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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54)] 도덕국가 꿈, 시대를 앞선 개혁가 정암(靜菴) 조광조 

“어버이 사랑하듯 임금 사랑, 집 걱정하듯 나라 걱정했네” 

17세에 김굉필 만나 도학의 길… 중종반정 뒤 급진 정치 개혁
기득권 세력 반격에 좌절됐지만 조선 사림 사표(師表)로 추앙


▎정암의 후손 조선경·조병성(왼쪽)씨와 심곡서원 이건술(가운데) 원장이 서원 외삼문 앞에 섰다.
골짜기는 도심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산자락 아닌 곳은 어김없이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널찍한 도로에 상가가 보였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심곡서원(深谷書院) 주변이다. 심곡서원을 찾은 날은 7월 21일. 음력으로 6월 초하루다. 가급적 그날 방문해 달라는 서원 측 요청을 받고서다. 초하루는 분향(焚香) 의례가 있는 날이다. 서원에 운영진 등 10여 명이 모였다. 심곡서원 이건술 원장을 만났다. 차례로 인사하는데 “그 사람은 정암 선생 명예 지키려고 광화문에서 시위했다”는 말이 들렸다. 서원 장의(掌議)로 있는 진용옥 경희대 명예교수를 두고서다. 심곡서원은 바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선생의 위패를 모신 유림의 추모 공간이다. 정암 선생은 관직에 나아간 뒤 걸어간 길 때문에 개혁이 화두가 되면 한 번씩 후세에 거론된다. 선생은 본래 도학적 이상 사회를 실현하려 했던 선비였다. 정암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오현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는다.

오전 11시, 서원 사우(祠宇, 사당) 앞에 돗자리를 깔고 분향례가 시작됐다. 향을 사르고 위패 등을 살피는 의식이다. 함께 알묘했다. 위패에는 ‘贈領議政文正公靜菴趙先生神位(증영의정문정공정암조선생신위)’라 쓰여 있었다. 위패 뒤 작은 커튼을 걷자 눈에 익은 선생의 전신상 초상화가 나타났다. 사우에는 오른쪽으로 위패 하나가 더 있었다. 학포 양팽손이다. 정암이 유배지 전라도 능주(화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시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때 시신을 수습하고 용인으로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한 지기(知己)다. 학포는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를 지내다 파직된 뒤 당시 고향 능주에 머물며 정암과 말벗이 되었다. 정암은 1519년(중종 14) 38세에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모함으로 사사(賜死)된다. 선생의 마지막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전하며 [정암집(靜菴集)] ‘어류(語類)’ 편에 실려 있다. “금부도사 류엄이 왕명을 받들고 오자, 선생은 뜰에 내려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묻는다. ‘상의 안후가 어떠한가?’ (…) 또 묻는다. ‘조정에서 우리를 어떻게 여기던가?’ 류엄은 ‘왕망(王莽)의 일로써 말하는 자가 있는 듯합니다’ 하고 답한다. 선생은 웃었다. ‘왕망은 사사를 위한 자이거늘, 명이로다. 죽을 따름이라 (…) 내가 편지를 써서 집에 보내고 또 분부할 게 있으니, 처치를 마친 뒤에 죽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허락했다. 선생은 방에 들어가 편지를 쓰고 또 회포를 적었다. ‘어버이 사랑하듯 임금 사랑하고/ 집 걱정하듯 나라 걱정했네/ 백일(白日, 해)이 위에서 굽어보고 있으니/단충(丹衷)을 환하게 비춰주겠지’ (…) 드디어 여러 번 곤 독주를 많이 마시고 죽으니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귀양살이 하던 김굉필과 운명적 만남


선생은 마지막 순간에 조정이 자신을 사사로운 욕심을 취한 한나라 왕망에 비유한다는 말을 듣고 절망한다. 그는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황망함 중에 정암은 고마움 전하는 걸 잊지 않는다. [해동야언]은 이렇게 덧붙인다.

“처음 능성에 왔을 적에 고을 원이 관동(官僮) 몇 사람을 보내 심부름하게 하였는데 죽을 때 각각 은근한 정을 표하고 주인에게 말한다. ‘내가 네 집에 붙어 있으면서 끝내는 보답이 있을까 했더니 보답은 못 하고 도리어 흉변을 보이고 또 너의 집을 더럽히니, 이것이 한스럽다.’ 그 말에 관동과 주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쏟으며 옷깃을 적셨다. 그들은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도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선생에 관한 말이 나올 적마다 목이 메어 흐느꼈다 한다.”

