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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9)] 남쪽 백성 이주 ‘사민정책’과 항구적 국경 방어망 

조선의 북방, 누구도 넘볼 수 없게 하다 

일관된 왕의 의지, 김종서·신개 등 인재 적재적소 활용해 실현
이주민 생계·의료·교육 전방위 지원… 훗날 과거 급제자 쏟아져


▎세종은 조정의 반대와 백성의 불만에도 사민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성공했다.
세종은 사민 정책을 설계해 백성을 함경도와 평안도로 옮겼다. 역사기록에서는 그들을 ‘입거인(入居人)’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주를 자원하는 백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주로 죄인과 그 가족을 들여보내는 강제 이민이 대다수였다. 강요된 ‘내부 식민’ 활동이었다.

유럽 역사를 읽어보면 중세 가톨릭 교회와 봉건 제후들이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오지를 개발했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자취가 남아 있다. 고려 때도 여진족 침략을 막기 위해 남부지방 백성을 함경도 영흥과 평안도 평양 이북으로 이주시킨 적이 있었단다. 세종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은 대대로 살던 땅에 편히 살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를 싫어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본성(常情)이니라.”(세종 24년 1월 10일) 왕은 이주하는 백성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면서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정책을 전개했다. 따지고 보면, 세종의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도 ‘입거인’의 후손이었다. 이성계의 고조부가 고향 전주(전라도)를 떠나 함흥(함경도)으로 이주했던 것. [용비어천가]에 펼쳐진 화려한 영웅담을 걷어내고 보면, 그들의 힘겨웠던 이주 역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사민 정책의 핵심은 4가지로 줄일 수 있다. 먼저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한 항구적인 방어망 구축이다. 그 당시 여진족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수시로 건너오며 우리를 괴롭혔다. 새로 얻은 국경 지역에 백성을 많이 살게 해 효율적으로 방어해야 했다.

사민 정책은 쉽지 않은 정책이었다. 특히 취약지역인 함경도의 개척은 어려웠다. 유능한 문신 김종서를 파견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김종서가 자리를 비운 조정에도 왕을 뒷받침할 신하가 필요했다. 왕은 신개를 최적의 인물로 판단해, 그를 고위직에 기용했다. 적절한 인사정책이 있었기에 사민 정책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다.

일관된 정책 추진도 성공에 한몫했다. 왕은 이 정책이 단기간에 승부가 나기 어렵다는 점도 충분히 인식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차근차근 밀고 나갔다. 세종은 이 정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고 조선 왕조도 장기간 이 정책을 유지했다.

백성에게 세제상 특혜를 줬고,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술도 보급했다. 의료 시설도 정비했고, 학교도 지었다. 이처럼 세종은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실질적인 혜택을 줌으로써 그들을 격려했다.

부왕 태종이 시작한 정책 계승해 확대


▎세종 시대에 개척한 4군 6진을 지키기 위해 왕은 사민 정책을 실행했다.
왕의 사민 정책은 부왕 태종의 사업을 계승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태종은 경원(함경도) 지방을 개척할 때 도내 인적 자원을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태종 17년(1417) 가을, 왕은 도내에서 백성 1000호를 징발해 경원으로 옮겼다. 이주를 원하는 300~400호도 보냈다. (태종 17년 9월 15일) 세종은 부왕의 정책을 토대로 더욱 체계적인 사민 정책을 실행했다. 그때 북방의 여진족은 온 나라의 골칫거리였다. 여진족은 한반도 북부를 틈만 나면 쳐들어와 식량을 요구하고 눌러앉았다. (세종 7년 1월 20일)

고심 끝에 세종은 사민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할 생각을 품었다. 이런 결심을 굳힌 것은 재위 10년(1428)경이었다. 그는 우선 평안도 변경(邊境) 지방을 대상으로 사민 정책을 펴려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세종 11년(1429) 가을, 왕은 의정부 대신들에게 물었다. “남부지방(하삼도, 한양 남쪽에 위치한 충청·전라·경상도)의 백성을 평안도로 옮겨 여진족 침략에 대비하고 싶다. 원망과 비판의 목소리가 클까 염려돼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의정 맹사성은 우회적으로 반대하며, 범죄자를 이주 대상으로 삼자고 했다. 병조 판서 최윤덕도 백성을 강제로 옮기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세종 11년 8월 21일)

