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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불혹 선수’ 박용택·이동국의 20년 피날레 

멀지않은 종착역, 아름다운 마무리가 시작된다 

79년생 동갑내기… 야구·축구 둘뿐인 현역
은퇴 후 훌륭한 지도자감으로도 기대 한몸에


▎박용택(LG, 왼쪽 사진)과 이동국(전북 현대)은 프로야구·축구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한다. 각각 신인이던 2002년과 1998년 박용택과 이동국의 모습.
불혹(不惑). 공자는 [논어]에서 나이 마흔이 되면 세상사에 미혹되지 않는다고 했다. 주변에서 어떤 흔들림이 있어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다.

스포츠 선수에 마흔은 ‘끝’에 가깝다. 마흔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끝없이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볼 수 있다. 프로축구 전북 현대 모터스 이동국과 프로야구 LG 트윈스 박용택(이상 41)은 현역 최고령 선수다. 1979년생 동갑내기인 둘은 이제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프로야구 최다 안타 주인공인 박용택은 이미 2018시즌 뒤 올해까지 2년 계약을 맺고, 은퇴를 예고했다. 팀이 한국시리즈에 간다면 앞으로 4개월 정도 더 현역 생활을 할 수 있다. K리그 최다 득점 기록자인 이동국도 이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쯤엔 축구화를 벗을 가능성이 크다. 프로에서 20년 성공을 거둔 이들은 어떤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을까.

라이온 킹, 수퍼맨으로 돌아오다


▎2015년 12월 3일 전북 현대 이동국이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MVP를 수상한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뛴 선수가 많지 않잖아요? 그 정도로 뛰다 보니 축구가 조금 늘었나 봐요.”

프로 23년 차 이동국쯤 돼야 할 수 있는 농담이다. 1998년 포항에서 데뷔한 그는 2020년에도 현역이다. 1979년생 동갑내기 박동혁은 충남 아산 감독이고, 두 살 아래 최태욱은 국가대표팀 코치다. 이동국은 지난해 말 JTBC 예능 [아는 형님]에 나와 “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올해가 형의 마지막 시즌’이다. 그렇게 말한 지 5년 되다 보니 이젠 아무도 안 믿는다”며 웃었다.

사실 이동국의 축구 인생은 굴곡이 심했다. 이동국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전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당시 한국은 0대 5 참패를 당했지만, 열아홉 살 이동국이 날린 중거리 슛 한 방은 팬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겼다. ‘라이온 킹’이란 별명도 얻었다. 공을 향해 달리며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 같다 해서 붙여진 닉네임이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이동국은 시련을 겪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게으른 천재’로 낙인 찍혀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그는 2004년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입대했다. 그곳에서 절실함의 벼랑 끝에 선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만났다. 나태해지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골 감각이 절정이었다. 하지만 이동국은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꿈을 접어야 했다. 2006년부터 잉글랜드 미들즈브러에서 뛰다가 2008년 성남 유니폼을 입고 K리그로 유턴했지만 2골에 그쳤다.

2008년 말 최강희 당시 전북 감독(현 중국 상하이 선화 감독)이 서울의 한 커피숍으로 이동국을 불러냈다. 최 감독은 “구단에서는 ‘양로원을 만들 거냐’고 했지만, 이동국의 눈빛을 보고 재기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난 동국이에게 ‘네가 손을 들지 않으면 (경기에서) 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회고했다.

2009년 전북으로 이적한 이동국은 ‘제3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전북 ‘닥공(닥치고 공격) 축구’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지난해까지 11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고, 7차례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K리그 최우수선수(MVP)도 네 차례 수상했다. K리그 최다 득점(225골)도 경신 중이다. ‘이동국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는 말’까지 나왔다.

돌이켜보면 이동국의 축구 인생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20대에는 안티 팬들의 오해와 편견과 싸웠다. 중요한 순간마다 발목을 잡는 부상과의 싸움도 처절했다. 30대에는 나이와 사투를 벌였다. 40대에도 한물갔다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있다.

‘5남매’가 이동국을 ‘수퍼맨’으로 만들었다. 이동국은 2005년 이수진씨와 결혼해 쌍둥이 딸 재시·재아(13), 설아·수아(7), 막내아들 시안(6)을 두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5남매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그에게 가족은 활력의 원천이다. 그는 “아빠는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사람이란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골을 넣고 수퍼맨이 날아오르는 포즈를 취한 적이 있다. 그는 “아빠라면 누구나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진 남자’가 되고 싶어한다. 나도 항상 수퍼맨이 돼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도 큰 힘이다. 이수진씨는 이동국이 시련에 부딪히면 “우리 영화를 찍고 있다고 생각하자. 엔딩이 중요하니 마지막에 꼭 웃자”고 위로해줬고, 요즘에는 “지금 이 나이에 선수로 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고 말해준다.