선생의 인품이 느껴지는 일화다. 사우를 나와 이건술 원장의 안내로 정암 후손인 조선경·조병성 씨와 함께 서원을 둘러보았다. 중심 건물 강당으로 들어갔다. 기문이 빼곡하다. 이 원장이 기문을 살피다가 한 곳을 가리켰다. 숙종 임금이 [정암집]을 읽고 느낌을 쓴 글을 양각한 기문이다. “죽음에 임하시어 남긴 말씀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앞을 가린다”는 내용이다. 글자는 식별이 어려운 상태였다. 서원 오른쪽에는 보호수인 수령 500년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나뭇가지며 잎이 무성했다. 그 아래는 연못이다. 정암이 직접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생전에 살았던 집터라는 뜻이다. 외삼문 밖으로는 공터가 보였다. 원장은 문화재청과 경기도·용인시가 주변 3000평을 매입해 역사박물관을 짓는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은 1498년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이후 50년간 선비들이 무더기로 화를 입는다. 당시 새로 등장한 사림은 집권 세력인 훈구·척신의 비리와 부도덕성을 비판했다. 사림은 연산군 시기 두 차례 사화에도 학문을 연마하고 개혁 의지를 결집했다. 마침내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면서 개혁은 시대적 당위로 떠오른다. 정암은 이러한 여망을 안고 사림의 젊은 기수로 등장한다. 그는 가계로 보면 개국공신 후예인 훈구 출신이다. 그러나 정암은 치열한 학행을 통해시대의 흐름을 바꾸려는 개혁의 신봉자였다. 조광조는 17세 때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희천에서 귀양 살던 한훤당 김굉필을 만난다. 김굉필은 정몽주~길재~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의 적통으로 무오사화에 연루돼 유배 중이었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 선비]에서 “사화를 입은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간 것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사화의 뿌리인 성리학적 이념을 공부하겠다는 결심도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분석한다. 정암이 사림의 영수(領袖)가 된 연원이다.

심곡서원에는 널찍한 후원이 있었다. 뜰을 안내한 뒤 이원장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심곡학원 명의로 돼 있는 서원 부지 소유권을 이제는 되찾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일대 땅은 효종이 사액(賜額)하면서 서원에 내린 사패지였다. 심곡서원은 1953년 재단법인 심곡학원을 설립해 심곡고등공민학교를 거쳐 문정중학교를 개교했다. 서원이 학교를 세운 유일한 사례다. 서원과 관련된 부지도 심곡학원으로 들어갔다. 1964년 재단법인은 학교법인으로 전환된다. 학교법인은 그 사이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그 과정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났다. 서원이 시굴을 하나 해도 학교법인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심곡서원 일대는 김대중 정부 들어 아파트단지 조성 등 지금의 모습으로 개발됐다. 5만평이 넘는 심곡학원 땅도 일부 들어갔다.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여씨향약 실시하고 도교 관청 소격서 혁파


▎드론으로 촬영한 심곡서원 전경. 서원 주변은 아파트단지로 둘러싸여 있다.
다시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는 평소 의관을 단정히 하고 언행은 절제했다. 1510년(중종 5) 정암은 진사시 장원에 합격하지만, 이듬해 어머니상을 당한다. 1515년 여름 효성과 청렴이 알려지면서 그는 추천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첫 임명된다. 5년이 전부였던 관직 생활의 출발이다. 그해 가을 조광조는 알성시 을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등 주로 언관직을 수행한다.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다. 그는 조정이 왕후 문제로 의견이 갈리자 “언로(言路)가 통하면 다스려지고 막히면 어지러워지며 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종은 이후 조광조만 남기고 사헌부와 사간원을 모두 갈아치운다. 그의 말과 글은 개혁이라는 시대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다. 임금은 신임했고, 정암은 제도를 하나씩 개혁한다. 그는 사회 모순이 사장(詞章, 시가와 문장)을 중시하고 도학(道學, 사람의 도리)을 경시하는 학문 풍토에 기인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분위기를 혁신하기 위해서는 도학을 높이고 왕도정치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은 거침이 없었다. 전국 향촌에 여씨향약을 실시하고 미신이나 다름없는 도교 관청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다. 일 처리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퇴계가 쓴 정암의 행장(行狀)에 일화가 나온다.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와 옥당(玉堂, 홍문관)이 소격서 파하기를 청하여도 여러 달 동안 윤허가 없었다. 선생이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윤허를 받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다’ 하고 저녁에 대간(臺諫)들이 모두 물러갔는데도 옥당에 머물러 계(啓)를 논해 마침내 윤허를 받고서야 나오셨다.”

