 그러나 동춘당이 온화함만 있지는 않았다. 숙종 시기 대사성을 지낸 김창협은 “일에 임하여 흔들리지 않고 끊기를 칼같이 하신다”고 표현했다.

송준길은 서울 정릉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송준길의 외할아버지 김은휘와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는 친형제 사이다. 아버지 송이창과 김장생은 이이와 송익필, 김계휘 문하에서 같이 수학했으며 매우 가깝게 지냈다. 또 송이창은 경제적으로 넉넉해 송시열 집안이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동춘당은 이렇게 경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쌍청당의 정신은 근대까지 이어진다. 동춘당의 10대 종손으로 이조참판을 지낸 송도순은 문석봉 의진에서 군향관으로 활동하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자결했다. 종손의 동생 송영진 씨는 “이후 종가는 가산이 많이 기울었다”고 덧붙였다.

쌍청당을 나와 갑천을 건너 동춘당이 배향된 대전 유성구 숭현서원(崇賢書院)을 찾았다. 서원 길은 미로에 가까웠다. 전날 대전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서원은 폐쇄를 앞두고 있었다. 현장에 배치된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로 사당에 참배했다. 송인수·김장생·송준길·송시열 등 이 지역 8현을 기리는 공간이다. 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중건된 뒤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지금의 모습은 1994년 발굴에서 송준길이 쓴 묘정비가 나와 그 기록을 토대로 서원을 복원했다고 한다.

친구가 상을 당하면 성복(成服) 전에 달려가


▎송준길의 친필 기몽 시. 1672년 1월 11일 밤 동춘당이 꿈에 퇴계 이황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잠에서 깬 뒤 여운이 남아 그 느낌을 시로 적은 글이다. / 사진:대전시립박물관
송준길은 일생 예학에 주력했다. 일찍이 스승 김장생은 “후일 예학의 종장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김장생이 엮은[의례문해] 절반은 송준길의 질문이다. 그는 특히 영남 예학자인 장인 정경세와 예 문답을 하고 다시 김장생에게 문답하는 방법으로 기호와 영남 예학을 집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예 실천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친구가 상을 당하면 반드시 성복(成服, 상을 당한 뒤 소·대렴을 마치고 상복으로 갈아입는 절차) 전에 달려가 함께 슬퍼하고 상가에 보내는 부의 품목에는 대추·곶감과 함께 황초를 넣어 “이 초로 불을 밝혀 내 정성을 바치길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동춘당 종가의 접빈객 문화는 사라진 듯했다. 송준길은 모나지 않았다. 그는 이이를 종장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적전(嫡傳)이었지만 영남학파의 종장인 퇴계 이황을 흠모했다. 열린 자세로 퇴계의 학문적 성과와 영남 예설을 수용해 기호학파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조선 예학 형성에 기여했다. 그는 17세기 기호와 영남을 잇는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박스기사] ‘양송체(兩宋體)’ 남긴 서예의 대가 송준길 - 조선시대 통틀어 묘비명 글씨 가장 많이 쓴 선비

동춘당 송준길은 서예에서 한호의 석봉체를 이어 양송체(兩宋體)로 불리는 서체를 남겼다. 심영환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 책임 연구원은 ‘동춘당 송준길 필첩의 성격’이라는 글에서 “조선시대 서예는 크게 여말선초의 송설체(松雪體)와 이를 이어 석봉체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며 “양송체는 바로 석봉체를 이으며 조선 중기 서예를 대표한다”고 표현했다. 대전 숭현서원 뜰에 세워진 묘정비의 송준길 글씨는 분명 와 닿는 데가 있었다.

송준길은 어려서부터 글씨 쓰기를 좋아했는데 열 살도 못돼 병자호란 시기 문신을 지낸 이시직이 “네가 나보다 낫다”고 칭찬했을 정도다. 송준길 글씨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이다. 김집은 왕희지의 해서를 깊이 체득해 당시 비석을 세울 때 김집에게 글씨를 받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김집은 훗날 송준길에게 편지로 묘표(墓表, 비석)를 부탁했다. 송준길은 45세에 각자(刻字)를 하기 위해 김집에게 석봉이 쓴 서경덕의 신도비 탁본을 빌려 달라고 한다. 이때 김집은 글씨는 정(精)하게 쓰면 되지 꼭 각자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두 사람이 석봉체의 영향을 받았음을 방증한다. 석봉은 율곡을 사숙한 율곡학파로 분류된다.

송준길은 이렇게 석봉체를 골격으로 삼아 당나라 안진경의 글씨를 녹여내 웅건하고 장중한 무게와 기품을 더한 독특한 글씨체를 확립한다. 송준길은 특히 행초서를 잘 썼는데 유려하면서도 장중함을 더해 예와 부끄러움을 아는 선비 정신을 서예 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서인과 남인은 정쟁이 격화되면서 글씨도 서로 다른 길을 추구한다. 심영환 연구원은 “미수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은 창고주의(蒼古主義)에 입각해 상고시대 서예에 기원을 두었고, 송준길 등 서인은 당대의 정통 흐름을 쫓았다”고 분석한다.

송준길의 글씨는 당시 명필로 소문이 나 비석에 새기는 글씨는 물론 병풍이나 족자 글씨를 써 달라는 주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명성이 자자해지자 왕실도 송준길에게 지문(誌文) 등을 쓰라는 지시를 내린다. 송준길은 차자(箚子)에다 한번은 자기 글씨를 자평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행초(行草)를 주로 써서 해서(楷書)는 그리 잘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송시열은 묘비명을 주로 짓고, 송준길은 묘비명의 글씨를 주로 써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묘비명을 쓴 사람이 됐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2008호 (2020.07.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