“진짜 상상도 못했죠. 몇 번은 더 갈 줄 알았다니까요.” 지난 시즌 뒤 만난 박용택에게 건넨 첫 번째 질문은 “한국시리즈에 이렇게 오래 못 진출할 줄 알았느냐”였다.

박용택은 2002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이 이끈 LG는 정규시즌 4위에 머물렀지만 현대 유니콘스와 KIA 타이거즈를 차례로 물리치고, 한국시리즈(KS)에 진출했다. 하지만 KS에서 삼성에 2승 4패로 밀려 아쉽게도 우승에 실패했다. 당시 신인이었던 박용택은 데뷔하자마자 큰 무대를 밟았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박용택은 “6차전에서 지고 나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공·수·주 삼박자를 갖춘 야수였던 박용택은 데뷔하자마자 주전으로 활약했다. 지난해까지 통산 안타 2439개를 쳐 프로야구 역대 안타 1위에 올랐다. 한 팀에서만 19년을 뛰면서 세운 기록이다. 박용택은 팬 서비스가 좋기로도 유명하다. 2011년부터 연탄 봉사를 하는 등 사회공헌활동에 앞장서 사랑의 골든글러브를 2번이나 수상하기도 했다.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깨 부상이 심각해져 송구 능력이 떨어졌을 땐 그를 ‘소녀 어깨’라고 비웃는 이들도 있었다. 2009년 홍성흔(당시 롯데)과 타격왕 경쟁 사건도 있다. LG는 롯데와의 경기에서 홍성흔을 일부러 4번이나 볼넷으로 내보냈고, 박용택은 출전하지 않고 타율을 관리해 1위에 올랐다. 박용택은 이후 “내 생각이 짧았다”고 후회했다.

‘우승택’을 꿈꾸는 19년 차 간디택


▎LG 박용택이 2018년 7월 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NC전에 앞서 개인 통산 최다 안타 신기록 달성 기념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다.
그런 그가 이제 배트를 내려놓는다. 지난해 LG와 2년 계약을 맺은 박용택은 “2020시즌 뒤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1990년 야구를 시작한 지 30주년인 올해 은퇴한다. 박용택은 “선수 생활을 이렇게 오래 하면서 우승도 못하고 마지막 시즌을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아쉬워했다.

누구보다 많은 안타를 때린 건 수많은 연습과 시행착오 덕분이다. 원정 길에 버스가 휴게소에 섰을 때 배트를 휘둘렀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박용택이 쉬는 날 즐기는 취미는 ‘야동(야구 동영상)’ 보기다. 프로 초창기엔 다리를 드는 레그킥 타격폼을 쓰기도 했던 박용택은 최근엔 다리를 거의 들지 않는다. 박용택은 “상황과 투수에 따라 타이밍을 맞추는 방법을 늘 연구한다”고 했다.

지난 6월 부상으로 1군에서 제외되기 전까지 기록한 올 시즌 타율은 0.317(8월 12일 현재). 그는 수십, 수백 가지 폼을 시험하면서 상황에 맞는 타법을 구사한다. 지난 3월 오키나와 전지훈련 당시 LG 캠프에서 가장 먼저 나와 스윙 연습을 하던 선수도 박용택이었다.

박용택은 후배들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포수 유강남(28)이 대표적인 멘티다. 띠동갑에 가까운 후배지만 유강남은 군에서 전역한 2016년부터 박용택을 따라다니며 타격 기술을 흡수했다.

그 결과 지금은 KBO리그를 대표하는 공격형 포수로 성장했다.

올해는 ‘최고령 제자’도 배출했다. 포수 이성우(38)다. 지난해 LG에 합류한 이성우는 데뷔 후 처음으로 3할대 타율을 기록 중이다. 지난해까진 12년 동안 홈런 4개를 쳤는데 올해는 벌써 3개를 날렸다. 이성우는 “용택 형 덕분에 달라졌다. 나는 수비가 중요한 백업 포수라 타격코치님들이 나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용택 형이 하체 회전을 활용한 스윙을 알려줬다”고 했다.