미완의 개혁… 반정공신 위훈삭제


▎음력 초하루를 맞아 유림이 서원 사우 앞에서 분향례를 올리고 있다.
1519년 정암은 대사헌으로 승진한 다음 과거제의 폐단을 보완하는 현량과(賢良科)를 도입한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대책(對策)만 시험 보고 채용하는 제도이다. 명분은 이랬다. “나라가 선비를 뽑는데 오로지 과거에만 의지한다. 세도(世道)는 점점 멀어지고 과거 공부를 하는 자는 글이나 외는 데 힘쓰고 의리를 알지 못한다. 치도(治道)가 날로 떨어지는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그 결과 개혁 성향의 젊은 선비가 많이 등용돼 조광조를 지지하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신진사류(新進士類) 김식·김정·박상·김구·기준 등이다.

정암은 개혁이 점차 뿌리를 내리자 현량과 출신 신진사류들과 함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 추진한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 당시 책봉된 100명이 넘는 공신 중 하자가 있는 76명을 정리하자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훈구 세력의 집권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었다. 훈구 세력은 강하게 반발한다. 홍경주·남곤·심정 등 훈구파는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움직여 임금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한다. 한편으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인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해 의심을 조장시켰다. 중종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의 개혁을 기본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방법이 과격하고 미숙해 염증을 내고 있었다. 거기다 위훈삭제 조치가 반정을 반역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중종은 마침내 훈구 대신의 탄핵을 받아들인다. 조광조 일파에 처벌이 내려진다. 위훈삭탈 4일 만에 일어난 기묘사화다. 선비 70여 명이 화를 입었다.

사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림이 성장해 개혁을 눈앞에 두고 물거품이 되었다는 좌절감과 함께 희생자가 가장 많은 사화였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이를 두고 “자질과 재주가 뛰어났음에도 학문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치 일선에 나아가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다 결국 실패했다”고 탄식했다. 심곡서원은 유네스코가 2019년 등재한 ‘한국의 서원’ 9곳에서 빠졌다. 조선오현을 배향한 서원으로는 유일하다. 도동서원(김굉필)·남계서원(정여창)·옥산서원(이언적)·도산서원(이황)은 모두 들어갔다. 심곡서원도 처음에는 후보로 신청했으나 훼실된 게 많다며 반려됐다. 대표적인 것이 산앙각(山仰閣)·문향각(聞香閣)·임심루(臨深樓)라고 한다. 이 원장은 “복원 등을 위한 시굴조사가 예정돼 있다”고 아쉬워했다.

심곡서원을 나와 600m 떨어진 도로 건너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정암의 증조부터 아들까지 4대가 모여 있는 가족 묘역이다. 묘역을 관리하는 조성원 씨가 안내했다. 광교산 자락 묘소의 입구에는 정암의 절명시(絶命詩)가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묘역 가운데는 높이 3m가 넘는 비석이 눈길을 끈다. 이수와 귀부도 없이 비신만 있는 정암의 신도비다. 비각마저 없어 이끼 끼고 마모가 심해 글자는 알아볼 수 없다. 노수신이 쓴 신도비는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도덕이 있고 들은 것이 넓으며, 올바른 도리로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뜻풀이로 시작된다. 신도비에는 “(선생이) 평소 ‘우리 임금도 가히 요순이 되게 할 것이고 우리 백성도 가히 인(仁)하고 수(壽)할 수 있게 할 것’이라 이르셨다”는 충심이 새겨져 있다. 선생은 사후 50년(1568년) 영의정에 추증된다. 1610년(광해 2) 명예의 전당인 성균관 문묘에도 배향된다. 그가 최후를 맞은 능주 죽수서원, 김굉필을 만난 희천 상현서원 등 연고지 서원을 비롯해 전국 서원 20여 곳에는 위패가 모셔졌다.