그런데 변방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지혜로운 한 선비가 함경도(함길도) 관찰사에 임명되자, 그는 절박한 현지 사정을 아뢰었다. 적의 기습이 염려되기 때문에, 15세 이상의 장정은 밭을 갈거나 땔나무를 구하러 나갈 때도 활과 화살을 휴대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훈련된 군사가 부족했고 코앞에 있는 적이 언제 어디서 공격을 가할지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세종 16년 4월 26일) 왕은 쓸 만한 장수를 모두 북쪽으로 보내 수비태세를 갖추게 했으나 마음을 놓지 못했다. 사민 정책과 같은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세종이 다짐한 이유였다.

결단을 내렸다. 침략에 취약한 함경도로 총애하는 신하 김종서를 파견했다. 수년간 세종 곁에서 승지로 활동했던 김종서는 왕의 의중을 잘 파악했던 신하 중 하나였다. 그는 체구도 작고 무술을 배운 적도 없었다. 그러나 워낙 주도면밀하고 굳센 성격의 재사였다. 세종 15년(1433) 12월 9일, 김종서는 관찰사로 임명돼 함경도로 떠났다.

왕은 그에게 웬만한 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김종서는 함경도에 도착하기 무섭게 몇 가지 중요한 계획을 작성해 왕에게 보고했다. 첫째, 도내 2200호의 백성을 골고루 차출해, 전략상 요충인 경원부와 영북진(부령)으로 이주시키겠다고 했다. (세종 16년 1월 6일) 그리하여 체구도 건장하고 용감한 청년들이 요지를 방어했다.

둘째, 김종서는 경원부, 영북진의 성벽도 새로 쌓겠다고 보고했다. 왕은 이 작업에 6100명의 장정을 동원하게 했고, 부족한 식량 6000석도 지원했다. 셋째, 김종서는 현지인을 그곳의 벼슬에 임명하는 ‘토관직’ 제도를 설치하자고 건의했다. 조정 대신들은 관직을 함부로 주면 안 된다며 이 제도에 반대했지만 세종은 김종서의 제안에 찬성하며 이렇게 말했다. “토관을 임명해 백성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이 급선무다. 김종서가 건의한 벼슬자리를 단 한 개도 줄이지 말라.”(세종 16년 1월 6일)

김종서가 함경도에 도착한 뒤로, 세종은 자신이 꿈꿔온 사민 정책을 하나씩 펼쳤다. 여러 해가 지난 다음, 김종서는 왕에게 올린 글에서 그 시절을 회상했다. “갑인년(세종 16년, 1434) 봄, 저는 수만 명의 백성을 수개월 동안에 걸쳐 변경으로 옮겼습니다. 풀밭을 전답으로 바꿔 백성의 식량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회령과 경원 및 경흥에 성을 쌓았고, 여러 지역에 작은 보루(小堡)도 만들어 변경을 지켰습니다.” (세종 22년 1월 17일) 김종서가 이런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가자 김종서에 대한 백성의 불만이 커졌다. 변경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누구보다 법을 엄격히 집행하면서 김종서를 원망하는 병사와 백성이 점점 많아진 것이다. “백성들이 변경으로 이주할 때 어디선가 헛소문을 듣고 신(김종서)을 원망하옵니다.” 김종서 자신조차 이런 식으로 왕에게 하소연했다. (세종 22년 1월 17일)

궁궐에는 김종서를 비판하는 관리도 있었다. 여진족 추장 홀라온이 김종서의 기생첩(愛妓)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둥, 김종서가 원칙도 없이 백성들에게 경작지를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했다는 둥 그의 불법과 비행을 고발하는 이가 있었다.