한국에서 별명이 가장 많은 야구 선수는 박용택이다. 오랜 기간 활약해서 붙은 ‘꾸준택’, 콧수염과 안경 때문에 인상이 닮았다고 ‘간디택’, ‘가을야구 할 테니 유광점퍼 사도 좋다’고 말해서 생긴 ‘점퍼택’ 등 어림잡아 100가지도 넘는다. 올 시즌 은퇴를 앞둔 박용택이 희망하는 별명은 ‘우승택’이다.

올 시즌 LG는 선두 NC 다이노스와는 다소 격차가 있지만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박용택은 “(올해가) 가장 우승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솔직히 지난해는 우승할 팀이라고 얘기하기 어려웠지만 올해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타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배트 스피드, 힘, 그리고 144경기를 치를 수 있는 체력이다. 베테랑들이 갈수록 살아남기 힘든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필요한 것, 바로 ‘멘털’이다. 스윙은 아주 짧은 순간 이뤄지지만 집중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선 정신적인 힘이 필요하다. 박용택은 30대가 된 뒤부터 이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박용택은 “마음이 100이라면 30의 긴장감, 그리고 70의 여유가 조화를 이룰 때 좋은 타격이 이뤄진다”고 했다. 스윙은 연습을 통해 고칠 수 있지만, 멘털은 그렇지 않다. 박용택이 선택한 방법은 생각, 그리고 책이다. 박용택은 틈날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는 책들을 읽는다. 평소엔 말이 많아 ‘투 머치 토커’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경기 직전엔 최대한 말을 아끼며 집중한다.

남다른 멘털과 휴식…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


▎전북 현대 이동국의 가족. 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재아·재시, 이동국, 설아·시안·수아, 부인 이수진씨.
박용택은 지난 6월 23일 잠실 키움 히어로즈전에서 0대 0이던 1회 말 2루 베이스 쪽으로 느린 타구를 굴렸다. 2사 1·3루였기 때문에 내야안타가 된다면 득점할 수 있었다. 유격수 김하성이 뛰어들어오며 공을 잡아 1루로 던졌지만 전력질주한 박용택의 발이 더 빨랐다. 세이프. 팀에는 귀중한 선제점을 안긴 박용택의 2478번째 안타였다.

하지만 박용택은 베이스를 밟은 뒤 쓰러졌다. 오른 햄스트링 부상으로 4주 진단을 받았다. “올해는 무조건 건강이 제일이다. 지난해(64경기)보다 더 많은 경기를 뛰기 위해 5㎏을 감량했다”던 바람이 빗나갔다. 하지만 타구 하나, 플레이 하나에 충실했던 그를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예상보다 공백 기간은 길었지만 박용택은 돌아왔다. 7월 30일 퓨처스(2군) 경기에 처음 출전하면서 몸 상태를 끌어올렸다. 드디어 1군에 합류한 박용택은 곧 프로야구 최초로 2500안타를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치열한 상위권 싸움을 펼치는 팀에도 큰 힘이다.

이동국 역시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강희 감독은 “(이)동국이는 불가사의다. 40대인데도 풀 타임을 뛰어도 다음 날 피부가 뽀송뽀송하다”며 회복 능력에 감탄했다. 이동국은 1998년 이후 쭉 몸무게 80㎏ 대, 허벅지 둘레 25~26인치를 유지한다. 어지간한 걸그룹 멤버 허리보다 굵다. 이동국은 “고교 시절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1시간 걸려 통학했다. 종아리 근육을 다지기 위해 버스에서도 선 채로 발뒤꿈치를 들어 땅에 닿지 않게 버텼다”고 말했다.

오래 뛰는 비결을 물으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라고 대답한다. 그는 매일 8~11시간 자고, 뭐든 잘 먹는다. 팀 연고지인 전주의 오리백숙이나 부대찌개 식당에는 그의 사인이 걸려 있다. 기분전환을 위한 맥주 한 잔은 마다치 않는다. 가족여행도 자주 간다. 지난해 말에는 버킷리스트대로 미국 마이애미의 해변에서 음악을 들으며 조깅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서일까. 웬만한 일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는 “인생에서 축구는 그저 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쉬는 날에는 큰딸인 재아와 테니스를 하거나 따로 골프를 친다. 지난해 5월 축구인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부상을 딛고 부활한 타이거우즈(45). 이동국은 “우즈를 보면 찡하다. 남들이 다 등돌려도 자기만의 길을 걸어갔다”고 말했다. 이동국의 습관 중 하나는 득점 장면을 반복해 보는 거다. 그는 ‘몸은 골 넣은 느낌을 기억한다’고 믿는다.