전국 서원 20여 곳에 위패 모셔져


▎심곡서원 사우에 모셔진 정암의 위패와 전신상 초상화.
신도비를 지나 정암의 증조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묘소를 차례로 거쳤다. 일대 묘역은 말끔히 정돈돼 있었다. 묘역 맨 위가 선생의 묘소다. 비석 하나에 봉분도 크지 않은 소탈한 무덤이다. 그 흔한 문인석 하나 없다. 비석은 세로로 넉 줄에 관직을 쓰고 맨 오른쪽에 정부인 이씨가 함께 묻혔음을 새겼다. 예를 표했다. 묘소의 소박함이 더 존경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후손들은 불천위 제사 없이 묘소에서 100여 명이 모여 시제만 지낸다고 했다. 제천에 사는 조완희 종손은 “사화 이후 후손들이 흩어져 힘들게 살면서 종택은 따로 없다”고 설명했다. 선생의 자취를 돌아보며 심곡서원 장의 진용옥 교수의 영상이 떠올랐다. 진 교수는 4·15 총선을 앞두고 열린민주당 황희석 후보가 “조국(전 법무부 장관)은 조광조”라고 표현하자 “조광조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며 광화문 옛 사헌부 터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후손들도 그런 정치적 악용을 가장 우려했다.

심곡서원은 지난해 12월 ‘정암 조광조 선생 서세(서거) 50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열었다. 선생은 일찍이 도학을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 새 시대를 이끌 이념으로 확신했다. 그는 그 실현을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 이상국가의 꿈은 기득권 세력의 음모 앞에 좌절된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이후 사림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추구한 이상은 실현되고 그는 선비의 사표(師表)가 된다. 우암 송시열은 “(선생이) 포부를 펴지는 못했으나 성인(聖人)의 도를 밝혀 후세인을 열어 준공은 일시의 선치(善治)보다 더 큰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보면 그의 개혁은 실패가 아닌 성공이었다.

[박스기사] ‘금수저’ 였지만 험한 길 선택한 정암 - 고려부터 명문가, 고조부는 조선 개국공신

조광조는 명문가 출신이다. 고조 조온은 조선 개국 공신이다. 조광조가 기묘년 영의정 정광필의 변호로 사사 대신 유배로 정상이 참작된 것은 고조의 음덕이 작용했다. 태조 이성계는 조온의 외삼촌이었다. 조온은 어려서부터 이성계를 따랐으며 고려 우왕 때 이조판서로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공신이다. 또 1392년(태조 2)에는 서북면 도순무사로 연의주 장정을 군적에 올려 병력을 강화하고 수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기도 했다.

더 올라가면 쌍성총관을 지낸 조광조의 8대조이자 한양 조씨 2세인 고려 시기 조휘가 있다. 조휘가 함경도 쌍성총관에 오른 것은 1258년(고려 고종 45). 쌍성총관은 당시 중국을 통일하고 서역과 유라시아까지 세력을 넓힌 원나라 세조(쿠빌라이)가 임명한 자리였다. 고려 왕실과 조정은 백성과 강토를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해 있던 시절이다.

쌍성총관은 총독과 비슷한 자리다. 쌍성총관은 조휘에 이어 아들과 손자, 증손까지 이어졌다. 쌍성은 함남 영흥이다. 그러나 이 자리의 성격을 두고 논란이 있다.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조휘가 열전편 ‘반역전(叛逆傳)’에 들어가 있다. 고려의 반역자라는 뜻이다. 후손 조성원 씨는 이와 관련해 “[고려사]의 이런 평가는 세종이 성군이지만 부당하다”고 말한다. 세종이 용비어천가에서 노래한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추존 목조)도 1255년 덕원(현 원산)에서 쿠빌라이로부터 오동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지역사령관) 벼슬을 임명받은 이후 익조·도조·환조 4대로 이어지는 가족사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버려진 백성과 함께 한 같은 행적이란 뜻이다.

가장 가까이는 조광조의 삼촌도 빼놓을 수 없다. 경원 부사였던 삼촌 조원기는 원칙주의자 조카 조광조가 34세에 벼슬길에 오르자 편지를 썼다. 벼슬길을 조심하라는 당부였지만 그의 앞날을 예감하는 듯한 내용이다. “네가 이번에 추천을 받았다니 기꺼우면서도 한편 근심이 드는구나 (…) 무릇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가히 높이 날고 멀리 뛸 수 없나니 반드시 세속과 어울려 많은 사람의 미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형조판서·좌참찬 등을 지낸 조원기는 밥상이 소박해 ‘오이대감’으로 불린 청백리다. 이것만 봐도 조광조의 선대는 본래 ‘금수저’ 훈구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2009호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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