왕의 믿음 속에 강력한 실행력 보여준 김종서


▎세종은 김종서를 보내 6진을 개척하고 두만강 북쪽의 공험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6진 지도.
김종서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세종은 깊이 우려하였다. 오랜 생각 끝에 왕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무고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종서의 공이 크다. 경은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김종서를 위로했다. (세종 22년 1월 17일)

얼마 후에는 김종서에게 다시 글을 보내 그의 과실을 조용히 타일렀다. “우리가 오랑캐보다 병력도 많고 세력도 월등히 강해서 마음대로 쉽게 제압할 수 있다면 여진족을 엄하게 다뤄도 좋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하지 못하다면 적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이 도리어 낫겠다.”(세종 22년 7월 19일) 김종서의 용기와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가 유연하지 못한 점을 걱정했던 것이다.

파견 7년 만에 왕은 그를 서울로 돌아오게 했다. 그의 노고를 칭찬했고, 이후 변경에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그의 의견부터 물었다. 사민 정책이 성과를 내려면 김종서의 풍부한 현지 경험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왕의 판단이었다. 세종 28년(1446) 초봄, 왕은 최북단인 6진(당시는 5진)에 백성을 계속 들여보낼지 잠시 망설였다. 그때 김종서는 그곳은 이미 인구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과거에 함경도에서 근무한 정갑손(예조판서)도 불러서 의견을 청취했다. 현지 사정을 충분히 검증한 다음, 이후 이주하는 백성은 용성(청진)과 경성 이남에만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세종 28년 2월 11일)

왕은 매사에 신중하고 엄격한 김종서를 함경도 관찰사로 보내 사민 정책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하여 강병도 양성하고 성도 쌓아 국방력은 점점 충실해졌다. 그러나 김종서의 단점이 부작용을 낳기 시작하자, 그를 조정에 귀환하게 해서 정책을 측면 지원하게 하였다.

현장에 김종서가 있었다면 조정에는 신개가 사민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세종 18년(1436)부터 신개는 왕의 측근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왕은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자신의 깊숙한 ‘사적 공간(內殿)’으로 신개를 불러들여 논의하기도 했다.

신개가 왕의 눈에 들었던 때는 세종 15년(1433)이었다. 왕은 여진족을 무력으로 응징하려 했으나 대신들이 모두 반대했다. 신개는 달랐다. 그는 여진족을 정벌하자며 상세한 토벌 계획서를 작성해서 올렸다. 그때부터 세종은 그의 능력을 믿고 중용했다.

[세종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은 신개를 질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아부를 일삼아 사민 정책과 세제 개혁(공법) 등 백성에게 불편한 정책을 건의했다고 거세게 비판했다. (세종 28년 1월 5일) 실록 기사라고 무조건 맹신하면 곤란하다. 신개는 10년 동안 의정부 대신으로서 세종이 궁리한 여러 정책을 헌신적으로 뒷받침했다. 훗날 그는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돼 군신의 의리는 사후까지 이어졌다.

남쪽 백성을 함경도로 옮기는 일은 세종 19년(1437)에 시작됐다. 신개가 의정부 대신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사민 정책의 배경에는 남부의 과도한 인구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세종 24년 2월 6일) 북으로 떠나는 이주민 행렬은 매년 계속됐다. 평범한 백성만 아니라 행정을 담당할 향리들도 이주했다. 향리와 그 가족이 5400명이나 함경도로 들어간 적도 있었다. (세종 20년 7월 25일) 해마다 조정에서는 함경도로 이주할 백성을 지역별로 할당했다. 예컨대 세종 24년 가을에는 이듬해에 함경도로 갈 백성 750호를 경상도에서 350호,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각각 200호씩 등과 같이 정했다.