2000년 전후 이동국의 국가대표 경기 사진을 보면 대부분 무릎에 테이핑하고 있다. 당시 그는 무릎 인대를 다친 상황에서도 청소년팀부터 올림픽팀, 국가대표팀 소집에 모두 응했다. 40대쯤 되니 언제, 어떻게 조절하면서 뛰어야 할지 노하우가 생겼다.

박용택이 은퇴 시기를 미리 정한 건 야구를 더 잘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2018년 39세의 나이에 최다 안타 기록을 세웠지만 박용택은 자신이 정점에 올랐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LG와 FA 계약을 하면서 은퇴 시기를 못 박았다. 박용택은 “이 정도 야구를 했으면 은퇴 시기는 내가 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2년 더 현역으로 뛰면 개인적으로나 팀에 괜찮을 것 같더라”고 설명했다.

야구계에선 박용택의 향후 진로에 대한 관심이 많다. 한 방송사 아나운서는 “박용택의 입담과 야구관이라면 해설위원으로 무조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차명석 LG 단장은 “당장 코치를 하는 것보다는 연수를 다녀오거나 스카우트 등 다른 업무를 맡게 할 생각이다. 물론 해외 연수를 간다면 구단이 지원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다시 태어나도 야구는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박용택은 “은퇴 이후 야구계를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용택은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내가 야구계에 가장 도움이 되는 걸 하고 싶다. 아직은 결정하지 못했지만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하려고 한다”고 했다.

박용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배인 (이)병규 형이 지금 1군 타격코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코치를 하더라도 당장은 (LG 1군 코치는) 못할 것 같다”며 웃었다.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 팬이었고, 서울에서 자라 LG에서만 19년을 뛴 박용택이 지도자가 된다면 당연히 LG 줄무늬 유니폼을 입을 것이다.

타격코치 박용택, 수석코치 이동국?


▎2005년 12월 10일에 결혼식을 올린 LG 박용택-한진영 커플.
이동국은 올 시즌도 4골을 기록 중이다. 하지만 현재는 전북 클럽하우스에서 재활 중이다. 7월 중순 무릎 내측 인대를 다쳤다. 부상 당시만 해도 ‘복귀까지 최대 2달이 걸리거나, 시즌아웃될 수도 있다’는 예상이 나왔다. 하지만 이동국은 엄청난 회복속도를 보인다. 이르면 8월 말 복귀할 수도 있다.

이동국은 월간중앙과의 전화 통화에서 “부상을 한 지 3주가 좀 지났다. 검사에서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며 “숙소에 좋은 치료 장비가 많이 있어 순조롭게 재활을 잘하고 있다. 몸 상태를 하루빨리 올려 8월 말이나 9월 초 복귀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북에서 함께 뛰었던 이재성(홀슈타인 킬)은 “동국이 형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드렸다”면서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초인적인 회복능력을 지녔다”고 말했다. 이에 이동국은 “개인적으로 아픈 걸 잘 참는 스타일”이라며 웃은 뒤 “노하우가 있기보다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부상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하루하루 즐겁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전북은 K리그1에서 울산 현대와 치열한 선두 싸움을 펼치고 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에도 도전한다. 이동국은 “선수층이 두꺼워야 한다. 최대한 빨리 컨디션을 끌어올려 경기에 나서지 못한 부분을 채우고 싶다”며 “팬들이 원하는 목표를 함께 이루고 싶다”고 했다.

이동국은 시즌 중이던 지난 6월 AFC A급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지도자 교육을 위해 K리그 2경기도 빠졌다. 당시 “매 시즌 은퇴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먼 미래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최근 몇 년간 한결같이 “감독이 원하고, 또 내 스스로 경기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느낄 때까지만 (선수로) 뛰려고 한다”고 말해왔다.

이동국은 자신의 미래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지도자 이동국’을 크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만일 된다면 선수들과 소통을 가장 우선시하고 싶다.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한 인정해주고 잠재된 능력을 끌어 올려줄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선수 생활을 길게 하고 인생의 굴곡도 적지 않아 훗날 감독이 된다면 해줄 얘기가 많을 것 같다.”

- 김효경·박린 중앙일보 기자 kaypubb@joongang.co.kr

202009호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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