조정서 헌신적으로 정책 뒷받침한 신개


▎세종시 장군면에 있는 김종서 장군 묘.
그런데 하필 그해 함경도에 흉년이 드는 바람에 이주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대신 신개 등은 이주민 수를 대폭 줄여, 경상도에서 100호,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는 각각 50호씩만 들여보내자고 건의했다. 왕은 그들의 제안을 허락했다. 세종 24년 9월 5일 실록을 보면 그 무렵 해마다 700~3000호, 즉 3000명에서 1만2000명쯤이 북쪽으로 떠났다. 세종 재위 기간 해마다 1만 명씩, 총 15만여 명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누구를 보낼지도 중요한 문제였다. 세종 20년(1438) 겨울, 사간원에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토호들, 특히 도덕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양반을 강제 이민에 포함하자고 했다. 세종은 비현실적인 제안이라며 비판했다. (세종 20년 11월 23일) 그러나 시일이 좀 흐르자 왕도 생각이 바뀌었다. 결국은 범죄를 저지른 향리와 관리를 북으로 보내기에 이르렀다. 가령 세종24년(1442) 겨울, 천안(충청도)의 어느 양반이 지방관에게 대놓고 욕설을 퍼붓자 그와 그 가족을 모두 함경도 경원으로 이주시켰다. (세종 24년 10월 8일) 한편, 신개 등 의정부 대신들은 시골의 서리와 향리 중에도 토지대장을 속여서 세금을 도둑질한 사람이 많다며, 그들 일가를 함경도로 보내자고 했다. 왕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세종 27년 7월 24일) 이 같은 강제 이주 규칙은 훗날 [경국대전]에 명시됐다.

사민 정책은 함경도에서 시작해 평안도로 확대됐다. 신개 등이 주장한 것이었다. 세종 24년(1442) 봄, 그들은 3000호를 평안도로 보내자며 왕의 허락을 구했다. 되도록 잘 사는 백성으로 고르되, 1차로 황해도에서 550호, 충청도에서 630호, 전라도에서 820호, 그리고 경상도에 1000호를 선발하기로 했다. (세종 24년 2월 6일)

물론 저항하는 백성도 많았다. 개령(경상도 김천)의 향리였던 임무는 강제 이주를 반대하며 자해(自害)하는 등 극단적인 모습도 보였다. 팔뚝을 끊은 그는 스스로 장애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무척 측은하게 여기노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세종 19년 1월 4일) 그러면서도 그런 불상사로 사민 정책을 중단하거나, 당사자를 이주대상에서 제외하지는 않았다. (세종 26년 윤7월 18일)

백성의 저항은 오래 지속됐다. 세종 28년(1446) 초여름, 사간원에서는 강제 이주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농사도 짓지 않은 채 탄식하며 억울해한다며, 이 정책을 폐지해 민심을 위로하라고 요청했다. (세종 28년 4월 30일) 그러나 왕은 요지부동이었다.

도망치고 자해하는 백성도… 예외없이 이주시켜


▎세종 때 간행한 ‘농사직설’.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기록한 책으로 이후 수많은 농서의 기본이 됐다.
북방으로 이주했으나 도망친 백성도 많았다. 세종 25년(1443) 4월, 대신 황보인이 평안도를 둘러보고 대궐로 돌아왔다. 그는 아뢰기를, 바닷가 백성 중에 도망친 사람이 591호나 된다고 했다. 본래 그곳에 살던 백성인데도 도망친 사람이 321호요, 이주민 중에서 달아난 사람은 270호라고 보고했다. (세종 25년 4월 14일) 그럴 때마다 세종은 그들을 붙잡아서 북방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명했다.

심지어 여진족에게 투항한 백성도 있었다. 초반에는 함경도 근처 국경에 4진을 설치했고, 나중에는 5진, 6진으로 확대 개편했다. 그곳으로 이주한 사람 중에는 힘든 노역을 피해 여진족에게 투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종은 백성의 고통을 헤아려 너그러이 용서했다. 그러나 세종 28년(1446) 봄부터는 처벌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투항했다가 붙들리면 목을 베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세종 27년 12월 8일) 그러나 백성의 생명을 존중하는 왕이라 그들조차 마구 처벌하지 않았다.

세종은 이주민을 위한 대책도 다양하게 세웠다. 세종 22년(1440) 봄, 왕은 박근을 평안도로 보내 현지 사정을 조사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주민 생계대책을 마련했다. 그곳에 살던 원주민의 좋은 밭(숙전, 熟田)을 떼어 이주민에게 제공하자는 주장이었다. 인구에 비하면 해마다 경작할 수 있는 좋은 밭이 많았다. 이에 좋은 밭 10결 이상을 소유한 농가는 3결을 바치게 해 그것을 이주민에게 나눠주자는 것이었다. (세종 22년 3월 3일) 북방 이주민을 부유한 자영농으로 양성하려는 계획이었다.

북쪽 변방의 군인과 백성에게 왕은 의료 혜택을 골고루 제공했다. 세종 17년(1435) 김종서가 함경도의 열악한 의료 상황을 알리자, 의학 교수(敎諭)를 선발해 현지로 내려보냈다. 이로써 의료인(醫生)도 양성하고, 그곳에서 자라는 약재도 적당한 시기에 채취하게 했다. (세종 17년 9월 25일)

백성의 생업인 농업을 힘써 권장한 것은 물론이다. 함경도와 평안도의 백성은 농업에 서툴렀다고 한다. 그 점을 근심한 왕은 북방의 관리에게는 농사 현황을 더욱 자세히 물었고, 농업 서적도 나눠줬다. (세종 10년 윤4월 11일) 그런 과정에서 최초의 농업 서적인 [농사직설(農事直說)]이 탄생했다. (세종 10년 7월 13일) 이로써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이 중부에서 북부로 차츰 올라갔다.

그러나 왕은 서두르지 않았다. 세종 19년(1437) 봄, 함경도와 평안도의 관찰사에게 특명을 내려 [농사직설]을 친절하게 가르치라고 말하면서도, 백성을 함부로 억누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달래라고 당부했다. (세종 19년 2월 15일)

이주민 가운데는 고향에서 양반으로 지내던 사람도 많았다. 왕은 그들이 한꺼번에 고향과 지위를 잃고 낙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세종 24년(1442), 세종은 신개 등에게 명하여, 이주민 가운데서 원래 관직에 종사한 사람을 찾아서 그 품계를 높여 주라고 했다. 관직이 전혀 없었던 이라도 처음 벼슬에 나갈 때는 특별히 8품직에 임명하라고 부탁했다. 왕은 고향에서 쫓겨난 양반까지도 위로한 것이었다. 조정 대신 중에는 왕이 벼슬을 이용해 민심을 유혹한다며 은근히 비웃는 이들도 있었으나, 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종 24년 1월 10일) 나라의 먼 장래를 생각해서 시작한 사민 정책인 만큼,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가며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백성 억누르지 말고 천천히 달래라고 당부


▎사민 정책으로 북으로 이주한 전주김씨 가문은 시간이 지나 과거에 합격한 인재를 배출했다. 평양의 전주김씨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조상이다. 사진은 전북 완주군 모악산에 자리한 전주 김씨 시조 묘.
세종은 변경 지역인 회령과 종성 및 공성(경흥)에도 향교를 두었다. 특히 경원과 회령에는 교육을 전담할 교원(敎導)도 파견했다. (세종 19년 7월 17일) 어디에 살든 학문에 힘쓰면 반드시 출세할 기회를 보장하겠다는 강력한 왕의 의지였다.

이처럼 여러 면으로 세종은 북쪽으로 이주한 백성들을 보살폈다. 단기적으로 보면 백성의 마음을 잠시 위로하는 데 그쳤을 것도 같으나, 장기적으로 상당한 효과를 얻은 통치술이었다. 북으로 간 백성들의 생계는 점차 안정됐고, 그 지역의 농업 생산력도 높아졌다. 그러자 여진족들도 우리 영토를 함부로 넘보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18세기에 이르러 서북지방에서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평양의 전주김씨(김정은 조상)와 정주의 수원백씨(시인 백석의 조상) 등이 대표적이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우리와 중국의 국경선도 완전히 고정됐다. 또, 조선 8도의 백성들이 언어와 풍습뿐만 아니라 혈통 상으로도 혼연일체가 됐다. 이것은 모두 세종이 시작한 사민 정책이 성공한 결과였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09호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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